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92화.
길드원 면접과 때아닌 친구, 여동생, 첫 파티원들과의 조우.
그리고 여제와 대련이라는 헤프닝(?)이 끝나고, 도현의 심경엔 작은 변화가 생겼다.
더 이상 따라잡으려 애쓰지도, 도움을 받는 게 아닌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가 된 것.
그걸 자각하니 어딘가 해방감이 든 것이다.
알게 모르게 쫓기는 듯한 느낌이 많이 사라졌다 해야 하나.
‘이번 대륙 퀘스트가 진짜 노다지였네.’
보상 천지였으니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전력을 발휘해 보니 스펙업의 수준이 생각 이상의 소득이었다.
‘이 정도면 앞으로 나올 메인 퀘스트 깨는 것도 더 수월해질지도?’
물론 메인 퀘스트 또한 본격적인 서막에 들었으니 난이도가 얼마나 오를지가 관건이긴 하다만.
그래도 이만큼 강해졌으니 조금은 수월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이제 시작이야.’
자신의 성장은 아직 한참 남았다.
당장 눈앞의 여제와 검성에 비해서도 초월을 두 번이나 적게 했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같은 수준까지 올랐으니, 이대로만 가면 능히 최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터였다.
‘……초월을 다 할 수 있을까 싶은 게 문제지만.’
다른 유저들이야 특성이 하나이니, 금방 다음 초월로 넘어가지만 도현은 특성만 6개.
아마 전부 초월시켜야 다음 초월 단계로 넘어갈 거 같은데, 오히려 특성이 많은 게 족쇄가 된 느낌도 없잖아 있다.
그래도 최종 성장을 하게 되면 고생한 것 이상의 낙이 올 거다.
대기만성형 느낌이랄까.
“뭐래, 우린 가만히 있을 거 같냐? 너 그렇게 초월 밍기적거리면서 하다간 다시 또 뒤처진다? 요즘 컨텐츠들이 쏟아지는 추세인데.”
“…….”
맞는 말이었다.
대륙 퀘스트의 보상만 해도 이 정도.
메인 퀘에 본격적으로 접어들게 된 데다 길드전까지 업데이트된 지금.
아마 엄청난 속도로 컨텐츠가 소모될 텐데 여유를 부렸다간, 특성 초월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격차가 아득하게 벌어질 수도 있다.
‘결국 또 열심히 따라잡아야 하는 신세네.’
한 번 후발주자는 영원한 후발주자도 아니고.
이 정도면 팔자 아닌가 싶다.
그래도 전에 비하면 마음이 한결 편하긴 했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 당장은 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 섰다는 게 사실이니.
그래서일까. 문득 그놈이 생각났다.
‘멸살.’
지금이라면 그놈과 붙어도 할 만하지 않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꾸꾸다.
뎀로크에서도 피지컬에선 적수가 없던 쌈닭이자 랭킹 3위의 광전사.
그 명성이 갓오세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최강의 여성 플레이어’, ‘여제’, ‘일인군단’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쥔 피지컬 괴물.
그런 꾸꾸와 호각을 다투었으니 충분히 해 볼 만하지 않겠는가.
‘길드전이 언제 열릴지는 모르지만 금방 열리겠지.’
그동안 꾸꾸랑 대련하면서 익숙해지고, 엘라니스 졸업 퀘스트까지 클리어한다면 해 볼 만한 걸 넘어서 의외로 쉽게 이길지도…….
“멸살을 쉽게 이겨? 허, 인마. 그건 아니지.”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앞에서 꿀꺽꿀꺽 맥주잔을 들이켜던 보라 아재가 헛웃음을 뱉으며 초를 쳤다.
“얘가 꾸꾸 녀석 이겼다고 벌써 랭킹 1위 찍는 상상하고 있나 보네.”
“나 이겼으면 랭킹 1위지 뭐. 틀린 말은 아니야.”
“어, 검성이랑 상대 전적 승률부터 6할로 만들고 오고.”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반박하지 않는 여제.
그런 그녀의 옆에서 차분하게 맥주를 마시는 검성도 딱히 끼어들지 않는 걸 보면 무언의 긍정을 표하고 있는 듯했다.
다만 한 사람.
초롱초롱한 눈을 세모나게 뜬 광신도가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요. 신께서 불가능한 일은 없사옵니다. 이 미천한 신도는 신께서 승리를 쟁취하셔 우매한 이들에게 광명을 퍼트리리라 믿나이다.”
목소리가 너무나 미성이라 전혀 근엄하게 다가오진 않았지만, 그 안에는 짙은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만큼 도현을 믿는다는 소리.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감명이라도 받은 걸까,
“뭐, 저 녀석이 지는 모습도 왠지 상상이 안 되기는 하는데…….”
아재가 턱수염을 매만지며 말을 흐리다가, 도로 말을 정정했다.
“스읍, 아니다. 멸살은 아니야. 걘 좀 탈인간이라서.”
“음, 그 정도야?”
“10대 길드가 동급이 아닌 건 너도 알지?”
“얼추.”
10대 길드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는 있지만, 자세히 파고들면 같은 10대 길드끼리도 무력 차이가 심하다.
당장 라이하스와 멸살만 봐도 그렇다.
같은 10대 길드 마스터인데 두 사람 사이의 실력 차이는 하늘과 끝 차이 아닌가.
물론 라이하스의 경우 신생 10대 길드라 기존의 10대 길드 마스터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긴 하겠지만…….
“그걸 감안하고 봐도 엄연히 상위권과 중위권, 그리고 하위권 사이의 간격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
“아재는 어디 반열인데?”
“글쎄…… 중위권 아닐까?”
그 말에 심드렁하던 도현이 드물게 눈을 크게 떴다.
“아재가?”
“뭐, 레이드면 몰라도 내가 대인전에서 좀 약하긴 하니까.”
이건 의외였다.
비록 대인전에서 다소 약점이 명확하긴 하나, 그걸 감수하고도 뎀로크에서 랭킹 5위에 자리하던 아재다.
그런 아재가 이끄는 길드의 간부들도 하나같이 엄청난 템빨러들 뿐.
‘그런 바벨론이 중위권이라…….’
문득 궁금해진 도현이 안면이 있는 이들의 이름을 꺼냈다.
“아더나 뇌제…… 아니, 천마는?”
“글쎄?”
“?”
“그렇게 봐도 어쩔 수가 없어. 10대 길드끼리 붙을 일이 있어야지. 다들 신대륙에 집중한다고 모습도 안 보이는데 뭐 어떻게 파악하냐.”
“아니, 그럼 하위권 중위권은 왜 나눈 건데? 아재는 중위권이라며?”
“나야 뭐 그 정도 아닐까 예상하는 거지. 다른 애들이 얼마나 강해졌든 말든 내가 평타는 칠 거다 이거지, 인마.”
“이게 뭔…….”
……아재도 요즘 꾸꾸랑 검성 녀석들과 자주 만나더니 옮았나?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자니, 아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미간 근육과 팔뚝의 근육에 난 혈관이 덩달아 꿈틀거린다.
언제봐도 경이로운 근육들.
몸의 90퍼가 근육으로 이루어진 인 외의 무언가를 보는 거 같다.
하나 지금은 저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는 근육도 시선을 오래 붙잡지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다.”
“멸살, 그 녀석이 명실상부 10대 길드 1위…… 아니, 갓오세 전체 유저를 두고 봐도 1위라는 거. 다른 놈들도 자존심 상해하지만 반박은 못 할걸?”
“그 정도란 말이지.”
확실히 라그 베헤모스를 잡을 때, 싸우는 모습을 보긴 했다.
다섯 자루의 마법검을 이기어검으로 다루는 능력은 가히 사기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협적인 건, 멸살 본인 그 자체에 있었다.
‘이기어검으로 다룰 때보다 본인이 직접 검을 쥘 때가 더 강해.’
이기어검으로 끊임없이 견제하고 상대의 움직임을 통제하며 원하는 곳으로 몰아세우고, 본인이 직접 마무리한다.
그게 멸살의 전투 방식이었다.
그리고 마무리하는 방식은 손에 쥔 검마다 달랐으니 대처하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닐 터.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전투 방식도 검마다 다 달라 보였지.’
벌처럼 정신없이 허공을 쇄도하는 검들을 그때그때 낚아채며 휘두르는 전투 방식.
그야말로 변화무쌍의 극치.
그건 검성의 말대로 검술이라 부를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검을 도구로써 더없이 완벽하게 활용하고 있을 뿐.
“심지어 그놈도 대륙 퀘스트 보상을 받았을 테니 더 강해졌겠지. 소문으로는 보상이 평범한 수준이 아니라던데.”
“흐음.”
그럴 만도 하다. 당장 1위인 자신은 신화급 보상을 얻었으니.
아재나 여제, 그리고 아나와 검성도 전설+의 보상을 얻었는데 2위인 멸살이라면 신화급은 아니더라도 준신화급은 얻었을 터.
‘그때보다 더 강해졌다는 거지?’
심지어 아직 자신은 멸살에게 안 될 거라고 아나를 제외한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한다.
그에 도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경계심? 그런 게 아니었다.
붉게 타오르는 그것은 분명한 호승심.
꾸꾸 녀석이 늘 말하는 몸이 근질거린다는 게 어떤 건지 알 거 같다.
그러던 그때였다.
띠링!
“음?”
“어.”
갑작스레 울린 경쾌한 알림에 도현과 동료들, 그리고 아나가 맥주를 마시다 말고 멈칫했다.
단 한 사람.
도현만이 올 게 왔다는 듯 씨익 입꼬리를 올릴 뿐.
[월드 메시지 : 길드전 일정이 확정되었습니다.]
[갓 오브 세이비어의 첫 공식 길드전은 일주일 후 신수의 섬, ‘라크시아’의 두 번째 마을 케센트에서 진행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공지 사항을 확인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던가.
타이밍 좋게 잡힌 길드전 일정을 보며 도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딱 대라. 결판내러 가 줄 테니.’
앞으로 일주일.
졸업 퀘스트를 깨고 드디어 갓오세의 정점을 가리는 무대에 참여하기까지 주어진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
띠링! 띠링!
“대박, 길드전 일정 잡혔다!”
“드디어 우리 길드를 증명할 기회다.”
“NPC 소속 출신을 무시하는 것들을 짓밟을 차례다.”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른 월드 메시지를 확인한 각 길드 마스터들이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고.
“일주일 후라…….”
“예.”
그중에는 10대 길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스러운 기운이 가득한 성전에서 성검을 닦고 있던 금발 녹안의 미남자.
“슬슬 밖으로 나갈 때가 된 건가. 듣자 하니 대륙 퀘스트 때 얻은 보상이 컸다지.”
“……예. 최상위권의 랭킹에 등재된 자들의 경우 현존하는 최고 수준의 전설+ 등급의 무구들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더 킹의 마스터 아더.
다른 일정 때문에 대륙 퀘스트에 참여하지 못했던 그는, 비서의 설명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한 눈으로 성검을 닦는 걸 반복했다.
스으-
몇 차례를 반복한 후에야 멈춘 아더가 천천히 성검을 들어 올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깨끗하군. 이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해. 괜히 성검이라고 칭하는 게 아니야. 그렇지 않나?”
무슨 뜻인지 몰라 눈치를 살피며 답하지 않는 길드원을 보며 아더가 피식 웃으며 말을 바꾸었다.
다행히 이번 말은 길드원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전설+ 등급이라고 했던가? 그게 뭐가 중요하지.”
“나에겐 이 성검(聖劍)이 있는데.”
갓오세에서 단 한 사람.
성검의 선택을 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유일무이한 검.
그 어떤 무구보다도 상징적이고 찬란한 검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었다.
“누가 와도 상관없다. 그 멸살마저도.”
그리 말하는 아더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낮게 가라앉은 채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10대 길드 마스터들도 비슷했다.
“……호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칠흑처럼 검은 흑발과 흑안.
고고하다는 표현이 걸맞은 성숙한 여인이 침음을 흘리며 바위산 밑을 내려다보았다.
“천마천세 만마앙복!”
그곳에는 그녀의 모습을 올려다본 수천 명의 도복을 입은 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천마, 천지아의 관심은 한 곳에 쏠려 있을 따름이었다.
“일정이 잡혔다고.”
눈앞에 떠 있는 월드 메시지.
그곳에 적힌 길드전 일정에 말이다.
“드디어 샌드백에게 서열 정리를 해 줄 시간이 왔구나. 요즘 자주 기어오른단 말이지.”
아스트가 들었으면 버럭 화를 냈을 발언을 스스럼없이 내뱉은 그녀가 검은 도복의 소맷자락을 매만졌다.
무척이나 기대되는 게 있을 때 하는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드디어 길드전인가.”
“미궁 때 이후로 처음인가. 10대 길드가 한곳에 다 모이는 건.”
“다들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궁금한걸.”
“시나, 그 날파리 같은 놈을 또 봐야 하는 건가.”
“듣자 하니 이번엔 사왕, 그 녀석도 온다지? 이거 참 역대급 컨텐츠로군.”
“……빠득. 전에는 방심했다. 이번에야말로 우리 일본 사무라이 정신의 힘을 보여 주도록 하겠다.”
그 외에도 혈살과 미카즈키, 아크…….
다른 모든 10대 길드의 마스터들 또한 기대감 반, 호승심 반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드디어인가.”
그 누구보다 왕좌에 걸맞으나, 커다란 바위 위에서 홀로 서 있는 금발의 남자.
현재 유저 정점에 한없이 가까운 인물.
“카이저.”
멸살, 그가 그 어느 때보다 깊은 눈으로 월드 메시지…… 아니, 그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갓오세에 유례없던 태동이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