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67화.
호승심.
이제는 낯설기만 한 감정.
마지막으로 가졌던 게 언제인지 모를 감정이었다.
뎀로크 시절 2년에 가까운 시간을 1위를 유지하게 되며 다시는 느끼지 못했으니까.
하나 그것보다 적합한 표현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실제로 멸살이 싸우는 건 처음 보긴 하지만…… 이 정도였다고?’
사실 궁금하긴 했다.
늘 혼자 다니면서도 2위를 유지하던 멸살은, 과연 어떤 전투를 펼치는 자인지.
대체 어떻길래 자신에게 밀리지 않던 그 시절 동료들보다 늘 위에 있는지.
애석하게도 게임이 망해버린 탓에 볼 수 없었던 것을, 2년이 흐른 지금 다른 게임에서 보게 되었고.
두근.
그것은 강한 자극이 되어 도현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싸워보고 싶다. 저자와.
그런 생각이 자꾸만 뇌리를 비집고 튀어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멸살도 마찬가지였다.
서걱-! 촤악!
끊임없이 움직이며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멸살의 시선은 쭉 도현을 향하고 있었다.
‘저게 카이저…….’
그 또한, 도현이 싸우는 모습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니, 굳이 따지면 처음은 아니긴 하다.
먼발치에서 스쳐 가듯 본 거나, 영상을 통해 본 걸 합치면 꽤나 많이 보아왔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그것도 함께 레이드를 하며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본 도현은 기대 이상이었다.
‘퇴화했다고 생각했다.’
전설급 스킬 하나 없던 뎀로크 시절보다 좋은 능력을 얻고, 좋은 조건을 가진.
그야말로 불운이라는 최악의 단점을 극복한 카이저.
불과 1도 안 되어 수많은 하이 랭커들의 위에 군림한 포텐셜.
뎀로크를 기억하는 모두가 신이 돌아왔다고 칭송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멸살만큼은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무뎌졌다. 그때보다.’
그 시절 카이저는 폭군이었고, 통제할 수 없는 맹수였다.
모든 면에서 불리한 조건을 가졌음에도, 이를 드러내는 자들을 모조리 압도해버리는 절대적인 강자.
먼발치에서 보았음에도 그 눈빛과 기세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할 정도로.
하지만 갓오세에서 본 그의 영상들은, 하나같이 무언가 비어있었다.
분명 빠르게 강해지고 있고, 이전의 약점들을 극복했으나 당시의 날 것과 같은 기세와 압도하는 눈빛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일까.
멸살은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었다.
무뎌진 그와 달리, 자신은 비교할 수 없이 날카롭게 벼려졌으니까.
하지만 지금.
[전(前) 심연의 강자, ‘라그 베헤모스’의 난격을 패링하는 것에 성공하였습니다.]
촤악! 휘릭-
“나이사! 패턴 끊겼다.”
“미친, 또 패링했어!”
“와아아아아아!!!”
“카이저! 카이저! 카이저! 카이저! 카이저! 카이저!”
처음으로 그 확신에 금이 갔다.
그리고 한 번 간 금은 빠르게 깨져가기 마련. 도현의 활약을 보는 멸살의 동공이, 그답지 않게 옅게 흔들렸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가득한 저 눈빛. 상대를 찍어누르는 듯한 압도적인 기세.
일만 대군과 수많은 유저들 사이에서도, 유독 빛이 나는 존재감.
심지어 그 여제와 비교해도 객관적으로 밀리지 않는 전투력까지.
‘…….’
그 시절 보았던 그때의 카이저였다.
무뎌졌다 생각했던 칼날이, 다시금 찬란했던 시절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스윽.
멸살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현상이었다.
자신이 인정했던 유일한 호적수가, 자신이 기억하던 그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것에 대한 만족하는 걸까.
그도 아니면 위기를 느끼는 걸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멸살이 더욱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키에에에에에!!!!
[전(前) 심연의 강자, ‘라그 베헤모스’의 생명력이 50% 이하입니다.]
라그 베헤모스.
전 심연의 강자라는 타이틀이 허언이 아닌지, 무려 일만 명이 넘는 대군이 딜을 욱여넣고 있음에도 아직도 50%의 생명력이 남아있다.
[3페이즈에 돌입하며 특성이 추가적으로 해금됩니다.]
[특성 ‘종말의 괴수의 피부’가 발현됩니다.]
[방어력과 마법 저항력이 크게 상승하며 받은 데미지의 일부를 축적하여 다음 ‘라그 베헤모스’의 공격이 강화됩니다.]
[라그 베헤모스가 받는 모든 피해가 70% 경감됩니다.]
3페이즈에 돌입하며 발현된 추가 특성 때문이었다.
방어력이 말도 안 되게 커진 것도 있지만, 핵심적인 건 저 모든 피해 70% 경감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사기 특성 때문이었다.
‘만약 이종족들이 오지 않았다면 볼 만했겠군.’
그때는 제풀에 지쳐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사상 최초로 레이드하다 제한시간이 끝나 강제 로그아웃이 되는 유저가 생겼을지도 모를 일.
그런 면에서 이 무대의 MVP는 카이저라 볼 수 있었다.
다크 엘프들을 설득해서 일만 대군을 데리고 오게 한 결정적인 인물이 카이저, 그였으니까.
“카이저! 카이저! 카이저! 카이저!”
“와아아아아!!”
“멸살! 멸살! 멸살!”
“아아, 카신이시여…….”
“카멘.”
아주 오랜만에 세 번째 신대륙을 나와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괜히 유저들이 카이저의 이름을 부르짖는 게 아니리라.
이젠 하다 하다 이런 거에도 경쟁심을 느끼는 건지.
피식 웃던 멸살이 웃음을 거두었다.
늘 짓고 있던 담담한 포커페이스가 되었으나, 그 눈빛만큼은 이전보다 확실하게 또렷해져 있었다.
‘기대 이상이다, 카이저. 전혀 실망시키지 않는군.’
하지만.
자신을 뛰어넘기엔 아직은 일렀다.
……아직까지는.
‘기대되는군. 다음에 만났을 땐 또 얼마나 강해져 있을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기대감이 멸살의 움직임을 더욱 적극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마치 아직까진 자신이 앞서고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무덤덤하고 재미없다는 평이 많은 멸살답지 않은 유치한 행동이었지만, 당사자인 도현은 그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확히는 그럴 생각을 품을 수가 없었다.
‘저기서 더 빨라진다고? 허, 그래. 나도 질 수 없지.’
정작 본인부터가 잔뜩 불이 붙어있는 판국이었으니까.
보란 듯이 베헤모스를 휘몰아치는 멸살을 보며, 도현도 더욱 거세게 공격을 퍼붓고 패링하며 적극적으로 레이드에 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계속해서 멸살과 베헤모스를 번갈아 향하는 게 누가 봐도 의식하는 모습.
웃긴 건 서로가 그러고 있는데, 정작 본인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이번 레이드에 기여도가 높은 사람이 승리하기로 합의라도 본 것처럼 미쳐 날뛰는 두 사람.
-……주인이 뭔가 평소랑 좀 다르지 않아? 뭔가 들떠 보이는데. 안 그래, 찰…….
-리자리자.
평소와는 다른 주인의 모습에 가디언들이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역겨운 심연……. 피비린내마저도 더럽기 짝이 없구나. 흐압!
-……아, 집중하고 있구나. 그, 표정은 좀 풀고 베는 게 어떨까? 지금 표정이 고문하는 사람 같아서 좀 그래.
-에휴. 듣지도 않네. 그냥 놔두자.
-리자? 리자.
따닥. 딱.
-그래, 우리도 열심히 하자. 너희 수가 몇 명인데 찰리한테 밀릴 거야?
따닥. 그어어어-
찰리가 워낙 베헤모스에게 고통을 주려 하고 있다 보니 금방 묻혔다.
“어우, 쟤들 이번에 왜 저렇게 적극적이야? 따라가기 벅차게.”
“아재가 따라갈 게 있어? 뒤에서 그냥 스매쉬만 날리고 있는데.”
“…….”
“그나저나 이거 이대로 가다간 순위 다 뺏기겠는데…… 우리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안 그래?”
“아아, 물론입니다. 신께서 광명을 남기셨으니 그분의 은혜를 입은 저희는 응당 그 뒤를 따라야 하는 법. 그분을 모시는 자로서 한치 부끄럼 없는 기여도를 달성하겠나이다.”
그렇게 때아닌 기여도 싸움에 두 사람이 날뛰자, 여제와 아스트, 광신도와 같은 동료들도 승부욕(?)이 돋았는지 더욱 적극적으로 변했고.
와아아아아아!!
“죽어라, 우리 가족의 원수.”
“오냐, 드디어 네놈의 숨통을 내 손으로 끊을 기회가 되는구나. 내 한 시도 네놈을 잊은 적이 없다.”
“죽여! 아주 족쳐버려!”
덩달아 사기가 오른 이종족들과 유저들도 뒤가 없는 사람처럼 템포를 올리며 무기를 휘두르고, 마법과 화살을 퍼부었다.
레이드에서 중요한 건 체력관리와 어그로 관리.
이를 위해 아무리 많은 인원이 레이드를 한다 해도 적정 속도를 지켜가며 교대로 공격을 하는 게 보편적이다.
하지만 레이드 인원이 일만에 달한다면?
그때는 체력 배분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그냥 다 쏟아부으면 그만이었다.
[전설(유일) 무기 ‘열계(裂界) – 도’의 특수 옵션 ‘멸법참(滅法斬)’을 시전합니다.]
[단 한 차례 시전 범위의 모든 마법을 멸합니다.]
[용살의 마법검 크산테의 특수 옵션 ‘파괴’가 시전됩니다.]
[시그니처 특성 ‘스매쉬’가 발동됩니다.]
[시그니처 특성, ‘이단 척결’을 시전합니다.]
도현과 멸살을 비롯한 선두주자들부터.
[‘알테리온 엘란드리엘’이 광역 마법 ‘신목(神木)의 덩굴’을 시전합니다.]
[‘알테리온 엘란드리엘’이 광역 마법 ‘블리자드’를 시전합니다.]
[다크 엘프의 찬란한 영웅, ‘아스트라 라벤시아’가 광휘의 검을 발현합니다.]
……
[하이 엘프, ‘다메스 그란다’가 광역 마법 ‘끝없이 솟구치는 덩굴’을 시전합니다.]
[하이 엘프, ‘라드란 바그라’가 ‘신궁술 – 속사’를 시전합니다.]
알테리온과 아스트라를 선두로 한 이종족들.
그리고 유저들과 수많은 이종족들이 뒤를 보지 않고 온 힘을 다해 공격을 퍼붓자 그야말로 진풍경이 펼쳐졌다.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재해, ‘하늘을 집어삼킨 눈’은 이제 없었다.
그저 거대한 면적으로 인해 맞을 곳이 넘치는 훌륭한 샌드백만이 있을 뿐.
‘이, 이럴 수는 없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억울한 입장이 된 바탄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현실감이 없다 못해 멍하다.
모든 걸 다 포기하고 괴수의 심장이 되는 걸 택했건만, 그 결과가 샌드백 신세라니?
‘말도 안 된다. 이럴 수는 없어.’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나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생명력과 정신없이 느껴지는 타격음들이 머리끄덩이를 끌어올리며 말하고 있었다.
네가 보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라그 베헤모스’의 생명력이 30% 이하입니다.]
50% 밑으로 내려간 지 얼마나 됐다고, 어느새 30% 이하로 내려왔다.
더는 발현될 특성도 없다.
이대로면 죽음은 확정된 상황. 꼴사납게 아무것도 못 하고 정신없이 집단린치를 당하다 죽을 운명이었다.
‘라그 베헤모스가…… 전 심연의 강자가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고 진다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늘을 집어삼킨 눈.
전 심연의 강자.
엘라니스의 대재앙이자 재해라고 불리었던 라그 베헤모스의 최후가 이리 하찮다 못해 가소로운 죽음일 거라고.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무려 백 년이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계획했다.
백 년 전에 르시아, 그 여자의 훼방과 권왕의 존재 때문에 일을 그르친 후로 더욱 철저하게 준비했다.
‘염원’을 이루기 위해.
오직 그 일념 하나로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그분’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분들이 말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생명력이 20% 이하입니다.]
쿠웅!
“베헤모스가 쓰러졌다! 일어나기 전에 족쳐!”
“그래, 이거지!”
“지금이야! 다 쏟아부어!”
……이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아…… 이렇게 끝이 나는 건가.’
모든 게 끝이 났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