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68화.
끝이다.
곧 죽어도 인정하기 싫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더는 남은 수도,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없었으니까.
그래서일까.
빠드득.
이젠 발악에 가깝던 집념은 사라지고, 그 대신 원망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원망의 대상은 우습게도 단 한 명이었다.
가장 높은 DPS를 자랑하는 멸살.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는 여제.
처음 한 방의 임펙트만으로 아직도 기여도가 4위에 달하는 아스트나, 일만 대군을 이끌고 온 아스트라.
그리고 광역 CC 마법들로 베헤모스의 공격과 움직임을 저지하는 알테리온.
그들 모두 이 전장의 주역이었지만, 바탄의 원망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보다도 더욱 앞에 서 있는.
그어어- 따닥.
흐읍!
찬란한 빛의 검을 휘두르는 순백의 기사와, 그에 상반되는 검은 기운을 일렁이는 해골과 언데드 군단들.
그들의 중심에 서 있는 검은 가면과 도복을 입은 남자.
‘카이저……!’
카이저.
저놈이 모든 원흉이었다.
애당초 다크 엘프들을 설득한 것도 그였고, 권능을 막아버린 것도 그였다.
심지어 지금도 까다로울 패턴을 모두 패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최상위권 딜러의 역할을 해내고 있으니, 저자야말로 이번 패배의 가장 큰 기여를 한 원수라 할 수 있었다.
‘생각을 잘못했다. 놈의 동료들이 아닌, 저놈을 먼저 죽였어야 했어.’
죽일 수 없다면 하다못해 2인자이자 자신의 가디언인 아게리나의 디버프라도 먹였어야 했다.
이를 빠득 갈며 노기를 드러내던 바탄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이제 와서 후회해서 뭐 한단 말인가.
달라질 건 없었으며, 자신은 패배한 것을.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베헤모스 또한, 쓰러졌으니 심장을 파괴하기까진 그야말로 시간문제겠지.
심장이 파괴되면, 자신의 의식도 꺼진다.
필멸을 포기한 이상 환생조차 불가한 영원한 안식을 맞이하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세상 밖으로 나오시기 전에 바라시던 세상을 만들어두고 싶었는데…….’
그에 바탄이 질끈 눈을 감던 그 순간이었다.
[호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이질적인 기운이 전해져온다 싶더라니…… 밖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군…….]
밖에서 들려온 소리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뇌리에서 울려 퍼진 듯한…… 아니, 그보다 더 깊숙한 내면에서 느껴지는 느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감각이었으나, 겨우 그런 것에 놀랄 수는 없었다.
[크흐…… 흐흐……. 재미있는 장난감이 생기나 했건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가. 역시 바깥은 재미있어.]
쇠를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울린 순간.
베헤모스의 심장이 된 그에겐 느껴졌다.
라그 베헤모스가 떨고 있었다.
본능밖에 남지 않은 괴수에게, 그것도 한때 권좌에 있었던 괴물에게 이런 두려움을 느끼게 할 존재라니.
상식 밖의 일이었지만 바탄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 또한, 베헤모스와 같이 온몸이 떨려오는 지독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이 압도적인 기운…….’
확실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필멸자라면 본능적인 거부감과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
‘그’가 확실했다.
그리고 이를 확신하는 순간.
[호오, 나를 알아보는…… 흐음? 이 기운은……. 이거 지금 보니 제 영혼에 재미있는 짓거리를 했군. 나를 받아들이기 충분하겠어.]
‘그게 무슨…….’
[거부하고 싶다면 하라.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
‘……!’
베헤모스의 내면 어딘가에서부터 뻗어온 어둠이 순식간에 심장을 뒤덮었고.
이내 정신이 아득해졌다.
* * *
쿠우우웅!
거대한 산이 무너진 듯 웅장한 소음.
그리고 실제로 벌어진 눈앞의 광경은 그러한 소음 이상으로 거대한 압박감이었다.
육안으로 모두 담는 게 불가할 만큼 거대한 몸.
문어발처럼 사방으로 퍼지며 시야를 어지럽히던 발과, 웬만한 빌딩보다 거대한 파충류와 같은 눈동자.
그 모든 특징을 가진 존재의 크기는 아득할 정도였고.
그러한 존재가 쓰러지는 광경은 그것만으로도 그림이자 영화였다.
오죽하면 이곳에 모인 만 명이 넘는 이들이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있을까.
자신들이 만들어낸 결과임에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넋을 놓고 감상하는 모습이었다.
“와…….”
그 침묵을 깬 건, 한 줄기 감탄이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전(前) 심연의 강자, ‘라그 베헤모스’를 처치하였습니다.]
[모험의 서에 기록됩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타이틀 ‘엘라니스의 구원자’를 획득합니다.]
…….
마치 침묵이 깨진 것을 들은 것처럼, 수많은 메시지 창의 향연이 펼쳐진 것이다.
메시지 창은 말하고 있었다.
전(前) 심연의 강자, 라그 베헤모스.
하늘을 집어삼킨 눈이라 불리던 엘라니스의 대재앙이, 이제는 영원한 안식에 처하게 되었음을.
“와아아아아아!”
“씨X 해냈다! 해냈다고!”
“미친, 이걸 진짜 잡네.”
“카이저! 카이저! 카이저! 카이저!”
“멸살! 멸살! 멸살! 멸살!”
“크으! 이게 역배의 맛인가. 미쳤다 진짜.”
지금껏 지킨 침묵은 이것을 위한 것이었다는 듯.
귀가 멎을 듯한 함성이 엘프 마을 전체를 뒤덮을 만큼 광활하게 울려 퍼졌다.
일만에 달하는 이들이 한마음이 되어 내지르는 함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야구장에서 응원하는 팀이 이겨 다들 한 마음으로 소리칠 때.
가슴속에서 무언가 들끓지 않던가. 지금도 그러했다.
“크으, 엘프 형님 아주 장난 아니었습니다. 활을 어찌 그리 잘 쏘십니까.”
“김 아무개 아닌가! 그러는 자네야말로 아주 훌륭했네. 칼솜씨가 아주 제법이더군!”
“우리가 해냈습니다!”
“아아, 이런 날이 오다니. 내 죽기 전에 한을 풀게 될 줄이야……. 모두 자네들 덕일세.”
제아무리 NPC들이라곤 해도 함께 전장을 겪은 이상 전우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한순간의 일이 아니었다.
[하이 엘프 ‘베시아드 하브’님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엘프 ‘레디코’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다크 엘프 ‘크란드비’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
[숲의 종족 ‘우거든’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종족 ‘엘프’가 ‘사도’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뀝니다.]
[종족 ‘다크 엘프’가 ‘사도’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뀝니다.]
[종족 ‘초록 숲의 종족’이 ‘사도’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뀝니다.]
계속해서 울리는 알림들이, 그들의 진심을 전해주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이곳의 모든 유저들의 머리 위로 떠 오르고 있었기에 유저들 또한 더 마음 편히 친밀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친밀도에 그치지 않았다.
[엘라니스의 모든 종족들은 사도들의 도움을 평생 기억할 것입니다.]
[종족에 대한 친밀도가 한계치에 도달합니다.]
[엘라니스의 이종족들과 사도들간의 평화협정이 맺어졌습니다.]
[엘라니스가 ‘인간’을 ‘우방관계(友邦關係)’로 생각합니다.]
[본대륙의 NPC들보다 빠른 협정을 맺었습니다.]
제국에서 맺은 이종족들과의 교류 관계.
조금의 심적 교류 따위 없는, 비즈니스에 불과했던 것과 다른 완전한 우방관계를 맺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돌아가면 내가 한 잔 사도록 하겠네.”
“크흐! 좋죠.”
“오늘 아주 죽어보자고.”
이종족들에게서 유저들을 대할 때 알게 모르게 느껴지던 묘한 거리감이 사라진 지금.
이제는 동네 이웃처럼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하드가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사람들…… 아니, 엘프들이었구나.
-리자리자?
-응? 엘리자한텐 항상 저랬다고? ……그건 엘리자니까 그렇지. 후우, 더러운 외모지상주의…….
-리자?
-……그보다 찰리 속이 너무 후련해 보인다? 이제 좀 한이 풀려?
-이제 겨우 죽어 마땅한 자 하나가 죽었을 뿐이네. 앞으로 더욱 정진해야겠지.
그리 말하는 찰리지만, 한결 후련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어우, 힘들어라. 넌 힘들지도 않냐? 왜 이렇게 개운해 보이지.”
“왜 힘들어? 오랜만에 원 없이 팼더니 속이 다 시원하구만. 당한 거 생각하면 더 패고 싶은데 좀 아쉽기도 하고.”
“……하기야 쌈닭이 어디 가겠냐.”
“카멘…….”
“와, 얜 잡자마자 기도하고 있네. 중증이다 진짜.”
여제와 광신도의 한결같은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아스트를 보며 도현이 피식 웃었다.
저 모습들을 보니 정말로 끝이라는 게 실감이 난 것이다.
다만, 여제의 말에는 공감하는 바였다.
[다음 경지가 선명해집니다.]
‘……진짜 곧이었던 거 같은데. 이게 영 아쉽네.’
끝내 4초식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게 못내 아쉬웠던 탓이다.
모처럼 호승심이 불타올라 날뛴 덕일까.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경지에 성큼 다가간 것이 느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충분히 도달했을 거 같은데…….
‘뭐, 잡은 게 중요하지.’
오늘만 날도 아니고.
이 추세면 금방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터다. 이번에 자신이 얼마만큼 강해졌는지 확실하게 파악할 수도 있었고.
그리고 그건 도현만이 아니었나 보다.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카이저를 발견한 아스트가 생각났다는 듯 소리치며 다가왔다.
“아! 카이저. 너 인마, 엄청 세졌더라? 르시아 만나러 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체? 폼이 빡 섰던데? 옛날 모습 나오더라.”
“맞네. 안 그래도 그 말 하려 했는데. 이젠 나랑 싸워도 장담이 안 되던데…… 스읍, 안 되겠다. 한 판 뜨자.”
“방금 레이드 끝났는데, 또 싸울 생각뿐이냐? 너도 참…….”
“아니, 저 모습을 보고 몸이 근질거리지 않으면 그게 사람이야?”
현재 갓오세에서 도현의 수준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그의 동료들.
그런 두 사람의 눈엔 보인 것이다.
지금 도현이 보여준 성장세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수준인지.
멸살도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는데 눈동자에 맺힌 저 묘한 빛은, 분명 흥미로움이었다. 그 시선을 도현은 피하지 않았다.
“……야, 너 어디 보냐? 한 판 뜨자니까?”
“크큭, 아무래도 저놈. 너보다 다른 놈이랑 뜨고 싶나 본데?”
“허.”
자존심이 상한 듯 고운 눈살을 찌푸리는 여제.
그 모습조차 치명적인 미모를 자랑했지만, 도현의 시선은 여전히 멸살에게 고정되어있었다.
웃긴 건 정작 멸살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채로.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한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유저들이 즉각 반응했을 만큼 묘한 기류가 흐르길 수 초.
스윽.
멸살이 먼저 움직이려 하던 그때였다.
“야, 그런데 왜 클리어 메시지가 안 뜨냐?”
“어?”
“듣고 보니……?”
“나 지금 계속 보상 기다리고 있는데…… 계산 중인가? 그렇다기엔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니냐?”
“글쎄…… 월드 퀘스트 때 보면 계산 중이면 사전 알림이 뜨던데.”
“뭐지?”
한 유저가 내뱉은 말을 시작으로,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그에 도현에게 다가오려는 듯 보였던 멸살도 멈칫했다.
담담하기 그지없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듯 보였다.
‘……그러고 보니 왜 안 뜨지?’
……사실 라그 베헤모스가 죽은 게 아닌가?
아니, 그건 아니다.
놈이 처치되었다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떠올랐으니까.
뭐, 브리온 때 처치 메시지가 뜨고도 부활을 하는 거지 같은 패턴을 가진 놈이 하나 있긴 했는데…….
‘그때는 바로 부활한다는 알림이 나타났지.’
이렇게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건 또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시끄럽게 떠들던 바탄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대략 베헤모스의 생명력이 20% 이하로 내려갔을 때쯤부터 같은데…….
‘……이거랑 관련이 있나?’
왠지 모를 찝찝함에 도현이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주, 주인…… 뭔가 이상해.
-리자리…….
-으음? 자네들 왜 그러나.
돌연 지하드와 엘리자가 오들오들 떨며 두려움을 표출하는 게 아닌가.
저 둘은 누구보다 마나에 민감한 녀석들.
붙어 다닌 세월이 있는 만큼,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닐 걸 아는 도현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뭔가…… 뭔가 나타날 거 같아. 끔찍한 무언가가.
지하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
그 어느 때보다도 두려움이 짙게 깔린 목소리에 도현이 반문하려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지하드의 안색이 돌연 창백하게 질린 것이다.
마치 무언가를 본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파앗-!!
도현의 뒤편.
……정확히는 라그 베헤모스.
아직 가루가 되어 흩어지지 않은 그의 사체에서 어둠이 솟구치며 주변을 뒤덮었고.
띠링- 띵!
[경고!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강림합니다.]
[압도적인 격을 지닌 존재입니다.]
[즉시 자리에서 벗어나십시오.]
“……뭐?”
알 수 없는 메시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