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4화 신격 – 8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기(氣)라는 고유의 힘을 인지한 아서 타렌폴드는 명실상부한 인류의 왕이자 인간의 정점이었다.
전쟁을 주도하면 오직 승리뿐.
다수의 영웅을 잡아먹은 악명 높은 드래곤까지 보란 듯이 베었으니 그의 주변에 사람이 모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가련한 인간을 위해 기를 운용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가장 나약했던 종족은 점차 힘을 갖추었다.
이제 수인이 야성을 뻗치면 반격을 했고.
이제 괴물이 가득한 영토를 개척해 엘프와 영역 다툼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이제 드워프의 이기심에 더는 휘둘리지 않아도 되었다.
오, 황금기여!
아서의 존재 자체가 전 인류에게 저력이 있음을 증명한다. 기술(기예)을 완성하기 전에도 그러했으니, 전성기를 구가했을 때는 오죽했을까.
아서는 스스로 대륙 최강자를 감히 논할 자격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유유자적 세상을 떠도는 태초의 마법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천지를 뒤집는 마법의 파괴력.
거리를 좁혔음에도 검은 닿지 않는다.
난생처음으로 패배를, 그것도 압도적인 패배를 맞이한 아서는 그의 사전에 없었던 굴복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몇 번을 맞붙어도 승리한다는 그림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아서로 하여금 진심으로 우러러보게 한 자, 그 사내의 이름은 올다르크였다.
이윽고 운명전이 발발하여 기꺼이 저항자의 편에 섰을 때…… 올다르크와 맞대결을 펼치는 ‘당신’이란 신을 보게 되었다.
공포, 그 전율.
기억한다.
아서는 아무리 강해진다고 한들 두 존재에게는 닿지 못한다고 단정했다. 그것들은 비상식의 범주도 한참 뛰어넘는 괴물들이었다.
세상은 어째서 저들을 낳았는가?
왜 둘이나 낳았는가?
불합리의 극치인 올다르크와 ‘당신’─────두 절대자(絕對者)가 존재하는 한 세계는 양분될 수밖에 없을 텐데.
둘 중 하나가 죽지 않으면 위태로운 균형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먼 미래에서도 그렇게 강대한 존재가 또 나타날 리 없으니까 말이다.
‘……나타날 리 없을진대.’
영혼이 일부 변형된다.
세계의 틈새로 넘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영혼을 이해했단 말인가. 신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신성력에 임의로 의지를 반영한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희생이 필요하다면 아무도 희생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 자신이 더 희생하겠다고? 거북해서 부아가 치밀 지경이다.
망상도 정도껏이다!
일광一匡
초대형 거검이 일순 사선을 베어 가르며 베르덴에게 육박했다. 베르덴이 하드라스의 어깨를 잡아당기고는 앞으로 나갔다.
<로드 아케인: 천멸(扦滅)>
손날에 파멸과 소멸의 개념이 깃들었다.
기예와 마도가 대립했다.
근본적으로 기와 마력이 접전을 벌이며 충격파를 일으켰다. 검이 척력을 밀어내며 다가오자, 베르덴이 다른 한 손마저 뻗었다.
파멸의 번개, 현뢰까지 동시에 발현한 그의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
후욱───콰아아아아앙!
궤적이 비틀려 버린 아서의 일격이 그늘의 바닥을 내리찍었다. 그것만으로도 베르덴은 온몸이 비틀리는 듯했지만, 이에 반해서 아서는 추가로 힘을 소모하지 않았다.
경지의 차이는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가가 차갑게 굳어 버린 쪽은 아서였다.
‘정면에서 밀어냈다. 내 기예를.’
‘당신’의 권능으로 가르간트에서 마주했을 때는 본심을 내지 않고도 이 기예로 목을 절단하여 멸할 수 있었다. 미처 기회를 놓친 이유는 검붉은 마력에 깃든 개념 때문이다.
그래도 다음 한 수로 죽일 수 있었지만 세계수가 관조하는 존재로서 금기를 내세워 정당하게 개입한 탓에 상황이 끝나 버렸다.
금기의 처벌로 권능의 절반이 봉인되고 금언까지 강제된 뒤…… 다시 가르간트를 찾아온 운명 파괴자를 처단하려 했다.
연속으로 동일한 금기를 침범하는 대가로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걸 각오하고 말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현 방주의 지도자가 막아섰다.
첫 번째도 죽이지 못했고.
두 번째도 죽이지 못했다.
이번이 세 번째다.
아서가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찰나와 같은 시간 동안에 운명 파괴자는 기어코 아서의 검을 받아 내는 경지까지 성장했다.
아무리 그가 금기 위반으로 전력을 낼 수 없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자의 가능성…….
여기서 죽여야 한다.
세계의 틈새에서.
몸이 없는 영혼이기에 그가 엘프를 해하지 않는 금기이자 약속에서 벗어난 바로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다.
놓치면 장담할 수 없다.
네 번째 조우에서는 얼마나 강해져 있을지.
‘최악의 후환이다.’
검면을 수평으로 눕혀 바닥을 쓸고, 제자리에서 회전했다. <비행>을 더한 움직임으로 다리의 절단을 피한 베르덴이 마력을 집중했다.
쿠웅.
하드라스가 숨이 닿을 정도까지 아서에게 근접해 거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우주의 암흑으로 덮인 그가 어깨를 들썩였다.
[크크큭…… 크하하하하핫……!]
대악마 군단장이 광소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악마들도 따라 웃었다.
모든 방위에서 메아리치다시피 하는 웃음소리가 틈새의 그늘을 가득 채웠다. 하드라스가 뚝 목소리를 끊으며 전신에 힘을 주었다.
[일전에 없었던 극도로 파괴적인 개념…… 단순히 우리의 신을 경계하는 것이…… 운명의 수레바퀴를 무너뜨렸기 때문만이 아니었군…… 그래서 네놈이 서둘러 돌아온 것이구나.]
하드라스는 무리하게 육신을 쥐어짜내면서까지 고양감을 드러냈다. 처음으로 베르덴의 마도를 직접 본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신’의 대척점이니까…….]
아서가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 가능성은 여기서 사라질 것이니라.”
[그 전에…… 우리부터 죽여야 할 것이다.]
하드라스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자 파멸의 빛이 시야를 채웠다. 검을 방패로 삼아서 광선을 막아 낸 아서가 붕 떠 지면에 착지했다.
[우리의 신께 제물을!]
───쩌어엉!
화염을 두른 거인 악마가 휘두른 타오르는 검이 측면을 힘껏 후려쳤다. 아무렇지 않게 힘을 흘려보낸 아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강해졌다. 운명 파괴자의 영향이로다.’
신앙자는 신에게 가까울수록 더욱더 강한 힘을 갖게 된다. 말인즉슨 악마들이 신성력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단 뜻이었다.
운명전에서도 거의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변화가 난무하고 있다.
콰과과과과광!
검붉은 번개가 아서의 군세를 눈 깜짝할 사이에 휩쓸었다. 직격당한 인간들이 덜덜덜 떨다가 비명을 질러 댔다.
“운명이, 내 운명이……!!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폐하아아!”
운명의 고리가 끊기며 순환 또한 끊어지니 <운명 회귀>가 파훼되었다. 파멸한 이들은 운명에 구원받지 못한 자들로 전락했다.
운명 파괴자가 설마 자기 영혼을 직접 조정하여 현실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것이라고는 상정하지 못한 결과였다.
<운명 회귀>의 권능, 회수.
아서가 한 번 더 힘을 바침으로써 운명의 군세를 거두어들였다. 12귀족도 포함했다. 지금 최대 전력을 내지 못하는 것들을 영영 잃을 수는 없다.
그들은 운명전의 휴전이 파기되는 해방의 날에 대륙을 누빌 군세였으므로.
<로드 아케인: 파명(破冥)>
알 수 없는 흔들림에 눈앞이 뒤틀렸다.
운명 파괴자를 필두로 한 무수한 악마가 쉴 새 없이 요동쳤다. 거슬린다. 계속해서 세계의 틈새로 올라오는 놈들이라고 해도 진즉 한 번쯤 정리해야 했었거늘.
‘……지금 ‘당신’에게 허락받은 제한된 힘을 전부 내게 집중할지니.’
아서가 검날을 손으로 쓸었다.
“운검(運劍), [카엘타리온].”
* * *
스하아아아.
초대형의 거검이 ‘당신’에게 하사받은 신기로 변모했다. 운명전이 중지된 뒤에 저항자를 배신한 대가로 첫 번째 사도에게 받은 검이었다.
검신이 크게 얇아졌다. 화창한 하늘의 빛무리가 어둠을 몰아냈다.
신기의 힘으로 금기에 얽혀 있는 본래의 힘을 더 끌어냈다.
최대 전력의 7할.
정광靖匡
베르덴이 구현한 종말의 빛이 갈라졌다.
아서가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정면을 질주했다. 눈에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파공음이 공간 전체를 흔들었다.
───!
불타는 거대 악마의 허리가 일순간 두 동강 나고, 크란벨의 사지가 잘렸다. 다수의 고위 악마가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그들과 같은 거리에 있던 하위 악마들은 자신의 죽음을 깨닫지도 못했다.
[설마……! 신이시여, 뒤로!]
‘당신’의 힘을 일부나마 감지한 하드라스가 당장 달려들었으나, 이내 세 번을 감당하지 못하고 암흑의 왕관이 갈라졌다.
공간을 이동할 새도 없다.
순식간에 아래에서 위로, 잔상을 남기며 검끝이 굽이쳤다.
콰드득!
베르덴의 옆구리를 관통한 운검에 짙은 핏방울이 맺혔다. 그 상태로 단단히 칼날을 붙잡은 그의 오른쪽 눈동자가 번쩍였다.
마안.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들이닥친 파멸이 아서의 머리에 작렬했다.
박살 난 투구가 떨어졌다.
그 안에는 인류 최초의 왕이 아니라───광신자 노인의 머리가 있었다. 피골이 상접하고 오직 믿음에 의존하는 허름한 존재가.
“육신은, 옛 왕보다 약하군.”
“…….”
“그 행색이 네놈에게 더 어울리고.”
움직임에 완벽히 대응할 수 없다면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다. 베르덴은 극단적인 전법에 일가견이 있었다.
보헤미른 마탑에서 탈출하기 전부터 그는 항상 목숨을 내놓고 살아왔기에.
“운명을 파괴해서는 안 됐노라.”
한쪽 눈의 실핏줄이 터져 버린 아서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분노가 넘실거렸다.
“그로 인해서 예정에 없던 많은 존재가 순환하지 못하고 스러지고 말리라. 운명 파괴자. 자네의 존재 자체가 해악이다. 모든 이의 고된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그 안에 악마는 없었지.”
“필요한 희생이노라! 최대한의 대의를 위해서!”
“대의…….”
베르덴은 직전에 아서가 참살한 악마들의 사체를 눈에 담았다. 끓어오르는 신의 격노에 틈새의 그늘이 진동했다.
“저게 대의로 인정받는 세상이라면, 차라리 내가 세상을 멸하겠다.”
“……!”
아서가 눈을 부릅뜨고는 함성을 내질렀다. 기와 마력이 격돌했다. 무지막지한 파장에 틈새의 악마는 접근하지도 못했다.
촤아아악!
인지 불가능한 검기가 날아오더니 양쪽 쇄골을 스치듯 갈랐다. 베르덴은 전혀 위축되지 않은 채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막하(莫下)의 륜>
추락하는 소멸의 태양.
활시위처럼 [카엘타리온]을 몸쪽으로 끌어당긴 아서가 허공을 박찼다. 한 점에 집중된 검기가 망화의 중심을 관통했다.
그 뒤엔 <공간 지배>의 영역을 구축한 베르덴이 자리했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공간의 칼날과 운검이 부딪친다. 이윽고 상처 하나 없이 영역마저 분쇄해 버린 그의 검술은 그야말로 극치였다.
“죽음을 관장하는 여섯 번째 사도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노라. 오직 인간만이, 나약한 다수의 인류를 이끄는 것이 허락된 극소수의 인간만이 육신을 끝없이 단련해 기술을 완성할 수 있으니.”
아서가 공간을 뛰어넘는 듯한 속도로 베르덴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보호막이 절단됐다. 고개를 비튼 그의 얼굴에 검흔이 남았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이다.”
저 사상(思想).
베르덴은 잠시 분노와 마력을 억누르고는 시선을 돌렸다.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주와 무슨 관계냐.”
아서가 답했다.
“내가 방주를 창설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