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6화 급진전 (2)
과거는 흔적이며.
현재는 진행이고.
미래는 가능성이다.
본디 운명의 개념이 세상을 지배하기 전에 미래 예지는, 보다 두루뭉술한 미래 ‘예측’이라는 용어로 존재했다.
전쟁터에서 화살을 맞을 확률.
마법이 성공할 확률.
검에 찔려 죽을 확률.
책장을 넘길 확률.
달밤이 차오를 때 잠에 들 확률.
…….
현재를 지나치지 않은 모든 시간과 사건엔 항상 여지(餘地)가 있었다. 당연한 것조차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비껴 갈 수 있었다.
심리, 상황, 이성, 판단, 우연.
세(世)의 본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가역적이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서 하나의 결과로 미리 정해질 수 없는 것이다.
항상성.
운명은 시공을 초월했지만, 그 힘이 약해지며 강제로 억제되어 있던 시간과 공간은 본래의 성질로 회귀하고 있다.
운명에 종속되어 탄생한 예지자와 선지자 또한 함께…….
다시 태고의 시대로.
다시 태초의 시제(時制)로.
“……아이샤 님?”
방랑의 무나딤이, 정원에서 간식을 먹다 말고 갑자기 서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이샤에게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베르덴을 따라서 침묵의 사막에서 주인 없는 땅으로 이주한 그녀는 마치 사명이라는 듯 아이샤의 시중을 자처했다.
나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신분은 더욱 그렇다.
현 투하르 제일의 선지자인 방랑의 무나딤은, 본능적으로 아이샤가 격상, 또 격상의 예지자임을 인지했으므로.
“운명의 해방은 만인을 교차할지니.”
늙은 점술가의 손녀──아이샤가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과연 사도는 운명을 거부할 수 있을까.”
“네?”
방랑의 무나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대륙 공용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이샤의 입에서 흘러나온 기묘한 언어는 대륙 공용어가 아니었기에 방랑의 무나딤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곧 아이샤가 눈을 깜빡이더니 들고 있던 포크로 케이크를 마저 잘랐다.
“언니, 이 크림 너무 맛있지 않아요? 할머니도 좀 드시면 좋을 텐데. 언니도 어서 드세요!”
“아이샤 님? 방금.”
“네? 뭐가요?”
아이샤는 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고, 천진난만하게 눈빛을 반짝였다. 방금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조금도 알아채지 못한 모습이었다.
‘역시 다르셔……!’
분명 어떤 예지력이 작용한 게 틀림없다.
도대체 아이샤의 힘은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는 걸까. 선천적으로 앞날을 점지하는 자로서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방랑의 무나딤은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반쯤 빈 찻잔에 뜨거운 홍차를 따랐다.
“아, 언니.”
아이샤가 새하얀 손으로 방랑의 무나딤의 어깨를 쓸었다.
툭.
얼마 남지 않은 운명의 실 가운데 느스해진 한 가닥이 끊어져 사라졌다. 나머지 실은 아직 팽팽하나 머지않아 기능을 잃으리라.
“이제 아드리안 아저씨하고 이자벨라 언니하고 많이 비슷해졌어요. 다른 사람도요. 되게 개운하겠다. 그렇지 않아요?”
아이샤가 방긋 웃었다.
소녀의 미소였다.
애석하게도 방랑의 무나딤은 그 순수한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 또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 * *
흑법의 자크란을 침묵시킨 스태프 [울티마]와 보헤미른 마탑의 장로를 처단한 마검 [케덴스]가 서로 교차하며 사선을 갈랐다.
카앙───!
그리고 그 중심 부분을 광검 [실렌다르]가 정확히 틀어막았다.
“합은 좋으나, 여전히 느려.”
아드리안이 자색의 기운을 폭발시켰다.
척력이 몰아친다.
유니아와 카인이 <비행>으로 물러나며 다음으로 시전할 마법을 연산했다.
직후 아드리안의 신형이 쌍둥이의 동체 시력에 아슬아슬하게 걸릴 듯 말 듯, 시야 끝에서 희미하게 흔들렸다.
‘옆!’
카인이 즉각 측면을 경계하는 순간 [케덴스]가 채 경로를 막기도 전에 발길질이 파고들었다. 옆구리를 타격당한 그가 뒤로 밀려났다.
“끅.”
“칫……!”
트리플 캐스팅: <아이스 레인>
상공에 그어진 한 줄기 틈새에서 무수한 얼음 송곳이 쇄도했다. 카인을 보호한 유니아가 촉각을 곤두세우며 몸을 비틀었다.
<디스트럭션>
스태프와 광검이 충돌했다.
엇갈린 시선.
중력과 검기가 맞물리며 인력이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유니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검사가 날아다니다니. 사기 아니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콰아아앙!
힘 싸움에서 완전히 패배한 유니아가 지면에 추락했다.
아드리안이 허공을 도약했다.
이는 다름 아닌 산디르 파엔의 기예를 모방한 결과였다.
다만 명확한 차이점이 있다면…… 아드리안은 기예의 형태가 아니라 오직 기의 운용만으로 그것을 구현해 냈다는 점이다.
남다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건 베르덴뿐만이 아니었다.
동시에 카인이 돌진해 아드리안의 검기를 재빨리 막아섰다. 유니아도 금방 몸을 회복하고 달려들면서 난전을 유도했다.
“지금 내 속도는 너희들의 감각을 약간 웃도는 정도다. 둘이서 내 움직임에 적응하지 못하면 격상의 강자로는 그저 약자에 불과하지.”
아드리안이 앞꿈치에 무게를 실었다.
땅이 일부 갈라졌다.
“눈에 의존하지 마라.”
날이 세워지지 않은 광검의 칼등이 유니아와 카인을 각각 후려쳤다. 입술이 찢어지고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혈액의 특유한 끈적한 쇠 맛이 비릿하게 혀끝에 감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온의 쌍둥이는 전의를 더욱 불태웠다. 전력을 끌어올렸다. 위계 돌파를 시도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콰과과과과광! 콰아앙! 콰과과과과과!
필사적으로 죽일 각오로 임해도 흠집도 나지 않는 상대방과 대련을 하는 건 그 자체로 축복과도 같다.
두 사람은 주변 자연을 초토화시킴으로써 축복을 만끽했다.
안전지대에서 훈련을 구경 중인 에온의 정보관, 페르네가 감탄했다.
“역시 무지막지하네요. 웬만한 수련장은 간단히 망가지겠어요.”
케이렐이 고양이 귀를 쫑긋거리며 허리를 크게 폈다.
“둘 다 보통 국가급 전력이 아니니까. 저런데도 훨씬 더 강해지고 싶다니……. 게다가 베르덴 님하고 아드리안도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보고 있고. 수인보다 더하다니까?”
“강자로서 그 이상의 경치를 알기에 가질 수 있는 향상심이죠.”
에네트가 첨언했다. 그녀는 명상을 하듯 앉은 채 허벅지에 대검을 눕혔다. 그리고 그들의 전투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케이렐과 페르네가 나란히 에네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드리안과 이런 거 저런 거 다 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야?”
“?!”
에네트가 크게 몸을 떨었다.
“대, 대체 누가 그런 말을……?”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 듣다 보니 뭐…… 근데 사실 아니야? 아드리안은 한마디도 안 하고, 너는 옆에서 얼굴만 붉히다가 도망갔다며.”
“솔직히 말해서 그 정도면 기정사실이긴 해요.”
“출처는 이자벨라 님이군요.”
그녀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이 생각하신 그런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카페의 밀실에서 차를 마시고, 인적이 드문 거리를 돌아다닌 게 전부입니다.”
“밀실?”
“인적이 드문?”
“아드리안 님은 유명하시니까요. 괜한 구설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케이렐의 꼬리가 살짝 구부러졌다.
“그런데 왜 얼굴이 빨개져?”
“그야…….”
에네트가 목소리를 최대한 줄였다.
“의외로 상냥하셔서요.”
“콩깍지 두께가 무슨 마법 장벽 수준인데.”
무슨 소녀도 아니고…….
“딱히 큰일이 없었는데 아드리안 님은 어째서 아무 말도 안 하신 걸까요?”
“이자벨라 님을 놀리려고 그런 거겠지.”
주인 없는 땅의 케이렐은 아드리안의 하나밖에 없는 소꿉친구다. 아드리안의 행동 원리쯤은 훤히 꿰뚫고 있다.
“그래도 당장 밀어내지 않는 걸 보면 싫지는 않은 모양이긴 한데…….”
“크흐흠!!”
에네트가 애써 온몸의 혈류를 가라앉히며 주변을 환기했다.
그러곤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 블루라는 정령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겁니까?”
“네…… 아직이요.”
페르네가 품속에서 조심스럽게 푸른 빛무리를 꺼냈다. 손바닥 위에 살짝 떠오른 정령은 예전보다 훨씬 더 빛이 약해져 있었다.
마법계 총회의가 열리기 전에 베르덴의 마력을 받은 블루는 최근까지 잘 지내다가, 갑자기 이렇게 변하고 말았다.
“베르덴 님께서 아무래도 잠에 든 것 같다고 하시면서, 혹시 모르니 메르퀴엔 님과 진지하게 상담해 보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메르퀴엔 님을 찾아가 보니까 자기도 뭔지 모르겠다면서 일단 깨어날 때까지 내버려 두라고 하셨어요.”
“그럼 걱정할 건 없겠네.”
“그렇긴 하지만요…….”
블루가 옆에서 반짝거리며 날아다니지 않으니 영 마음이 허전했다. 이미 페르네는 블루와 정이 들어도 너무 들어 버렸다.
“포션.”
“……!”
어느샌가 아드리안이 그녀들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에네트가 신속하게 최상급 포션 두 병을 전달했다.
아드리안이 던진 포션을 단번에 들이켠 유니아와 카인이 곧 주저앉았다.
온몸이 엉망진창이었다.
“하아, 하아…… 꽤 아프긴 하지만 엄청 개운하긴 하네. 정신이 확 든 것 같아.”
“후우, 후…… 고생, 하셨습니다.”
“본래는 나와 주군이 번갈아 가면서 훈련을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이번처럼 주군께서 안 계신 동안에는 전적으로 내가 대련을 맡을 거다. 길어도 최대 하루에 15분씩.”
“고맙긴 한데 15분은 너무 짧은 거 아니야?”
“지금 너희들 수준으로는 무리하면 무리할수록 역효과다.”
아드리안은 냉정했다.
“매일같이 내가 제어하는 속도에 적응하는 것에 집중해라. 감각이 따라오지 않으면 너희는 초월자의 털끝에도 닿을 수 없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알겠어. 근데 선배는 갑자기 무슨 일이래? 엄청 급한 볼일이 생긴 것 같은데.”
“너희들 수준으로는 알 필요 없다.”
“흥! 나중에는 말하지 않으면 못 배길걸?”
베르덴, 이자벨라, 아드리안, 알파, 베타가 다른 비밀을 감추고 있는 건 안다. 하지만 에온의 구성원은 불만이 없었다.
특히 유니아와 카인이 그러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 선배의 비밀을 듣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뭐, 기대하지.”
그렇게 오늘의 짧고 굵은 대련이 마무리되려던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구……!
느닷없이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슨…….”
“우리 때문에 지반이 약해졌나?”
지진?
그렇다고 하기에는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하늘의 기류도 변했기에. 유니아, 에네트, 카인은 당장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 가운데…… 오직 아드리안만이 현상의 원인을 포착했다.
팍!
“앗……?!”
아드리안은 말로 설명하지 않고 페르네의 손을 쳐 냈다. 이게 더 빠르니까. 그녀에게서 떨어진 블루의 빛이 순식간에 강렬해졌다.
순수한 마력이 엄습했다.
자연이 비명을 지른다.
그 익숙한 느낌에 아드리안의 평정도 흔들렸다. 유니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늘로 떠오르는 블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선배?”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일순간 태양보다도 밝아진 마력의 빛이 시야를 빼앗았다. 아드리안은 눈꺼풀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모든 걸 지켜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이 가라앉았다.
이윽고 그들에게 낯익은 특유의 빛이 천천히 고도를 낮췄다. 그것이 서서히 궤도를 틀더니 방향을 조금 바꾸었다.
“아!”
페르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정령이 그녀에게 내려앉았다.
“블루…… 니?”
반짝!
블루가 명멸했다. 한 번은 푸른빛으로…… 한 번은 순수한 검붉은빛으로. 심지어 이전에는 없었던 강대한 존재감과 함께.
[페. 르. 네.]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베르덴에 의해 정력석에서 재탄생한 숲의 정령, 블루───이젠 무한과 파멸의 정령이 느릿하게, 그리고 또박또박 그녀의 이름을 발음했다.
정적 속에서 아드리안이 말했다.
“당장 엘프 불러.”
* * *
저번처럼 책장을 열어도, 이리저리 건드려 봐도 [그링 아르카넘]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상식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한 상황.
[열네 번째 실험 실패.]
[열다섯 번째는 다소 비상식적인 방법입니다. 진행하시겠습니까?]
“이렇게 계속 모른 척을 하겠다니, 그럼 우리도 어쩔 수 없지.”
베르덴이 손가락을 굽혔다.
마도 <파멸>
파멸의 마력이 담긴 번개가 조화를 이루면서 현뢰로 변모했다. 간헐적으로 현뢰가 빛과 소리를 내며 그의 손에 깃들었다.
“이래도 가만히 있나 보자고.”
파지직──!
베르덴이 진심으로 결단을 내리며 세계 금서를 노렸다.
그때였다.
여태껏 미동도 없던 [그링 아르카넘]이 멋대로 확 열렸다. 본래 안에 있어야 할 종이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책 내부에는 그저 빛 한 점 존재하지 않는 칠흑의 공간만 자리했다.
베르덴이 우뚝 손을 멈췄다.
침묵이 감돌았다.
동시에 [그링 아르카넘]이 움찔거린 순간 그가 무한의 마도로 마력의 장막을 펼쳐 알파와 베타를 보호했다.
쩌어어어억…….
세계 금서 속 어둠이 확산하며 베르덴 일행이 있던 공간 전체를 집어삼켰다.
* * *
[공간의 변화. 확인.]
[지금까지 관측한 적 없는 장소입니다.]
알파와 베타는 무사하다.
감각도 정상이다.
호스트를 마주했을 때처럼 호흡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숨을 내쉬자 공기 방울이 위로 떠올랐다.
‘물속인가?’
마치 심해에 들어온 기분이다. 이렇다 할 수압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역시 [그링 아르카넘]은 바다와 연결된 모양이었다.
그때,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정면.]
어둠이 아주 약간 밝아지면서 베르덴 일행을 향해 누군가 걸어왔다. 얼굴만이 아니라 피부에, 옷에, 온몸에 따개비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은 기묘한 인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인간의 형태를 취한 알 수 없는 생물이었다.
씨익.
따개비 인간이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전혀 동요하지 않으시…….”
“웃어?”
베르덴이 손을 반쯤 쥐었다. 그러자 특정 공간의 압력이 강해지며 따개비 인간의 목에 엄청난 부하가 가해졌다.
“죽고 싶으면 계속 웃어라.”
멋대로 다른 곳으로 끌려오는 건 이제는 신물이 날 지경인데. 무엇보다도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알파와 베타도 함께 있다.
베르덴은 힘 조절을 하기 싫을 정도로 심기가 아주, 아주 불편했다.
“꺼어윽……!!! 꺼으으어어어어억!!!”
따개비 인간은 머리가 터지기 직전까지 몰려서는 비명을 질러 댔다.
웃음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