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2화 혈연? (3)
베르덴이 사고력을 찰나에 끌어올렸다.
‘반젤리스가 대련을 제의했다.’
마법적인 교류를 도모하면서 혈통을 확인하려는 걸까. 올 게 왔다. 그렇다면 결론은 ‘예상대로’ 둘 중 하나로 귀결되리라.
위대한 혈통은 아니지만 <아케인>을 터득할 수 있는 걸 보고 죽이려 들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대하지 않거나.
즉, 진실이 전제였다.
반젤리스와 메드레일의 착각을 더는 방치할 생각이 없다. 이 문제를 미루고 미뤘다가 자칫하면 돌이키지 못할 테니까.
지금보다 더 혼란스러워질 대륙의 정세 속에서 마도국과의 혈통을 둘러싼 갈등이 터지면 치명적인 국면을 초래할 수 있다.
이 건에 대해여 베르덴은 이미 관리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거짓으로 상황을 모면한다면 당장은 숨을 돌릴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마음을 옥죄어 언젠가 다시 숨통을 조일 것이다. 사안이 크면 클수록 더욱더 단단히. 그렇다고 해서 솔직함이 항상 바라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나, 진실성에는 언제나 의미가 있지.
───진실과 현혹. 둘 중 무엇이 옳다고는 할 수 없다. 그저 둘 중 하나로 이어진 미래를 감당해야만 하는 현실만 있을 뿐이니.
───베르덴, 그대는 본체의 피를 물려받은 7대 마도왕을 어떻게 대하고 싶은가?
다양한 선택지.
‘가급적이면 반젤리스 루인 아케나드와 반목하고 싶지는 않아.’
그것이 베르덴의 심정이었다.
초대 마도왕의 후예라는 점과 인간적인 호감을 제쳐 둔다 해도, 그만큼 ‘당신’의 운명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우군은 거의 없다.
그리고, 혹시 모를 갈등을 피하려고 반젤리스를 속였다간 그 앞에서 영영 <아케인>을 운용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거짓말이 들통날 테니까.
모래 위에 세운 탑은 산들바람에도 흔들리고, 작은 파도에도 무너진다.
그래서 베르덴은 과감하게 판단했다.
‘정공법으로 극복한다.’
반젤리스의 위대한 혈통 검증법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필시 <아케인>을 체득할 수 있냐 없냐로 판단하겠지.
그 방법으로 반젤리스는 베르덴에게 <아케인>을 가르칠 터였다.
바로 여기가 관건이었다.
‘혈연이 아님을 증명하되 <아케인>을 터득할 수 있단 가능성을 보여 줘야 돼. 그렇게 해야만 앞으로 <아케인>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마도국 왕실을 납득시키는 것.
어떻게 마도왕의 혈통이 아닌데도 마도왕의 마력 운용법을 체득할 수 있는가…… 에 대한 해명은 미리 준비해 왔다.
이론적으로 완벽하게 해석할 수 없는 독자적인, 고유 마도를 적절하게 갖다 붙이면 의문은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
네가 가르쳐 준 거, 해 보니까 됐다!
이런 식으로 진심으로 모른 척하면 반젤리스라고 해도 어쩔 방법은 없다. 진실을 바탕으로 삼아 거짓을 섞은 것이다.
그렇기에───반드시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 딱 하나 있었다.
‘스승님에게 배운 <아케인>은 절대로 발각되면 안 된다. 절대로.’
만약 <아케인>의 경지를 들켰다?
반젤리스에게서 검증 차원으로 <아케인>을 배운 후라면, 그 경험을 토대로 발전시킨 거라고 말이라도 할 수 있지…….
처음부터 초대 마도왕의 마력 운용법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단언컨대 아주 골치 아파진다.
관리자의 존재를 어떻게 밝힌단 말인가?
초대 마도왕의 비밀스러운 행적을 발설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초대 마도왕의 핏줄이라고 해도 감출 것은 감춰야 한다.
‘그것만 넘기면 나머지는 수월하다.’
물론 이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렸을 경우를 가정한 주의 사항이다.
최악은 따로 있다.
설득에 실패하고, 결국 혈통이 아닌 자에 의한 <아케인>의 유출을 막기 위해 반젤리스가 직접 손을 쓰는 것.
“…….”
베르덴은 마도국과의 교전을 상상하면서 서로의 전력을 비교했다.
에온에는 두 명의 초월자, 한 명의 마족, 한 명의 마도사, 두 체의 인공 골렘이 있고.
아케나드 마도국에는 한 명의 초월자, 초월자의 손녀, 수백 년의 연구로 조직된 13명의 최정예 원소 마도사가 있다.
‘불리하다. 압도적으로.’
마도국이 전력을 갖추고 있다.
반젤리스의 무장을 제외해도 아티팩트가 한둘이 아닌 데다가 개중엔 고대 아티팩트로 의심되는 것이 최소 두 개 이상으로 짐작된다.
과연 아케나드 마도국의 저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드리안이 기습한다면 허를 찌를 수 있겠지만, 엘레마르의 단장을 포함한 일부 마도사를 일격으로 제압하는 건 어렵다.’
극점은 초월자와 합을 이룰 수 있다.
보헤미른 마탑과의 전면전에서 아드리안 일행이, 1세기 전의 초월자인 산디르 파엔과 격전을 벌였듯이 말이다.
‘무엇보다 반젤리스의 실제 경지는 파악이 되지 않았으니.’
정보가 부족하다.
게다가 발목이 잡히는 순간 마도국에서 증원까지 올 것이다. 지고한 센트럼. 이곳은 아케나드 마도국의 심장부다.
베르덴과 아드리안이라고 하더라도 정면 대결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면 즉시 도주한다.’
베르덴은 센트럼의 선착장 위치를 염두에 두며 시선을 약간 높였다. 손을 내밀고 있는 반젤리스의 호기로운 얼굴이 보였다.
“혹시 부담스러운 제안이었나?”
“아니.”
베르덴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원하는 바다.”
“하하하!”
반젤리스는 기쁨을 숨길 생각조차 없었는지 활짝 웃었다. 악수한 팔을 크게 흔들고는, 메드레일을 향해 빠르게 손짓했다.
“서둘러 스태프 좀 가져오거라. 아참, 베르덴. 보다시피 센트럼의 연무장은 어지간해서는 손상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 둘의 전력을 온전히 버틸 정도는 아니다. 교류의 취지가 흐려지지 않도록 서로 제한을 두고 싶은데.”
“그래, 어디까지나 대련이니까.”
“역시 시원시원하군.”
반젤리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쿠웅!
연무장 천장이 열리며 두 개의 거대 모래시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각자가 소모한 마력량을 측정하는 기구다. 매직 아이템이라기보단 인공 아티팩트에 가까운데, 마력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훈련에 사용하면 아주 효과적인 물건이지. 규칙은 아주 간단하다. 푸른 모래가 먼저 떨어지는 사람이 패배다.”
마력량에 제한을 둔다면 파괴력이 강력한 마법을 시전하기 어렵다. 양측이 힘을 조절하는 데는 최적의 도구였다.
“조부님.”
“그래, 잘 가져왔다.”
반젤리스는 쌍둥이처럼 닮은 스태프 중 하나를 베르덴에게 건넸다.
“같은 무기를 쥐어야 공평한 대련이지.”
후웅.
베르덴이 단단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마법적 효과도 없는 스태프를 휘둘렀다. 대련용 무기치고는 무게중심이 나쁘지 않았다.
“손에 익을 시간이 필요한가?”
“이 정도면 됐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 외부인은 가장자리까지 물러나 있도록.”
엘레마르의 13명은 이미 멀찍이 물러나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과묵했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기대감에 찬 눈을 빛내고 있었다.
메드레일은 그들과는 조금 성격이 다른 기대감을 품고 있었지만.
마법사로서 순수하달까…….
베르덴은 구경꾼을 물릴까 고민했지만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만에 하나라도 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니 차라리 보이는 곳에 두는 편이 변수를 줄일 수 있었으므로.
“…….”
반젤리스와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 베르덴이 시선으로 말했다. 그 뜻을 이해하며, 아드리안 일행이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베르덴 폐하. 승리.]
[무운을 빕니다.]
알파와 베타가 응원한다.
연무장의 끝과 끝에 선 두 초월자가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었는데, 그런데도 흔쾌히 대련을 받아 줘서 고맙군.”
“뭐, 받은 건 받은 거니까.”
진실과 거짓은 둘째 치고 대련을 거절하는 것도 방법은 방법이었지만…… 다른 걸 떠나서 아케나드 마도국이 선뜻 보여 준 옅은 녹색빛의 화염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베르덴조차 어떻게 모방해야 할지 몰랐던 초대 마도왕의 원소 속성에, 오랜 연구를 통해 조금이라도 가까워진 것이니.
그 광경은 베르덴에게 영감을 주었다.
원소 속성에 대해서.
반젤리스가 물었다.
“그나저나…… 네 힘을 억제하는 봉인은 언제 풀 거지?”
“걱정하지 마라.”
베르덴이 이전보다 편안하게 겁화를 해제하며 앞발을 디뎠다.
막강한 존재감이 연무장 내부를 가득 채웠다.
“제한이 있더라도, 대충 할 생각은 없으니까.”
베르덴이 마력회로를 활성화하면서 정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성녀와 수왕의 다툼에 끼어들었던 그 신체 능력이었다.
쿵!
반젤리스가 양손으로 붙잡은 스태프를 절도 있게 낮추며 자세를 잡았다.
“갈수록 마음에 드는군.”
피가 끓어오른다.
여러 의미로.
* * *
고위계급 마법을 구사하지 않아도 베르덴의 힘은 막강하다. 아드리안이 평가하길 순수한 박투만으로도 초월자의 반열.
마법계 초월자와의 마력 제한 대련에선 베르덴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반젤리스가 움직였다.
<비행>
<비행>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낮게 떠오르며 스태프를 휘둘렀다.
청량한 금속음이 고막을 울렸다.
“흠.”
반젤리스가 진심으로 감탄하며 베르덴의 한 수를 흘려 보냈다. 순수한 근력 차이를 확인하고 힘 대결에 굳이 응하지 않은 것이다.
베르덴이 회전을 거듭했다.
쉴 새 없이 허공을 가르는 살벌한 바람 소리가 연이어 메아리쳤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그 연격을 흘려 내던 반젤리스가 마력을 전개했다.
쾅, 쩌저적!
마력의 벽에 금이 갔다.
그 위로 중력 마법을 더하자 곧 보호막이 산산이 부서졌다. 청금색 눈동자 바로 앞에 스태프의 머리가 드리웠다.
<전이>
일격이 빗나갔다.
콰아앙!
공간을 이동한 반젤리스가 사각에서 화염 광선을 사출했다. 베르덴이 팔을 휘둘렀다. 광선이 휘어져 연무장의 벽에 그을음을 남겼다.
“워 메이지의 마력 제어. 능숙하군. 아르나크 제국에서 배운 건가?”
“굳이 배울 것도 없지.”
베르덴이 스태프를 겨누고 똑같이 화염 광선을 내뿜었다.
반젤리스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글거리는 불줄기가 튕겨져 나가듯이 궤적이 비틀렸다. 명백히 베르덴이 구사하는 마력 제어를 앞서는 수준이었다.
“하기야 마력 조작에 능한 자에게, 이런 기술쯤은 몇 번 보기만 해도 충분히 습득할 수 있는 수준이기는 하지. 너와 나처럼.”
반젤리스가 살아온 세월은 이미 100년을 넘은 지 오래다. 초월자로서의 삶이, 베르덴의 나이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하물며 당대의 마도왕.
반젤리스는 마력과 마법 운용에 있어서 자신이 초월자 중 최고라고 믿는다.
빛이 번쩍였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베르덴과 반젤리스는 모든 원소 속성에 적합성을 갖고 있다. 단독으로 행하는 원소 폭격은 두 사람의 장기이자 특기였다.
마력 제한이 있음에도 둘은 서로를 향해 마법을 퍼부었다.
연무장이 원소의 색채로 물든다.
천장에 고정된 모래시계 속 푸른 모래가 빠르게 떨어진다. 직후 베르덴이 연속해서 공간을 뛰어넘곤 수평을 후려쳤다.
“……!”
스태프가, 반젤리스가 내민 손바닥 바로 앞에서 정지했다. 기류가 술렁인다고 느낀 순간 베르덴의 시야가 뒤집혔다.
‘역시 마도왕의 후예라는 건가.’
허공에서 무게중심을 되찾은 그가 미끄러지듯이 물러나 자세를 잡았다.
반젤리스가 말했다.
“시조께서는 원소 마법만이 아니라 근접전에서도 절대적인 능력을 자랑하셨다. 이 사실이 전혀 퍼지지 않은 것은, 시조께 접근조차 할 수 있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지. 놀랐나?”
그건 베르덴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반젤리스가 직전에 구사한 전투 기술의 원형은, 골렘 연구 시설에서 관리자와 맞붙으며 충분히 보고 느꼈으니까.
“그러고 보니 방대한 마력량, 압도적인 마력 조작 능력, 통상적인 마법사의 상식에 어긋나는 근접 전투 능력, 다양한 원소 마법.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는 공통점이 참 많은 것 같군.”
베르덴이 시치미를 뗐다.
“무슨 의미지?”
“하하하, 나도 아직 모른다. 마음속 깊이 기대만 품고 있을 뿐이지.”
반젤리스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부디, 우연이 아니길.”
기세가 일변했다.
반젤리스가 직선으로 확 뻗은 스태프가 정확히 베르덴을 가리켰다. 그의 청금색 눈동자에 분명한 의지가 깃들었다.
“길은 역사이며, 역사는 곧 증명. 누군가가 내게 묻거든, 나는 걸어온 길로 답하리라.”
마력이 치솟기 시작했다.
초월, 그 이상으로.
“마도(魔道)를 개방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