842화 소회 (2)
대기실에 있는 인원과 따로 움직여, 가장 먼저 세계 회의장을 벗어난 반젤리스가 가르간트에서 머물던 저택으로 이동했다.
강대한 존재감을 느낀 메드레일이 잠옷 차림으로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
“오셨어요, 조부님?! 세계 회의는 어떻게…….”
“희소식이다.”
반젤리스가 이내 주먹을 치켜들며 꾹 참고 있던 기쁨을 표출했다. 그의 손녀조차 여태까지 본 적 없는 감정의 격동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시길래?’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메드레일은 자연스럽게 기대감을 품었다. 뭔지는 몰라도 보통 소식이 아닌 건 틀림없었다.
반젤리스가 턱을 단호히 당기며 메드레일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예상이 맞았다.”
“네……?”
“베르덴에겐 아케나드의 피가 흐르고 있다.”
메드레일의 눈동자가 커졌다.
“지, 직접 확인하신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나는 이번 세계 회의에서 그렇게 확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랬을 테지.”
여러 충격적인 소식과 장면이 반젤리스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드래곤의 소재로 만든 특유의 로브. 불과 몇 달 사이에 7위계 상위, 아니 거의 끝에 닿은 경이로운 성장력. 신비로운 배경. 특별한 마도. 그 천하에 다시 없을 고유한 비범함. 과연 초대 마도왕의 혈육이라고 하기에 어떤 부족함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내 확신을 진실이라고 믿게 한 건 바로 ‘그 감각’이었지.”
“감각, 이요?”
“그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반젤리스가 짧은 턱수염을 쓸며 이리저리 거실을 걷다가 멈춰 섰다.
“해방감.”
“해방감?”
“운명과 예언에 관한 베르덴의 연설을 듣던 그때 나는 실제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아주 오래된 구속복을 벗는 듯했어. 메드레일, 내가 이와 비슷한 기분을 언제 또 느꼈는지 기억하느냐?”
메드레일 루인 아케나드는, 반젤리스의 유일한 손녀이면서 제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여태껏 가르침받은 건 마법적인 지식뿐만이 아니라 7대 마도왕의 생애 그 자체였다.
메드레일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초월자로 각성하셨을 때.”
“내게 깃든 고유 아케나드 혈통이 깨어나는 순간 존재 자체가 펄펄 끓는 듯했지.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을 경험한 도중 그때가 머릿속에 떠오르더구나. 나는 여기서 우연이 아닌 어떤 필연을 인식했다.”
반젤리스의 흔들리지 않은 눈동자에는 광기가 묻어나 있었다.
“베르덴은 어떤 식으로든 초대 마도왕과 관계가 있다. 우리만큼이나 아주 깊게.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란다.”
“조부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면 확실히 기정사실이라고 봐도 좋겠네요.”
메드레일이 살짝 눈을 치켜떴다.
“그래도 확인해 보실 거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해도 명확한 물증이 없는 심증뿐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여기서 멈춰서는 절대 아니 된다.
세상이 널린 온갖 미지를 파헤치고 탐구하는 마법사라면 더더욱.
반젤리스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안 그래도 올해의 마도 축제를 에온과 함께 준비하기로 약속하고 오는 길이다. 세계 회의의 결정 사항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짓고 나면 베르덴을 마도국에 초대할 예정이지. 아케나드 혈통 검증은 그때 이루어질 거다.”
“방식은…… 역시 그거 외에는 없겠군요.”
“이제 우리 둘밖에 남지 않은 혈통의 일원을 찾는 일이다. 기밀 유지가 대수일까.”
마도왕의 핏줄을 오류 하나 없이 증명할 수 있는 마법적인 수단은 단 하나───아케나드의 마법사만 다룰 수 있는 특수한 마력 운용법밖에 없다.
“내가 베르덴에게 <아케인>의 기초를 전수하마. 그 규격 외의 재능이라면 하루 만에 여부를 가릴 수 있을 거다.”
<아케인>을 아주 조금이라도 체득한다면 초대 마도왕의 혈통이고.
<아케인>을 전혀 다루지 못한다면 초대 마도왕의 가계가 아니다.
결과는 실로 명료하리라.
* * *
베르덴이 팔짱을 꼈다.
‘분명 난 세계 회의에서 <아케인>을 사용한 적이 없는데.’
초대 마도왕, 정확히 관리자와의 관계를 외부에 설명할 수 없어서 마력을 운용하는 데 일부러 신경을 썼건만…….
도대체 어디서 마도왕의 혈통이라고 착각할 만한 단서를 잡힌 걸까.
‘귀찮게 됐나.’
돌이켜 보면 모종의 이유로 계속 의심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세계 회의 직전에 반젤리스가 친근하게 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마도왕의 피는 조금도 잇지 않았는데 <아케인>을 체득한 걸 알아차리게 된다면 반젤리스는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할까.
‘여전히 적대적으로 돌변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피뿐만이 아니라 마력까지 고려해서 판단을 내린다면 다르겠지만.’
그런 엘프적 관점에서 베르덴은 초대 마도왕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으니, 아케나드 마도국과 적이 되는 일은 피할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반젤리스가 모든 정황을 듣고도 진실을 흔쾌히 이해할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해서 베르덴과 초대 마도왕은 혈연과는 다른 의미로 상당히 관련이 깊으니까.
다만 이런 예측은 너무 낙관적이라 그냥 생각만 해 두었다.
‘결국 마도국에 가 봐야 알겠군.’
상황에 따라서 임기응변으로 대응한다.
일단 그렇게 결론 내렸다.
반젤리스의 오해를 어떻게 풀지는 나중에 해결할 문제니까.
“진짜 재밌었다!”
이그나시아가 둥둥 떠다니는 권좌에 앉은 채로 기지개를 켜며 다가왔다. 그녀의 양옆에는 마스터와 서약자가 있었다.
“지난번 세계 회의하고는 전혀 비교가 안 되지? 왜 그런 줄 알아? 당연히 베르덴이 없었으니까! 오오, 베르덴, 나의 케이크, 나의 과자, 나의 어릿광대, 나의 이야기꾼, 나의 애착 인형───”
“기괴한 노래 부르지 마라.”
“아하하하핳!”
이그나시아가 베르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화려하게 웃었다.
정신 사납기 짝이 없다.
“다른 참석자들은 갔나?”
“예, 폐회식이 그렇게 끝났으니까요. 하원이나 상원이나 여러모로 느긋하게 회포를 풀 만한 분위기가 아니니. 그나마 수왕이 더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나간 게 다행이죠. 드워프도 그렇고요. 마탑들은 특히 더 조용했죠.”
마스터의 설명을 보충하듯 서약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쩔 수야 없지. 덕분에 세계 회의에서 얻은 정보가 한둘이 아니라 생각할 게 많을 테니까. 안정을 사랑하는 인드렌의 얼굴은 특히 심각했고. 가레스는 루아스교하고 같이 가던데.”
“끌려갔군.”
“아무리 가레스라고 해도 그 세 명하고 진심으로 붙을 생각은 못 하지. 성녀도 있는데. 그나저나 회의 끝나자마자 가레스에게 그런 식으로 되갚을 줄이야. 역시 노렸나?”
“회의 중에 주목도만 분산될 뿐이니까.”
최초의 마탑과 예언으로 공들여서 세계 회의를 장악했는데, 그런 와중에 가레스에게 반격한답시고 주검의 영광과 혈맹 건으로 루아스교를 끌어들이는 건 오히려 손해였다.
어차피 세계 회의는 일부에 불과하다.
현실은 엄연히 현실이다.
이렇게 페회 직후 가레스를 루아스교에게 맡기는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놈을 더 곤란하게 만들기에 용이했다.
“그 두 번째 하인이란 녀석 때문에 성녀가 엄청 열을 받았던데. 혐의가 없다고 해도 가레스도 한동안 골치 아프겠어.”
“당한 게 있으면, 최소한 당한 만큼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누가 그러던데.”
“제라클 황제가 그랬겠지.”
“잘 알고 있군.”
“예전에 그 친구 황제 즉위식에 초청받았을 때, 제국 측 자리가 조금 빈 것 같다고 물으니까 그렇게 답하더군. 하하, 괜히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정치계 초월자라고 하는 게 아니라니까.”
여러 초월자만이 아니라 제국 황제하고도 연이 있었나? 서약자는 사교성이 풍부해 보이는 것처럼 이 바닥에서 발이 넓은 듯했다.
“그나저나 앞으로 쉴 틈 없이 바빠지겠어. 그놈의 예언 때문에…… 아무튼 하이랜디아로 돌아가기 전에 이 말을 하러 왔다.”
“듣고 있다.”
“나는 내 가족과 나라만 지키면 돼.”
서약자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네가 무슨 비밀과 계략을 품었든 그것만 잊지 않는다면 도와주마.”
“…….”
“난 꽤 단순한 사내거든. 조만간 또 보자고.”
서약자가 그야말로 남자답게 웃고는 작별 인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마스터가 말했다.
“유리온은 추구하는 이상이 한없이 투명하다는 게 개성입니다. 그래서 훤히 보인다고 무시하면 더욱 안 되죠.”
“솔직히 말해서 현 초월자 중에서 본성이 지독한 걸로 순위를 매기면 유리온은 손에 꼽힐걸? 음, 성녀 바로 아랫급 정도?”
“너도 상위권이겠지?”
“어머, 내 성격이 그렇게 안 좋아 보이니? 그런데 초월적 존재를 무려 다섯이나 죽인 녀석보다는 낫지 않을까?”
“풋.”
마스터는 슬쩍 입가를 가리고는 안 웃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럼 가까운 시일에 주검의 영광 건으로 연락하겠습니다. 둘 다 안녕히.”
“베르덴만 부르는 거니? 나는?”
“생각해 보고요.”
그렇게 마스터도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이그나시아가 다리를 꼬았다.
“아, 세계 회의 끝나니까 되게 심심하네. 뭔가 허전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너 때문에 내 재미의 역치가 높아진 거잖니? 어서 책임져!”
“무슨 책임.”
“사막.”
그녀가 속삭였다.
“침묵의 사막에 있는 문명이라는 거, 꼭 구경하고 싶거든. 내가 딱 보니까 최초의 마탑이 거기에 있을 것 같은데.”
“흐음.”
“에이, 내가 이런 부탁 할 거 알면서도 사막에서 책을 가져온 거잖아. 괜히 뜸 들이지 말자. 우리 친구 아니었니? 응?”
이그나시아가 며칠 전 선물받은 투하르의 서적을 들이밀며 칭얼거렸다.
이에 베르덴이 답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너한테 갚을 빚이 하나 더 남아 있었지. 이걸로 값을 대신하는 건가?”
“아, 그건 좀.”
“?”
“시, 실리스도 내가 제자로 받아 줬잖아. 그거면 된 거 아니야? 친구라고 해서 네 부탁 들어준 건데.”
“너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을 텐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어쨌든 나중에 사막 데려다주기다? 약속, 끝!”
이그나시아가 강제로 베르덴과 새끼손가락을 걸고는 자취를 감췄다. 초월자라는 것들은 어째서 이렇게 제멋대로인 걸까.
‘내가 할 말은 아닌가.’
베르덴은 어느새 적막해진 복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주변 기척은 대부분 사라지고 이제 일부만이 남았기에.
“대화는 잘 끝나셨나 보군요.”
모퉁이에 있던 세계수의 관리자, 세렌디아가 벽에서 등을 뗐다.
“조금 걸을까요?”
* * *
세계 회의 대기실 쪽으로 베르덴과 세렌디아가 나란히 걸었다. 짙은 마력으로 둘러싸인 두 사람의 대화는 은밀히 이루어졌다.
“카란스하고 메르퀴엔은?”
“먼저 회의장 밖으로 보냈어요. 데려온 엘프가 많다 보니 곧바로 가르간트를 떠나려면 채비를 갖춰야 하니까요.”
“지금 새벽인데.”
“가르간트는 대수림의 엘프에게 적합한 환경이 아니라서요. 차라리 어두울 때 떠나는 편이 마찰이 적죠. 물론 주인 없는 땅은 조금 다르지만요. 한동안 머물러도 괜찮겠죠?”
“이미 허락한 지 오래다. 같이 가면 편하겠지만, 나는 아직 가르간트에 볼일이 남아 있어서.”
“물론 이해한답니다.”
베르덴이 규칙적인 발소리를 들으며 화제를 돌렸다.
“마경에 기생의 대악마가 있냐고 섭리자에게 물었었지. 그 덕분에 마경 정벌을 재발의해 확실히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진실의 서약에선 간단한 질문을 던져 내가 진실을 더 많이 감출 수 있도록 해 줬고. 엘프는 순전히 나를 돕기 위해서 세계 회의에 참석한 건가?”
“여러 방면에서 조력하려고 했는데 막상 나설 만한 순간이 거의 없더군요. 아쉽게도.”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베르덴이 물었다.
“그래서 엘프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뭐지?”
“이미 이루었습니다.”
세렌디아가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복도를 내려다봤다.
“오늘 당신이 한 선택들은 세상을 다시 한번 크게 바꾸었어요. 침묵의 사막에 생명의 묘목을 심어 죽은 자연을 되살린 것 이상으로.”
“영향력을 말하는 거군.”
“네, 이 세계 회의를 기점으로 많은 것이 시작될 겁니다. 또 많은 것이 변할 거고요.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태초의 세상처럼.”
그녀가 발걸음을 늦추었다.
“모든 것에 대비하세요, 베르덴. 운명은 어디에나 있답니다.”
“……자세히 들을 순 없는 건가.”
“금기도 어디에나 있거든요.”
이윽고 멈춰 선 세렌디아가 미소를 보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주인 없는 땅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카란스가 재회를 고대하고 있으니 가능하면 빨리 돌아와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노력해 보지.”
멀어져 가는 세렌디아의 뒷모습을 보던 베르덴이 문장을 곱씹었다.
‘운명은 어디에나 있다라…….’
뭔가 의미심장했다.
베르덴은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고는 대기실 앞에 섰다. 주저하지 않고 문고리에 손을 얹은 순간 의념이 전해져 왔다.
───아카데미에서 위계 마법사들을 어떻게 가르칠 건지 기대하마.
섭리자, 데우스 위덴의 것이었다.
새삼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베르덴은 작은 한숨과 함께 마저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베르덴 폐하.]
[베르덴 폐하의 복귀를 확인했습니다.]
알파와 베타가 뛰어들어 베르덴의 양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푸른 고리로 이루어진 특유의 외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듯했다.
“기다리느라 고생했다.”
[고생.]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왠지 모르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 * *
“…….”
멀리 있는 베르덴에게 의념을 보낸 섭리자가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대행자, 메이아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두 번째 하인의 정체를 억지로 들춰 낸 이유가 뭐지?”
“어차피 세계 회의에 있던 자들의 운명의 실은 거의 끊어졌어요. 사소한 개입으로는 앞으로의 일에 영향을 줄 일이 영영 없게 됐죠. 그래서 저도 손을 써 봤어요.”
메이아가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왜요. 당신이 한 건 합당한 거고, 내가 한 건 부당한 건가요?”
“그냥 물어본 거다. 따지는 게 아니라.”
“저도 알아요.”
메이아가 대놓고 짜증 내는 걸 보니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섭리자는 스쳐 지나가는 추억을 감상하곤 내심 웃었다.
그렇게 정적이 내려앉은 와중에 메이아가 슬쩍 입을 열었다.
“……운명의 잔재에 일어난 변화는 그분께서도 느끼셨을 텐데. 아직도 별다른 반응이 없으신 걸 보면 이 사태를 용인하신 모양이네요.”
“그렇게 해석할 수 있겠지.”
“그래서 말인데…… 태초의 마법사께서는 지금 어디 계신 거죠?”
올다르크 루인 아케나드.
태초의 마법사의 육체는 레프라기움 마탑의 동력원 속에 있으나, 최근 깨어난 그의 정신은 대륙 어딘가에 떨어졌다.
그 위치를 감지하는 것이 허락된 존재는 단 한 명뿐이었다.
섭리자가 고개를 돌렸다.
동쪽으로.
“지금 동대륙에 계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