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1화 소회 (1)
덜컥, 쿵!
어두컴컴하고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수직으로 서 있는 ‘관’이 열렸다. 마법이 해제되면서 육중한 석재 판이 지면 위로 쓰러졌다.
턱.
관 안쪽의 어둠 속에서 손 하나가 튀어나와 틀을 짚었다. 숙주가 사망해 빙의가 해제된 루네시카의 본체를 달빛이 반겨 주었다.
그녀가 천천히 바깥으로 한 발짝 내딛자 가슴이 강하게 욱신거렸다.
“어……?”
루네시카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통증이 느껴진다.
정확히 신성에게 꿰뚫린 부분이었다.
‘말도 안 돼.’
영혼이 일부나마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엄연히 본체와 빙의체는 별개의 개체다.
설령 루아스 교국의 신의 기적에 직격당한다고 해도 빙의체 안의 그녀는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어떤 피해도 받지 않는다.
단순한 이론 따위가 아니라 8세기 전에 이미 몸소 확인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아픔은 대체 뭐란 말인가.
“……!”
루네시카가 손목을 확인하고는 멈칫했다. 그녀가 직접 만든 팔찌───고대 아티팩트 [희생]의 보석 중 하나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꺄아아아아!
영혼이 메아리치는 소리가 귓가를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내가…… 죽을 뻔했어?”
절명에 임박한 순간이 아닌 이상 발동하지 않는 그것을 보며, 루네시카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새벽이 깊은 숲속에 도사린 짐승, 마수, 아인종, 이형종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그녀가 있는 장소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루네시카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참으로 오랜만에 죽음을 실감했다. 달빛을 품은 식은땀 한 방울이 턱 끝에 맺혔다.
“뭐야, 그 마도.”
* * *
약 이틀 동안 진행된 세계 회의가 결국에는 막을 내렸다. 어떤 참석자에겐 길었고, 어떤 참석자에겐 짧은 시간이었다.
다만. 세상에서 한 손에 꼽히는 중요하고 거대한 행사가 마무리되었음에도 참석자 대부분의 표정은 전혀 밝지 못했다.
폐회 직전에 발생한, 세계 회의에서 공식 확인된 사망자 1명 때문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평안하시오.”
“회포를 풀고 싶으나…… 크흠흠, 때가 아닌 것 같구려.”
하원의 참석자들이 저들끼리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들은 상원을 향해 저마다 예를 취하며 복도로 나섰다.
피곤한 사건에 더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듯 발걸음이 빨랐다.
“루아스시여, 가련한 죽음을 애도해 주소서.”
로니아 국왕의 보좌관의 시신은 루아스교가 직접 수습했고, 로니아 국왕 또한 주검의 영광에 관련해서 강제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로니아 국왕은 자신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고 해명했지만, 사안이 사안인 터라 진실 규명은 피할 수 없었다.
적어도 성녀의 신앙이 이성적으로 납득할 때까지 말이다.
“이 새끼들이…….”
“비키시죠.”
마울러가 불쾌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며 루아스 교국의 행사를 방해했다. 로니아 왕국은 델하룬과 도시 연합과 함께 그의 권역이었으므로.
로니아 국왕 따위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지만, 놈이 외력에 강제로 끌려다니는 건 마울러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었다.
대치가 이루어졌다.
과연 한 번 더 마찰이 생기나 싶었으나, 베르덴이 지나가듯 개입했다.
벽안이 마울러를 마주했다.
“순순히 협조하는 게 편할 텐데.”
“뭐?”
“너도 주검의 영광과 연관이 있으니까.”
주검의 영광의 세 번째 하인이 주도해서 창설한 혈맹에는 그림낙스의 수장처럼 마울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서로 깊은 관련성이 없다고 해도 일단은 접점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베르덴의 이야기를 들은 루아스교의 신인들이 내는 기세가 변했다. 단번에 용의선상에 오른 마울러가 눈가를 씰룩였다.
“너, 이 새끼……?”
아드리안이 조소했다.
“그러게 적당히 짖으라니까.”
이미 경고했음에도, 감히 소사이어티를 끄집어내서 에온을 정치적으로 공격한 대가는 치러야 마땅하다.
“이만 가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만나게 될 것 같지만.”
“……조심히 들어가시길.”
성녀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인사를 건넸다. 세계 회의에서 서로 언쟁이 있기는 했지만 보다시피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그렇게 교황과 성자와도 간단히 대화를 나눈 베르덴은 아드리안과 일행을 데리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등 뒤에서 마울러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놈은 루아스교의 신인들을 상대해야 하느라 여력이 없다.
“…….”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새벽이 깊었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고 난 다음 날의 밤하늘엔 별빛이 가득했다.
“사람이 많으니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군. 먼저 가 있어라. 곧 따라가겠다.”
“예, 주군.”
“응, 알겠어.”
아드리안은 되묻지 않고 절도 있게 명령을 따랐다. 겁화를 제어하지 않은 상태인 베르덴에게 경호는 필요 없었다.
아드리안이 즉각 리비안트 공국, 벨디른 공화국, 에스티리아 왕국을 통솔해 대기실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이자벨라는 베르덴을 향해 손을 흔들며 유니아와 라테온을 데려갔다.
꾸벅.
막 회의장을 빠져나온 로벨린이 베르덴을 향해 목례했다. 보헤미른 마탑의 장로들을 이끌고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는, 이제 제법 마탑주의 권위가 느껴졌다.
베르덴은 다시 창 너머로 보이는 가르간트의 야경을 눈에 담았다.
“세계 회의라는 간판이 붙었지만, 사실상 자네의 독무대였군.”
제라클 황제가 뒷짐을 진 채 베르덴의 곁에 섰다. 리반데일 대공이 직접 기를 발현해 안팎의 소리를 차단했다.
“원하는 건 이루었나?”
“보다시피.”
“변수가 있을지언정 전반적으로 상황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지. 성취감에 제법 도취되었겠어.”
“아르나크 제국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래도 자네만 할까.”
물이 흐르는 듯한 대화였다.
리반데일 대공은 마치 닳고 닳은 정치가 두 명이 사담을 나누는 광경을 보는 것 같았다. 둘 다 속내가 음흉하기 짝이 없다.
베르덴이 물었다.
“마경 정벌의 성공 확률은 희박하다. 초월자조차 나오지 못한 험지이니. 그 확률을 높이려면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인력과 자원이 필요할 텐데, 제국이라고 해도 감당할 수 있는 건가?”
“그래서 협력자부터 확보했지. 그런데…… 설마 그 협력자가 기어코 마경 정벌을 재발의해 통과시킬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제국의 황제에 비해서 경력은 한참 모자라도 한 세력의 수장이다. 가만히 얻어맞고만 있을 순 없지.”
“그게 자네를 마경 정벌에 가장 먼저 끌어들인 이유이기도 하네. 작은 앙갚음이지.”
제라클 황제는 작게 웃었다.
“이걸로 화산 지대에서 있었던 일은 넘어가도록 하겠네.”
정체를 감춘 채 알파와 함께했던 베르덴은, 화산 지대에서 아르나크 제국과 몇 번 충돌했던 기억을 되살렸다.
“……그걸 담아 두고 있었나?”
“당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최소한 당한 만큼은 반드시 갚는다. 정치의 기본 철학이지. 내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근간이기도 하고.”
“지독한 성격이다. 괜히 본받지는 말도록.”
리반데일 대공이 슬쩍 비판했지만 제라클 황제는 들은 척도 안 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도 정치의 기본 철학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오늘 자네가 보여 줬던 모습은 여러모로 경악스러웠네. 공개한 비밀들 또한. 그런데도 여전히 감추고 있는 게 많은 것 같군.”
“궁금한가?”
“묻지 않겠네. 등가교환의 법칙은 마법계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이 아니지. 그 비밀을 들을 수 있는 대가가 준비되면 다시 이야기하겠네. 앞으로 얼굴을 맞댈 일도 많아질 테니.”
대륙 간 무역 협정.
히아레마르 내해 탐사.
마경 정벌을 위한 탐사.
에온과 아르나크 제국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 세 개의 의제는 ‘동시에 진행’된다. 당연히 주검의 영광에 대한 사안도, 루아스교를 중점으로 논의될 예정이었다.
그때, 리반데일 대공이 물었다.
“베르덴, 예언 중에서 가장 가까운 위험은 뭐라고 생각하나.”
“시체의 산 위에 앉은 군주.”
베르덴은 확신했다.
“아무래도 옛 왕이겠지.”
회의장에서 보았듯 주검의 영광이 아예 목전에 다가왔다. 정체를 발각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세계 회의를 몰래 엿들으러 올 정도로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
그만큼 옛 왕의 부활이 가까워졌다고 보는 게 타당한 해석이었다.
‘머지않아 충돌하게 되겠지. 그 무대는 아마…… 히아레마르 내해.’
용검, 마그라스가 발견된 장소가 곧 격전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옛 왕이 마지막으로 다루었던 6대 전설 중 하나였다.
“역시 그런가.”
제라클 황제가 턱을 당겼다.
“서로 돌아가서 준비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닌 것 같군. 자네의 말마따나 시간은 유한하니까. 헬리온 마탑과 약속도 있고.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제라클 황제가 떠나기 직전 슬쩍 고개를 틀었다.
“그보다 베르덴, 자네가 황실의 일원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왜지?”
“서로 정적이 되었다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했을 테니까.”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건 타인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사로잡는 것.
그런 의미에서 수많은 정보를 이용해, 거짓과 진실을 뒤섞어 세계 회의를 뜻대로 주도한 베르덴은 정치가의 표상이었다.
리반데이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에게 정치력을 인정받았군. 축하하지.”
“…….”
정치계에서 악명이 높은 제라클 황제에게서 그런 칭찬을 받은 걸 과연 좋게 받아들여야 할까, 베르덴은 말없이 턱만 긁적거렸다.
제라클 황제와 리반데일 대공이 그대로 자리를 떴다. 검성과 마법성의 로드, 워 로드가 뒤에서 그들을 호위했다.
당연하게도 투구로 머리 전체를 가린 레그리트는 베르덴에게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방주에서 호출이 있을 테니 금방 다시 보겠지만.’
세계 회의라는 큰 산을 넘었음에도 베르덴이 할 일은 줄어들긴커녕 더 많아졌다. 자기 자신이 선택한 숙명이었다.
날이 밝는 대로 가르간트에서 남은 일을 처리할 계획이었다.
‘소환 마법.’
베르덴은 아카데미 재학생이자 방주의 후보 중 하나인 테오도르가 여러 도움을 받아 만든 새로운 마법 종류에 관심이 깊었다.
비록 베르덴에겐 무용지물일지라도, 마법적인 호기심만큼은 충분히 채워 줄 터.
그리고.
펠디안느와 연락을 취해 제국 연회에서의 거래를 마무리할 생각이다.
아티슨 마탑이 대륙 간 공간 이동진의 기초를 축조해 주는 대가로, 알파가 펠디안느가 소개한 사람을 ‘제자’를 받아들이는 것.
과연 아티슨 마탑주가 에온에 파견하고 싶다는 인물이 누구일까. 베르덴은 조금이지만 내심 기대가 되었다.
그때, 낯익은 기척이 가까워졌다.
“제국과 많이 친한 모양이군.”
“어쩌다 보니 서로 엮인 게 많아졌지.”
“그래서 함께 마경 정벌을 논의한 건가. 위세가 서로 동등하다면, 아르나크 제국은 협력국으로 삼기 나쁘지 않지. 물론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지만.”
7대 마도왕, 반젤리스가 호위도 없이 단신으로 찾아왔다.
베르덴이 물었다.
“용건은?”
“올해는 마도 축제가 열리는 해다. 세계적으로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봄이 되면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겠지. 그래서 말인데…….”
반젤리스가 작게 헛기침했다.
“에온만 좋다면 아케나드 마도국과 함께 축제를 준비하는 건 어떤가.”
“축제를……?”
베르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그에게 있어 마도 축제는 즐거운 행사는 아니었다.
언제나 보헤미른 마탑에 남아 잡일을 도맡아 했으니까.
‘물론 뜻깊은 날이긴 하지만.’
그야 마도 축제로, 발로크 베시아스를 비롯한 보헤미른 마탑 수뇌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역천을 성공했으니까.
문자 그대로 말하면 마도 축제는 베르덴이 다시 태어난, 그러니까 생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보니 마도 축제는 최초로 건설된 마탑을 기념하고 마법의 부흥하는 전통이었지……. 음, 최초의 마탑주와 당대의 마도왕의 주도하는 축제라. 나쁘진 않은 제안이다.’
아케나드 마도국의 위상은 마법계에서 최정상에 올라 있다. 수백 년 동안 마도 축제를 경험했으니 도움받을 점이 많을 터였다.
고민할 것도 없다.
에온도 4년 주기로 열리는 마도 축제를 무시하고 지나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수락하지. 그런데 에온은 마도 축체에 이렇다 할 경험이 없는데. 괜찮은 건가?”
“물론 괜찮고말고.”
반젤리스가 베르덴의 어깨를 두드리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같은 핏줄인데.”
“……?”
“조만간 초대장을 보내겠다. 다음엔 마도국에서 보도록 하지. 하하하하하!”
“……???”
베르덴이 뭐라고 되물을 틈도 없이 반젤리스가 <전이>로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은 베르덴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같은 핏줄이라니. 뭔 소리야.’
고아원 출신인 베르덴은 당황스러웠다.
모르긴 몰라도, 반젤리스가 뭔가를 크게 오해한 것이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