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7화 급진전 (3)
푸른 산맥에 도착하기 전…….
세계수의 조언 덕분에 베르덴은 자신이 초월자가 되지 못한 이유를 자각했다.
두려움.
다시 타의에 의해 일상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무의식적인 망설임이 되었다. 오직 그것만이 선택을 가로막았다.
초월의 경지로 올라서지 않고 평화로운 나날을 구가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복수만 끝내고 새로운 삶을 거머쥘 수 있었다───이렇듯 비교적 쉬운 선택지는 분명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덴은 기꺼이 세 번째 길을 택했다. 두려움에 물러서지 않고 가능성으로 남지 않기로 결단한 것이다.
그는 하나를 고르지 않고 모든 것을 손에 넣기로 마음먹었다.
선택의 결과는, 역시 무거웠다.
한때 하늘이라 여겼던 존재들을 하나둘씩 아래로 끌어내리고, 그들을 발판 삼아 스스로 대륙의 하늘이 되었음에도…….
드높은 하늘 위에는 다른 하늘이 있었고, 광활한 우주가 있었다. 이 세계와 역사의 정점에 선 존재들이 말이다.
기억과 상상이 뇌리에서 교차했다.
침묵의 사막에서 ‘당신’의 표층의지와 마주했을 때, 혹시라도 이자벨라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만약 잿빛의 용에게 역소환되었을 때 베르덴에게 지킬 대상이 있었다면, 그런 와중에 잿빛의 용이 도와주지도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가장 강력한 간수들을 상대로 베르덴의 승률은 매우 희박했다.
가르간트에서 광신자 노인과 맞닥뜨리고 목을 거의 베일 뻔했을 때도 타인을 보호할 여력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미래 운명이 가리키는 존재 중 하나일 호스트는 어떨까. 미완성된 사막의 신보다 강하면 더 강했지 약하진 않을 텐데.
‘정보가 전무하다.’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대비도 갖추지 못한 채 또 처음 보는 공간에 던져졌다.
게다가 이번엔 알파와 베타까지.
따개비 인간의 반응을 보아 이 현상은 고의성이 다분했다. 잿빛의 용과의 우연성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말인즉슨 광신자 노인과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적으로서 규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먼저 평화로운 대화의 여지를 없애 버린 건 상대 측이다.
“호스트는 분명 나를 주빈으로 대우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게 그 대우인가? 제멋대로 이곳으로 우리를 불러들이는 게?”
혼자일 때와 함께일 때는 다르다.
최악을 상정하는 것.
베르덴의 머릿속은 이미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을 가정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베르덴의 역린이었다.
“마땅한 이유가 있어야 할 거다.”
“켘, 케엑…….”
공간 압력이 느슨해지자 따개비 인간이 제 목을 부여잡고 몸을 굽혔다. 보글보글. 입에서 나온 공기 방울이 위로 떠올랐다.
그렇게 겨우 정신을 차린 따개비 인간이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오, 오해. 오해이십니다……! 전, 저는 호스트의 명령을 받아, 케흑, 주빈을 안내하기 위해서……!”
“지식의 만찬회가 열렸나?”
“아닙니다…… 아르카디옴은, 아직 준비 중에 있습니다. 호스트께서 말씀하시길, 주빈께서는 이번, 아르카디옴이 처음이시니, 큽, 사전 안내가 필요할 것 같다고 하셔서…….”
따개비 인간은 최대한 웃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저, 아르카디옴의 집사 중 하나인 ‘셸브론’. 어쩔 수 없이 주빈께 강제적인 수단을 쓴 점은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
베르덴은 가만히 서서 셸브론의 탁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뭔가 섬뜩함을 느낀 셸브론은 자연스럽게 눈을 내리깔았다.
베르덴이 턱짓했다.
“안내해라. 호스트에게.”
“아, 예!”
셸브론이 용서받았다고 생각했는지 황급히 길을 안내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일정 반경 내의 어둠이 조금씩 걷혔다.
따각따각.
셸브론의 등에 기생하는 거대한 따개비가 소리를 낸다. 베르덴은 공간 감각으로 주변을 보다 선명하게 인식하며 의념을 보냈다.
───알파, 베타. 전투에 대비해라.
진실 속에 거짓이 섞였다.
또한 적의도.
───그리고 내 이름을 언급하지 말도록.
의심이 생겼으니 확인하는 것이 순리다.
반짝.
알파와 베타는 대답 대신 푸른 고리의 외눈을 빛냈다.
* * *
물속 특유의 저항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부력에 베르덴의 잿빛 머리카락과 [아인베르]의 소매가 살짝 떠오른 채로 나풀거린다.
‘이곳은 해저(海底)인가.’
빛이 전혀 닿지 않는 심해 중의 심해.
확실히 새롭기는 했다.
인류가 감히 탐험할 수 있는 깊이는 제한되어 있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바다야말로 가장 거대한 미개척 지대다.
‘공간 좌표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군.’
광신자 노인의 거짓된 공간에 들어갔을 때와 패잔병의 감옥으로 이동했을 때와는 다르게 베르덴 일행은 그 실체가 옮겨졌다.
대전당으로 돌아갈 수 있는 통로의 확보는 필요 불가결하다.
베르덴이 아공간에 보관한 [그링 아르카넘]을 의식했다. 지금으로서는 대륙과 이어진 길은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서둘러 [그링 아르카넘]을 다루는 법을 찾아내는 것이 최우선이다.
베르덴은 언제든 <겁화>를 해방할 준비를 하며 평온을 가장했다. 반면 알파와 베타는 새로운 미지에 몰두했다.
알파는 진즉에 기억 골렘 기능을 활성화한 상태였다.
[유적. 확인. 바다 문명?]
셸브론이 살짝 고개를 틀었다.
“대륙을 지성체가 지배하듯이, 바다도 지성체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숫자는 대륙의 지성체들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죠. 초고도의 문명이 있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베타가 말했다.
[초고도의 문명이라고 하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문명이든 간에 결국에는 번영과 쇠퇴를 반복하기 마련입니다. 본래 이 유적은 바다에 있던 것이 아닙니다. 거대한 섬의 지반이 지진으로 인해 무너져 그대로 내려앉은 결과물이죠.”
셸브론이 기이한 산호초로 장식된, 거의 무너진 회랑을 거닐며 밖을 가리켰다. 특정 부분의 어둠이 밝아졌다.
이제는 잔해밖에 남지 않은 어느 도시의 흔적이 시야에 비쳤다.
“하지만 지성체와 도시는 스러졌을지언정 지식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모든 걸 품는 것이야말로 바다의 본성이자 개념.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해저의 주민은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물고기도?]
“하하, 대륙에서 생각하는 물고기는 저희에게도 식량입니다. 정확히는 어인(魚人)이나 인어(人魚)가 주민 중 하나이지요.”
[둘이 다름?]
“엄연히 별개의 종족입니다. 서로 거의 앙숙에 가까우니 조심하십시오.”
베르덴이 눈살을 찌푸리며 셸브론의 존재를 잠시 노려봤다.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는 정말로 아르카디옴의 집사라는 듯이 정적에 가라앉지 않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아르카디옴은 지식의 만찬회를 뜻하면서도, 온 지식이 모이는 저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제 직책이 집사인 것이지요. 아르카디옴에서 계급은 총 네 개로 세분화됩니다.”
호스트.
주빈.
귀빈.
하객.
“저를 비롯해서 해저의 주민 대부분은 하객 신분입니다. 귀빈(貴賓)이란, 대륙에서 생각하는 귀족보다 훨씬 더 존귀한 자격을 가진 존재로서 그 숫자는 십수 명밖에 되지 않는답니다.”
베르덴이 물었다.
“주빈은?”
“아주 먼 옛날에 존재했다고 들었지만 실제로 뵌 적은 없습니다. 현재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아르카디옴에 큰 기대를 품은 귀한 분들이 아주 많으십니다.”
셸브론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여기 네 번째 주빈께서 참석하시니.”
까마득한 과거에 주빈이 세 명 정도 더 있었다는 건가. 아르카디옴이 존재해 온 세월을 가늠해 보면 정말로 적은 숫자였다.
‘과연 그 세 명은 누굴까.’
베르덴은 궁금증을 생각 한구석에 묻어 두고 곧 시선을 높였다.
머지않아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지며 어둠이 확 걷히자…… 아르나크 제국의 황도보다도 훨씬 더 크고 장엄한 바닷속 저택이 화려한 빛을 뿜으며 베르덴의 벽안을 물들였다.
[와.]
알파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베타도 애써 말은 안 했지만 비슷한 반응이었다.
진정한 지식의 보고에 시선을 빼앗겨 버린 베르덴 일행을 바라보며, 셸브론은 한쪽 입가에 짧은 웃음을 띠었다가 곧 지웠다.
“사소한 오해가 있어서 본의 아니게 정식 인사가 늦었습니다. 아르카디옴에 방문하신 걸 환영합니다, 주빈───”
“귀하께서 그 네 번째 주빈이신가.”
딱, 딱, 딱.
바로 옆쪽에서 누군가가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다가왔다.
셸브론이 다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루자크 경의 존안을 뵙습니다.”
“인간과 작은 골렘들. 확실히 주빈답게 굉장히 특이한 조합이구료.”
바다코끼리와 아주 흡사한 얼굴을 한 인간형의 존재가 눈을 끔뻑였다.
루자크.
그는 셸브론을 심해에 널리고 널린 돌멩이처럼 무시하고는 베르덴 일행을 응시했다. 베르덴, 알파, 베타를 번갈아 가면서.
베르덴이 물었다.
“그쪽은?”
“루자크 팔테인. 아르카디옴에서 열여섯 번째 귀빈으로 취급받고 있소. 귀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숫자와 신분이지.”
루자크가 지팡이에 양손을 올리며 이제야 똑바로 베르덴을 쳐다봤다.
“아르카디옴이 본격적으로 열리려면 아직 조금 남았는데…… 음, 보아하니 만찬회에 참석하기 전에 설명을 들으러 온 것 같소만.”
셸브론이 말을 덧붙였다.
“호스트께서 초청하셨습니다.”
“호스트께서는 한창 만찬회 준비로 바쁘시다고 들었소. 물론 금방 오실 테지만. 아무래도 지금 당장 대면하시지 못할 것 같은데, 잠시 기다리는 동안 나와 대화라도 나누지 않겠소? 귀하께선 이곳이 처음이니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하오만.”
베르덴이 말없이 시선을 보내자 셸브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모르게 목을 어루만지며.
“……호스트께서 현재 아르카디옴 바깥에 계시긴 합니다.”
“그런가.”
베르덴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
“주빈과 처음으로 자리를 갖게 되다니.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셸브론이 앞장을 섰고, 그 뒤를 루자크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그리고 그런 루자크 팔테인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베르덴이 알파와 베타와 함께 아르카디옴을 향해 걸어갔다.
‘그나저나 의문이군.’
루자크는 대륙에 전해지지 않은 특정 종족이라고 하기에는 복합적인 느낌이 아주 강하긴 했지만 그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베르덴이 루자크의 뒤통수를 관찰했다.
‘저 열여섯 번째 귀빈은…… 정말로 살아 있는 존재인가?’
회백색의 뇌가 훤히 드러나 있다.
죽은 듯 미동 없이.
* * *
아르카디옴의 내부는 전반적으로 저택의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수십 개의 서로 다른 문명이 합쳐진 듯 듣도 보도 못한 양식이 한둘이 아니긴 했지만 금방 눈에 적응됐다.
셸브론은 장식물처럼 벽에 가까이 붙었고, 넓은 공간 한가운데에선 베르덴 일행과 루자크와 앉아서 서로를 마주했다.
“뭐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지만, 만찬회가 열리기 전까지 모든 섭취 행위는 금지되어 있소. 호스트께서 그 규칙만큼은 철저히 지키시지. 그러니 주빈께도 양해를 부탁드리오.”
베르덴은 자연스러운 태도로 거만하게 턱을 괴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뭐지?”
“사족은 싫어하시나 보구려. 하하. 마음이 맞아서 다행이오. 나 또한 최대 효율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지식인이기에.”
루자크가 지팡이를 의자 옆에 기댔다.
“귀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아르카디옴은 지식을 나누는 만찬회이자, 머릿속에 담긴 지식을 교류하는 저택이기도 하오.”
“…….”
“하지만 본래 지식이란 무상으로 제공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식인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소. 나도 그렇고.”
그가 가슴을 폈다.
“그래서 아르카디옴은 평소 게임을 즐기오.”
[게임?]
“그렇소. 게임. 서로 내기를 해 승자에겐 지식을 제공받을 권리를, 패자에겐 지식을 내놓아야 할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오. 이야말로 ‘지식의 만찬회’의 본질이기도 하오.”
루자크가 손짓했다.
셸브론이 서둘러 뛰어와서 수십 개의 기물과 하나의 보드를 꺼냈다. 체스. 아니, 체스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이었다.
“그러니 나와 게임 한판 하는 게 어떻소? 그렇게 함으로써 승자에게 간단한 질문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오. 룰은 지식인에게 전혀 어렵지 않으니 금방 익힐 수 있을 텐데. 아, 물론 처음이시니 3수 양보해 드리겠소.”
내기라…….
베르덴이 잠시 고민한 끝에 루자크에게 대답하려 할 때였다. 알파가 자그마한 손으로 [아인베르]의 소매를 당겼다.
[내 차례.]
알파가, 초대 마도왕의 지적 능력을 물려받은 창조물 본인이 참여를 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