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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사적 복수(10)
우리의 반격으로 추격대가 반파되자 추격자들은 거리를 확 벌렸다.
물론 날이 밝은 것도 영향이 있을 터였다.
멀리서도 확연하게 이쪽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저들을 어쩌지요?”
사련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어왔다.
“직접 가서 떨어뜨릴까요?”
“되었다. 그냥 두거라.”
지금 죽어라 추격대를 다 처치해 봤자 다른 추격대가 붙을 거다.
더구나 우리가 과민한 반응을 보인다면 이쪽에 담악이 있다고 더욱 확신하겠지.
아직 그 확신을 줄 필요는 없다.
그래, 차라리 지금은 혼란을 주는 게 낫다.
“마차를 세워라.”
“에? 지금요?”
“그래. 어차피 밥을 먹어야 하니.”
어차피 놈들도 극도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중이다.
예상치 못한 행동이 곧 놈들에게 혼란을 조장할 것이다. 정시 때 그랬던 것처럼.
달리던 마차는 관도 한쪽에 자리한 큰 공터가 나타나자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다른 마차들도 한 번씩 쉬어 가는 쉼터였다.
태을문의 사람들과 담악은 마차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
복면을 쓴 흑도인들과 나를 비롯한 사련 등 몇몇 사람만 식사를 준비하게 했다.
어차피 솥을 건 후에 물과 말린 쌀, 육포와 건야채 등을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기에 손이 많이 갈 것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오려는 놈들이 보이기에 화살 몇 대를 쏴주니 놀란 고양이 마냥 후다닥 뒤로 물러난다.
“천천히 목을 옥죄어 오는 밧줄 같네요.”
사련의 짧은 감상.
물러나는 그들을 보고 있음에도 그녀의 안색은 편해 보이지 않는다.
금·은·동 형제와 달리 숨 가쁘게 쫓기는 추격전은 처음 겪어 볼 테니.
사냥감이 되는 건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게 만든다.
사흑련 호위들만 봐도 그렇다.
사련보다 강호의 경험이 많고 철저하게 훈련받았을 그들도 다른 이들처럼 배식받은 죽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었으니.
“나도 먹지 못하겠는 것이야.”
갑자기 당서희가 절반 이상 남은 죽 그릇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말했다.
“죽을 다 먹기 전까진 당과 금지입니다.”
“……
쫓길 땐 원래 육포와 당과만 먹는 것이야.”
육포는 그렇다 치고…… 거기 당과가 왜 들어가는데.
“죽을 다 먹지 않으면 다음 당과 배식은 없을 겁니다.”
입을 삐쭉 내밀며 다시금 죽 그릇을 받아 든 당서희를 두고 마차로 향했다.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문을 조금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당서희처럼 죽을 먹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식사부터 하시죠. 곧 출발할 겁니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식은 후에 한 번에 마시면 되니까.”
담악은 그렇게 말하며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그 옆에는 새로 작성된 서책이 벌써 두 권이나 쌓여 있었다.
낌새를 보아하니 마차로 이동하는 내내 계속 무언가를 적고 있었나 보다.
“대체 뭘 적고 있는 겁니까?”
“유서 같은 거라고 보면 될 겁니다.”
나더러 탈출시켜 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빠르게 놀리던 붓을 잠시 멈추고 나를 슬쩍 본 후 다시 고개를 돌려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탈출을 시켜달라 했지 살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
내내 붓을 붙들고 있던 담악이 처음으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가는 길에 갚을 수 없는 빚을 또 지고 싶지 않으니까. 여기까지만 해도 진 공자는 충분히 할 일을 다 했습니다.”
냉정한 말과 달리 입가에 작은 미소까지 띤 담악의 태도에 나는 달리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를 배려하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쾌한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나는 대답 대신 마차 문을 강하게 닫는 걸로 내 기분을 표했다.#거리를 두고 따라붙던 추격자들은 하나둘 아군이 추가되자 다시금 공격을 시작했다.
독과 암기에 높은 경계심을 가진 놈들은 활과 창으로 원거리 공격을 하기 시작했고, 켜켜이 날아든 화살 공격에 마차는 어느새 고슴도치처럼 변해 버렸다.
“크윽!”
사상자도 나왔다.
“사흑련을…….”
어처구니없게도 눈먼 화살에 급소를 맞은 호위는 동료의 품 안에서 죽어가면서도 자신이 소속된 사흑련의 이름을 부르고 숨을 거뒀다.
전생의 소정대 얼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분개한 사절단 호위 하나가 추격자들을 쫓고 오겠다며 숲속으로 뛰어들었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허망하게 두 사람이 죽고 남은 사절단 인원은 이제 총 일곱.
그중 학사는 담악을 포함해 총 셋인 상태가 되었다.
불행한 소식에 학사들은 점점 더 불안한 모습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반대로 담악은 그리 격동하지 않았다.
그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써 내려가는 붓놀림이 더욱 빨라졌을 뿐.
마치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사람처럼 그는 귀신이라도 들린 듯 서책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이 위급한 순간 써야 할 유서란 게 당최 무엇일까.
그리고 그 유서에 들어가는 글자는 왜 저리도 많을까.
의문은 깊었지만 장시간 생각할 틈 따윈 없었다.
삐익
-하오문의 전서응이 전한 새로운 소식.
-무당파 맹호대 접근 중
-점창파 태화대 접근 중특작 부대가 아닌 본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육가창식에 대한 반발치고는 반응이 극단적이다.
맹 내부에 뭔가 일이 생긴 걸까.
애당초 계획했던 위치는 최소 남정에 도달해서 마지막 작전을 펼치는 거였는데.
조금 앞당길 필요가 있겠다.
“훠이 훠이.”
고삐를 당기자 마차의 속도가 서서히 떨어진다.
가장 앞선 우리 마차가 멈추자 줄지어 따라오던 마차들도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마차를 세운 뒤 나는 태을문의 사람들이 타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내가 문을 열자 예상했다는 듯 문주님이 검을 들었다.
“말했던 것보다 조금 이르구나.”
“저쪽이 조금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그러하더냐.”
문주님이 마차에서 내려 나와 함께 사흑련의 사절단 인원들이 타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나와 홍문기 문주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보곤 담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붓을 놀렸다.
그간 달리는 내내 마차 안에서 글을 썼던 것인지 먹을 갈던 두 학사의 양손이 시꺼멓게 물들어 있었다.
“마침 이쪽도 다 끝났습니다.”
서책 다섯 권을 완성시킨 담악이 책을 들고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학사들은 태을문의 마차로 옮겨 탔고, 사흑련의 남은 호위들은 마차를 버리고 말에 안장을 채웠다.
“준비 끝났습니다.”
이제부턴 태을문과도 헤어진 채로 따로 움직인다.
내가 당서희와 제갈천기를 바라보며 고갯짓을 하자 담악이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들 또한 태을문과 함께 가주십시오.”
예정되었던 작전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담악.
“총군사님…….”
“나와 함께 간다면 필히 죽을 겁니다.”
담담한 담악의 말에 사흑련 호위가 튀어나올 듯 다가섰다.
“안 됩니다!”
담악은 천천히 그러나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더 이상 쓸데없는 죽음을 감내할 필요는 없습니다. 련주님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사죄드린다 전해 주십시오.”
담악은 들고 있던 서책 다섯 권을 호위에게 맡겼다.
“서책 안에는 제가 죽은 후 향후 전쟁의 방향과 구파일방을 무너뜨릴 방법들을 모두 망라해 놓았습니다. 사흑련의 군사부 인원들에게 전달해 주면 모두 준비해 줄 겁니다.”
그가 유서라 말했던 것은 결국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사흑련의 미래를 대비해 놓은 것이었다.
“안 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아니요. 이곳에서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흑련도, 여러분도 살 수 있습니다.”
무공 한 자락 익히지 않았건만 그가 내뿜는 기백은 범접하기 힘든 것이었다.
호위들은 감히 그 앞에서 그의 말을 부정할 수조차 없었다.
“사흑련의 부흥은 분명 나의 죽음으로 시작될 터이니 여러분들은 지체 말고 떠나십시오.”
이 양반, 계속 이상한 소리 하네?
이야기를 듣던 나는 그에게 다가가 기습적으로 수혈을 집었다.
탁탁탁.
말을 하던 담악의 눈꺼풀이 서서히 감긴다.
“지……
진공…….”
억지로 눈을 치켜떠 수혈을 짚은 나를 노려보려 하지만, 무공도 익히지 않은 인간이 수혈을 버틸 리 만무하다.
“이, 이게 무……
슨…….”
“너무 시끄러워서 말입니다.”
“말…… 같지도…….”
그렇게 말하며 푹 쓰러지는 담악.
나는 그를 받쳐 들고 내 말 안장 위에 태웠다.
고개를 돌려보니 넋이 나간 표정의 호위들이 보였다.
“뭐 하고 있습니까? 안 갑니까?”
“네?”
“아무리 스스로 죽길 각오했다 한들 살려서 데려가야지요. 그게 호위의 책임 아닙니까?”
아, 네.”
이게 이렇게 처리해도 되는 일인가? 하는 표정의 호위들은 이내 하나둘 말에 올라탔다.
나는 당서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당 선배.”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야.”
고개를 끄덕인 당서희는 복면을 다시금 올리고 자리를 박차 뛰어올랐다.‘……
어차피 청녹색 장삼 때문에 당가 사람인 걸 다 알 텐데.’복면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추격대를 정리하기 위해 당서희가 움직이고.
나는 홍 문주에게로 향했다.
“지금 이쪽으로 무당파의 맹호대와 점창파의 태화대가 오고 있다고 합니다.”
무당과 점창을 언급했음에도 문주님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걱정 말거라. 부디 몸조심하거라.”
“네.”
이어, 태을문 사람들의 가장 뒤에 선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려는 순간.
무언가 얼굴로 날아와 잡아챘다.
“이게 뭡니까?”
내려다보니 익숙한 물건이었다. 아버지를 향해 다시 물었다.
“천잠보의 아닙니까?”
“입고 가라. 네놈 것은 망가져 버렸다며.”
얼마 전에 망가져 버렸다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아버지가 입으십쇼. 전 괜찮습니다.”
이 상황에서 더 위험한 사람을 꼽으라면 내가 아닌 아버지가 아니겠는가.
아버지를 향해 다시금 천잠보의를 던지려는 순간.
“네놈이 그걸 입고 가지 않아 혹여 죽기라도 한다면, 나 또한 따라 죽을 것이다.”
몹시도 진지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태을문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나 또한 뜨악한 표정인 건 마찬가지였고.
정작 장본인은 태연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을 잇는다.
“나는 내 사문의 사람들을 믿는다. 그렇기에 기어이 따라온 것이다. 너 또한 그렇다면, 네 안위를 먼저 챙겨라.”
그 말에 나는 감히 천잠보의를 다시 돌려줄 수 없었다.
핑
– 펑!
잠시 뒤 추격자들을 모두 처리했다는 당서희의 신호탄이 쏘아져 올랐다.
“가거라.”
아버지의 담백한 말에“보중 하십시오.”
말 고삐를 당기며 달리기 시작했다.#진소운과 담악 일행이 떠난 뒤에도 마차의 속도는 일부러 줄이지 않았다.
애당초 담악은 이 마차에 탄 것으로 되어 있어야 하니까.
사흑련의 학사들과 진태산은 마차 안에서 몸을 숨겼고, 태을문의 제자들 모두가 마차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황.
홍문기는 어느새 어엿한 숙녀가 된 자신의 딸을 보며 물었다.
“이런 일들이 많았느냐?”
“어휴…… 말도 마세요. 매일매일이 외줄 타는 기분이었다니까요.”
불만을 토로하듯 툭툭 대답하지만 얼굴엔 걱정이 한가득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두 눈에는 신뢰가 가득하다.
내뱉는 말과 표정이 다른 걸 보니 어느새 아이가 다 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진소운 그 녀석은 언제 이리 성장하여 어른들을 보살피는 수준이 돼버린 건가.
그간 너무 방만했다는 자괴감이 든다.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어른들에게 털어놓지 못했다는 건 곧 홀로 그 괴로움과 고독함을 견뎌왔다는 뜻이니까.
자책하는 마음을 참을 수가 없다.
“우리가 어른 노릇을 못 한 탓이지.”
“에?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멋쩍어하는 사련의 어깨를 두들기며 안심시켰다.
“걱정 말거라. 이제부턴 우리가 소운이의 짐을 함께 나눠 들 것이니.”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부터 강대한 기파를 발산하는 이들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이편으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단순한 정찰이나 추격을 위한 자들이 아니다.
정예.
그것도 본산이나 무림맹에서 활동할 법한 수준.
“마차 속도를 높이게.”
마차 속도를 높여보지만 쫓아오는 이들과의 거리는 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 대응하지 말거라.”
어설프게 대응할 상대가 아니었다.
정면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이들.‘무당, 점창?’어디 소속이든 만만치 않은 상대.
아니나 다를까.
쫓아오던 이들은 어느새 마차를 바짝 따라오다 못해 앞질러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바닥에 착지한다.
피어오르던 모래 먼지가 순간 무언가에 잡아채인 듯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광경에 기시감을 느낀 홍문기.
이내 용봉지회가 태을문에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봤을 땐 참으로 신기했었지.’그는 고개를 똑바로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관도를 막고 있는 서른에 달하는 인원.
그들은 이제까지의 추격자들과 달리 복면을 쓰지 않았다.
무복의 새겨진 문양을 보고 어디 소속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점창.’맨 앞에 선 자가 검을 들어 마차를 세웠다.
“어, 어떻게 할까요?”
마부의 물음에 홍문기는 고개를 끄덕였고, 마부는 고삐를 당겨 천천히 마차를 세웠다.
끼익
-경첩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자리에 멈춰 섰다.
“잠시 검문이 있겠소.”
가타부타 자기소개도 없이 자신의 용무만을 말하는 점창파의 무인.
“검문?”
“무림맹의 반역도가 탈옥하여 쫓고 있는 중이오. 협조해 주시오!”
점창파의 무인은 성큼성큼 마차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
스겅
-홍문기의 검에서 검기가 발산되며 무인의 발치에 칼자국이 새겨졌다.
“무슨 짓이냐!”
챙!
점창의 무인이 죽일 듯 노려보며 검을 치켜들었다.
그를 내려다보며 홍문기가 느긋하게 말했다.
“누구인지도 모를 자들이 마차를 함부로 열겠다는데, 가만히 두고 볼 것 같나?”
“이런 미친…… 이 문양을 보고도 모르겠더냐!”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을 가리키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사내.
그를 보며 홍문기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예전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었지.’저들의 무도함을, 저들의 비례를.
응당 그럴 수 있는 자연스런 현상처럼 생각했다.
힘이 약했기에 당하는 모멸감이라 생각지 못하고.
“네놈 사부가 누구더냐?”
“사, 사부?”
홍문기의 손가락이 마차 지붕에 달린 작은 깃발로 향한다.
“네놈의 사문에선 이 문양이 누구의 것인지를 가르치지 않았느냐?”
알고 있소. 그런데 그것이 내게 위협을 가한 이유요?”
“태을문을 알고 있느냐?”
“알고 있소. 그리고 그대들이 반역도를 돕고 있다는 것 또한.”
“그럼 명령서를 가져와라.”
점창의 무인은 대답 대신 홍문기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홍문기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좌중을 압도한다.
“설마 명령서도 없이 이리 무례를 행한 것인가? 이래서야 네놈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흑도 왈패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더냐!”
빠드득.
점창인의 입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나고, 검은 금방이라도 출수할 듯 거칠게 떨린다.
그때, 관도를 막고 있던 이들 중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쥐었다.
“태화대의 대주 장소평이라 합니다. 귀하의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태을문의 홍문기다.”
장소평은 잠시 머릿속으로 뭔가를 떠올려 보려는 듯하더니 이내 포기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모르겠군요. 혹 직위는 무엇이십니까?”
“장문인이다.”
그러셨군요.”
한 문파의 제자가 한 문파의 존장에게 무례를 범했음에도, 점창의 인물들은 곤혹스런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이것이 태을문의 현실이고 그간 자신이 외면해 왔던 진실이라는 것에 홍문기는 작게 몸서리쳤다.
장소평이 보다 여유로워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렇담 귀문에서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겠군요.”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지?”
“말씀드렸다시피 반역도를 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문에서 그 반역도를 돕고 있다는 정보도 들었지요.”
하지만 홍문기 역시 쉬이 기가 꺾이지 않는다.
“아까부터 반역도, 반역도 하는데 대체 누굴 이야기하는 것이지?”
“이름도 대지 못하면서 공무를 수행 중이라 하였는가?”
“기밀입니다.”
기밀은 무슨, 누가 봐도 기만을 부리고 있다.
지난날의 자신이라면 진작에 몸소 마차의 문을 열며 저들에게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배까지 까뒤집었으리라.
그래, 분명 그랬을 것이다.
마차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 무에 힘든 일이랴 스스로 합리화하며.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는 단순히 문을 열어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우습군.”
“뭐가 우습다는 겁니까?”
“그대들의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은 것임을 깨달았으니, 어찌 웃지 않고 배기겠는가.”
장소평이 검을 뽑았다.
“협조하지 않는다는 얘기겠구려.”
홍문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대들이 좋아하는 실력행사로 원하는 바를 이뤄보게.”
동시에 삼십(三十)
에 달하는 인원이 검을 뽑았다.
예전 같았다면 두려움에 다리가 벌벌 떨리고 손에 힘이 빠졌을 게 분명했을 터.
“오라!”
하지만 홍문기의 내면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