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4화 강자란
성갑, 아르미넬(Arminel).
성창, 그란테르(Gran-ter).
두 개의 신물로 무장한 성녀 에르세티아가 몸을 틀었다. 창날과 갑각에 둘러싸인 팔뚝이 맞부딪쳤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수인 대부족 출신은 아니야.’
수인의 세부 종족은 한둘이 아니나, 이런 특징의 수인족에 대해 들은 적은 없을뿐더러 일신의 무력도 차원이 다르다.
당대의 수왕 안티아스처럼 별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포식자를 안티아스가 방치할 리 없다. 수인은 무력에 의한 위계질서를 인간보다 중시하니까.
우두머리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수인은 부족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
역으로 생각하면 이 모든 게 안티아스가 꾸민 짓일지도 모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걸 떠나, 안티아스가 대부족의 통치자로서 이 와중에 인류와의 전쟁을 선뜻 선포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쩌어엉!
사방의 구름이 밀려났다.
놈의 손상된 갑각은 재생력을 가졌는지 한순간에 수복됐다. 몇 시간에 걸친 교전에도 둘에게는 이렇다 할 상처가 없었다.
중상을 입혀도 금세 멀쩡해지는 것은 성녀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것이 신앙계 초월자란 존재…… 확실히 기대 이상이긴 하군. 그런데 이 대륙에 너와 같은 초월자가 얼마나 더 있는 거지?”
“그게 왜 궁금한 겁니까.”
“그야 그렇지 않은가.”
바르카젤이 말했다.
“드래곤은 애초에 제멋대로인 데다가 원초적인 본능을 중시하기에, 후천적으로 갖게 되는 야망 같은 걸 품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종은 다르지. 그중에서도 인간과 수인은 그런 부류의 욕망이 크다. 힘이 있으면 야심차게 휘두르는 것이 본성이다.”
“…….”
“이 시대에서 너희 인간의 초월자는 종족의 틀을 벗어난 존재라고 들었다만, 여전히 야욕을 갖고 있는 건 매한가지지. 이상이라고 하던가? 그러니 나로서는 이런 의문이 들 수밖에.”
바르카젤이 과장스럽게 옆으로 팔을 들어 세계를 가리켰다.
“왜 세상은 진즉 멸망하지 않았을까.”
강자가 많으면 갈등은 필연이다.
평소에는 얌전한 짐승도 영역을 침범당하면 미쳐 날뛴다. 평화? 화합? 그딴 건 없다. 세상에는 전쟁과 휴전뿐이다.
당장은 손을 맞잡고 웃을지언정 언젠가는 파탄이 나게 되어 있다. 평온이란 다음 전쟁을 위한 발단이자 포석에 불과하다.
“본래 신성 모독자의 의문에 대답해 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인간적으로 안타까워 당신에겐 기본적인 상식 하나를 알려 드리죠.”
에르세티아가 성창으로 바르카젤을 가리켰다.
“세상은 그걸 ‘균형’이라고 부릅니다.”
“균형이라.”
바르카젤이 이빨을 드러냈다.
“그보다 위태로운 것도 없을 텐데───!”
바르카젤은 넘쳐 흐르는 야성을 더욱 풀어헤치며 강하했다. 생긴 것만큼이나 끔찍하고, 포악한 기세가 신성력을 위축시켰다.
그 순간.
에르세티아가 절도 있게 창끝을 내리며 자세를 잡았다.
“루아스시여.”
쿠오오오…….
성스러운 광영이 난반사하며 새벽을 한낮으로 바꾸었다. 마치 빛으로 이루어진 소용돌이가 그녀를 휘감은 모습이었다.
‘이대로 가면 몇 날 며칠을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겠지. 수인이 감추고 있을 저력을 고려하면 성창의 해방만으로는 단번에 승패를 가리기 어렵다.’
현재의 에르세티아와 바르카젤의 전투는 누가 더 우위라고 할 수 없었다.
개개인의 능력치는 달라도 비등했다.
에르세티아도 이만한 강자를 진심으로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게 지금까지 평화로운 시대였으니까.
루아스교의 성녀로서 초월적인 존재를 죽여야 될 일 자체가 없었다.
‘……베르덴.’
세계 회의에서 당당하게 초월적 존재를 다섯이나 죽였다는 진실을 스스로 밝힌 인물의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분명 같은 시대의 인물인데 도대체 무슨 인생을 살아가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남자지만 적어도 미지에 기꺼이 발을 디딜 정도의 각오는 항상 갖추고 있을 것이다.
‘내 각오가 그보다 못할 리 없어.’
신성력의 밀도가 극으로 치달으며 성창과 성갑을 자극했다. 이 두 신기의 진정한 권능을 동시에 깨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럴 만한 상대가 없었을뿐더러…… 그녀처럼 두 개의 신물의 선택을 받은 신인 또한 이제까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하지만 의심은 없다.
“부디 허락하소서.”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신의 사랑과 자애를 느꼈다.
“위대한, 빛의 신격을.”
<신기 해방>
성창과 성갑에서 터져 나온 빛무리가 주변 모든 이의 시야를 빼앗았다. 신성한 기둥이 하늘과 대지를 하나로 연결했다.
바르카젤은 그대로 직감에 의존하여 손톱을 세워 내질렀다.
참극.
갑옷 사이에 감춰진 목덜미를 잡아서 뜯어내려던 손아귀가 무언가에 붙잡혔다. 그가 흠칫할 만큼 강한 힘이 갑각을 으깼다.
빛이 가라앉았다.
바르카젤의 눈동자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
창대에 강타당한 바르카젤이 뒤로 나가떨어지다 날개로 균형을 잡았다. 그런데도 그의 시야는 여전히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깨가 내리찍혔다.
추락했다.
쿠우우우웅!
바르카젤이 가까스로 몸을 회전해 팔과 다리로 충격을 견뎌 냈다. 그를 중심으로 땅 일대가 밑으로 꺼졌다.
울컥.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바르카젤의 입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충격이 온몸을 헤집었다.
“크하하핫……! 신물이라 불리는 기묘한 무구의 힘. 이게 너의 저력인가.”
바르카젤이 고개를 들자, 빛으로 형성된 네 장의 날개를 등에 단 에르세티아가 투창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약속’을 떠나서, 앞으로의 세상이 어찌 될지 궁금하군. 겨우 다시 얻은 ‘운명’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을 만큼.”
그가 자신의 머리를 콱 붙잡았다.
“이 시대의 주인은 누가 될까.”
생명의 야성.
쿠드드득.
강인한 손톱들이 얼굴 갑각을 부수고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머리뼈를 넘어간 압력이 위험하게 뇌를 자극했다.
본능이 포효한다.
죽음의 위기를 자처하면서, 그의 몸에서 혈류가 가속했다. 상처 입은 짐승은 야성이 극대화되어 훨씬 더 흉포해졌다.
<여명의 창>
섬광과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쏘아진 성창…… 바르카젤이 압도적인 반사 신경으로 허리를 비틀며 잡아챘다.
“이 빛의 근원이 무엇인지 보고 싶군.”
“당신은 불가능합니다.”
어느새 성녀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수인이니까.”
루아스교는 여신의 빛을 신앙하며 오직 인류를 위한 종교다. 영혼이 없는 수인은 어떤 삶을 살아가든 루아스의 곁으로 갈 수 없다.
광신자.
에르세티아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제외한 종족을 인간보다 못한 하등한 비인간으로 규정하는, 지독한 인간 중심주의자다.
“과거에는 인간을 차별했는데, 이제는 인간이 차별하는가.”
땅이 갈라졌다.
“이야말로 광기의 시대구나.”
성창이 신성한 빛으로 변해 에르세티아의 손으로 돌아오고, 바르카젤이 함성을 지르며 여력(膂力)의 제약을 해제했다.
손날을 세워 휘둘렀다.
쩍.
산맥이 갈라졌다.
옛날 지상 최악의 난쟁이와 죽고 죽이다가 놈의 역작과 몸을 반토막 낸 힘이었다.
생명을 야성으로 치환하는 능력.
서로 대립한 인간 제국의 황제 두 명을 참살하고 무려 수십만 명의 병사로 중앙 대륙을 빨갛게 물들인 대학살의 수인이 도래했다.
에르세티아가 뒤로 무게중심을 이동해 허리를 젖혀 피했다.
아무리 치유의 기적이 있어도 정통으로 맞으면 위험하다고 직감했다.
그것은 바르카젤도 피차 마찬가지였다.
쿠우우우우웅!
최고위 기적이 실린 성창이 미처 휘둘리기 전에 번번이 가로막힌다. 직후 빛의 날개와 수인의 날개가 부딪힌다.
살의에 집중한 그들은 물러서지 않고 접전을 이루었다.
하늘과 땅.
전장은 이 세상이었다.
반경 수 킬로미터가 붕괴했다.
척살.
바르카젤이 공세를 퍼부어 성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성갑이 막아 내지 못한 충격에 그녀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윽고 짧게 도약한 바르카젤이 전력으로 발을 내질렀다.
천공 추락.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도시 골드힐을 파괴한 것보다 더한 힘이 성녀를 집어삼켰다. 대지가 파도처럼 출렁였다. 산산조각 난 절벽이 성녀가 날아간 곳을 덮었다.
그 옛날보다도 농밀한 전투 희열에 바르카젤이 광소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이렇게 압도당하는 경험은.
하늘에서 쇄도한 빛의 사슬들을 모조리 베어 버린 찰나, 잔해에서 빠져나온 에르세티아가 육박해 그 텅 빈 복부를 팔꿈치로 찍어 버렸다.
바르카젤의 폐가 들썩였다.
“큽……!”
쩌엉!
이어진 권격에 턱이 들렸다.
바르카젤의 이빨 사이에서 새어 나온 피거품이 흩날렸다. 코앞에서 성창이 날아왔다. 즉각 고개를 튼 바르카젤이 움찔 떨었다.
‘거리가.’
루아스 교국의 모든 신인은 신앙과 교리 외에도 모든 방면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다. 무기술만이 아니라 격투술까지.
정의의 그레고르반 추기경의 무투술을 모조리 터득한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든 거리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무투계는 근거리에, 마법계는 원거리에 강하다.
신앙계는 그 두 장점을 모두 아우를 수도 있다.
<성광: 고해>
수백 개의 빛살이 닿은 직후 바르카젤의 갑각이 갈라졌다. 금이 간 갑각 사이에서 뒤늦게 피가 뿜어져 나왔다.
<성광: 참회>
신성력에 의해 육체가 고정된 바르카젤에게 빛의 권격이 세 번 가해졌다. 옆구리, 머리, 가슴. 뼈에도 금이 갔다.
그는 장기까지도 파열되는 감각을 느끼며 힘으로 구속을 풀고…… 웃었다.
“크하하하하하핫.”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죄의 대가를 치를 기회를.”
에르세티아가, 바르카젤의 명치에 닿은 손바닥을 90도로 틀었다.
신성력이 명멸했다.
<성광: 속죄>
신성 광선이 수인의 몸을 관통했다. 실제로 뚫은 것은 아니지만, 그 기적의 권능은 내부까지 충분히 적시고도 남았다.
바르카젤은 쓰러지지 않고 앞다리에 힘을 싣고 팔을 휘둘렀다.
성창에 가로막혔다.
에르세티아의 뒤에 있던 자연은 붕괴되었지만, 정작 그녀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무정하게 그를 응시했다.
상처투성이가 된 바르카젤.
입가에서 흘러내린 한 줄기 피와 왼쪽 눈의 피눈물이 전부인 성녀.
“헤아릴 수 없는 저항력…… 그 성갑이라는 거. 무척 성가시군.”
“당신도 그렇습니다.”
콱.
에르세티아가 재생하고 있는 어두운 갑각 틈새를 손끝으로 파고들었다.
갑각을 뜯고, 붉은 생살을 쥐어짰다.
“……!!……!!!”
“이 팔부터 찢어발기도록 하죠.”
바르카젤은 신경이 난자당하는 고통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포식자의 눈이 에르세티아의 몸 상태를 주시했다.
‘성녀도 많은 힘을 소모했다.’
여러모로 현 상태에 익숙지 않은 게 보인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면 이미 자신의 오른팔을 뜯어 버리고도 남았을 터.
‘지금이다.’
지금이야말로 다시 없을 기회다.
촤아아악!
바르카젤이 날개를 펄럭이며 힘껏 천공을 향해 도약했다. 에르세티아의 손가락에 걸려 있던 근육이 찢어졌다.
“최강의 성녀라는 건 인정하마! 그러니 특별히 내가 세상의 진리를 알려 주겠다. 강한 존재가 언제나 강한 게 아니다!”
허공을 몇 번이고 박찬 그가 하늘의 끝에서 잠시 멈춰 섰다.
“비로소 살아남는 것이 강함이지.”
천공 대학살.
바르카젤이 스스로 유성이 되어서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급강하했다.
대기 마찰의 열기가 날개를 손상시키고, 갑각 안으로 스며 들어가 살을 태웠지만 그럴수록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생명의 야성으로 신체의 여력을 해방한 최악의 일격이다.
회피는 무의미하다.
도망치기 전에 죽을 테니까.
‘지면에 충돌하면 세르파니아 추기경이 있는 곳까지 닿는다.’
에르세티아가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성창을 크게 당겼다. 이미 준비는 끝났다.
그녀의 신앙심은 최고조에 이르렀으니.
“루아스시여.”
반응하는 성창과 성갑.
“인류의 적에게 마땅한 단죄를.”
마침내 그녀가 신의 기적을 발현했다.
<여신의 심판>
한 점의 빛이 돼 버린 성창이 정확히 바르카젤의 궤도로 쇄도했다. 둘 다 오차는 없었다. 어느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윽고…… 서로의 중심에서 교차했다.
────────────!
빛이 격하게 터져 나오면서 중앙 대륙 일부를 물들였다. 빛의 따스함이 피부에 닿아 추위를 거두었다. 여신의 창은 신앙의 적을 무자비하게 멸하며, 인간을 조심스럽게 보듬는다.
밤이 사라졌다.
땅에 빛이 깊게 스며들어 낮이 되어 버린 세상이 현현했다. 신앙계의 초위 마법이자 초월기를 사용한 에르세티아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쿠웅!
바르카젤의 잘린 오른팔이 떨어져 더러운 바닥을 굴렀다.
피가 뿜어져 나와 웅덩이를 이루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감히……!”
성창을 회수한 성녀가 즉시 몇 번의 도약을 거쳐 하늘 높이 떠올랐다.
시선의 끝에서 비틀거리며 멀어지는 바르카젤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