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0화 사후(事後) (1)
이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장막이 섬을 둘러 안팎의 출입을 차단했고.
지금은 그 장막은 감쪽같이 사라졌으나 그 대신 미지의 섬에 불가해한 천재지변에 발생했다.
‘상황을 못 따라가겠어……!’
제국 함대를 지키느라 지상에 남아 있었던 메리사 페스필드가 몇 시간 동안 이어진 흐름을 돌이켜 보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심장이, 마력회로가 떨린다.
지휘에 전념하는 레그리트와 프리발트의 얼굴도 사색에 가까웠다.
레그리트는 왜 중상을 입었는지, 초월자들이 왜 다 상태가 엉망인지, 그 괴물 같았던 신성은 어째서 천검에게 업혀 온 것인지…… 도대체 지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었다.
물론, 당장은 후퇴가 먼저였다.
“서둘러 퇴각 준비를 갖춰라!”
아케나드 마도국의 탐사단장이 목소리를 키워 신호를 보냈다. 그런 와중에 아까처럼 바위를 비롯한 거대한 낙하물이 날아올 것을 우려하여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각국의 마법사가 일대를 보호하는 한편 비행정의 동력들이 활성화되었다.
“인드레 님……! 시, 시급한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저희 장로께서 보이지 않으십니다. 혹시 행방을 알고 계십니까?”
“저희도 부디……!”
인드렌은 여러 탐사대를 구출했으나, 애석하게도 그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직도 지하에서 돌아오지 않은 자들이 있다.
희생자들.
베르덴이 말했듯이 지하 미궁에 살아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인드렌에게 실종자에 관해서 묻는 이들도 짐작하고 있으리라.
‘혼잡한 상황이었다. 거대한 미라 기사에게 당한 탐사대도 있을지 모르나, 역시나 가장 큰 원인은 그게 아닐 터…….’
인드렌은 시선을 옮기지 않고 델하룬 진영 쪽을 의식했다.
미궁에서 조우한 마울러, 가레스 시릴리아드는 인드렌의 추궁에 거슬리는 탐사대원을 살해했다고 시인한 바 있다. 이곳에 없는 젠티르 마탑의 장로도 그중 하나겠지.
주검의 영광 때문에 흐지부지됐지만 인드렌과 가레스는 해당 사안을 이유로 마찰이 생겨 전투까지 벌였다.
가레스는 머지않은 시기에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날이 올 것이다. 인드렌이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지하 미궁엔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네. 유감이네.”
“아…….”
“일단 자네들의 목숨부터 챙기게.”
쿠구구구구구……!
천막을 정리하거나 물자를 회수할 여유도 없이 모두가 철수에 전념했다.
묘왕이 미친 듯이 닦달하여 이데라트 연맹국의 비행정이 먼저 떠올랐다. 하늘과 바다를 잇는 다수의 소용돌이가 만든 기류에 기체가 흔들렸다.
번쩍!
절망의 번개가 드리웠다.
선착장에.
마법사들의 장막을 삽시산에 파훼해 버린 현뢰가 절벽을 강타했다. 희미한 잔류 번개가 정확히 비행정 내부에 침투했다.
“이런……!”
“동력, 동력의 마력 완전 소실!”
“아, 안 돼!
론트넬 부관장이 비명을 질렀다.
마법 자주 연대의 비행정이 떠오르지도 못하고 비상 착륙했다.
모두가 <비행>으로 섬에서 탈출하기는 어렵다.
멸망해 가는 섬의 환경이 ‘마력’을 불규칙적으로 끊기 시작했다. 공간도 불안정하다. 잠시라도 장막이 사라진 사이에 저 난폭한 기류에 휘말린다면 바다로 빨려 들어갈 터.
비행정의 강하고 안정적인 동력이 가장 안전한 탈출 수단이었다.
그때. 레온하르트가 소리쳤다.
“교국의 비행정으로! 어서요!!”
루아스 교국의 비행정은 성물을 동력으로 삼아서 그런지 잔류 번개가 약간 노출되었지만 동력을 잃지 않았다.
성직자들이 다른 세력의 사람들을 태웠다. 마법 자주 연대는 비행정의 가치에 순간 망설이다가 이내 등을 돌려야만 했다.
낙뢰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진다.
시간이 없다.
파멸의 번개가 이번에는 템플의 비행정을 향해서 정확히 쇄도했다.
“제가 베겠습니다.”
“안 됩니다.”
대제자의 검을 뺏어 든 벤디에가 급속도로 상승해 검의를 발현했다. 콰과과광! 어떻게든 현뢰를 막아 낸 그녀가 갑판에 착지했다.
“스승님?”
“절대로 저 번개에 맞서지 마세요.”
난간을 잡아 육체를 지탱한 그녀의 팔에 어두운 균열이 생겼다.
“어서 섬을 떠나도록 하죠.”
그렇게 혼돈 속에서 수십 척의 비행정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근처에 현뢰가 떨어지고, 소용돌이의 바람이 대기를 찢었다.
선상에 선 모든 사람이 점차 멀어지는 섬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압박감에 정신이 마모됐다.
에온의 비행정은 최후미에 자리했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실 뿐 다행히 주군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한데 이 말도 안 되는 체온은 뭐지? 8위계의 과정이 이런 건가?’
아드리안은 자신의 상처를 돌보지 않고 베르덴의 안위만을 신경 썼다. 혹여 무슨 돌발 상황이 벌어질까 싶어 그레이브와 알더니스도 물렸다.
간헐적으로 신음을 내뱉으며 <인테리스>와 함께 누워있던 베르덴.
그가 갑자기 아드리안이 손목을 붙잡았다.
“아드리안…… 잠시, 부축을…….”
“아. 예, 주군.”
아드리안의 도움을 받아 베르덴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베르덴은 갑판으로 나와 에온의 일원들을 가로지르곤 섬을 바라보았다.
찌잉───
이명이 끊이질 않는다.
수많은 목소리가 베르덴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정확히 분간할 수는 없었으나 그 의미는 일종의 ‘기도’나 ‘숭배’에 한없이 가까운 것 같았다.
‘뭐가, 뭔지…… 당최 알 수 없다.’
베르덴은 이성(理性)이 마비된 탓에 깊이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현상을 분석할 여력조차 하나도 없었다.
파괴의 충동과 감정만이 빈자리를 대체해 그의 사고를 이끌었다.
‘하지만…….’
베르덴이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천천히 구부러진다.
두 개의 마도가 개방되었다.
스쳐 지나가듯이 칠흑의 [아인베르]가 ‘잿빛’으로 물들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의, 존재의 격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8위계로의 상승만이 아니다.
다른 변화가 또 있다.
두근.
베르덴은 다시 광폭한 본능에 사로잡혀 주먹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미지의 섬 전체를 뒤덮고 있던 검붉은 균열이 발광했다.
한순간이었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
거대한 섬 자체가 파멸의 광채에 휩싸여 무수한 파편으로 갈라지고, 하늘에서 떨어진 멸절의 우레가 섬 전역을 파괴했다.
후폭풍에 바다가 밀려나며 소용돌이가 일제히 소멸하였다.
마치 ‘신’이 종말을 선언한 것처럼.
용검 마그라스가 잠들었다고 알려진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이 멸망했다. 고막이 멀어 버릴 듯한 혼란, 그 안에서 정적이 감돌았다.
“아드리안.”
목소리에 힘이 풀렸다.
“내 부재는, 맡기겠다.”
“예, 주군.”
아드리안은 즉답했다.
“에온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베르덴은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떨구며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 * *
아주 멀리서 검붉은 빛이 광휘를 내뿜었다.
옛 왕이 부활하고, 옛 왕의 근거지가 돼야 했을 섬이 붕괴했다. 붕괴하는 걸 넘어서 섬의 존재 자체가 멸절하고 말았다.
파도에 흔들리는 나룻배.
“…….”
섬을 탈출한 단텔은 피를 뚝뚝 흘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드리안의 검에 절단된 단검의 날이 눈에 들어왔다.
‘사도의 부활은 성공했다. 하지만 이건 상부에서 원하는 상황이 아닐 텐데.’
바로 오늘을 기점으로 옛 왕이 군림을 시작해야 했으나, 결국 드라벤을 궁지로 몰아넣은 베르덴 탓에 옛 왕이 금기의 대가를 대신 치러 세계수에게 봉인의 형벌을 받고 말았다.
그 전에 옛 왕이 직접 초월자의 수를 줄여 주기를 바랐지만, 또 베르덴이 옛 왕의 주의를 끌어 초월자 중 사망자는 없었다.
베르덴. 베르덴. 베르덴.
과연 단텔과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그래도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운명전의 휴전을 끝낼 과정에 돌입했다.
옛 왕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겠지만 그 권능은 이미 대륙에 닿았다. 물론 운명이 없으니 앞으로 또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다.
계획대로 될지.
계획이 완전히 틀어질지.
하여튼 간에 상부는 이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고,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 있어 단텔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옛 왕의 부활을 제외하고 가레스와 인드렌, 둘 중 하나조차 죽이지 못했으니.
“……나쁘진 않나.”
단텔은 자조하다가 힘없이 정신을 놓았다.
부상이 심각했다.
왼쪽 승모근에서 그 아래의 윗가슴까지 절단한 초월기가, 단텔의 항상성을 거의 단절하기 직전까지 몰아넣었기에.
잔잔히 피가 고인다.
초라한 나룻배가 파도에 실려 떠내려간다.
* * *
레프라기움 마탑의 대행자, 메이아가 멸망하는 섬을 주시했다.
“저희가 생각했던 방향은 아니지만 옛 왕이 당장 전쟁을 시작하는 건 막았네요. 이제 흐름은 저희에게 넘어왔군요.”
“주류(主流)에 비하면 작은 줄기지.”
섭리자, 데우스 위덴이 팔에 난 절상을 손끝으로 쓸어 검흔을 지웠다.
용검 마그라스와의 충돌에서 입은 상처였다.
“운명의 추종자들은 특정했나.”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요…… 베르덴 덕분이죠. 그들이 무리하게 움직이게 된 건 순전히 베르덴의 활약 덕분이니까요.”
메이아가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베르덴의 경지는 어디까지 상승할까요.”
“모른다. ‘당신’만이 아니라 태초의 마법사께서도 그와 같은 과정을 겪진 않으셨으니.”
‘당신’, 태초의 마법사, 베르덴.
결과적으로 같은 절차를 밟았고, 또 밟고 있으나 순서에서 차이가 있다. 경지가 완성된다는 전제하에 높이는 같을지언정 서로 다른 탑을 쌓는 것이다.
8위계에 오른 베르덴의 탑이 어떨지는 가 봐야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힘을 가졌든 적어도 옛 왕의 군세에 대적할 수준은 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 정도도 하지 못하면 곤란하다.
태초의 마법사께선 베르덴에게 남다른 기대감을 품고 계신다.
“옛 왕이 필요한 만큼 날뛰고 난 뒤에 베르덴이 처단하는 편이 유리하나, 만약 불가능하다면 본래의 계획대로 옛 왕을 처리하면 그뿐.”
데우스의 손안에 평범한 듯 보이면서도 어딘가 고풍스러운 창이 현현했다.
4대 전설: 서로를 죽이는 창 – 루기나 혼 (Lugina Horn).
최후의 저항자는 오직 옛 왕만이 아니라 운명의 사도들을 상대한 수단을 마련했다. 일곱 번째 사도가 돼야 했었을 사막의 신의 신앙을 몰락시키려 했던 키론다르처럼 말이다.
이 루기나 혼을 던질 존재는 데우스도, 메이아도 아니었다.
“‘씨앗’들에게 이번에 확인한 운명의 추종자들의 내력을 전달하도록.”
“그들이 준동한다 싶으면 자연스럽게 처리하라고 일러두죠.”
메아아가 물었다.
“옛 왕의 군세의 위치도 확인할까요?”
“거기까지 손을 대게 되면 이번에는 우리가 선을 넘게 되겠지.”
데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옛 왕의 군세는 대륙의 문제다.”
저항자의 상대는 어디까지나 운명.
그 외는 대륙의 지배자들이 감당하리라.
* * *
옛 왕은 신체 일부를 매개체로 삼아서 신체의 주인을 부활시킬 수 있다.
손가락이라든가, 발가락이라든가.
어느 정도의 크기만 갖춘다면 얼마든지 부활의 주춧돌로 쓰일 수 있다. 그자가 수백 년 전의 존재라고 할지라도.
쿠웅.
허름한 집 안에서 관이 열렸다.
“내가 먼저 깨어났나.”
이처럼 옛 왕의 부활에는 여러 제약이 따르지만 루네시카 안테르노아가 그러했듯 초월자조차 되살릴 수 있다.
옛 왕의 새로운 군세는 그 힘에서 기인한다.
주검의 영광은 루아스교의 추적을 피하며 여러 강자와 암암리에 조우했다. 초월자 전쟁에서 적으로 만났던 사내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계약을 맺었다.
계약 내용은 저마다 다르지만 주검의 영광에서 베풀 수 있는 것은 부활뿐이었으니. 그것은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얻은 것과 같았다.
그렇다.
인간을 넘어선 수명조차도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이상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초월자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끼이이익…….
낡은 경첩이 소리를 지른다. 문밖에서 화창한 햇빛이 쏟아졌다.
아니무스에 있을 때와는 다르다.
드라벤의 영혼에 깃들었을 때와도 다르다.
신선하고, 생생하다.
마침내 고대에서 현대에 부활한 초월자가 나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 가슴이 두근거리는군.”
맑은 하늘에 천둥소리가 퍼져 나갔다.
“베르덴, 과연 네가 내 이상이 될 수 있을까.”
8위계 초월자, 반토레온 로든 타라니스.
과거 초월자 전쟁에서 옛 왕을 상대했던 광명의 대재해가 부활했다.
자신의 고유 마법인 대광역의 원리를 이해한 걸 넘어 응용하기까지 한 베르덴에게 아주 강한 흥미를 품은 채로.
뒤이어 건물에서 다른 초월자들의 관도 하나둘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