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3화 신격 – 7
우드드드드득.
목뼈가 짓눌려 으스러지는 소리가 어둑한 그늘을 적셨다. 거의 반쯤 뜯긴 목덜미. 왈칵 피를 분출한 12귀족이 즉사했다.
침묵이 찾아왔다.
남은 12귀족들은 악마들을 무시하고 베르덴만을 응시했다. 하드라스는 베르덴을 주시하며, 악마들을 지휘해 조용히 전열을 정비했다.
누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경직된 공기는 한순간에 터져 버리리라.
‘당신’의 두 번째 사도───아서 타렌폴드가 느릿하게 자세를 정립한다.
인류 최초의 왕으로서의 겉모습은 가르간트의 광신자 노인이었을 때와 사뭇 달랐다.
지금의 그는 넝마를 두르고, 피부가 말라붙은 괴인이 아니었다.
투구 바깥으로 빠져나온, 색이 빠지다시피 한 검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긴 수염.
부리부리한 눈.
선명한 이목구비.
굵은 뼈를 감싼 밀도 높은 근육.
오래된 전투의 흔적이 남은 채 위엄을 풍기는 갑옷과 망토.
운명 이전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인류의 진정한 황금기를 연 어진 왕…… 현왕이라고도 불렸던 사내가 거기에 있었다.
“순환을 약속받은 찬란한 인류여.”
주인의 체구에 걸맞은 거대한 검신이 천천히 바닥으로 기울었다.
귀족들의 기세가 일변했다.
“운명 파괴자를 처단하라.”
동시에 베르덴이 영창했다.
마력이 현현한다.
“하늘의 각도, 땅의 선율, 대기의 반향.”
최초의 마탑에서 위계 마법 이전에 존재했던 영창 마법 체계를 지식에 담았다.
고대의 영창을 현대의 대륙 공용어로 재해석한 문장의 나열. 본디 영창 마법이란 언어를 통해 세계 자체에 현상을 일으키는 비이성 마법이다.
뜻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사용 언어가 다를지언정 마법은 발동한다.
무엇보다도 그가 호소한 세상은 내면세계이므로 베르덴 자신이기도 했다.
영창 마법의 실패 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
“궤적을 정렬하라.”
베르덴의 머리 위로 솟구친 여덟 개의 마력의 광선이 하나로 합쳐지고, 그렇게 구체가 되어 버리며 발광했다.
고대 영창: 분염
마력의 구체는 다시금 수백 개의 화염 광선으로 화하여 사방에서 빠르게 접근해 오는 귀족들을 향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귀족들이 능숙하게 악마 사이를 누비며 베르덴을 향한 살의를 뻗쳤다.
죽어도 신음조차 내뱉지 못하는 인형과도 같은 자들이었지만 근방의 환경을 이용하는 본능은 있는 듯했다.
하지만 베르덴이 시전한 고대 영창 마법은 화염계 최상위권에 속해 있다.
견주지도 못할 자들은 마법사의 거리를 좁힐 수 없다.
투두두두둥.
목표물에게 유도된 17개의 화선이 하위 귀족 두 명의 전신을 관통했다. 뇌와 심장에 타오르는 구멍이 생긴 그들이 고꾸라졌다.
악마들과 베르덴으로 인해서 죽은 귀족은 이로써 5명이었다.
다른 귀족 두 명은 속도를 늦추는 대신에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였고, 다른 귀족 두 명은 전부 반응하지 못한 채 사지 중 두 곳이 꿰뚫렸다.
반면에 나머지 귀족 셋은 각자의 무기로 열선을 쳐 내어 자신들뿐만이 아니라 왕까지 보호했다. 여타 귀족과는 차원이 다른 몸놀림이었다.
그들은 왕의 고유한 집행 및 행정 기관인 원탁을 창설한 상위 기사, 즉 상위 귀족이었다.
‘두 번째 사도를 제외하고 지금의 내게 닿을 수 있는 존재는 저 셋.’
여유는 없다.
‘숫자부터 줄이는 게 선제다. 나의 의지가 미약한 ‘신성력’에 온전히 반영될 때까지.’
심장이 박동한다.
점차 강하게.
베르덴이 다음 영창 마법을 전개하는 도중에 어둠이 끼어들었다. 홀로 상위 귀족 세 명을 막아선 하드라스가 낮게 속삭였다.
[이들은 호위대이자 지휘관…… 곧이어 배신자의 부름에 군세가 옵니다…… 처음부터 군대를 동원하지 않은 것은…… 아직 제가 살아 있는 것은…… 배신자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뜻…….]
그가 귀족들의 무기를 단단히 붙든 채 고개를 살짝 돌렸다.
[현재 배신자에게 허락된 힘을 강제로 끌어내야 합니다…… 한계에 달하도록…… 더 이상 그늘에 머물 수 없도록…… 그것만이 유일한 활로입니다.]
암흑의 왕관이 울렁인다.
하드라스가 12귀족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자들을 억지로 밀어냈다. 함성을 터뜨리며 베르덴과 최대한 멀리 떨어뜨렸다.
그들이 날아가 버린 전장 저편에서 초월적 존재의 전투를 연상시키는 굉음이 연이어 폭발했다.
악마들이 베르덴의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다시피 적을 몰아세웠다.
[접근은. 허하지. 않겠다.]
고위 악마들을 필두로 세워진 대군이 귀족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영창 마법에 기동력이 약해진 중위급 귀족 하나가 악마에 뒤덮여 해체되었다.
전쟁터 한복판의 풍경.
이렇게나 많은 병력이 베르덴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드라스를 제외하면 악마의 개체마다의 실력은 12귀족에 비해 뒤떨어져도.
당장 숫자의 차이는 압도적이다.
고대 영창: 헤반테인
베르덴이 구현한 키론다르의 마법에서 다섯 개의 화염 채찍과 마법 사슬이 순식간에 뻗어 나와 아서의 사지를 옭아매려 한다.
직후에 거인에 비견되는 화염의 악마가 타오르는 검을 내리친다. 수백 개의 기괴한 촉수가 폭발하면서 가시들이 날아간다.
“악마를 통솔한다라…….”
퇴로가 없는 전방위 공격에 아서가 오른 다리를 들어 그늘을 내리찍었다.
쿠우우우웅.
기압(氣壓)이 굽이쳤다. 영창 마법과 악마들의 한 수가 튕겼다. 시간이 멎어 버린 듯이 사물의 움직임이 느리게 보였다.
아서의 신형이 사라졌다.
악마들이 거의 인지도 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에 베르덴이 반응했다. 크게 물러나며 입술을 달싹였다. 벽안에 검날이 드리웠다.
‘망설임이 전혀 없다. 지난번에는 내게 치명상을 입힌 뒤 금기 위반으로 세계수가 개입했는데, 여기선 그 금기가 통용되지 않는 건가.’
상대는 ‘당신’의 검이다.
예측할 수 없으니 지난 경험에 의존하는 하책은 금물이다.
가르간트에서 마주했을 때보다 강렬한 존재감이 피부를 찔렀다. 정면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유리한 간극을 유지해야 한다.
세 걸음 안쪽으로 들이면 출혈은 피할 수 없고.
두 걸음 안쪽을 허용하면 치명상은 필연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악마들도 휩쓸린다.’
고대 영창: 트라피르엔사
최고위 영창 마법이 검기를 봉인하고는 놈에게 그 파괴력을 돌려주려 했으나, 찰나마저 쪼갠 짧은 순간에 붉은 기운이 몰아쳤다.
손목 회전에서 비롯된 기의 폭풍이 마법을 박살 내고 베르덴의 가슴을 찢어발겼다.
스르륵…….
베르덴의 모습이 사라졌다.
분신을 이용한 속임수.
영창 마법은 위계 마법만큼이나 다양하다.
“깨지고 갈라져 쏟아져라.”
고대 영창: 카르돔
근방의 공간이 부서진 유리창처럼 조각나며 파편이 비산했다.
이에 검풍이 일대를 휩쓸었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서 조금도 멀어지지 않는다.
아서는 악마들을 배제한 채로 오직 베르덴만을 쫓았으며, 베르덴은 악마가 없는 방향으로 정교한 분신을 이용해 회피를 거듭했다.
콰과과과과과광!
검기와 영창 마법이 서로 교차하며 연쇄 폭발이 시야를 가렸다. 아서의 감각이 서서히 진짜 베르덴을 포착하려 했다.
베르덴이 무슨 심정으로 악마에게 돌아왔는지, 또 이런 전법을 구사하는지는 아서도 충분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으드득.
치아가 맞물렸다.
“이타심, 책임감…… 우습지도 않도다. 저항자 흉내를 내는 걸로도 모자라, 자기희생과 헌신까지도 존재에 품다니.”
아서가 우뚝 멈춰 섰다.
잔상을 남기며 역으로 세워진 거검.
“분수에 맞지 않노라.”
한껏 경멸을 내보인 아서의 광신적인 믿음이 어둠 속에서 발호한다.
‘당신’의 권능 – <운명 회귀>
악마들에 의해서 찢어발겨진 귀족들의 파편과 혈흔이 다시 하나가 되어 본래의 형태를 이루고, 그늘을 밝힌 빛에서 왕의 군대가 몰려왔다.
운명이란 영원이며, 영원이란 순환.
자기 꼬리를 먹어 치우며 한없이 재생하는 용처럼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 한 운명에 귀속돼 버린 존재는 윤회를 반복할지니…….
그들은 생과 죽음이 반복되었다는 자각조차 없이 과거 최초의 왕을 따라 영광스러운 전쟁터를 누볐을 때의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지성체의 자유 의지는 없다.
필요 없다.
본인들은 스스로 자율적인 존재라고 느끼므로.
무대 위의 인형은 자유롭다.
“인간을 위하여!!”
“왕께 승리의 영광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인류의 전진에 맞선 악마, 두 종족이 그늘의 중심에서 충돌했다.
[배신자의 주구들……!]
[크하하핫! 신의 영전에 제물로 바치겠다.]
고위 악마가 병사들을 학살하면, 병사는 힘을 모아서 대응했다. 또한 병사 중에서 특출나게 강한 인간이 나와 역으로 악마를 참살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베르덴을 따랐던 악마의 머리가 나뒹굴었다.
“켈므.”
반사적으로 하위 악마의 이름을 되뇐 베르덴의 심사가 뒤틀렸다. 어느 병사가 힘없이 미소를 짓고 있는 켈므의 머리를 밟아 터뜨렸다.
적의가 확 쏠린 그 한순간에 묵직한 발소리가 빛살처럼 들이닥쳤다.
중각重角
터어어어엉!
완벽에 가까운 분신 중에서 전투 경험을 토대로 정확히 본체를 간파한 아서의 돌진.
직접적으로 닿지 않아도 어깨를 크게 감싼 기가 충격을 전달했다.
온몸으로 인간의 군세를 휩쓴 베르덴이 여기저기 박살 난 인간의 시체 언덕 위에 쓰러져 뒤로 고개를 늘어뜨렸다.
“전장에서 잔정을 논한다니, 미숙한 신이도다. 완성과 어울리지 않아…… 지도자란 엄연히 만인의 핏물을 뒤집어쓰는 존재이거늘.”
직전의 일격에 아군이 피해를 보았는데도 아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운명 회귀>가 없다고 해도 같은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적을 몰아붙이는 수가 더욱 많은 아군을 살리는 길인 걸 이해하기 때문이다.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는 법이고,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가?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지배하는 존재라면 항상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있다.
그럴 수 없다면 군림할 자격은 없다.
“육신이 없는 이 세계의 틈새에서 자네는 엘프가 아니니 세계수의 금기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없도다. 하물며 미완(未完), 오만, 과욕, 동정, 자만. 패인은 이렇듯 수도 없이 많으매.”
“…….”
“그야말로 운명을 파괴한 자의 말로로다.”
기가 응축되어 기예의 형태를 취한다.
검명이 울린다.
그때 상위 귀족의 머리 두 개가 날아와 아서의 발 앞에 굴렀다.
[마족…… 동지가 맡긴 등을 벤 타락자가…… 감히 누구를 가르치는가.]
상위 귀족 두 명을 쳐죽이고, 다른 한 명에게는 중상을 입혀 크란벨에게 마무리를 맡긴 하드라스가 베르덴의 앞을 지켰다.
그 역시 부상이 얕지 않았고 적잖은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신앙은 무뎌질 줄 몰랐다.
상위 귀족이 되살아나면 성가시지만, 당장 상위 귀족을 회귀시키려면 배신자도 적잖은 힘을 바쳐야 하니 부담스러울 터.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
현상의 발현에는 반드시 소모가 따른다.
운명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신이시여…… 저희는 누구의 강요도 없이 진정으로 전선에 섰습니다…… 그러니 숭고한 죽음을 가여워하지 마십시오…… 그 산을 넘어서야만…… 비로소 저들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
[희생 없는 전쟁은…… 없습니다.]
베르덴이 운명에 뒤얽힌 인간들의 조각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입가에서 흘러내린 피.
크게 흐트러진 잿빛 머리카락이 베르덴의 벽안을 가렸다.
“어떤 피해도 없이 승리를 거머쥐겠다는 허상은 품은 적 없다.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 저 악마들처럼 누군가는 죽겠지. 말하지 않아도 인지하고 있다…… 그저 용납하지 않을 뿐.”
[신이시여…….]
“먼저 피를 흘려야 한다면, 그건 나다.”
블랙 아워를 찬탈할 때도, 또한 보헤미른 마탑에 복수할 때도, 베르덴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베르덴은 언제나 최전선에서 가장 강한 자들을 상대했다.
“반드시 희생이 필요하다면 내가 더 희생하면 된다.”
그 각오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아무도 희생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
베르덴이 오른쪽 엄지를 곧게 세워 심장 부위를 강하게 찔렀다.
어째서 세계의 틈새에서는 영창 마법만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가? 왜 경지는 그대로인데 마법적 전력을 발휘할 수 없는가?
출력을 담당하는 마력회로가 없기 때문이다.
───[이곳은 세계가 아닙니다…… 세계와 세계 사이에 있는, ‘세계의 틈새’…… 또한 허락되지 않은 영혼들이 흘러 들어오는…… 통로이자…… 운명의 철책입니다.]
이곳이 영혼의 통로라면 현재 베르덴도 영혼이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여 존재와 직결된 심장의 마력, 역천의 마법진, 잿빛 머리카락, 그의 마력량을 대변하는 벽안 등만이 이어진 것이다.
현대의 마력회로는 어디까지나 육체에 한정된 초대 마도왕의 마법적 기관이니까.
‘본 힘을 발휘하려면 마력회로를 구축해야 한다. 내 영혼에 직접.’
그야말로 신(神)의 발상.
신성력은 형태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마력회로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신성력의 크기가 아직 미미해 그 복잡한 의지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이제 충족했다.
부족한 힘마저 채우는 절대적인 의지가 그에게 있으니까. 일반적인 신은 가지지 못하는 초월자의 이상이 말이다.
시간은 충분히 지났다.
심장에서 뻗어 나온 마력의 통로가 순식간에 영혼 내부에 뿌리내렸다. 뇌, 손, 발. 머리부터 사지 끝까지 마력이 흐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
세계수를 연상시키는 거대하고 순수한 마력이 틈새의 그늘을 압도했다.
잠들어 있던 베르덴의 길이 열렸다.
마도 <무한(無限)>
마도 <파멸(破滅)>
겁화까지 타오르며 망화의 최후 영역, 월식까지 상시 개방되었다. 베르덴의 몸 주변에서 간헐적으로 번쩍이는 파멸의 마력을 목도한 하드라스의 사고가 정지했다.
[저…… 힘은……?]
악마들이 일시적으로 전쟁을 중단하고 자신들의 신을 높이 우러러보았다. 운명에 순응한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드러냈다.
‘편린.’
아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편린이 보인다.’
마치 세상의 주인이라는 듯──모든 이의 영혼을 격동시키는 존재감. 이와 비슷한 기분을, 아서는 과거 경험한 적이 있었다.
‘절대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