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화 대륙 (2)
서대륙에서 큰 영역을 소유한 아케나드 마도국, 아르나크 제국, 루아스 교국, 화산 지대의 드워프가 전시 상황에 돌입했고.
중앙 대륙에서는 이미 서대륙보다 먼저 군대를 소집했다.
“하부 수인 부족장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에온이 그러더군요.”
“인간과 수인이 언데드로 변했다고 하네. 죽음의 문의 영향이라는데, 다른 곳은 아무렇지 않은 걸 보니 동대륙 남부에 한정된 일일지도 모르겠어.”
“하부 수인 부족의 생존자들이 대부족으로 오고 있다는군.”
주인 없는 땅의 서쪽에 자리한 중부 수인 부족의 족장들과, 델하룬 북부와 영토를 맞댄 상부 수인 부족의 족장들의 대화가 오간다.
수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광경을 바라보던, 수인 대부족에서 가장 강한 여섯 부족장 중 하나인 비왕이 말했다.
“선택에 의한 타락. 내부에서 배신자가 발생하니, 기세가 크게 꺾이는 순간 어지간한 세력은 삽시간에 와해되겠군요. 타락의 영향이 동대륙 남부 너머까지 뻗치면 볼만하겠습니다.”
“흥미로운 힘이지.”
수왕 안티아스가 왕좌에 앉은 채로 대륙 신문을 읽고 있다.
히아레마르 내해의 밑바닥에서 벗어난 옛 왕이 대륙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새로운 소식은 각 세력에 알려졌다.
그쯤 하늘에서 거대한 드래곤의 그림자를 봤다는 소문이 목격자들의 입을 통해서 전염병이라도 돌듯이 세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가르간트에서 만든 신문은 불길한 전운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쥐 떼 같았던 언데드가 전부 물러났다…… 대단한 통솔력이다. 심지어 세상의 죽음을 지우고 드래곤을 길들이기까지. 죽음의 제왕이라는 이명이 아깝지 않군.”
신문이 툭 던져졌다.
“이로써 대륙 규모의 전쟁은 확정됐다. 아칸드가 개전에 앞서 전령을 보내겠다고 하는 걸 보면 단순한 정복 전쟁을 원하는 건 아닐 터. 이 또한 흥미가 가는 부분이야.”
흑표범 수인이자 여섯 부족장의 영왕이 이빨을 드러냈다. 다른 부족장도 하나같이 야성을 뚜렷하게 내비쳤다.
“전면 전쟁이 되겠지요.”
“평화의 끝이 도래했구나.”
“종족 전쟁 이후로 최대 전쟁이 되겠습니다.”
이종족 전쟁은 3세기 전의 사건이다.
엘프와 다르게 수인의 평균 수명은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대는 여러 번 교체됐다. 당연하게도 이종족 전쟁을 경험하고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수인은 아무도 없다.
전쟁이란 자연의 극치.
이성만으로는 헤쳐 나갈 수 없는 야만적인 폭력의 장이다. 평화 속에서 태어난 수인의 야성에 묻은 녹을 떨어뜨릴 때가 다가온다.
물론 전쟁의 광기와 생존 본능에 압도된 수인도 발생하겠지.
이 또한 야생이다.
야성이 무너진 수인들은 도태될 것이고, 새로운 야성에 적응해 살아남은 강대한 수인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피에 젖어 울부짖고.
사냥하여 포식자가 돼라.
이종족 전쟁에서 수인 대부족을 지휘했던 수왕의 어록이었다.
델하룬의 여제에게 살해당했으나, 그가 그렇게나 날뛰던 많은 수인을 철저하게 통제해 인류를 압박한 발자취는 남아 있다.
이렇듯 과거는 활용할 때가 많다.
가장 위대한 생물로 일컬어지는 안티아스는 수인 대부족의 역사에 가장 해박한 수인이다. 그는 엄연히 수인족 지식인이다.
안티아스가 말했다.
“동대륙 남부를 정리할 때 녀석이 참전했다고 들었다. 에온에 고용되었다지?”
“그렇게 듣기는 했습니다만…….”
“크, 크흠.”
부족장들이 헛기침을 하며 애써 고개를 돌리거나 시선을 회피했다.
중앙 대륙 4강 – 검은 야수.
수왕의 친자식이며, 한때 수인 대부족에서 여섯 부족장 후보에 올랐던 존재.
어째서 그가 모든 걸 포기하고 대부족을 떠난 것인지는 안티아스를 포함해 극히 일부의 수인밖에 알지 못한다.
현 여섯 부족장 중에서도 내막을 모르는 이가 태반 이상이었다.
어쨌든 검은 야수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았다.
돈만 주면 무엇이든 처리하는 해결사라니?
그냥 수인이었으면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겠지만, 다름 아닌 수왕의 핏줄이다. 수인족 지배자의 자식 중 하나가 인간의 하수인처럼 보이는 꼴을 어떤 수인이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용병 놀이가 질리진 않나 보군.”
오직 안티아스만이 피식 웃고는 권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서 부족자들이 기립했다.
“연맹장의 배신으로 루아스 교국에 위협을 받은 이데라트 연맹국은 인간이 아닌 우리와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수백만, 그 이상의 병력이 언데드 대군과 부딪치는 풍경은 필시 절경이겠지.”
천막은 없었다.
창공(蒼空)이 그들의 지붕이었다.
“비왕, 지금쯤 옛 왕은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나.”
“전 대륙의 언데드를 통제할 수 있다고 할지언정 사령부는 필요 불가결합니다. 천검이 마주했다고 한 크세리온 제국의 제4사령관이 옛 왕의 명령을 이행할 손이자 발이 될 터.”
비왕이 부리를 달싹였다.
“옛 왕은 언데드 군세의 머리가 될 지휘부를 마저 조직할 겁니다. 봉인에서 해방된 날짜를 기점으로 해 21일이란 시간은 그를 위해서겠지요.”
“길게 끌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
안티아스가 발을 굴렸다.
진동이 대지를 타고 퍼졌다.
강대한 야성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수인들이 크게 포효했다. 야생의 법칙을 숭배하는 수인들의 본성이 천지를 물들였다.
엘프 종족은 세계수를 신으로 모시며 세계수의 관리자의 뜻을 존중한다.
드워프 종족은 여러 클랜장이 존재하여 권력이 분산되어 있다.
인간 종족은 세력이 세분화되어 있으며 각각의 중심을 따른다.
수인 종족은 그들과 다르다.
하부 수인 부족, 중부 수인 부족, 상부 수인 부족은 수인 대부족의 산하이며, 수인 대부족의 정점은 언제나 한 명이었다.
“초월자들도 과거 초월자 전쟁에서처럼 연합체를 구성한 모양이던데. 과연…… 어떤 위상을 보여 줄지 기대가 되는군.”
짐승의 피가 끓는다.
“프로하스로 간다.”
안티아스가 정상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차가운 북부로 향했다.
* * *
중앙 대륙 어딘가.
쿠웅.
사룡 네크바엘이 거대한 앞발로 안개가 자욱한 산등성이를 짓밟았다. 나무와 땅이 우악스러운 힘을 견디지 못하고 으깨진다.
비늘이 암녹색의 빛으로 물들었다.
이윽고 안개 속에서 새어 나오던 빛이 사라지자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은 사라지고, 인간의 형상만이 존재했다.
폴리모프(Polymorph).
양측 관자 놀이에 큼지막한 드래곤의 뿔이 솟은 소년. 네크바엘의 인간 형태.
그는 드래곤의 비늘로 구성된 크세리온 제국의 제복을 두르고 있었다.
몸집은 평범한 인간보다 작아졌을지언정 세로로 갈라진 안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용의 공포가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초라한 은신처다.]
“하인들이 이전에 사용하던 장소는 현 다크워튼 마탑주에게 발각되었다. 그리고 그림멜 그롬파르가 흔적도 없이 파괴했지.”
[제국은 어디에 있나.]
“곧 불러올 것이다. 부활이 끝나면.”
잠시 기다리고 있자, 아칸드와 네크바엘 앞으로 한 명의 흑마법사가 나타났다.
그는 주검의 영광의 리마넨이었다.
에스티리아 왕국에서는 노사와 비올라의 명령을 받아 움직였고, 베르덴에게 노사와 비올라가 사망한 이후에는 왕국에서 확보한 옛 왕의 왼 다리를 첫 번째 하인에게 전달했다.
리마넨은 그렇게 하인들의 수족이 되어 은밀하게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 다른 대륙에 사문을 여는 것도 말이다. 하인들이 죽었어도 그와 같은 흑마법사가 더 있었다.
쿵!
아칸드를 보자마자 눈을 부릅뜬 리마넨이 땅에 이마를 찍었다. 네크바엘과 찰나에 눈을 마주쳤는데 생명을 비웃는 죽음의 기운에 몸이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리마넨이……! 크세리온 제국의…… 황제 폐하와 수호룡을 뵙나이다……!!!”
아칸드가 왕의 위엄을 드러냈다.
“너의 충정은 하인들에게 전해 들었다.”
“아……!!”
리마넨이 전율했다.
“신하들의 신체가 있는 장소로 안내하라.”
“부디 앞에서 걷는 것을 용서하시옵소서…….”
리마넨은 볼 안쪽을 강하게 깨물어 떨리는 몸을 억제했다. 산등성이 사이에 흑마법이 깃든 마법진이 은폐한 동굴로 향했다.
주검의 영광의 잔당이 좌우에서 부복한 채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하군. 드라벤 르마르크가 지휘한 크세리온의 영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네크바엘이 경멸했다. 흑마법사들이 눈꺼풀을 꽉 감았다. 분노가 아닌 굴종이었다. 그들은 그저 사룡의 존재감에 공포와 희열을 느꼈다.
“루, 루아스교가 크세리온 제국의 의식장을 찾아 없애고, 위대한 주검을 두고 교전이 발생하면서 고위 흑마법사가 대부분 사망했습니다. 현 주검의 영광의 수뇌부는…… 저희가 전부입니다.”
“그 희생이 재건의 초석을 쌓았다.”
아칸드가 그들의 노력을 치하하며 흑마법사의 길을 가로지른다.
“이제 영광을 되찾을 시간이다.”
그가 주검의 영광에 이전 본거지에 있던 고대의 장식장 앞에 섰다. 투명한 유리 너머에는 귀, 손가락, 뼈, 코 등 저마다 주인이 다른 신체 부위가 진열되어 있었다.
여섯 번째 사도의 권능.
아칸드는 시체의 일부에서 죽은 존재를 부활시킬 수 있다. 어떤 죽음을 맞이했든 영혼이 무사하다면 한 번은 되살아난다.
몰가른의 벽화가 묘사했듯 그는 시체의 산 위에 앉은 군주다.
툭, 툭, 툭툭툭툭툭…….
진열장에서 튀어나온 신체 부위에서 점차 살점과 뼈가 자라난다. 기괴하기 그지없었으나 누구도 감히 눈을 떼지 못했다.
불멸의 세상.
주검의 영광이 바란, 죽음만이 있어 생명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세계가 눈앞에 있었다. 이걸 위해서 그들은 충성을 바친 것이다.
“크…… 허…….”
절단된 약지에서 시작해 신체가 완성된 노인이 숨을 토한다.
연합 도시 카일리언스의 시장을 배후에서 조종 및 살해, 유골룡을 깨우고 셉타 호른을 유도해 벨디른 공화국을 공격한 흉수,
결국에 베르덴과 아드리안에게 맞서다가 죽음을 맞이한 흑마도사.
네 번째 하인───케실루스 차에렌이 2년 만에 생명을 되찾았다.
“이곳은…….”
성녀에게 심판을 받은 세 번째 하인───만연의 랑데르크도 죽음을 딛고 올라섰다.
하인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부활이 이루어졌다.
수백 년 동안 능력을 증명하며 진열장에 올라간 것이 허락된 흑마도사들이 깨어난다. 과거에 세 번째 및 네 번째 하인이었던 자들까지도.
개중엔 에스티리아 왕국에서 사망한 흑마도사도 있었다.
“내, 몸이…… 멀쩡해?”
“나는 분명, 죽었을 터인데…….”
베르덴의 마법에 잿더미가 된 백골의 비올라가 피부를 어루만진다. 베르덴에게 그림 리퍼를 잃고 자결한 노사(老士)가 현실을 자각한다.
무려 백 명이 넘는 흑‘마도사’의 의식이 곧이어 아칸드에게 향했다.
“나크텔, 처음으로 죽음의 지배자를 알현하나이다.”
“티아즈라 모튼, 처음으로 죽음의 지배자를 알현하나이다.”
“르카리아, 처음으로 죽음의 지배자를 알현하나이다.”
주검의 영광에 소속된 채 죽음을 맞이한 세 명의 흑마법계 초월자가 예를 갖췄다.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부활자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케슬루스 차에렌, 처음으로 죽음의 지배자를 알현하나이다.”
“랑데르크, 처음으로 죽음의 지배자를 알현하나이다.”
“라젝 헤리안, 처음으로 죽음의 지배자를 알현하나이다.”
“본래의 이름을 버린 노사로서, 처음으로 죽음의 지배자를───”
“비, 비올라, 처음으로───”
“─────────”
“─────────”
“─────────”
다양한 이름이 동굴에 울려 퍼진다.
아칸드가 손짓했다.
주검의 영광의 생존자들이 헐벗은 그들을 로브로 감싸 주었다. 초월자 전쟁에서 봉인된 옛 왕을 목도한 흑마법사들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마침내.
장장 8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주검의 영광이 목적을 이루었다.
“아칸드 리니게아 타인 크세리온.”
아칸드가 단언했다.
“너희의 유일한 지배자다.”
“……!”
생전에 느껴 본 적 없는 존재감이 순간 산등성이 전체를 위압했다. 이 얼마나 강대한가. 루아스 교국은 결코 대적할 수 없으리라.
아칸드가 약간 고개를 틀었다.
“사문은 어떻게 되었지?”
리마넨이 즉답했다.
“다소 저항이 있었기에 절반 이상의 사문이 현재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중 동대륙에 존재하는 사문 중 세 개는 전부 열렸습니다.”
“개방한 신하는.”
“시, 신하는 아니옵고…… 첫 번째 하인과 약속을 맺은 초월자들이 그리했나이다. 광명의 대재해, 대제, 그리고 여제입니다.”
아칸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침묵이 이어졌다.
네크바엘이 조금 미간을 좁히며 아칸드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칸드는 낮게 웃으며 안개 너머의 하늘을 노려보았다.
그는 이상을 굽힐 줄 모르는 초월자를 부활시킨 적이 없었다.
“이용당했나.”
“네?”
“성대한 전쟁이 되겠군.”
천천히 흐르는 기류.
“크세리온 제국을 재건하기 전에 잊지 말아야 할 명제를 고하겠다. 크세리온 제국에 속한 초월자들을 제외하고…….”
아칸드가 단호히 선언했다.
“모든 초월자는 적이다.”
초월자를 향한 강한 적대감이 주검의 영광, 아니 크세리온의 영광에 뿌리를 내렸다. 아칸드는 여전히 살아 있다.
초월자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
초월자 연합의 주둔지.
아드리안은 그간의 부상을 최대한 회복하면서 명상을 위주로 단련했다. 머릿속으로 그린 전장에서 그는 하늘을 갈랐다.
검기에 몰두하다 못해 몰입하다가 순간 의식이 튕겨 나가기를 반복했다.
쿵쿵.
입구에서 들린 소리에 아드리안이 눈을 떴다.
“주군께서 오셨나?”
유리온이 문틀에 몸을 기댔다. 벤디에는 옆에서 꼿꼿이 서 있었다.
“그래, 방금 왔지.”
“바로 나가지.”
“그 꼴로?”
막 자리에서 일어난 아드리안이 시선을 내렸다. 상반신을 드러낸 그의 몸은 전투를 치른 듯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벤디에가 수건을 던졌다.
“베르덴은 연합군을 둘러봐야 하니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일단 씻으시죠.”
“음…… 알겠다.”
“생각보다 말을 잘 듣네.”
유리온을 흘겨본 아드리안이 땀을 닦으며 개인 훈련장을 나섰다.
좌우에서 그를 따라가던 초월자들이 물었다.
“그래서 부상도 이제 꽤 회복했는데, 도대체 언제 말해 줄 거야? 궁금해 죽겠다고.”
“뭐를?”
“동대륙 남부에서 있었던 일이요.”
벤디에도 이에 흥미가 있었다.
“마울러와의 결판은 어떻게 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