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9화 잿빛 (1)
태초의 땅에서 세계수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는 살아 움직이는 대자연 그 자체를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고.
침묵의 사막에서 ‘당신’의 표층의식을 마주했을 때는 숨통이 틀어막히고 영혼이 심하게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도 그때와 비슷했다.
압도적이다.
고개를 들어도 위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절벽이 당장이라도 찍어 누를 듯 베르덴의 기세를 사정없이 위압했다.
마력이 요동친다.
본능이 저항과 도주 중 하나를 택하라고 서둘러 강요한다.
가르간트의 웬만한 건물보다도 거대한 잿빛의 드래곤은 보다시피 치명적인 상처를 여러 개 떠안고 있었음에도…….
베르덴은 저도 모르게 포식자가 아닌 피식자의 입장을 자처했다.
하지만 베르덴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로 살아온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격상의 존재를 마주하는 건 그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당신은 누구지?”
베르덴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태연히 묻자, 잿빛의 용은 얕게 콧김을 내뿜으며 흥미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래, 그 정도 기개는 있으니 겁도 없이 ‘당신’의 계획을 망친 거겠지, 운명 파괴자.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을 테지만…….]
날카롭게 찢어진 동공이 하늘로 향했다.
[최근에 수많은 운명의 실이 끊어졌군. 지금도 끊어지고 있고. 운명의 잔재마저 무너뜨린 건 다분히 의도적인 것 같은데. 과연.]
낮은 웃음소리가 공동을 흔들었다.
[운명의 수레바퀴를 망가뜨리고도 다시 운명을 자극한 목적이 뭐냐.]
베르덴이 대꾸했다.
“내가 먼저 물었다.”
격의 차이는 극명하다.
알고 있다.
베르덴의 수준으로는 봉인된 잿빛의 용을 감당할 수 없다. 하나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협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누가 먼저 물었는냐는 중요치 않다.]
존재감이 사방을 압도했다.
드래곤 피어.
[대담함과 무모함은 다르다, 베르덴. 존중해 줄 때 존중받도록.]
“……!!!!”
마치 심장을 붙들린 것처럼 베르덴의 몸 전체가 경직됐다.
마력이 억눌리며 빛이 저물었다.
마력회로가 강제로 비활성화되자 턱이 들렸다. 무릎이 꺾이지 않게 버티자 힘줄과 핏줄이 터질 듯 불거졌다.
‘이 격은…… ‘당신’의 표층의지, 그 이상!’
지금까지 세상의 비밀들을 접한 베르덴도 잿빛의 용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설마 초대 마도왕, 세계수 그리고 ‘당신’의 경지에 필적하는 존재가 더 있을 줄이야.
빛이 사라진 암흑 속에서 근엄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왜 운명을 또다시 건드렸나.]
뚜둑, 뚝.
베르덴이 억지로 고개를 내리며 드래곤의 공포에 대항했다. 심장에 깃든 무한한 마력이 조금씩 압력을 밀어냈다.
“누구냐고, 물었을 텐데.”
베르덴이 딛고 있는 동굴 바닥에 금이 갔다. 다시 빛이 피어나며 어둠이 일그러졌다.
그렇게 이 세상에 둘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허공을 장식한 마력의 빛은 잿빛의 용과 베르덴만을 비추었다.
[만용을──]
“답을 원하면, 먼저 대답해라.”
베르덴이 재차 입술을 뗐다.
“당신은, 운명의 편인가?”
잿빛의 용은 베르덴을 알고, 베르덴은 잿빛의 용을 모른다.
정보가 부족하다.
그런 상황에서 베르덴은 잿빛의 용이 ‘당신’의 적인지, 또 정말로 세계수와 같은 저항자의 편인지 확인해야 했다.
그게 시작점이다.
시작조차 할 수 없다면 서로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운명의 편?]
잿빛의 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하더니 이내 거체를 들썩였다. 조용한 광소가 강인한 눈빛에 담겨 베르덴에게 전해졌다.
훅.
동시에 베르덴의 마력과 신체를 압제하던 힘이 사라졌다.
[그 반대다.]
베르덴이 숨을 내쉬며 [인테리스]를 두 번 정도 다잡았다. 마력의 흐름이 원활해진 걸 확인한 그가 시선을 바로 했다.
“그럼 저항자의 편이라는 건가?”
[운명에 저항을 했을지언정 저항자는 아니었다. 나는 올다르크에 속하지 않았으니. 그저 ‘당신’의 뜻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지. 그리고 이것이 그 결과고.]
잿빛의 용이 앞발을 조금 움직이자 수백 개의 거대 쇠사슬이 철렁였다.
베르덴이 눈살을 순간 찌푸렸다.
‘……무자비한 봉인이군.’
경도와 강도를 계측할 수 없는 잿빛의 비늘들이 일부 억지로 파괴당하고, 그 틈새에 새까만 쐐기가 단단히 틀어박혔다.
게다가 침묵의 사막에서 조금이나마 실감했던 힘의 편린이 느껴졌다.
저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당신’의 봉인.
회복력을 없애고.
힘을 지속적으로 흩어 버리고.
거동을 제한하고.
…….
산 채로 영원한 고통을 안기려는 잔혹한 형벌 같다. 베르덴이 간파한 봉인의 일부 효과만으로도 그 끔찍함이 충분히 느껴졌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감내하고 있는 잿빛의 용이 기이할 지경이었다.
[현상을 관찰하는 습성. 오랜만에 보는 마법사의 기질이군. 좋다. 네가 나와 대화할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걸 확인했으니. 다시 시작하지.]
잿빛의 용이 묻는다.
[베르덴, 어떻게 이곳에 왔지?]
“……?”
베르덴이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날 부른 것 아니었나?”
[그런 적 없다. 내 처지를 보면 알 텐데. 나는 현실에 간섭하지 못해. 뭐, 그렇다면 역시 이것과 관련이 있겠군.]
잿빛의 용이 천천히 앞발을 움직였다. 그림자가 자신을 아예 집어삼켰음에도 베르덴은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거대한 발톱이 그의 잿빛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너는 잿빛의 의미를 알고 있나?]
“조금은.”
천공룡 아에로돈이 잿빛 머리카락에 관해 설명한 적이 있다.
몰가른의 벽화 앞에서.
───그리고 ‘잿빛’은, 이전의 것을 태우거나 소멸시키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정화와 재생, 더 나아가 부활을 상징한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는 외적인 것을 넘어 내면적인 전환 또한 아우르고 있지.
───여기서 부활이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야. 삶에서 삶으로. 죽음이라는 과정 없이, 동일한 주체를 가진 존재가 본질적으로 완전히 뒤바뀌는 것을 말하는 거다.
───그것은 필멸자에게 감히 허락되지 않은 개념이야.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일개 마법사 따위가 넘볼 수 있는 게 절대로 아니란 말이지.
사실상 베르덴이 성공한 역천의 결과를 요약한 내용이었다. 과거의 신체적 한계를 탈피하는 육체의 재구성.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군. 그렇다고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발톱이 멀어졌다.
[네가 알고 있는 대로, 네게서 나타난 그 잿빛은 완전한 부활을 동반한 진화를 이룩했다는 고유한 증명이다. 부분적인 개념이지.]
“부분적?”
[타오르는 불이 재를 낳듯이, 세계는 탄생하면서 잔재를 남겼다. 그리고 회색의 잔재에 남은 불씨에서 단 하나의 생명이 태어났지. 주체는 영원하되 본질은 완전히 뒤바뀌면서 부활의 진화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불멸의 개체가.]
잿빛의 용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그것만으로도 강진이 발생해 주변 동굴 일대가 흔들렸다. 마력의 빛 위로 넘어간 머리에서 회색의 용안이 명멸했다.
[나는 세상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존재.]
그의 숨결이 대기를 격동시켰다.
[잿빛은 나의 개념이다.]
“……!”
[보다시피 그것이 나와 나의 본질을 관통하는 공통점이지. 이제 네가 답할 차례군.]
다시 마력의 빛 아래로 내려온 드래곤의 머리가 벽안에 비쳤다.
[어떻게 이곳에 왔는가.]
* * *
세계수 언급, ‘당신’의 힘이 느껴지는 악의적인 봉인, 참혹한 몰골, 잿빛의 정의…… 확실히 운명의 편이라는 정황은 없다.
속임수라는 의심도 들지 않는다.
이 동굴은 세월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존재해 온 게 느껴진다. 고작 공공연한 정보를 얻으려 이런 수고를 들일 리가 없었다.
‘잿빛의 용은 내게 강한 흥미를 품고 있다.’
그러니 원하는 걸 조금씩 내주며 탐색할 필요가 있다. 베르덴은 잿빛의 용이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 또 과거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궁금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소환 마법과 의식 격리에 대해 언급하자…… 베르덴은 지금껏 들은 것 중 가장 시끄러운 비웃음 소리를 들었다.
[크크큭, 의식을 격리해? 카하하하하! 보기보다 무식하구나. 배경은 갖췄는데 그 안을 채울 지식이 부재한 결과인가. 덕분이 이런 만남이 이루어졌으니 나쁜 것도 아니다만.]
“뭐가 문제지?”
[완전한 의식이 분리되면 그것을 어찌 완전하다 할 수 있겠는가. 쉽게 설명해 주지.]
잿빛의 용이 발톱을 세워 베르덴을 가리켰다.
[너는 마법적 이해력이 높아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나? 그게 반복적인 숙달이든 순간적인 깨달음이든 간에.]
“나는…….”
베르덴은 과거를 돌이켜 봤다.
마법 이해력.
베르덴이 타고난 재능의 원천.
보헤미른 마탑에서 그야말로 수많은 마법 이론을 섭렵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식을 확장하는 일에 불과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해력이 높아졌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존재는 그릇을 키우며 성장하고, 그렇게 한계에 다다른다. 하지만 네 마법에 대한 이해력은 처음부터 완성돼 있었다. 그러니 마법을 공부해도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을 리 없지. 네 의식도 마찬가지다.]
“…….”
[잿빛의 개념을 일부 품은 채 초월을 선택한 순간 네 의식은 완성됐다. 정말로 극소수의 방법이 아니면 그 의식은 해할 수 없지. 그런데 의식을 격리해서 소환체에 뭘 어째? 그런 거짓된 소환 마법은 꿈도 꾸지 마라.]
고막을 울리는 커다란 훈수에 베르덴은 반문하지 않았다. 해당 주제에 관한 지식이 부족해 아는 체도 할 수 없었으므로.
“나에 대해 잘도 알고 있군.”
잿빛의 용이 콧잔등을 씰룩거렸다.
[네 기운에서 느껴지니까. 이걸로 알 수 있는 건 대략적인 흐름일 뿐이지만. 아무튼…… 역시 네 재능은 녀석을 닮았다. 외모는 네가 좀 더 낫군, 인간의 미적 기준으로.]
베르덴이 흠칫했다.
“초대 마도왕 말인가?”
[그건 내게 생소한 명칭이다. 녀석이 뭐라 불리든 간에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내겐 올다르크일 뿐이지. 지금은 미쳐 버렸지만.]
초대 마도왕이 미쳤다─── 가르간트의 뒷골못에서 조우한 광신자 노인이 말한 것과 일치하는 문장이다.
베르덴이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은 초대 마도왕이 뭘 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는 건가?”
[물론이다. 하나 너에게 말할 수는 없다. 지금의 너에게는 세상의 법칙을 강제하는 금기를 버틸 만한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자격 부족이지. 그러니 알려고 하지 말도록.]
잿빛의 용은 단호했다.
[그래서 운명의 찌꺼기까지 손상시킨 저의가 뭐라고 했지?]
뭔가를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다면 그 대가를 지불하라는 뜻이다. 잿빛의 용은 베르덴과의 문답을 즐기고 있었다.
베르덴은 고집부리지 않고 이번에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운명에 선수(先手)를 쳤다.]
“적의 팔다리부터 끊는 건 당연한 전략 아닌가.”
‘당신’의 운명이 이루어지기 전에 간섭해 운명을 뒤틀어 버린다, 베르덴이 세계 회의를 통해 전달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운명의 사도들을 제거함으로써 최대한 ‘당신’의 전력을 약화시키겠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군. 확실히 효과적일지도 몰라.]
잿빛의 용이 눈동자를 기울였다.
[그런데 정작 ‘당신’은 어떻게 할 거지? 네 힘으로 ‘당신’을 어찌할 수 있다고, 세상을 규합하면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정해진 건 없다.”
[그렇다. 네가 그렇게 만들었지. 운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불확실한 태초 본연의 세상으로. 경이로운 업적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 제어하고 있는 힘까지 고려하면, 너는 강한 축에 속한다. 하지만 의식과 마법적 이해력과는 달리 완성과는 거리가 멀지. 태초 이래 그런 수준의 강자들이 얼마나 있었을 것 같나.]
쿵.
“……!”
등 뒤에서 묵직한 울림이 느껴졌다.
자연현상이 아니다.
베르덴과 잿빛의 용이 아닌 세 번째 존재가 오고 있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한 발소리를 내면서.
[내가 너무 오래 깨어 있었군.]
“뭐?”
[이곳은 패잔병의 감옥이다. 나는 영원한 죄수고, 너는 유일한 침입자지.]
잿빛의 용이 확언했다.
[간수들이 온다.]
파앗!
베르덴이 마력의 광원을 더욱 키워 어둠을 크게 밝혔다. 발소리가 더욱 가까워진다. 게다가 기괴한 존재감까지.
머지않아 빛과 암흑의 경계선에 새로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