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화 죽음은 없다 (2)
히아레마르 내해가 네크바엘이 만드는 인력에 끌려온다.
규칙적인 파도의 웅얼거림은 이내 사라지고, 해수면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물방울이 분리되어 떠오른다.
부패한 대기가 네크바엘을 중심으로 맹렬하게 원을 그린다.
고오오오오오오……!
생명을 떨리게 만드는 울림이 고막을 파고들어 이명을 자아냈다.
적룡 사르칸드라 이후로 처음으로 고룡이 대륙에 등장했다.
아칸드와, 태초의 드래곤과 연이 닿은 베르덴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고룡은커녕 성체 드래곤조차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고룡의, 원수를 대하는 것 이상의 살의를 맞닥뜨린 충격은 곧 형언할 수 없는 경악으로 이어졌다.
“가주.”
베르덴의 파멸이 만들어 낸 것과는 다른 세기말의 풍경을 목도한 이자벨라가 고룡의 입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둑한 광채를 주시했다.
“이거, 못 피해.”
“베르덴!”
“여파에만 신경 써라.”
베르덴의 검은 불꽃을 숨결로 내뱉었다. 심장의 무한한 마력을 끝없이 불태우는 겁화(劫火)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내가 상쇄할 테니.”
초위 마법을 시전한 직후에는 필연적으로 빈틈이 생기고 만다.
네크바엘의 공격 범위에 명확히 포함된 아칸드는 대처조차 하지 않았다. 방어도, 공격도, 회피도 하지 않을 듯한 기세였다.
‘놈은 행동을 절제하고 있지만 신뢰하지 못하니 무시할 수도 없다.’
세 명이 전부 초위 마법을 발현하면 아칸드에게 등을 내어 주는 꼴이다.
화아아악!
베르덴의 판단이 합리적이라고 여긴 반젤리스는 마도 <원천>이 깃든 스태프를 움직여 마력의 흐름을 시시각각 변화시켰다.
이자벨라는 [끝없는 만상]을 소환하여 오른손에 쥐었다. 이 중에서 가장 미력하기에, 그녀는 형안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상황의 허점을 찾아 개입할 기회를 찾으려 했다.
둘과 달리 잠시 고민한 테아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양팔을 강하게 내리쳐서 장대한 파도의 성벽을 일으켰다.
후웅.
네크바엘과 가장 가까운 베르덴이 [인테리스]를 허공에 띄웠다.
그리고 합장했다.
‘초위 마법은 마도의 결정체.’
세계의 틈새에서 인간계 최초의 왕을 상대했을 때 8위계를 자각하지 못한 베르덴은 무려 네 개의 초위 마법을 연달아 시전했다.
잘못된 방법이었다.
8위계가 되고 나서야 초위 마법의 올바른 용법을 이해했다. 베르덴이 보유한 초위 마법은 일격이 가장 중요하다.
그 본의에만 집중하여 마력과 정신력을 할애해야 한다. 다른 마도의 초위 마법을 쓸 수 있는 여지를 아예 남기지 않고.
‘궁극의 마법에 두 번은 의미가 없다.’
파멸의 마도에 한 번.
무한의 마도에 한 번.
두 개의 마도를 개척한 베르덴에게 허락된 초위 마법의 횟수는 두 번이다. 그 이상이 되면 효율성과 위력이 큰 폭으로 떨어진다.
최근 여제에게 파멸의 초위 마법을 썼으니 당장 남은 건 한 번뿐이다.
‘실재의 말살.’
베르덴을 기준점으로 반경 수십 미터의 수평선이 검은 화염에 광기와 함께 타올랐다. 네크바엘에게 끌려가는 바닷물이 분해됐다.
망화의 본래 주인인 다히트 웨스로엘은 7위계가 한계였다.
초위 마법 <극제해방>으로 마력회로의 안정성을 제거, 한계 위계의 절대적 명제를 지웠으나 본인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렇기에 망화(亡火)의 마도는 7위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다히트는 애초에 8위계의 재목이 아니기에 한계 위계를 돌파한다고 해도 그 이상의 힘을 거머쥘 수는 없었다.
7위계 상위에 오른 경지와 마도 개념을 통달하는 과정을 모조리 편법으로 극복하기에는 8위계까지의 거리가 너무도 멀었으므로.
순수한 8위계의 <망화>.
공상 속의 가능성으로 남은 미답의 영역은 오직 베르덴만 나아갈 수 있다. 이에 다히트의 모든 기억이 깊게 속삭였다.
그래, 네가 곧 소멸이다.
망화의 불길에 파묻힌 베르덴이 완전히 밀착시킨 두 손을 움직였다. 안광을 번뜩였다. 한 차례가 아닌 세 차례 응축된 소멸의 힘이 이내 베르덴의 제어에서 벗어났다.
<무암(無暗)>
이글거리는 암흑이 일시적으로 공간조차도 지워 없애며 굽이친다. 굽이치며 솟구친다. 사방에 뿌리를 내린 네크바엘의 기운은 대립하지 못하고 삽시간에 소멸에 삼켜지고 있다.
그리고───소리가 멎었다.
비탄의 숨결.
네크바엘이 히아레마르 내해를 향해서 타락의 어둠을 토했다. 망화와는 개념적으로 다른 죽음의 그림자.
이윽고 사룡의 브레스와 베르덴의 초위 마법이 근접했다. 그것들이 닿기도 전에 어둑한 섬광이 순간 작렬했고.
히아레마르 내해에 밤이 현현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썩어 문드러져 순수성을 상실한 생명력이 결국에 소멸되었고, 소멸은 멸하고자 하는 생명력의 크기가 너무도 커 힘을 다하고 흩어졌다.
그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서 베르덴과 네크바엘이 접전을 이루는 양상.
힘의 격돌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강한 후폭풍이 내해를 강타했다.
─────! ──! ──────!
반젤리스가 지배하는 원천의 흐름이 여파의 무게에 흔들렸다.
“이만한, 힘의 대립은 처음이군……!”
반젤리스는 8위계 다다른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동급과의 전투 경험이 현저하게 부족했다. 8위계급 존재가 수백 년을 통틀어도 몇 없을뿐더러 그런 적과 갈등을 빚을 일도 없었으니까.
무엇보다도 반젤리스는 7대 마도왕이니 무작정 별다른 이유조차 없이 그만한 위험을 감수해서도 안 됐다.
베르덴과 네크바엘의 충돌은 반젤리스에게 격한 흥분을 불러일으켰고, 또 반젤리스의 약점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쩌적.
범위가 조금 더 제한적이었으면 모르나, 주변을 크게 보호해야 하는 터라 물샐틈없이 막아 내기에는 마력의 밀도가 부족했다.
약해진 일부 마력의 기류 사이로 무거운 돌풍이 비집고 나왔다.
촤아아아아아악!
선박들을 보호한 테아렐의 파도 장벽이 빠르게 깎여 나간다.
아칸드를 계속해서 의식하면서, 그녀도 이만한 충격파에서 이렇게 많은 인원을 피해 없이 지키는 건 무리였다.
테아렐이 수복하는 것보다 빠르게 파도 장벽의 두께가 얇아진다.
‘이런, 생존자는 절반 정도만…… 응?’
푸확!
“도울게요!”
갑자기 이자벨라가 파도에 직접적으로 손을 넣어 마도 <침식>을 힘껏 발휘했다.
발로크 베시아스의 스태프의 머리 부분에서 붉은 수정을 중심으로 세 개의 고리가 겹치지 않고 교차하며 회전을 거듭했다.
‘뭐야?’
무너지기 직전에 테아렐의 파도가 부분적으로 보강되었다.
테아렐에게 가해진 부담의 절반도 이자벨라에게 옮겨 갔다. 이자벨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코피를 쏟으며 힘겨워하고 있지만, 명백히 테아렐과 같은 마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내 마법에 간섭을……?’
이자벨라의 마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당황한 테아렐이, 일순간 모두를 스쳐 지나간 어둠에 상체를 움츠렸다.
비탄의 숨결과 <무암>이 서로를 밀어내다가 끝내 동시에 폭발했다. 반경 수백 킬로미터의 구름이 전부 사라져 창공이 환해졌다.
마지막으로 추락한 파장과 잔향이 초월자들의 발밑을 뒤집어엎었다.
* * *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
내해에 구멍이 뚫렸다.
상공까지 분출한 바닷물이 소나기가 되어 모두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뒤이어 거대한 그림자가 수면에 가까워졌다.
쿠우우우우웅!
수복되지 않은 바다의 절벽 끄트머리에 착지한 네크바엘이 가라앉지 않은 채 섬뜩한 안광을 빛내며 머리를 들이민다.
망화의 초위 마법은 반동이 거의 없다.
들끓는 겁화를 다스리면서도 베르덴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세계수…….]
네크바엘이 콧숨을 내쉬면서 베르덴을 자세하게 관찰했다. 심장에 깃든 마력의 근원을 꿰뚫어 본 그가 비늘을 꿈틀거렸다.
[……와는 다르군. 본질적으로는 그 이상.]
콰아아아!
네크바엘이 앞발을 내리찍었다. 아칸드가 있던 장소였다. 물보라가 치는 광경 속에서 아칸드가 그의 앞다리 위를 거닐었다.
[무엇이냐, 이 존재는.]
“나의 운명을 실현해 줄 존재지.”
[사도의…….]
아칸드가 보란 듯이 네크바엘의 정수리에 자리를 잡았다.
네크바엘은 으르렁거리며 진심으로 불쾌감을 표출했으나, 끝내 아칸드를 붙잡아 내던지려 하지는 않았다.
주종 관계인가.
그에 가까워 보인다.
네크바엘의 존재 자체가 아칸드에게 종속돼 있는 듯했다. 그것은 아칸드가 아니라 옛 왕의 고유한 힘일 것이다.
운명의 사도란 ‘당신’에게서 힘을 받은, 선택받은 존재를 의미하니까.
“네크바엘을 기다렸을 뿐이지만,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아칸드가 말했다.
“우리는 대등한 전쟁을 벌일 수 있겠지. 과거의 초월자 전쟁보다 더.”
“그게 네 사명인가?”
“나의 크세리온 제국은 재건된다.”
그는 베르덴, 반젤리스, 이자벨라, 또 테아렐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약 8세기가 지났음에도 젊음을 자랑하며 근엄하게 선언했다.
“21일 뒤에 전령을 보내지.”
네크바엘에 탑승한 아칸드가 저항을 택한 대륙을 굽어보았다.
“그때까지 전쟁은 없다.”
사룡의 날개가 풍압을 일으켰다. 아칸드를 태운 네크바엘이 공중으로 떠오르고는 히아레마르 내해를 떠나려고 한다.
이번에는 막지 않았다.
고대의 크세리온 제국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아칸드만이 아니었다. 베르덴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더 이상의 교전은 손해만 야기할 터.
생전 고룡의 힘을 되찾은 사룡을 토벌할 대책을 따로 강구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이 일치한 터라 굳이 합의점을 찾을 것도 없었다.
“흐음.”
아칸드와 네크바엘이 멀어져, 머지않아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반젤리스가 짧은 수염을 쓸었다.
“루아스교가 지금껏 숨겨 온 정보와 어긋나는 부분이 많군.”
반젤리스가 비평했다.
“이 자식들, 쓸모가 없는데.”
“아르나크 제국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서대륙의 절반 가량을 보호, 아케나드 마도국은 불안정한 공간 좌표를 고정하는 데 성공, 에온은 피울음 역병 치료만 봐도 말할 것 없지만 초월자 연합의 구심점이기까지 하고. 그동안 교국이 한 건 성율성단을 창설해서 이단 심문으로 배신자들 솎아 내고 있는 것밖에 사실상 한 게 없어.”
테아렐이 손가락을 접으면서 강대국들의 업적을 나열했다. 대전당에 꽤 오래 머물면서 이것저것 들은 게 좀 많았다.
루아스교는 최근 세계 종교에 걸맞은 위상을 증명하지 못했다.
“교황은 아직 거동이 조금 불편하다 하고, 성자는 경험 미숙, 성녀는 감감무소식. 신인이 없으니 제대로 힘을 못 쓰네. 베르덴, 그냥 네가 종교 세워.”
“하하하하하, 그것도 나쁘지 않겠어. 레프라기움 마탑도 신비주의만 일삼으니, 최초의 마탑을 내세워 마탑 서열 1위도 하면 되겠군.”
“아하하…….”
반젤리스와 테아렐은 농담 삼아 던진 말이었지만 이자벨라는 내심 뜨끔했다.
베르덴은 자연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확실히 신이 된 영향이 은연중에 퍼지고는 있는 듯하지만.
대륙에서 단 한 번도 신격을 드러낸 적이 없으니 신앙과 종교의 단어가 언급될 때마다 반응할 이유는 없었다.
‘근데 섭리자는 뭐 하고 있는 거지?’
나중에 알아봐야겠다.
“가주,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
“준비를 갖출 수밖에.”
아칸드가 21일 뒤에 전령을 보낼 것이고, 전쟁을 중단하겠다고 했으나 따로 수작을 부리지 않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아칸드의 행방을 추적하고.
초월자 연합을 주축으로 세력들을 집결.
세계 회의에서 베르덴이 규합했지만, 배신자로 인해 흐트러진 국제 사회가 붕괴되지 않도록 다시 정립해야 한다.
베르덴이 반젤리스에게 말했다.
“내게 묻고 싶은 게 많겠지만 지금은 미루지. 할 일이 태산이니.”
“그래, 일단 정상 회의부터 잡는 게 좋겠지.”
“근데 있잖아.”
테아렐이 의문을 표했다.
“왜 베르덴이 반젤리스 동생이야?”
초대 마도왕에 얽힌 베르덴과 반젤리스의 관계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아직은…… 에온과 마도국이 동맹 이상의 관계임이 밝혀지면 국제 사회는 극도로 경계할 것이다.
반젤리스가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내가 먼저 8위계 초월자가 됐으니 그리 어색한 표현은 아닐 텐데. 닮기도 했고.”
“닮아? 양심이…….”
테아렐이 미간을 좁혔다가 뭔가를 감지한 듯이 휙 고개를 돌렸다. 전투 여파에 죽은 해양 생물들의 잔해가 떠올라 있다.
머리가 박살 난 커다란 물고기가 선혈을 흘리며 둥둥 떠 있다.
그때였다.
첨벙!
그것이 갑자기 물속으로 들어가더니 히아레마르 내해를 유영했다. 사후 경직도 아니고, 신경이 자극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머리가 없는데 멀쩡히 바다를 누볐다. 살아 있는 것처럼.
“……이자벨라.”
“저 물고기, 안 죽었어.”
이자벨라의 형안이 머리 없이 움직이는 생물의 본질을 시각화했다.
“살아 있어.”
사체여야만 하는 생물들이 하나둘씩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그들은 아칸드의 진의가 무엇인지 이해했다.
죽음은 없다.
옛 왕이 봉인에서 완전히 풀려나자 전 대륙에서 죽음이 사라졌다.
* * *
죽음이 사라졌다. 대륙에 어떤 혼란이 생길지 아직 가늠할 수 없다. 에온의 정보관들에게 신속한 조사를 명령했다.
아드리안은 하이랜디아에서 마스터 벤디에와 서약자 유리온과 함께 초월자 연합의 주 정예군을 훈련시키며.
동대륙 남부에서 입은 부상을 빠르게 회복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비보와 낭보가 난무한다.
주인 없는 땅에서 베르덴은 알파와 함께 에온을 이끌었다. 자리를 비운 시간만큼이나 산적한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베르덴은 에온의 수장으로서 활동하며 전력의 회복을 도모했다.
그런데 단 하나의 소식이 그런 베르덴의 신경을 크게 건드렸다.
[성자?]
“성자가…… 로니아 국왕을 죽였다?”
“우연히 제가 생포해서 직접 계명 집행 부대에 인계했습니다만…….”
“갑작스러워서……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카인보다 먼저 주인 없는 땅에 복귀한 세를로와 라테온이 뒷짐을 진 채로 베르덴과 알파 앞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보고했다.
“그래, 루아스교가…….”
정적이 내려앉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라테온이 슬쩍 눈치를 봤다.
“교황과 성녀가 잘못 가르쳤나 보군.”
베르덴이 기밀문서를 내려놓았다.
“그럼 내가 가르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