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2화 죽음의 서막 (2)
욱신.
명치 바로 아래쪽에 난 자상에서 상당한 격통이 밀려온다. 히스릴의 난폭한 기가 파열상을 새겨 넣은 탓이다.
다만 지금의 베르덴은 이런 고통에 반응을 보일 정도로 인간적이지 못했다.
‘다친 짐승이 가장 포악하다고 했었나.’
잿빛의 용이 불어넣은 힘과 신성력으로 완성된 [아인베르]는 그 자체로 성체 이상의 드래곤의 비늘과 같은 저항력을 자랑하는데, 광검으로 발해진 검기에 제법 손상되고 말았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살아 있는 것처럼 자동으로 수복되겠지만.
‘내 심장을 노리려 했군. 과연, 방심할 수 없는 저력이다.’
전황을 지배했지만, 중상과 입히는 것과 동시에 공격을 허용했다. 방심과 오판은 찰나 역전의 빌미로 이어진다.
매 순간의 판단이 곧 변수이자 결론.
베르덴의 마법이 히스릴을 죽일 수 있는 것처럼, 히스릴의 무투 또한 베르덴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히스릴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베르덴이 대규모 언데드 군세와, 인간과 수인의 군대를 인지했다. 익숙한 존재감이 잡혔다. 그레이브 러드워스와 에온의 마법사들이 전장 속에서 베르덴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향했다.
죽음의 문이라 일컬어지는 거대한 암흑의 균열은 히스릴의 뒤쪽에서 고요하고, 또 어딘가 좀 불쾌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단서가 난잡해서 의도를 읽기 어렵군.’
베르덴은 맞은편의 히스릴을 바라봤다.
파직…… 파지직……!
검붉은 번개꽃이 히스릴의 어깨와 가슴, 그리고 복부와 골반을 사선으로 가로질렀다. 개념이 그녀의 존재 자체를 파괴하고 있다.
그걸 알고 있을 텐데도 히스릴은 웃으며 전의를 거두지 않았으니.
두근.
맥동하는 광검의 잔상이 물결처럼 퍼진다.
착시인가, 실제인가.
히스릴의 등 뒤에서 피로 물든 야수가 보이는 듯했다.
“예전에 누가 그랬어. 이 세상에 나보다 잔인한 존재는 없을 거라고. 욕이라고 한 말이겠지만 나한텐 칭찬이었지. 솔직히 자부심도 갖고 있었는데, 널 보니 자존심이 좀 상하네.”
히스릴은 자신과 같은 짐승을 보듯 베르덴을 노려보았다.
“대체 어떤 사상을 가져야 그런 마도를 개척할 수 있는 걸까.”
이렇게 직접 경험해 본 뒤에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드라벤을 통해서 보았던 검붉은 마력이 얼마나 잔혹하고, 또 흉악한지.
“학살이 악이라면 나는 차악이고. 베르덴, 너는 최악이 되겠지. 결과적으로 너로 인해서 셀 수 없이 많은 삶이 빼앗길 거야. 내가 여태껏 사냥해 온 숫자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학살은 원래 악이다.”
“악인(惡人). 자각은 하고 있었나 봐?”
“피차 보편적인 선악에 얽매일 만큼 나약하지 않을 텐데.”
현뢰가 된 [인테리스]가 일정하지 않게 뇌명을 터뜨린다.
“모든 변화의 책임은 내가 진다.”
“어떻게.”
“내 이상이 옳았음을 증명함으로써.”
“무엇으로.”
“힘에 의한 자유.”
세상에 군림한 것 이상, 그러니까 선악을 정하는 존재가 되겠다는 베르덴의 선언에 히스릴이 웃음기를 싹 지웠다.
그녀는 여제라는 이명에 걸맞게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분수에 맞지 않은 행동은 때로 꿈 같은 희극을 낳지만, 끝에는 반드시 비극으로 귀결된다. 주제를 모르는 자가 성공을 맛보면 평생 주제 파악 못 하고 날뛰기 때문이지. 내게 그보다 추하고 역겨운 것은 없어.”
“하지만 기대하는군.”
“불가능한 도전. 무모한 용기. 탐욕에 흠뻑 젖은 쓰레기들처럼 멍청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켜볼 만한 비극이지. 가끔 어린애 동화와 같은 해피엔딩을 보여 줄 때도 있으니까. 결국엔 그 기억을 잊지 못하고 또 동료를 구하겠다는 둥 또 시련을 극복하겠다는 둥 만용을 부리다가 전부 죽어 버렸지만.”
히스릴은 오랜만에 유쾌해졌다.
“혼돈은 이와 같이 이성도, 본성도 아닌 결단을 내리는 것들을 양산해 내지. 전 대륙이 혼란에 빠지면 더할 나위 없는 결말로 자신의 끝을 장식하는 바보가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그걸 보고 싶어. 그게 내 이상이다.”
분수를 모르고, 또 가식적인 것들이 구역질 나서 죽여 버리지만…… 그런 것들이 불가능한 걸 이루면서 바라는 완결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본능적인 히스릴은 역설적으로 본성이 혐오하는 광경을 추구했다.
“모순적이지?”
“초월자의 이상이니까.”
초월자는 닿지 않을 꿈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달빛에 매료된 나방처럼. 그것이 초월의 굴레였다.
“그러니 우리가 미친년놈 소리를 들을 수밖에.”
히스릴이 팔꿈치를 옆으로 밀어 올리며 광검으로 베르덴을 겨누었다. 기를 둘러서 파멸을 막아 낸 탓에 그 많던 기가 상당히 소모됐지만, 의지의 밀도는 한층 더 높아졌다.
마력의 기둥이 치솟았다.
잿빛 머리카락을 휘날린 베르덴의 [인테리스]가 강하게 점멸했다. 콰르르릉. 응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우레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에서 무차별적으로 떨어지는 현뢰가 그들을 에워싼 대지에 내리쳤다.
일그러지는 공간.
히스릴을 죽여서는 안 되지만 힘 조절할 여유는 없다. 얕보는 순간 대가를 치를 테니. 여제의 이빨은 신에게 닿는다.
광기의 결정체.
서로 이상을 밝힌 초월자들의 눈동자에서 살의가 뿜어져 나온 순간이었다.
뚝,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했다.
광야의 도륙.
광란분아狂亂噴牙
초월기 야혼으로 인외의 야성을 품은 히스릴이 절명의 초월기를 발현했다. 그녀의 신형이 사라짐과 동시에 살의가 송곳니처럼 빗발쳤다.
콰드드드득!
마치 물어 죽이듯이 [아인베르]가 관통되며 피가 번졌다. 어깨, 다리, 옆구리, 그리고 명치까지. 도합 일곱 개의 이빨을 박아 넣은 히스릴이 탐스러운 목을 뜯어 버리기 위해 지척에 도달했다.
그리고.
베르덴의 손에서 피어난 ‘어둠의 섬광’이 시야를 앗아 갔다. 무한의 마도로 인해 극한을 넘어서 집약된 파멸은 암흑과 다르지 않았다.
마도 현신의 끝.
개념에 완전히 녹아들면서 일시적으로 구성 물질 자체가 변화한 [인테리스]는 마안과 직결되는 파멸의 그림자가 되었다.
<대멸절: 녹스(Nox)>
두 초월자 사이에서 형언할 수 없는 힘의 충돌이 일어났다. 척력과 인력이 복잡하게 뒤얽히며 모든 게 혼돈에 휩싸였으니.
────────────!
감각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기온마저 느낄 수 없다. 세상이 그녀의 존재를 박탈한 것만 같았다.
히스릴은 무감각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광검을 내질렀다. 실낱같은 존재감이 느껴졌다. 마지막 이빨이 살갗에 박혔다.
촤아아아아아아악!
하얀 피부에 붉은 검흔이 떠오르며 뜨거운 피가 분출한다. 히스릴이 본 사람 중 가장 잘생긴 베르덴의 머리통이 날아올랐다.
이겼다.
이겼다.
이기고 말았다.
귀여운 아드리안이 원망하겠지만…… 초월자들의 승부는 냉혹하다. 죽이지 않으면 죽었다. 지금 그녀는 승리를 만끽했다. 자신을 야생으로 이끌었던 수왕을 살해했을 때보다 뭔가가 더 짜릿했다.
한 끗 차이였다.
운이 좋았다.
마지막 마법은 빗나간 걸까.
잘해야 동반 자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결과가 좋았다. 고통은 없다. 다행히 예상했던 것보다 쉽게 끝난 것이다.
쉽게.
그래, 쉽게…….
‘아, 역시. 너무 쉽다 했더니.’
착각에서 깨어난 히스릴 델 로하룬이 잠시 눈을 깜빡였다. 음울한 하늘이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리니, 초토화되어 지옥이 되어 버린 대지의 끝자락에 그녀가 드러누워 있었다.
패배했다.
다만 살아남았다.
광검 [실렌다르]는 그녀와 어느 정도 떨어진 땅에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어때…… 고고한 여제를, 짓밟은 소감은?”
“항상성이 파괴되기 전에 힘을 거두었다. 대답할 여력은 있을 테지.”
마도 현신이 해제된 베르덴이 근처 작은 언덕에 걸터앉았다. 관통상에 깃든 히스릴의 기운을 파멸로 지우며, 아공간에서 소환한 리산드로의 열매 포션을 복용했다.
대결은 끝났다.
최고위 마법진을 작성해 그녀를 구속한 베르덴이 여분의 로브를 던졌다. 누더기가 된 히스릴의 전신을 가려 준 그가 물었다.
“어머, 신사네. 난 지금 저항도 못 하는데.”
“아드리안은 어디에 있나.”
“무시하긴.”
히스릴은 곧 당연하다는 듯 정보를 숨기지 않고 답변했다.
“하부 수인 부족 내 버려진 감옥에 넣어 놨는데, 지금쯤이면 탈출했을 거야. 목숨에 지장은 없어. 신체 결손도 하나 없고.”
“그렇군.”
베르덴은 진실과 거짓을 면밀하게 판단하며 질문을 계속했다.
“너처럼 온전히 초월자로 부활한 존재가 몇이나 되지?”
“내가 알기로 날 포함해서 셋이야. 반토레온 로든 타라니스와 라이칸 투르가르드.”
“광명의 대재해와 동대륙의 대제인가.”
“짐작한 대로지? 쿨럭, 쿨럭.”
히스릴의 옅은 기침에 피가 좀 섞였다. ‘망가진 신경이 돌아오면서’ 격통이 일었지만, 그녀는 철저히 상태를 감추었다.
“우리는…….”
아홉 개의 사문.
각자 사문을 하나씩 열어서 드라벤과의 약속을 이행.
동대륙 남부에 두 개의 사문이 존재해 그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면서 하부 수인 부족에 있는 사문의 개방이 지연되었고, 그를 관리하기 위해서 이곳에 남은 히스릴.
“지금쯤 이곳의 두 번째 사문이 열렸겠지. 거기서 무슨 일이 생길지는, 관심도 없지만.”
“…….”
히스릴은 일목요연하게 부활한 이후에 지금까지 무슨 짓을 했는지 설명하고는, 이곳에 없는 두 사람의 행방을 발설했다.
“라이칸은, 동대륙의 마지막 사문을 개방하기 위해서 델하룬으로 갔고…… 반토레온은, 혼자 중앙 대륙으로 향했어. 벨디른 공화국에 있는 대륙 간 이동 마법진을…… 이용할 생각이라던데.”
“반토레온은 이미 드라벤과의 약속을 지켰다고 하지 않았나?”
“사문이 아니야. 목적은 이상이지.”
히스릴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반토레온은 주인 없는 땅으로 갔어. 베르덴, 널 만나려고.”
“나를……?”
그 소식에 베르덴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에게서, 이상의 가능성을 봤다나 봐. 권역이 걱정되니? 뭐…… 우려한 일은 없을 거야. 반토레온은 학살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네가 없으면 얌전히 차나 마시며 기다릴걸?”
그녀가 힘없이 웃었다.
“우리는…… 누구의 편도 아니야. 그냥 자유롭고 싶은 초월자일 뿐. 그래도 뭐가 어떻게 됐든 옛 왕의 세력에 속할 생각은 없지만.”
“대륙의 편에 설 수도 있다는 건가.”
“글쎄, 내키면?”
히스릴, 반토레온, 라이칸은 전황에 영향을 줄 만큼 강력한 변수. 죽이자니 전력이 아깝고, 살리자니 우려스럽다.
언제나처럼 선택의 기로에 선 베르덴이 다시 의문을 던졌다.
“그런데 아드리안에게는 잊지 못할 흔적을 남겨 놨다는 게 무슨 뜻이지?”
“아, 그거. 우후후.”
히스릴이 수줍게 입술을 핥았다.
“달콤했었지.”
“……?”
그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베르덴의 사고가 잠시 정지했다. 왜 얼굴을 붉혀. 순간 이자벨라와 칼리아가 겹쳐 보였다.
‘아드리안, 뭔 짓을 당한 거냐.’
베르덴이 드물게 진심으로 당황한 찰나, 분명히 전의를 상실했던 히스릴이 눈빛이 섬뜩할 정도로 매서워졌다.
동시에 허공에 수놓인 짙푸른 뇌창이 히스릴을 겨냥했다.
“허튼짓하지 마라. 도망갈 길은 없다.”
“방심을 안 하네.”
히스릴이 이를 드러냈다.
“근데 내 눈에는 보이는걸.”
최고위 마법진이 그야말로 무식한 근력에 뜯겨 박살 났다. 허리를 튕겨 일어난 히스릴이, 베르덴이 준 로브를 두르며 한 손으로 땅을 짚었다.
파멸의 궤적만이 새겨진 그녀의 몸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베르덴이 히스릴의 육체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마법적 작용을 간파했다.
‘리산드로의 열매?’
히스릴은 아드리안에게서 빌린 그 포션을 사전에 복용한 다음 기운과 의지로 은폐한 채 강제로 효력을 억누르고 있었다.
아드리안의 공간 가방에서 특히나 농도가 짙은 포션을 확인하고, 몸에 상처를 내 가며 시험한 그녀의 숨겨 둔 수였다.
베르덴이 파멸을 거둔 덕분에 회복력이 온전히 발휘되었다.
“검은 돌려줄게!”
격전을 벌이는 도중에 틈틈이, 또한 조금씩 기를 심어 놓은 광검이 원격으로 움직여 베르덴에게 쏘아져 나갔다.
쩌어엉!
그대로 [인테리스]와 부딪치며 금속음이 퍼졌고, 광검에 담긴 일말의 붉은 기운이 히스릴에게 다시 돌아왔다.
육체에 저장해 둔 포션의 힘으로 치명상과 중상을 일부 회복.
광검에 쌓아 둔 기를 회수해 퇴로를 모색.
파아아앗!
베르덴의 파멸에 체내의 기가 완전히 고갈돼 버린 그녀가 잠깐 움직일 기력을 되찾았다. 양손에 검기를 형성하며 각력을 폭발시켰다.
<차원 전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뇌창을 베어 버리던 그녀 앞에 베르덴이 들이닥쳤다. 그 또한 반동과 피로에 큰 힘을 소모했지만, 지금의 히스릴보다는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죽음의 문으로 향하고 있군. 어딘가로 이어져 있는 건가? 일단 밀어낸다.’
퀸터 캐스팅: <모멘티움>
막대한 질량이 스태프에 실렸다. 히스릴은 되레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내질렀다. 그리고 무게중심을 우측으로 옮겼다.
‘한 팔은 포기!’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왼팔이 부러져 뼈가 튀어나온 히스릴의 온몸이 짓눌렸다. 현재로선 견딜 수 없는 척력. 오른다리가 디딘 땅이 갈라졌다. 기껏 회복된 관절과 신경이 크게 삐걱거렸다.
“───!!!”
함성을 내지르며 오른손으로 베르덴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앞꿈치로 바닥을 당겼다.
기어코 힘의 방향을 뒤튼 히스릴이 뒤가 아닌 앞으로 튕겨 나갔다.
콰드드드득!
피부를 뚫고 나온 뼈로 지면을 긁으며 회전한 그녀의 뒤에 죽음의 문이 드리웠다. 붙잡힐 생각이 없다는 강인한 집념.
“아드리안에게 전해 줘.”
히스릴이 입술에 갖다 댄 손바닥을 떼어 키스를 날렸다.
“나도 처음이었다고.”
베르덴의 눈가가 떨렸다.
그러니까 뭐가.
“즐거웠어. 나중에 다시 봐.”
히스릴이 곧장 죽음의 문 안쪽으로 만신창이인 몸을 던졌다.
추적인가, 포기인가.
결정을 내린 베르덴이 가속해 히스릴의 발자취를 쫓았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베르덴도 죽음의 문에 진입했다.
……터어어어엉!
몇 초 뒤에 영혼에 충격을 받은 베르덴이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공간을 고정하여 허공에 정지한 그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금기……!’
강력한 금기의 경계선이 히스릴은 받아들였고 베르덴의 존재는 거부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다르나 그 과정은 성소 아벤카가 베르덴의 출입을 거부했던 것과 비슷했다.
파괴할 수 있나.
베르덴은 원초적인 방법을 염두에 두며 입술을 달싹였다. 가능하면 모른 척하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
“내가 저걸 부수면 어떻게 되지?”
베르덴이 재차 말했다.
“대답해라, 호스트.”
이내 아공간에서 멋대로 소환된 그링 아르카넘의 책장이 활짝 열렸다.
바다의 냄새가 베르덴의 주변에 감돌았다.
{과연 ‘당신’과 올다르크와 같이 이상을 추구하는 진정한 신. 이 내가 이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걸 이미 알고 있었…… 아니.}
호스트가 흠칫하는 반응이 전달됐다.
{너는 날 보고 있었군. 진즉에.}
영혼의 개념을 이해하고, 신격에 손에 넣었을 때부터 베르덴은 그링 아르카넘 너머의 호스트의 시선을 감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써 아는 체하지 않았다.
호스트는 여전히 베르덴에게 미지로 가려진 운명의 사도였기에…… 베르덴은 역으로 호스트를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다.
전해져 오는 시선에 집중하자 놈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호스트가 베르덴을 통해 세상을 보았듯.
베르덴은 호스트를 통해 아르카디옴을 보았다.
문제는 호스트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지식에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이다.
{과연…… 흥미롭다. 놀라워.}
“대답하지 않을 거라면 꺼져라. 관음증자.”
{관객이라고 해 줬으면 좋겠군. 아무튼 내 독단으로 만찬회가 지연되고 있으니, 이번에 한해서 네 의문에 답을 해 주지. 보상의 의미로.}
그링 아르카넘이 죽음의 문을 가리켰다.
{파멸의 개념에 의해 저것이 붕괴되면 ‘당신’도 올다르크도 원하지 않은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오직 기생충만이 기뻐하겠지.}
“기생충이라면…… 기생의 대악마?”
{이페아카른.}
호스트는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그 외에 기생충이 달리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