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3화 대륙 (4)
쿵!
반으로 갈라진 호수의 단면은 이루 말할 데 없이 깔끔했다. 돌출된 부분은 없었다. 그렇게 물에 젖은 지반에 사이좋게 수직으로 충돌했다.
“후우…… 후우…….”
마울러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호흡했다. 근육을 쥐어짜 출혈을 막았지만 장기를 두 번 이상은 끊어진 탓에 곧바로 움직이기 어려웠다.
서서히 몸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하지만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초월에 닿지 못한 인간 따위는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힘의 급류가 지형지물을 아예 바꿔 버린 풍경을, 마울러는 좋아했다.
이것이 초월자다.
이야말로 초월자 간의 혈투다.
마울러는 누구보다도 스스로 초월자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
“저항력이…… 제법이군. 생각보다.”
“주군의 마도에 비하면.”
아드리안이 널브러진 광검을 붙잡아서 검끝으로 바닥을 찍었다. 검신에 체중이 실렸다. 그의 그림자가 몸을 일으켰다.
“네 권격은 한없이 가볍다.”
“새끼가, 도발은.”
검붉은 마력에 시달렸던 순간을 떠올린 마울러가 침을 모아 뱉었다. 손가락 관절 부위가 삐걱거리는 거대한 건틀릿.
크게 진각을 밟은 마울러가 전과 거의 다름없는 속도로 굽이쳤다.
아드리안이 거기서 눈을 감고 광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과연…… 무식한 육체다.’
항상성은 비슷할지언정 저항력에서 차이가 제법 있다. 치명상을 안기지 않는 이상 폭주하는 비행정과 같은 놈을 멈출 수 없을 터.
그렇기에 정면으로 부숴야 한다.
아드리안이 방어와 회피 등에 집중하면 마울러도 그럴 여유가 생긴다. 속도로 우위를 점해도 생채기만 더 생기겠지.
그래서는 절대로 마울러에게서 패배를 끌어낼 수 없다.
모든 신경을 공격에 할애한다.
‘다만, 더 빠르게.’
후속타를 고려하지 않고 광검의 일격을 온전히 먹이는 것이다. 마울러의 물리 저항력을 크게 웃도는 피해를 안기려면 오직 그뿐이니.
기꺼이…… 사선(死線)에 들어서리라.
콰드드드득!
신속으로 가속한 광검이 마울러의 갑옷을 부수고 쇄골에 처박혔다. 뼈가 갈라지다가 탁 걸리는 촉감이 손끝을 타고 흘렀다.
그렇게 방어를 완전히 무시한 대가로 목 부근에 무자비한 정권이 꽂혔다.
콰아아아아아앙!
호수 벽에 붙은 채 고꾸라진 아드리안이 핏대가 불거진 모습으로 목을 움켜잡았다. 자칫하면 목뼈가 부러질 뻔했으나…….
동시에 광검이 사라진 마울러의 왼쪽 어깨에서 피가 분출했다.
마울러가 입가를 씰룩였다.
“같이 죽자는 거냐?”
“둘 다 죽을지도 모르지.”
아드리안은 절벽에 등을 기댄 채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러나 뭐가 됐든 반드시 내 검이 먼저 닿는다.”
마울러의 힘과 기술이 아드리안의 숨을 한순간에 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려면 마울러는 무조건 그의 일검을 견뎌 내야 한다.
단순히 수왕과 시종일관 난타전을 벌여 패배했던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전력으로 반격하려고 강성의 태세를 풀었다가는 아차 하는 사이에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 저 예리함에 속도가 실리면 저항력이 무색하다.
죽이려면 마울러 스스로 죽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셈이었다. 아드리안이 강요하는 사투(死鬪)에 응할 각오는 되어 있는가.
쿵!
건틀릿이 서로 부딪쳤다.
“초월자답군.”
격전으로 크게 소모된 연청의 기운이 폭증했다. 그에 응하기라도 하듯이 자색의 기운이 광검의 날에 집중되었다.
초월기의 전조였다.
지진이 일며 지상에 고여 있던 호수의 물이 이내 지하로 낙하했고.
찰나의 폭포가 둘 사이를 갈랐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
초고밀도의 기가 빛을 앗아 갔다. 그렇게 사실상 기의 광채가 되어 버린 그들이 잔상의 잔상을 남기며 광기를 격돌했다.
절벽과 절벽, 또 허공을 발판으로 삼아서 절벽의 틈새로 보이는 하늘로 솟구쳤다.
건틀릿이 도중에 절단되었으나 끝없이 연계하는 권각(拳脚)이 아드리안의 근육을 파괴하고, 장기를 짓눌렀으며, 어긋난 뼈를 마저 부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쏘아진 검기는 그보다 먼저 마울러의 전신에 깊은 자상을 남겼다.
‘한 치라도 밀리는 순간 끝…….’
이 속도.
이 위기감.
이 고통.
이 격전.
이 혈기.
이 끝없는 고양감.
강렬한 의식이 움텄다. 저도 모르게 힘이 다하던 손아귀가 광검을 힘껏 붙들었으며, 하늘색 눈동자가 더욱 선명해졌다.
검과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와 육체적 한계의 너머에서 무아지경에 들어선 아드리안이 순간마다, 순간마다, 순간마다, 순간마다, 순간마다 변화하는 세상에 ‘몰입’했다.
‘이 새끼…… 갑자기 기세가 묘하게 달라졌다.’
정신에 문제라도 생긴 것인지 정통으로 맞아도 눈을 전혀 감지 않는다. 확장된 동공이 집요하고, 또 집요하게 마울러를 노려본다.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 본능으로 행동하는 짐승을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콰아앙!
아드리안에게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음을 체감한 마울러가 다시금 허리를 비틀었다. 뭐가 되었든 간에 물러설 일은 없다.
둘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아드리안의 광검이 마울러의 갈비뼈를 가르며 폐를 지나쳤고, 마울라가 비스듬히 휘두른 팔꿈치가 아드리안의 어깨를 강타했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강!
마지막 힘을 쏟아 내듯…… 수백 합을 이루어 이내 네 자릿수에 달하는 합에 도달한 순간 두 사람이 절벽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기반이 무너진 지상에서 최후의 권격과 검격이 날아들었다.
누가 감히 내 위에 있으랴.
무전 – 무상無上
장엄한 태산마저 압도하는 초월기.
격중하면 초월자라도 항상성이 힘을 발휘하기도 전에 산산조각 날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권압이 아드리안의 모든 퇴로를 차단했고, 다음 마울러의 최강의 일격이 마치 거대한 낙석처럼 눈앞에 들이닥쳤다.
‘하늘을 베어라.’
아드리안은 주저하지도 않고 초월기를 향해 몸을 던졌다.
광검 [실렌다르]가 맥동했다.
초월기의 결을 따라서 자색의 검흔이 곡선으로 잔광(殘光)을 새겼다. 잔광은 사라지지 않고 자리에 머물렀다.
의지가 깨어난 아드리안이 이미 마울러와 다른 세상을 보고 있었다.
기의 섬광이 번쩍였다.
────────────!
아드리안과 마울러가 일순 교차했다. 아드리안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느새 좌측 하단에 있던 광검이 우측 중단에서 정지했다.
반쯤 고개를 숙인 아드리안. 그의 칼날이 햇빛을 반사해 극광처럼 아른거렸다.
쩌적.
허공에서 검흔들이 피어난다.
격전을 벌이는 동안에 아드리안의 검기가 베었던 모든 허공에서, 그야말로 수없이 많은 검기의 흔적이 현현해 일대를 장악했다.
그것들은 어떠한 의지라도 있는 것처럼 유리창이 깨진 듯한 굉음을 터뜨리며 일제히 마울러를 에워싼 공간을 뒤덮었으니.
단절의 극단에서 세상은 증식한다.
초월기.
만계萬界
분열된 하늘.
세계가 조각났다.
* * *
많은 갈래로 분화했던 세계가 점차 수복된다.
쿠우우우우우우…….
초월기가 대립한 여파로 싱그러운 산맥은 파괴돼 흙의 일부가 되었고, 거울처럼 아름답던 작은 호수는 메말라 황폐해졌다.
지각 단층이 일부 어긋났다.
양단되어 치솟은 호수의 절벽은 충격을 버텨 내지 못하고 기울어 무너졌다.
사방에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가 사라지자 크고 작은 바위의 잔해로 허물어진 대지가 몰골을 드러냈다.
“…….”
피가 낭자한 암반에 드러누운 마울러의 안광이 흐릿했다.
난도질당한 전신.
갈라진 피부와 근육 사이로 보여서는 안 될 것이 보였다.
초월자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수백 번은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처였다. 항성성이 마울러의 목숨을 붙잡고 있었다.
스르릉.
광검이 서슬 퍼런 금속음을 내며 마울러의 목을 겨누었다. 무릎으로 마울러의 윗가슴을 지그시 누른 아드리안이 검을 역수로 잡고 있다.
“움직여라.”
체중을 실으면 마울러의 약해진 육체는 별다른 저항 없이 뚫릴 것이다.
“머리 없이도 살아날 자신이 있다면.”
아드리안도 한쪽 어깨가 망가지는 등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런데도 그의 의지는 방금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검에 베이지도 않았는데 살갗이 베이는 것 같은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쿨럭, 쿨럭!
피를 한 움큼 내뱉은 마울러가 가쁘게 호흡하며 눈동자를 기울였다.
둘이 시선을 마주쳤다.
‘……!’
아드리안이 소름 끼치고도 위압적인 낯선 기척에 멈칫했다. 마울러가 눈가를 씰룩였다. 기이한 기척은 하룻밤의 꿈처럼 금방 사라졌다.
마울러의 눈동자 색깔이 변한 것 같았으나 다시 보니 그대로였다.
“그래, 여기까지가…… 초월자인, 나의 한계겠지. 쯧.”
마울러가 혀를 차며 몸에 힘을 풀었다.
“연합에 들어가겠다.”
자존심이 강해서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는데, 그 마울러가 사실상의 패배를 시인했다.
마침내 승패가 갈린 것이다.
“연합에 들어온 걸 환영하지.”
아드리안은 천천히 광검을 거두었다. 마울러의 몸에서 내려온 그도 긴장이 풀리며 주저앉았다. 짙은 피로감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어이.”
마울러가 쓰러진 채 눈동자를 굴렸다.
“방금 그건 뭐였지?”
“……글쎄.”
아드리안이 망가진 장갑 너머로 살갗이 찢어진 손바닥을 응시했다.
“나도 모른다.”
마치 육체가 구현할 수 있는 영역을 초월한 듯한 느낌이었다…….
행동뿐만이 아니라 무형의 의지까지도 실체화해 아드리안의 본능을 반영한 듯한. 지금은 사라졌지만 분명하면서도 모호한 감각이었다.
아마도 다음 경지의 편린일 것이다.
아드리안은 단 하나뿐인 초월기인 계열界裂에서 파생되어, 본능적으로 구현한 두 번째 초월기 만계萬界의 순간을 머릿속에 되새겼다.
숨을 돌리며 전투를 복기한 그가 허리춤을 뒤적거렸다.
‘주군께서 주신 공간 가방이 엉망이군.’
갑옷형 아티팩트인 [그늘거미] 안쪽에 보관해 둔 공간 가방이 훼손됐다. 막 다뤘다간 머지않아 기능을 잃을 터였다.
리산드로의 열매 포션을 두 병 꺼내 그중 하나를 마울러 머리 옆에 던졌다.
“마셔라.”
“고작 포션 따위로 되겠냐?”
“닥치고 마셔.”
마울러가 입안에 가득 고인 피를 내뱉곤 떨리는 손으로 포션을 들이켰다. 물론 녀석에게 제공한 것은 농도가 낮은 물건이었다.
혼자서 달릴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여러모로 편할 테니까. 그는 마울러를 업고 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꿀꺽.
아드리안은 포션을 소분하여 복용하며 치명상과 중상을 다스렸다. 부러진 어깨가 다시 붙은 걸 확인한 그가 입을 열었다.
당장 마울러에게 정말로 궁금한 게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델하룬에서 로니아 왕국으로 남하한 거지? 에온의 움직임이 네놈 귀에 들어갔을 리는 없을 텐데.”
“근시안적인 새끼.”
마울러는 놀라운 포션의 효능을 보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권역을 침범한 게 너희뿐인 것 같냐?”
그때였다.
“혹시 나 말하는 건가?”
“……!”
느닷없이 나타난 존재감에 아드리안과 마울러가 고개를 돌렸다. 검붉은 제복을 입은 아름다움 미인이 바로 그곳에 있다.
기척을 놓쳤다.
아드리안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즉각 광검을 집어 들었다.
“이상하네. 딱히 조용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얌전하게 움직였는데. 뭐, 아무렴 어때.”
여자가 두 사람을 위해 박수를 쳤다.
“훌륭한 사투였어. 피가 끓어서 하마터면 도중에 난입할 뻔했을 정도로. 솔직히 둘 중 하나는 죽을 줄 알았는데. 후후, 관객으로서 이보다 더한 즐거움은 거의 없겠지.”
“넌…… 누구지?”
“무엇보다 신기한 것도 봤고.”
아드리안을 바라보는 여인의 날카로운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이내 그녀가 로니아 왕국의 보검을 발도했다.
“히스릴 델 로하룬.”
여제 – 히스릴이 이름을 밝혔다.
“지쳐 있는데 미안하지만 너희는 방해물이거든. 그러니 나와 같이 있어 줘야겠어.”
“미친년이.”
마울러가 숨을 참고는 앞꿈치를 구부려 포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여유롭게 기다리던 히스릴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스쳐 지나가는 권격.
단숨에 간격을 장악한 히스릴이 무릎과 팔꿈치, 그리고 보검의 손잡이로 마울러의 명치, 목, 측두부를 강타했다.
……쿵.
마울러가 쓰러졌다.
꿈쩍도 안 했다.
의식이 완전히 날아간 것이다.
아무리 지쳐 있다고는 하지만 마울러가 너무도 무력하게 제압당했다. 초월자로서 최소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실력자.
“하나.”
마울러를 쓰러뜨리자마자 사족 보행으로 대지를 박차며 짐승처럼 달려든다. 부상을 돌보면서 상대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그에 맞춰 어금니를 깨문 아드리안이 무리하게 가속했다.
스하아아악!
본 적 없는 날렵하고 사나운 기교가 광검의 길을 자연스럽게 비틀었다. 허공을 베게 된 아드리안의 등 뒤에 그림자가 졌다.
“둘.”
칼자루의 끝부분이 목덜미를 강타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아드리안이 휘청거리다 지면에 머리를 처박으며 정신을 잃어버렸다. 손에서 빠져나간 광검이 바위에 널브러졌다.
“아까 몰입해서 각성 상태에 들어가더니, 역시나 본인은 모르는 기색이네. 본능적으로 진의를 깨달은 초월자의 실력이 아니야. 각성을 할 줄 알거나, 아예 모르거나. 원래 둘 중 하난데. 흠, 내가 모르는 중간 경지가 따로 있었나.”
쓰러진 아드리안에게 다가선 히스릴이 쪼그려 앉았다.
“이상한 초월자네.”
미려한 손가락이 아드리안의 볼을 찔렀다.
“흥미로워라.”
* * *
마울러와 격전을 마친 직후에 히스릴이 개입한 터라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 이후에는 감옥에 갇혀 지내야만 했다.
“뭐, 그렇게 됐다.”
아드리안이 동대륙 남부에서 있었던 상황에 대한 설명을 끝마쳤다.
아주 세세한 것은 제외했다.
마울러, 승패, 히스릴 등 간략하게 그 정도까지만 입에 담았다. 물론 히스릴과 같은 고대의 초월자들의 부활은 이미 전달한 지 오래였다.
“너, 초월자가 된 지 얼마나 됐지?”
“얼마 안 됐지.”
“그런데 가레스를 이겼다라. 수왕에게 패배하고 한동안 잠적하기는 했지만 실력은 확실한데. 게다가 녀석이 승복할 줄이야……. 은둔한 사이에 심경에 큰 변화라도 있었나. 세계 회의에서 하는 짓거리를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유리온은 팔짱을 끼고는 마울러의 평소 행실을 돌이켜보았다.
아드리안도 유리온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긴 했지.”
아드리안은 확실하게 마울러를 제압했다. 하고자 했다면 이미 죽이고도 남았다.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러나 찰나에 마울러에게서 발산한 알 수 없는 기척을…… 착각으로 무시할 수 없던 아드리안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벤디에가 말했다.
“초월자 연합의 전력으로 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울러를 끌어들였지만, 모두 알고 있다시피 그자의 성격은 난폭합니다. 언제나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겠죠.”
“허튼수작을 부리면?”
“그게 일선을 넘는 행위라면…….”
벤디에가 머리를 기울이며 무표정한 얼굴로 목을 그었다. 현재 무투계 초월자 중에서 그녀는 초월자를 가장 많이 상대했으며, 평생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초월자로서 약속을 했으니 설마 그럴 만한 짓은 저지르지 않을 거다. 뭣하면 나중에 언약으로 행동에 제약을 걸면 되고.”
유리온이 말을 이었다.
“그보다 벌써 그 정도 경지면 언젠가 벤디에에게 닿겠군. 앞날이 창창해. 안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죠.”
벤디에는 묘한 눈빛으로 아드리안의 옆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아드리안은 그 시선이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마울러와 함께 감옥에 갇혔을 때 별다른 일은 없었나요? 그 피의 여제인데.”
“말했다시피 우리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음식도 일일이 가져다주더군. 그 외에는 딱히…….”
아드리안은 문득 강제로 주입당한 혀와 입술의 감촉을 떠올렸다.
그보다 치욕스러운 경험이 또 있을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가요?”
“아무 일도, 없었다.”
아드리안은 다시 한번 강조하고는 곧장 앞장서서 걸었다.
“주군께서 기다리실지도 모르니 서두르지.”
* * *
그링 아르카넘은 고요했다.
호스트의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멋대로 관음하는 것은 좋아할지언정 당하는 것은 싫은 모양이었다.
그 ‘당신’ 휘하의 운명의 사도. 호스트가 몇 번째 사도인지는 모르나, 인간계 최초의 왕이나 옛 왕만큼 위험한 태곳적 존재였다.
‘어쩌면 그들 이상의 의미를 지녔을지도.’
호스트는 다른 사도와 달리 ‘당신’을 향한 맹목적 믿음을 보이지 않았다. 운명의 파괴자인 베르덴에게 정보를 제공한 것만 봐도 그러했다.
인간계 최초의 왕이 보였던 극도의 살의와 아예 반대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잘하면 호스트에게서 아주 중요한 세상의 비밀을 캐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르카디옴.
지식의 만찬회가 열리기를 바라는 것은 베르덴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몇 번 감았다가 뜨면 심해로 향할 시간이 다가온다.
에네트의 안내를 받아서 초월자 연합 주둔지를 둘러보며 반가운 얼굴을 확인했고, 또한 중심 전력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한 베르덴.
그는 주둔지 내의 작은 도시에 입성해 응접실에 들어섰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곳에 머물고 있는 초월자들과 마주했다.
벤디에 카에나르.
유리온 하이로스.
아드리안 첸버스.
짧은 인사와 함께 서로 면면을 확인하며 테이블 주변에 둘러앉았다.
“아드리안, 몸은.”
“놈들의 전령이 오기 전에 전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주군.”
“다행이군.”
아드리안의 안부부터 확실히 한 베르덴이 고개를 바로했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최근에 에온과 루아스 교국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단 이야기는 들었을 거다.”
“음, 들었지.”
유리온이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로니아 국왕을 살해한 성자라니…… 복수라니 이해는 가지만.”
“루아스교를 대표하는 신인이 저지를 만한 짓은 아니었죠. 하지만 전쟁이 코앞입니다. 루아스 교국은 언데드에 특히 강한 세력이고요.”
벤디아가 묻는다.
“과도한 보복은 분열을 낳을 겁니다.”
“그렇겠지.”
베르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적당한 수준으로는 끝낼 수 없다. 루아스 교국은 긴 시간 동안 정상에 머물러 있어 다른 세력에 굽히려 하지 않으니, 또다시 이런 월권이 벌어질지도 모르지. 권위란 그런 것이니까.”
“그래도 큰 마찰은 전력의 약화로…….”
“난 좋은 기회라고 보고 있다.
……기회?
유리온이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기회라니. 무슨 좋은 기회?”
“루아스교도 엄연히 초월자 세력이다. 과거 대륙 연합에도 루아스 교국도 포함됐고, 초월자 전쟁에도 신인들이 직접 관여했지. 이곳 초월자 연합에 들어올 자격은 차고 넘칠 텐데.”
베르덴은 어조에 힘을 실었다.
“우린 정상 회의에서 루아스 교국을 연합 휘하에 둔다.”
“세, 세계 종교를……?”
“당연히 전권까지 가져올 생각은 없다. 일부면 충분하지.”
아드리안도 지금 처음 듣는 내용이라 다른 두 사람처럼 말문이 막혔다. 시대를 통틀어 루아스교를 아래로 둔 세력은 없었다.
벤디에는 그것이 베르덴의 최종 목적이 아님을 간파했다.
“무엇을 원하는 거죠?”
“영향력.”
베르덴의 벽안이 명멸했다. 그건 초월자가 아닌 신의 눈빛이었다.
“우리는 세계 종교가 대륙에 끼치는 영향력을 대체하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