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mit Breaking Genius Mage Chapter Raws 850

850화 잿빛 (2)

허름한 갑옷을 두른 채 녹슨 철퇴를 한 손에 쥐고 있는 거대한 인간. 눈꺼풀이 죄다 잘려 나갔는지 네 개의 눈동자를 시종일관 시퍼렇게 뜨고 있다.

‘프로스티움의 거인……?’

북부의 감시자인 에레스가 보여 주었던 얼음 속의 거인과 흡사하다. 아니, 전반적인 형체는 사실상 거의 동일하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형적이고 소름 끼치는 기운만 제외한다면.

[한때 모든 거인은 저항자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운명전에서 패배하고 물리적 죽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굴종을 택했지. 그렇게 저항자의 잔당들을 몰살하는 ‘당신’의 첨병이 되었다.]

잿빛의 용이 나지막이 말했다.

[거인족은 지상(地上)의 종족.]

베르덴의 뇌리에 몰가른의 미래 벽화 중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인간들.

[운명의 사도── ‘거신(巨神)’의 병사다.]

거인이 입가를 끌어 올렸다.
뚜두둑.
커다란 입꼬리가 날카롭게 찢어지면서 흉측한 미소가 만들어졌다. 닫히지 않은 놈의 눈동자에는 오직 파괴 욕구만이 넘실거렸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거인의 함성이 베르덴을 덮쳤다.
전신이 찌릿거린다.
촉각이 극도로 예민해진 반동으로 잠시간 근육이 굳었다.

‘……! 빠르다.’

베르덴이 옆으로 물러나며 허리를 비틀자 철퇴가 사선을 갈랐다. 한 발짝 늦게 몰아친 후폭풍이 피부를 두드렸다.

<전이>

콰아아앙!

거대한 발바닥이 지상을 강타했다.

허공에 올라선 베르덴이 [인테리스]로 거인을 겨냥했다.

<볼케아>

초고열이 깃든 암석 파편이 거인에게 쇄도하곤 폭발했다. 수십 미터 반경까지 화염이 넘쳐흐르며 뜨겁게 달아오르는 공기.
베르덴은 차분히 거리를 두면서 거인의 반응을 지켜봤다.

[먼저 상대의 힘을 가늠하는 건가. 계산적이군. 또 여유롭고. 하지만 오판이다. 간수 중에 나약한 개체는 없으니.]

잿빛의 용은 구경꾼으로서 한마디 던졌다.

[그렇지 않나? 거신의 여덟 번째 자식, 르크노스여.]

십수 미터에 육박하는 양팔이 연기와 불길이 한꺼번에 걷어 냈다. 직후 거인이 손가락을 굽혀 대지를 강하게 붙잡았다.

인력이 발생했다.

“뭐──”

알 수 없는 힘이 베르덴을 강제로 동굴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중력은 아니다. 마치 베르덴이 추락하는 게 아니라 역으로 대지가 가까워지는 것 같은 감각이 엄습했다.

[거인족의 일부만이 타고나는 개념이다. 지상 최강의 종족다운 힘이라고 할 수 있지. 드래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베르덴이 땅에 착지하자, 거인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쿵쾅쿵쾅쿵쾅쿵쾅쿵쾅쿵쾅.

저 거체인데도 시간을 빠르게 재생하는 것처럼 괴이한 속도다.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서 베르덴이 구현한 공간 역장이 끝내 놈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깨졌다.

‘공간을 저렇게 간단히…… 기껏 힘을 제어해 놓은 게 무색해졌군.’

베르덴이 마력을 풀어 헤치며 무한의 마도를 극성으로 개방했다. 흑염이 무한의 장작으로 삼아 거칠게 타올랐다.

<겁화>

망화로 에워싸인 [인테리스]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철퇴가 부딪쳤다. 소멸의 개념에 의해 충격력이 소멸했다.
그렇게 찰나의 순간 베르덴이 공간을 뛰어넘어, 7위계 중력 마법인 <모멘티움>으로 거인의 투구를 내리찍었다.

콰지지지지지직!!!

그대로 녹슨 투구가 박살 나면서 정수리까지 고스란히 힘이 전달됐다.

‘저항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은 건가.’

놈의 두개골에 금이 가는 감촉이 스태프를 타고 전해졌다. 내구력이 이 정도라면 앞으로 두 수 안에 죽일 수 있을 터.

그때, 귓가에 바람이 스쳤다.

<전이>

베르덴이 머무른 자리를 거인의 손등이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한데 공간을 이동한 베르덴의 앞에도 철퇴가 있었다.

‘읽혔다고?’

콰아앙!

반사적으로 방어한 베르덴이 지면에 발이 닿은 채 밀려났다.
회전과 역회전을 거듭해 마찰력을 극대화시켜 속도에 제동을 걸었다. 몸에 전달된 충격의 일부에 속이 울컥거렸다.

‘……단순한 괴력이 아니다.’

잿빛의 용이 즐겁게 웃었다.

[거인을 제압하거나 죽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거인에게 한 번이라도 제대로 걸리면 누구든지 죽을 수도 있지. 존재의 격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는 한.]

훈수인지 조언인지…….

어쨌든 처음 듣는 정보였기에 베르덴은 대꾸하지 않고 귀담아들었다. 고대 거인을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므로.

거인이 철퇴를 질질 끌었다. 놈의 정수리에서 새어 나온 새까만 핏물이 얼굴을 적셨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베르덴이 물었다.

“거인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건가?”

[느낀다. 간수들이 이상할 뿐이다. 어둠 속에서 감옥을 지키느라 영겁을 배회하는 것들이 멀쩡할 리 없지. 무엇보다 이미 저들은 운명전에서 끝을 경험하기도 했고.]

잿빛의 용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은 재활용이 특기지.]

“무슨 뜻이지?”

[너에게는 아직 알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마저 힘쓰도록.]

거인이 검은 피를 흩뿌리며 마력의 광원 아래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베르덴이 무게중심을 이동하며 그에 응수했다.
철퇴에 맞서는 공간의 칼날.
그는 충격이 미처 전해지기도 전에 소멸시키며 몇 수 앞을 내다봤다.

‘이 르크노스란 거인은 상대를 지상에 강제하는 것 이외에는 특수한 힘은 없다. 그저 빠르고, 강하며, 본능적일 뿐.’

반면 베르덴의 고유 마법은 가짓수가 방대하며, <겁화>로 강화된 육체 능력은 무투계 초월자와 다를 바 없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내 개념이 우위다.’

관찰은 끝났다.

<혼광(混光)>

암청색의 빛이 폭발하며 뇌기와 열기가 철퇴에 작렬했다. <공단>에 손상당한 거인의 무기가 반쯤 파괴되며 쇳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손이 익든 말든 간에 거인은 베르덴을 향해 팔을 내리쳤다.

퀸터 캐스팅: <모멘티움>

중력의 방향을 역전해 거인과 대지를 한꺼번에 밀어 버렸다. 콰과과과과과과과! 중심을 잃은 거인이 바닥에 손을 짚으며 고개를 들었다.

베르덴이 양손을 겹치고는 손바닥 하나만큼 간격을 벌렸다.

<대암천(大陰穿)>

거대한 소멸의 광선이 빛을 가로질렀다.

[아───]

거인이 내지른 손바닥이 망화에 접촉하자 점차 흩어졌다. 베르덴이 이어서 마력을 불어넣자 광선의 규모가 확대됐다.
팔이 붕괴하는 순간에 흑염이 거인의 상반신을 집어삼켰다.

이윽고 베르덴이 허공에 띄워 놓은 [인테리스]를 잡자, 복부 위쪽으로 아무것도 없는 거인의 참상만이 남았다.

……쿠웅!

거인의 하반신이 쓰러졌다.

* * *

신경에 계속 거슬렸던 괴상한 존재감이 빠르게 사라졌다. 하반신에 남아 있던 검은 피가 흘러나와 웅덩이를 이루었다.

주변이 다시 고요해졌다.

<겁화>로 <개기식>과 <월식>을 상시 개방한 베르덴의 살상력은 침묵의 사막 당시와는 비교를 불허했다.

[사물을 지워 없애는 칠흑의 불꽃. 이 시대에서 올다르크로부터 비롯된 그걸 마도라고 한다지. 과연 인상적인 개념이군. 본질적인 깨달음이 더해진다면 쓸 만하겠어.]

“……?”

베르덴이 내심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망화는 어디까지나 무한의 마도에 근간을 두고 있는 건데. 그렇다면 파멸의 마도는 눈치채지 못한 건가?’

잿빛의 용은 냄새로 과거의 흔적을 식별할 수 있는 듯했지만, 그가 아까 말한 대로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베르덴이 물었다.

“구경거리는 됐나?

[제법. 필멸자가 감히 상상도 못 할 세월을 갇혀 지내다 보면 뭐든 재미있게 느껴지기 마련이지. 근데 이제 시작이다. 말했을 텐데.]

회색빛 동공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간수‘들’이라고.]

쐐액───!

어둠 속에서 보랏빛 촉수가 채찍처럼 굽이치며 쇄도했다. 베르덴이 내세운 [인테리스]의 머리 부분이 촉수에 휘감겼다.
콰지직!
공간째로 잡아당긴 다음 대지의 가시로 간수를 무참하게 꿰뚫었다. 사족 보행으로, 머리가 없이 몸체 중앙에 입이 달린 괴물이 새까만 피를 흘리며 축 늘어졌다.

[여긴 거인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이상의 존재가 득실거리지. 개체는 약해도,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하는 저 군체도, 그리고 감옥에 군림하는 최고 간수들도.]

마도 <파멸>

즉시 베르덴이 마안을 발동하며 검붉은 벼락을 일으켰다. 시선을 따라 수십 마리의 괴물에 현뢰가 작렬했다.

파아아아악!

일부 개체가 파멸당하고 다른 개체도 연쇄적으로 파멸당했다. 고대에서도 위험시되던 생물 군체가 단 한 수에 몰살당했다.

잿빛의 용이 잠시 미동도 없다가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그 마력은……?]

베르덴이 최대 전력을 발휘할 준비를 갖추며 자세를 잡았다. 그의 마안은 잿빛의 용 반대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뒤에 있는 존재들이 진짜 간수들인가.’

차츰 모습을 드러내는 여러 간수의 등 뒤에서…… 빛이 닿지 않는 어둠 뒤편에서 몇몇 존재가 베르덴을 주시하고 있다.
르크노스보다 짙은 존재감. 하나같이 초월적 존재, 그 이상이다.

저들에게 둘러싸이면 베르덴이라고 해도 승산은 극히 희박하다. 해법은 하나뿐이다. 놈들이 움직이기 전에 죽이는 것.

‘즉시 멸성을──’

베르덴이 망설임 없이 초위 마법을 준비하려던 그때였다.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크크크큭,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잿빛의 용이 광소하자 충격파가 광활한 공동을 휩쓸었다. 간수들이 떨며 물러섰다.
베르덴을 노리고 있던 최고 간수들의 시선도 움직였다.

[나조차도 경험이 부족해서 착각했군. 설마 그런 개념이 탄생할 줄이야. 과연 운명을 파괴한 유일한 존재답구나. 그래. 완성되지 않은 너 또한 ‘당신’의 대적자라는 거겠지.]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

지진이 발생했다.

[마음에 들었다, 베르덴.]

잿빛의 용이 거체를 일으켰다.

[바다의 비린내, 광신적인 악취, 죽음의 시취, 메마른 냄새, 용의 기운…… 이미 사막에 있는 운명의 사도를 죽임으로써 너는 파란의 중심에 섰다. 그들을 극복해라.]

그의 앞발이 땅을 짓눌렀다.

[그렇게 완성으로 나아가면서 ‘다섯 번째 세계’를 찾아라.]

“다섯 번째 세계라면…….”

[네가 나고 자란 현세, 어둠의 대악마가 있는 리버레아스, 우주의 경계선에 놓인 아크, 저항자의 본거지인 레프라기움 마탑. 이것들과 성격이 비슷한, 네가 모르는 세계지.]

분명한 속삭임이 베르덴에게 전해졌다.

[그곳에 ‘운명의 원천(源泉)’이 있다.]

소리가 멎었다.

베르덴과 잿빛의 용 주위로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익숙한 위협이다. 이건 금기 위반의 징조였다.

‘아니, 이건 라인델처럼 금기의 경계선을 건드린 게 아니야.’

확실히 금기를 위반했다.

……뭔가가 온다.

광신자 노인 때처럼 세계수가 등장하는 건 아닐 것이다. 온건함과 거리가 멀다. 베르덴은 저도 모르게 숱하게 본 죽음을 떠올렸다.

여기 있으면 죽는다.

[기념비적인 만남이었다, 베르덴. 이제 돌아갈 준비를 해라.]

베르덴이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나갈 방법이 있는 건가?”

[너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를 부르다가 내게 왔다. 소환 마법을 시전하다가 격의 차이 때문에 네가 역소환된 셈이지. 그러니 그 반대로 하면 될 테지만, 그것보다 훨씬 간단한 방법이 있다.]

잿빛의 용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차원을 부수는 것.]

드래곤 로어.

─────────!

잿빛의 용의 포효가 베르덴을 지나치고는 공간을 강타했다. 그에 휩쓸린 간수들이 날아가거나 육체가 파괴당했다.
대지의 균열처럼 보이는 세계의 틈새가 벽안에 비쳤다.

[올다르크가 드래곤의 소재로 제작한 그 로브에 부족한 부분이 꽤 보이더군. 아마 실패작이겠지. 내가 선물을 넣었으니, 훗날 네가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면 자연스럽게 손에 넣게 될 거다. 그러니 해야 할 일에 집중해라.]

“언제…….”

베르덴이 순간 [아인베르]를 바라봤다가 잿빛의 용에게 말했다.

“금기의 대가가 클 텐데.”

[금기 따위. 태초의 드래곤인 나에게는 무시해도 상관없는 하찮은 규칙이다. 뭐, 너에게는 절대적인 법률과도 같겠지만. 이렇듯 하늘은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드높지.]

잿빛의 용─── 드래곤의 시초가 거대한 날개를 폈다. 빛과 어둠에 둘러싸인 그 위용은 베르덴의 기억에 새겨졌다.

[재회를 고대하마, 베르덴. 죽지 말도록.]

한 번의 날갯짓에 7위계급 대기 마법의 위력을 웃도는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것이 침입자의 탈출을 막으려는 간수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

베르덴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고는 <전이>를 시전했다. 그렇게 패잔병의 감옥 바깥으로 이어진 세계의 틈새로 몸을 던졌다.

꾸드득, 꾸드드득.

곧이어 차원의 틈이 수복됐다.

[과연 세 번째 선택지가 생길 것인가. 궁금하군.]

잿빛의 용이 시선을 높였다. 허공에서 피어나는 빛이 점차 커지고 있다. 어떤 금기를 어겼느냐에 따라 그 집행자도 달라진다.

광명이 어둠을 밝혔다.

모든 간수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한때 저항자의 주축이었던 최고 간수들도 예외는 없었다.

[한동안 자긴 글렀군.]

‘당신’의 빛이 추락했다.
피와 비명.
잿빛의 용이 내지른 고통스러운 포효가 감옥 전체에 울려 퍼졌다.

* * *

현세로 돌아온 베르덴이 시선을 옮겼다. 상황을 보니 마법진 디스펜서로 소환 마법을 시험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른 건가. 그때처럼.’

광신자 노인과 만났던 당시를 떠올리며 베르덴이 시선을 내렸다. [아인베르]가 그의 눈에만 잿빛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칠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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