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3화 죽음의 서막 (3)
{스스로 진리와 학문을 탐구하여 새로운 이해와 통찰을 추구하는 지식인. 기생충은 그 지고한 결론에 빌붙어 결과만을 앗아 가려 한다. 비유하자면 나무가 왜 존재하는지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오직 과실만을 탐하는 것과 같지. 하물며 뻔뻔하게 과실을 내세우며 나무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호스트는 몹시 불쾌한 감정을 목소리에 여지 없이 담아냈다. 알파에게 뺨을 맞았을 때조차 흥미롭다며 웃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지식의 만찬회를 주도하는 자는 기생의 대악마를 어지간히도 혐오하는 모양이었다.
{이페아카른은 사유(思惟)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가장 악마다운 대악마일지도 모르지. 무엇보다 가장 추레한 촉수를 꿈틀대는 존재이기도 하고}
“…….”
촉수야 어떻든 관심 없다.
베르덴은 죽음의 문을 파멸시키면 이페아카른이 기뻐할 거라는 호스트의 충고를 머릿속으로 여러 번 곱씹었다.
‘지식의 만찬회가 지연된 보상이라는 이유로 내 질문에 답했지만…… 결국 호스트는 무상으로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기생의 대악마의 목적 같은 중요한 정보를 여기서 알려 줄 리는 없을 터. 하지만 파괴가 해답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죽음의 문에 들어갔을 때 베르덴은 총 세 종류의 힘을 느꼈다.
첫 번째, 금기의 경계 자체가 격렬하게 반응하며 반발력을 분출했다. 영혼이 떨렸다. 잿빛의 용이 다섯 번째 세계에 운명의 원천이 있다고 금기를 발설한 것 이상으로.
두 번째, 인간계 최초의 왕과 군단장 하드라스와 조우했던 세계의 틈새와 아주 밀접한 기운이 저 안에 만연했다. 마치 또 다른 세계의 틈새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세 번째, 어둠뿐인 공간에 들어선 직후에…… 침묵의 사막에서 맞닥뜨린 ‘당신’의 표층 의지가 어딘가에서부터 다가오는 걸 인지했다.
‘날 경계하는군.’
함부로 손을 대면 상황이 크게 잘못될 것 같다는 직감. 그래서 당장 파괴를 시도하지 못하고 호스트를 불러낸 것이다.
베르덴은 신격을 체득해 더 날카로워진 직관력을 발휘했다. 죽음의 문, 즉 사문(死門)이 말 그대로 문의 역할을 한다면 어디로 이어졌을까.
저 너머에 무엇이 감춰져 있길래 이토록 강하게 그의 출입을 거부하는 걸까.
선택이라고 하나, 실상 강요나 다름없는 타락의 선택지.
운명의 사도.
죽음의 문을 통해서 현현하는 옛 왕의 군세.
베르덴은 운명(運命)을 느꼈다.
‘아홉 개의 사문은 그 다섯 번째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운명의 원천과.’
암흑 균열이 베르덴을 고요히 응시했다. 파멸의 개념은 운명의 파괴에서 탄생했다. 다섯 번째 세계와 베르덴은 인과로 이어졌다.
머릿속에서 ‘당신’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지식을 감당키 어려운 자는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하지. 후회할까, 저항할까, 다른 길을 찾을까. 진실을 알게 된 너는 어떤 선택을 내릴까.}
호스트가 말했다.
{아르카디옴은 15일 뒤에 개최된다.}
15일?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더니, 드디어 준비가 끝났나.”
{다행히 어떤 만찬이 준비되었는지는 보지 못한 모양이군.}
호스트가 낮게 웃었다.
{성의를 다한 보람이 있길 바라지.}
그링 아르카넘의 페이지가 촤르륵 넘어가더니 책장이 닫혔다. 베르덴은 손 위로 떨어진 세계 금서를 아공간에 보관했다.
여전히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지식의 만찬회가 개최될 때까지 미룰 수밖에.
붕괴된 대지 위로 서늘한 바람이 분다.
사아아아아───
베르덴의 영혼과 육체에서 작열감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마도 현신의 반동. 손끝에서 떨어진 생체 조직이 하늘로 떠오르며 소멸한다.
그리고 항상성과 리산드로의 열매 포션 덕분에 금세 사라진 피부가 차오른다.
‘스스로 파멸자가 된 대가…….’
한계를 벗어난 파멸의 개념은 베르덴을 포함하여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 상대를 멸하고자 하면 베르덴 또한 멸망을 각오해야 한다.
마도 현신을 과도하게 사용한 순간 언젠가 그의 항상성은 파괴되고 말 테지.
‘안정화와 재정비에 더 집중해야겠군.’
호흡을 정리하며, 베르덴이 울퉁불퉁하게 치솟은 지각에 대충 걸터앉았다. 바닥을 짚은 [인테리스]를 몸 안쪽에 두어 어깨에 얹었다.
북쪽에서부터 이곳까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두 재해가 부조화스럽게 어우러진 듯한 분쟁 지대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폐하, 무사하십니까!”
마침내 전투가 끝난 걸 인지한 그레이브가 계명 집행 부대를 이끌고 날아왔다. 통제를 상실한 언데드 무리는 루아스교에 의해 정화되는 중이다.
부대 내에는 블랙 아워의 패잔병 출신인 오페아 로겐테나도 있었다.
“사, 상태가 위중하세요……!”
“목숨엔 지장 없다. 포션도 복용했고.”
“그래도요!”
초월자의 생명력은 인간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영역에 있다. 베르덴에게 그리 대수롭지 않은 상처도, 다른 이에게는 치명상이다.
오페아를 비롯한 에온의 일원들이 베르덴의 육체 상태를 점검했다.
베르덴이 말했다.
“이미 카인 측과 만났다. 라테온에게 자초지종도 들었고. 다사다난했더군.”
“……! 하하하, 그래도 폐하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라테온이 살아났다는 소식에 그레이브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아까 그자는 무엇이었습니까?”
“델하룬의 여제. 주검의 영광과의 거래로 온전히 부활한 초월자다. 옛 왕의 세력은 아니기에 생포하려 했으나, 보다시피 도주했지. 그래도 한동안 움직이진 못할 거다.”
“여제라면…… 이종족 전쟁의 원인.”
역사에 이름을 남긴 초월자의 등장에 그레이브가 표정 관리를 못 했다. 도대체 이 대륙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불투명한 미래를 가늠하려던 그레이브가 시선을 높였다.
“저것이…… 죽음의 문이 이번 사태의 원흉이라고 생각했는데, 맞습니까?”
“그래. 물리적인 걸 떠나서 내 힘으로는 파괴하긴 어렵다. 그리고 하부 수인 부족에 죽음의 문이 하나 더 있다더군. 일단 남은 비행정을 수습해 서쪽으로 이동한다.”
베르덴이 단언했다.
“아드리안이 그곳에 있다.”
“당장 채비를 갖추겠습니다.”
그레이브가 즉각 명령을 받들었다. 직후 에온에 속하지 않은 인물이 접근했다. 현 델하룬의 이인자가 베르덴에게 모습을 보였다.
미라셀이 예를 갖췄다.
“델하룬의 근위사단장, 미라셀. 대왕을 모시는 자가, 에온의 정점을 뵙습니다.”
“용건은?”
“에온의 천검만이 아닌 저희 대왕께서도 행방이 묘연해지셨습니다. 병력을 지원하겠습니다. 저희도 수색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에온과 델하룬은 사실상 적대적인 관계인 데다가 에온이 권역을 침범한 상황임에도 미라셀은 베르덴을 극진히 대했다.
그저 긴장하고만 있을 뿐 적대감은 없다. 공사와 손익의 구분이 명확한 여자였다.
공간이 울렁거린 건 그때였다.
“……!”
“……?!”
베르덴 말고도 공간 마법을 다루는 그레이브가 반응했다. 마법적 감각이 속삭인다. 이제 <전이>를 사용할 수 있다고.
“갑자기 공간이 안정되다니.”
“외부에서 개입했군.”
베르덴은 먼 서쪽을 바라봤다.
“대륙급 규모…… 마탑이나 마도국이 뭔가를 한 것 같다. 하긴 시간이 꽤 지났으니 그럴듯한 대책을 마련할 때도 됐지.”
히스릴의 생포를 뒷전으로 미룬 베르덴이 마력을 일으켰다. 무한의 마도를 개방한 그의 손끝에서 공간 마법의 술식이 진(陣)을 그렸다.
“언제 공간이 다시 불안정해질지 모르니 서둘러 이동한다.”
* * *
사문에서는 영혼을 이해하지 못한 자가 들어가면 길을 잃어버린다. 게다가 영혼을 모르는 자는 죽음의 문을 열 수 없다.
영혼을 다루는 욕망 – 아니무스에 약 3세기 동안 영혼이 보관되어 있었던 히스릴은 그 조건을 충족한 초월자였다.
허공에 생긴 틈새.
콰아아아아앙!
산 자의 영혼이 죽은 자의 세상으로 가듯이…… 빛에 가까운 속도로 이동하던 그녀가 균열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안 그래도 치명상을 입은 몸에 충격이 가해지며 내장이 울렸다.
“다른…… 문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사문을 도주로로 삼은 것은 히스릴이 즉흥적인 판단이었다. 물론 안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다는 확신 정도는 있었다.
직접 사문을 개방했으니까.
다만 들어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터라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지 못했다.
“끄응…….”
히스릴이 몸을 돌리고는 필사적으로 구덩이에서 기어 나왔다. 베르덴의 중력 마법에 격중당하며 얻은 중상이 낫지 않는다.
이미 포션의 효능이 다한 것이다.
히스릴의 생명력은 너무도 크기에 그렇게 효과가 좋은 포션조차도 온전히 그녀의 몸 상태를 회복시킬 수 없었다.
‘기(氣)가 완전히 바닥이야.’
손가락에 힘이 없어서 부러진 팔뼈로 무른 땅을 짚었다. 작은 구덩이조차 나가기 어려울 만큼 지치고 말았다.
‘마지막 마법. 역시 초위 마법이었나? 정확히 내 몸에 있는 기운만을 없애 버렸어. 비물질만이 아니라 혹시 개념도 파괴할 수 있는 건가? 만약에 베르덴이 내 존재를 지정해 멸하고자 했다면…….’
선명한 붉은빛이 그어진 어둠의 섬광.
콰르르르륵!
전투를 결정지은 마법에 직면한 순간을 떠올린 히스릴이 미끄러졌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그녀가 헛웃음을 지었다.
눈꺼풀에 맺힌 땀방울이 부드러운 볼에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아…… 겁먹었나. 정신적으로 좀 시달리겠네.”
꼬리를 만 짐승이 되어 버린 제 처지에 조소하곤 다시 위를 향했다. 가까스로 구덩이에 상반신을 걸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
“…….”
가도를 지나던 마부가 마차를 멈춘 채로 입을 쩍 벌리고 있다.
경국지색의 미인이 팔뚝을 뚫고 나온 뼈를 호미 삼아서 크레이터에서 올라오는 걸 보면 누구나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괘, 괜찮소?”
“그래 보여?”
“아, 미안하오! 당장 도와드리겠소!”
마부가 허둥지둥 내려와 발 빠르게 히스릴에게 달려왔다. 히스릴은 마부의 움직임을 관찰해 무력을 파악했다.
‘용병 출신인가. 약하네. 죽이는 건 문제없겠어.’
남자의 성적 욕망이 얼마나 충동적인지, 그리고 히스릴은 사내들에게 자기가 어떻게 보이는지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움직이지 못한다고 수작을 부리면 그 자리에서 토막 낸다. 솔직히 수작을 부리길 원했다. 히스릴은 마차가 필요했으므로.
의외로 히스릴은 순정파다.
“일단 마차에 실어 드리겠소. 아플지도 모르나, 좀 참으시오.”
멀쩡한 팔을 잡아 히스릴을 지상으로 끌어올린 마부는, 평소에 가지고 다니는 들것을 꺼내 히스릴을 옮겨 주었다.
“상태가 심각하니 내 집까지 좀 달리겠소. 이랴!”
“……?”
허름한 마차가 가도를 질주한다.
히스릴의 미색에 홀리긴 했으나 기이한 절제력을 발휘한 그는 성실하게 그녀를 치료할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뭐야, 이 마부?’
안전하게 마차에 실린 히스릴이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목소리를 냈다. 그녀가 특유의 매력을 발산해 마부의 속내를 건드렸다.
“집이라니…… 혹시 치료사?”
“평범한 마부일 뿐이오. 집에 아내와 딸이 있는데 그들도 치료에 해박한 지식은 없소. 하지만 은인에게 받은 아주 좋은 포션이 있지. 그거라면 당신도 한숨 돌릴 수 있을 것이오.”
마부는 능숙하게 마차를 몰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틀었다.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고 있소. 단언컨대 당신의 몸에 그런 의미로 손을 댈 생각은 추호도 없소. 가족 앞에 얼굴을 못 들 짓은 안 하오.”
“아내가, 예쁜가 봐?”
“내 눈에는 예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떨지 모르겠구려. 하지만 몇 년 동안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모신 적이 있었소.”
그는 진심으로 웃었다.
“행운의 선율가라고 들어 보셨소?”
“행운의 선율가?”
“지금은 은퇴했지만, 이 세상 누구보다도 찬란한 노래를 들려주었던 음악가였소. 그 목소리를 들으면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었지. 나는 행운의 선율가를 데리고 지역을 누비던 마부였소.”
마부 클린턴.
보헤미른 마탑을 향한 복수를 꿈꾸던 이자벨라가 연금술로 돈을 벌고 있을 때, 이형종의 맹독에 당한 클린턴의 가족은 이자벨라가 제조한 특효약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이후 이자벨라가 딸에게 재미 삼아서 들려주던 노래를 접한 클린턴은 그녀에게 음악가가 되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했다.
에온의 소식이 게재된 신문을 읽을 때마다 그는 자부심을 느낀다.
정말 인생 최고의 조언이었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히스릴이 관심이 생겨 물었다.
“은퇴하고 뭐 하는데?”
“마법사로서 아주 잘 살고 있소. 최근에 위험한 역병이 돌았었는데, 하하. 우리 가족이 걱정된다며 직접 돌봐 주기도 했었소. 예나 지금이나 내 평생의 은인이오.”
얼마나 아름답길래 히스릴의 외모에 면역이 있는 걸까. 뭔가 경쟁심을 느낀 그녀는 마부가 드물게 좋은 사내임을 확신하고 긴장을 풀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야?”
“여기? 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공간 이동 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졌다고 신문에서 그러던데, 전이 사고에 휘말린 모양이구려.”
다쳐도 그렇게나마 목숨을 건진 게 천운이라면서 클린턴이 말했다.
“여긴 중앙 대륙이오. 거대 도시 가르간트 근처에 있는 마을이지.”
* * *
구속구를 풀어 주자마자 마울러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바라던 바였다.
어차피 싫어도 전선에서 다시 보게 될 테니 둘이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타앗.
아드리안은 통신 장치를 작동하며 남동쪽으로 이동했다. 팔찌가 멀쩡히 기동하다 계속해서 도중에 정지됐다.
‘주군께서 새로운 중추 신호기를 가져오신 것 같은데, 이전과 다르게 통신이 아니라 장치 자체가 이상하다. 망가진 건가?’
아드리안은 마법 기술에 문외한이다.
쯧.
어쩔 수 없이 통신을 포기한 아드리안이 기동에 집중했다.
히스릴이 남긴 철검 한 자루만을 손에 든 그가 거치적거리는 언데드 무리를 베어 버리며 로니아 왕국 쪽으로 향했다.
‘기척.’
앞을 가로막은 절벽을 순식간에 타고 오르자…… 금색으로 테두리가 치장된 로브를 두른 존재가 손을 모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데드.
로브 안은 어둠으로 덮여 있어 알아볼 수 없지만 여타 언데드와는 격이 다른 죽음의 기운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색의 검기가 솟아오른다.
대화의 여지 없이 즉시 양단하려던 도중에 놈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인간의 것이 아닌 흉악한 손의 형태였다.
[생사를 나눌 생각은 없다, 아드리안 첸버스. 난 뜻을 전하러 왔을 뿐이니.]
“……!”
언데드가 정확히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드높은 지성이 느껴졌다. 아드리안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검을 겨누었다.
“넌 뭐냐.”
[크세리온 제국 제4사령관. 사르카논.]
옛 왕의 충직한 신하.
방금 동대륙 남부에서 두 번째로 개방된 죽음의 문에서 출현한 사르카논이 팔꿈치를 굽힌 채 한쪽 팔을 들었다.
아드리안의 감지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언데드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군세를 물리겠다.]
“뭐?”
[그분께서 개전(開戰)을 선언하실 때까지 우리는 전쟁에 임하지 않는다. 최후의 내일을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춰라. 시시하게 끝나지 않도록.]
사르카논이 천천히 팔을 내렸다.
[전쟁이란 서로 모든 걸 부딪치는 것. 그것이 옛 왕께서 추구하는 방식이니. 곧 모든 대륙에 찾아올 제국의 초대장과 전령을 맞이하라.]
하늘이 불규칙하게 어둠으로 물들었다.
통신 장치가 점멸했다.
사악한 마력이 음습하게 몰아치는 공간 속에서 사르카논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지며 그 목소리만이 대기 중에 맴돌았다.
[평화를 낭비하지 마라.]
아드리안의 검기가 허공을 가름과 동시에 음성이 뚝 끊겼다. 마법의 일종인가. 존재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둡게 명멸하던 하늘은 어느샌가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설마.’
기분 나쁜 조우에 미간을 좁힌 아드리안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옛 왕의 봉인 해제가 목전에 다다른 건가.’
통신 장치에 새로운 신호를 들어온 것을 확인한 아드리안이 손목을 올렸다. 정황상 그 사령관이라는 언데드 때문에 매직 아이템의 일시적으로 마비가 된 듯했다.
───광검은 회수했다, 아드리안. 위치를 말해라.
수십 일 만에 듣는 주군의 목소리.
다른 사람들이 몇 번이고 안부를 묻고, 복귀를 환영했을 것이다. 아드리안은 미사여구 없이 즉시 상황을 보고했다.
“주군, 히아레마르 내해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벌써 옛 왕의 봉인이 풀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륙 전역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