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51화.
그리고 부름에 답한 건, 찰리만이 아니었다.
따닥, 딱…….
그어어어-!
수많은 언데드 군단이, 유저들을 도륙하던 죽음의 군단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한데 그 힘이 범상치 않았다.
“뭐, 뭐야! 이 언데드들은!”
“내, 내 죽음의 군단이…… 밀리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내 군단은 최강의 군단이란 말이야!”
가장 강력한 군단으로 인정받는 사왕의 군단마저, 힘 싸움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개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로브를 쓴 해골이었다.
손짓할 때마다 군단이 몇 배는 더 강해졌으며, 지독한 한기가 주변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콰아아–!!
마도서를 읽을 때마다 지면에서 솟구치는 어둠의 기둥이, 드워프들과 죽음의 군단들을 집어삼켰다.
우어어어- 콰아아앙!
그렇게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폭주 전차처럼 돌격하며 덩치만큼이나 거대한 몽둥이를 휘둘러대는 오거 언데드.
그 덩치가 어찌나 큰지, 사왕의 군단장들과 힘 싸움이 성립할 정도였다.
-……이거, 놀라운데. 생전의 힘을 되찾았구나? 아니, 확실하게 그 이상인 거 같은데.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무법자.
-…….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기회를 준 나를 이렇게 죽이려고 온 거야?
-그건…… 기회…… 가…… 아니었…… 다……. 능멸…… 이었……지…….
-그래서?
-너를…… 막겠…… 다…….
-동족들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럴…… 자격이…… 나에겐…… 없…… 다. 그저…… 주군의…… 길을…… 밝힐 뿐…… 그 끝에…… 구원이 있으리…… 라…….
이 답답하게 늘어지는 특유의 말투.
모든 유저들은 사르기스를 거쳤기에, 이쯤 되니 유저들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마, 말을! 저거 무법자 왕이지? 맞지?”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로브를 쓴 해골 군단장과 오우거 군단장. 그리고 생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언데드면…… 설마?”
“이런 게 가능한 사람은…… 아니, 신수는 하나뿐이잖아!”
현존하는 최강의 고블린이자, 사왕 다음가는 네크로맨서로 꼽히는 존재.
“네크로맨서부터 죽여! 본체는 약해!”
“젠장, 엄호해! 무조건 지켜야 돼.”
“어떻게 저렇게 세졌는진 몰라도, 사왕의 군단을 막을 유일한 희망이다!”
하나 본신의 힘은 그 누구보다도 나약하기에, 주술사의 위치부터 찾는 유저들이었지만…….
“……엥? 어디에 있는 거야?”
“군단이 있는데 왜 정작 그 고블린은 안 보이는 거지?”
“언데드 군단 사이에도 안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평소와 달리, 위치가 드러나지 않았다.
아무리 정신없는 전장이라지만, 늘 군단 곁에 있던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위치를 찾은 건 그때였다.
무심코 위를 올려다본 유저가 기겁하며 소리친 것이다.
“어, 저길 봐!”
“미친…… 저게 그 고블린이라고?”
“아니, 왜 다 하늘에서 내려오냐?”
“그보다 생긴 게…… 아무리 봐도 고블린이 아니지 않아?”
한데 그 외관이 완전히 달랐다.
저건 아무리 봐도 고블린이 아니라…….
“……용? 인간? 아니 고블린? 무슨 형체인지 모르겠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뭔가…… 뭔가가 일어난 거 같은데.”
“저게 본체인…… 가?”
멀리서 보아서인지, 크기 자체는 크지 않아서인지.
여러모로 헷갈리는 생김새였는데 낙하하는 속도마저 점점 가속되는 탓에, 자세히 살펴볼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유저들은 볼 수 있었다.
콰아아앙!
“후우, 조용할 날이 없군.”
“깽판을 쳐보기만 했지, 이렇게 당해보는 건 또 오랜만이네. 너도 적이냐?”
“……아니, 꾸꾸. 기다려봐라. 생김새를 자세히 봐봐.”
“……호오? 뭐야, 이건 너무 흥미로운데. 무슨 일이 있던 거야?”
한창 검성과 여제 듀오와 전투 중이던, 볼카른 블랙의 위로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내리꽂히는 그의 모습을.
한데 그 결과는 놀라웠다.
—–!
그 단단한 볼카른이 거대한 날개를 접어 방어하고도, 한참이나 뒤로 밀려난 것이다.
그러고도 충격이 완화되지 않아, 거칠게 불꽃이 튀는 날개에서 저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볼카른 블랙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누구냐. 이만한 혈통인자를 발현한 블랙 일족은 더 없었을 텐데.
-못 알아보겠어? 볼카른. 아니, 볼카른 형.
-설마……?
뒤집어쓴 로브의 모자를 걷어내자, 꽁꽁 가려졌던 지하드 블랙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고블린과 용족의 피를 같이 이어받은 듯한 외형이었으나…….
얼굴과 피부 전체에 새겨져 있는 역설의 문양과 주변에 일렁이는 검은 마력은 그보다 더 고대의 것에 가까웠다.
[지하드 블랙이 ‘역설(逆說)의 고대룡, 칼드라헨’의 혈통인자를 발현합니다.]
-그래, 나다 이 X새끼야.
-……?
-으잉, 반응 뭐야? 주인이 너 만나면 꼭 이렇게 말하라 했는데…….
지하드 블랙이 비로소 잠재되어있던 혈통인자를 깨우고.
고대룡의 힘을 각성하여 돌아온 순간이었다.
-키륵, 케케륵. 아무렴 어때. 나 엄청 강해졌으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이 빌어먹을 배신자야.
생김새는 달라졌어도 성격은 여전한 모습이었으나, 볼카른은 전처럼 가볍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더 이상 저 말이 허세로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고대룡 칼드라헨…….’
그는 용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 본질은 용이 아니다.
용의 힘을 다루던 태초의 고블린.
끝내 그 힘이 고룡보다도 강한 경지에 이르렀기에, 고대룡으로 알려지게 된 존재.
하지만 볼카른은 알고 있다.
칼드라헨이란 건 전승을 통해 영생을 살아가는 위대한 이름이라는 것을.
역설의 고대룡 칼드라헨의 이전 세대에 칼드라헨은 다르게 불리었었다.
‘……탐식의 죄를 죽인 자.’
멸죄자(滅罪者), 칼드라헨. 그것이 태초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지금.
영겁의 시간이 거슬러, 이 자리에서 가장 강대했던 대죄 중 하나인 ‘탐식의 죄’와 멸죄자(滅罪者)가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가, 근원의 샘을 들렸군.
-그래, 덕분에 다 떠올랐거든? 그렇다고 정 때문에 봐줄 생각은 없어.
지하드의 얼굴에 순간 씁쓸함이 깃들었지만, 아주 잠깐 스쳐 갈 뿐.
-그리고…… 나도 주인 볼 때마다 이 말 꼭 하고 싶었는데 잘 들어.
-날개 똑바로 접어, 죽기 싫으면.
지하드 블랙이 두 눈을 불태웠다.
그러자 지하드의 로브 모자 안에 숨어있던, 작고 하얀 솜뭉치가 뾱, 하고 튀어나오더니.
지하드를 따라 하듯 볼카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리자리자!
바르하임이 아닌, 우리의 엘리자였다.
그리고…… 이들이 왔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쿠, 쿠구–
“따, 땅이 흔들린다.”
“또 뭔데!?”
“안개? 갑자기 웬 안개가 껴?”
“잠시만. 저거 봐. 저 거대한 건 뭐야!?”
“뱀……? 신수잖아, 저건!”
갑자기 드리운 안개 너머로, 드러나는 압도적인 크기의 실루엣.
뱀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거대하고.
용이라고 하기엔 뱀 특유의 형상을 한 그것은 신수(神獸)라는 단어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신수가 왜…….”
“신수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거 아니었어?”
“그럼 신수는 누구 편에 서는 거야?”
“제발 또 다른 세력만 아니길…… 아니, 차라리 다른 세력이어라. 집행자들 편에 설 바엔 차라리 그게 낫…….”
그에 유저들의 불안함이 더욱 커져갈 그때.
“어!”
“미친.”
“실화냐?”
유저들의 안색이 돌연 밝아졌다.
정확히는 대항자들의 안색이 밝아졌고, 그에 반해 집행자들의 표정은 똥 씹은 듯이 구겨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쿠구구- 구-
안개를 빠져나오며 신수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동시에 그 위에 타고 있는 남자의 모습도 함께 드러난 것이다.
-주인, 또 주인공 병 걸려서 늦게 왔…… 어? 말도 안 돼, 네가 왜 여기 있어!?
-리자! 리자리자!?
-찢겨 죽어라 더러운 심연 놈들…… 오셨습니까, 주군. 미천한 검으로서 주군의 뜻을 대행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지하드와 엘리자는 반가움에 소리쳤고, 찰리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심연을 베어 넘기다 말고 경례를 표했다.
그들의 정체는…….
[고대 왕의 신수, ‘아르라기니’를 조우하였습니다.]
[플레이어 ‘카이저’님의 신수로서 적당한 자격을 얻어 ‘아르라기니’가 전장에 참여합니다.]
-아르라기니!
-리자리자! 리자!
“아아, 카신이시여……! 저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군요.”
“카멘…….”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나의 신이시여.”
고대 인류의 암왕(暗王), ‘하르’의 양의 의지가 잠들어있던 왕의 무덤.
그곳에 분신을 문지기로 남겨두었던 신수.
“고생했다, 다들. 좀 늦었다.”
아르라기니의 본체와 그를 타고 등장한 카이저, 강도현이었다.
‘설마 그곳에 아르라기니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신수의 섬에서 인연의 끈이 연결된 존재라 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영락없이 아르라기니를 뜻하는 것들투성이였으니까.
당시 지하드와 엘리자가 아르라기니와 유독 친밀감을 크게 형성했었는데…… 그렇다 해도 신수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게 자연의 이치.
쉬식- 쉭-
따라와 주진 않을지도 모른다 생각했건만, 놀랍게도 말을 꺼내자마자 흔쾌히 함께해주었다.
인간의 신수가 되는 수모를 감수하고서라도.
쉬식, 쉭- 쉬익-
“그래, 고맙다.”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좋은 뜻이겠거니 하며 등을 쓰다듬는 도현.
실제로 좋은 말은 맞았다.
-어딜 한눈을 파는 거지, 지하드.
-에라이, 이런 감동적인 순간은 기다려주는 게 규칙인 거 몰라? 그러니 배신이나 하지.
-거봐, 엘리자도 비겁하다잖아.
-……아직도 어리군. 그래서는 날 이기지 못할 거다.
-케륵, 그렇다기엔 여유가 없어 보이는데?
지하드가 반기던 중에 공격해온 볼카른을 받아치느라 통역을 듣진 못했지만.
자신은 암왕의 신수.
카시야르의 계승자의 신수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못해, 오히려 자신이 더 원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중이었으니까.
“어디 상황 좀 볼…….”
하나 반기는 건 아군들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그 누구보다 격하게 반겨주는 이가 있었으니.
“피해, 이 새끼야!”
방금까지 목이 졸리다, 내팽개쳐진 아스트였다.
컥컥 대면서도 도현을 보며 외치는 모습에서 다급함이 물씬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압박감.
-……이리 대놓고 중앙에 나오다니, 그리도 목이 잘리고 싶었나 보군. 계승자여.
눈 깜짝할 새 등 뒤로 온 카디움이, 머리통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영왕의 머리를 일격에 터트렸던 그 힘을 담은 채로.
하지만…….
서걱-
-……뭐?
그보다, 도현의 검이 더욱 빨랐다.
카디움의 손이 뻗어지자마자, 손목이 잘려나간 것이다.
그야말로 눈치챌 틈도 없이 벌어진 일.
“이젠 보여. 네 움직임.”
워낙 순식간에 벌어져서일까.
아니면 이런 가벼운 검짓에도 손이 잘린 게 충격이었던 걸까.
-무슨……!?
카디움의 동공이 급격하게 커졌다.
여태까지 보였던 여유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모습.
-어떻게 내 권능을…….
말하면서 뒤늦게 깨달은 것일까.
카디움의 얼굴에 설마, 하는 감정이 스쳐 갔고, 그와 동시에 뒤에서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흐…… 크하하하! 그런가. 완성하였구나, 그릇이여. 신살(神殺)의 검을…… 아니, 네놈의 신살(神殺)을!!]
[……위험한 기운이군. 조심하라, 불멸.]
[크흐하하하하! 조심? 왜 조심해야 하지? 이 기운, 저릿한 감각…… 이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죽음의 감각이란 말인가! 인정한다. 그릇이여. 그 아르케온마저 뛰어넘은 너의 검을 말이다!]
무엇이 그리 기꺼운지 광소를 터트리는 놈을 무시하며, 도현이 천천히 천변을 쥐었다.
“신살이니, 뭐니…… 그런 건 다 모르겠고.”
그러자 천변에 거칠게 일렁이는 검붉은 빛이 깃들더니, 한 자루의 날렵한 장검이 되었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묵색의 검.
날은 갈라져 있고, 번개라도 들이친 듯 검면이 타버리기까지 했으나, 이보다 더 훌륭한 무구는 없었다.
[+15 진(眞) – 천변(千變)이 파명검(破命劍)을 발현하기 가장 적합한 형태로 변형됩니다.]
[신화급 시그니처 검술, ‘파명검(破命劍)’과 공명하며 진정한 힘을 이끌어냅니다.]
[유일 장신구 ‘패도지인(覇道之印)’이 발동합니다.]
[능력의 위력이 상시적으로 상승하며 등급이 높은 능력일수록, 그 힘이 더욱 강화됩니다.]
[파명검(破命劍) – 멸(滅)을 시전합니다.]
“일단 한 대 맞자.”
씨익 웃은 도현이 천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