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화 대륙 (5)
루아스교는 어떻게 전 인류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나.
오직 인간만을 치유하는 빛의 기적.
인류에게 바치는 숭고한 희생.
인본주의(人本主義)에 기반한 세계의 해석.
인간을 보호하는 울타리처럼 악마와 언데드를 물리치는 신성한 광휘.
…….
말해야 입만 아프다.
루아스교는 마법의 시대 이전에 인간의 시대부터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다른 건 몰라도 치유의 기적이 없었다면 질병과 감염으로 적잖은 사람이 현재까지도 죽거나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마법계가 첨단 기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면, 빛의 종교는 인간이 보다 잘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을 세세하게 조성했다.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빛의 성직자를 단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이는 없다.
그렇다.
신생아부터 노인까지, 모두가 루아스교의 빛에 안겨 있다.
빛의 신성력처럼 실체적인 힘을 부여하는 위대한 신을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러한 신이 자신을 보살펴 준다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애초에 빛에 감싸여 있어서 빛이 없는 삶을 알 리가 없으니, 빛의 신을 찬양하고 숭배하는 인간의 마음은 순리며 상식에 가깝다.
“물론 루아스교의 역할을 그대로 짊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라도 그렇지. 빛의 신성력은 마법적 작용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리고 모방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니까. 연합이 장악하고자 하는 비율은 전체의 극히 일부다.”
베르덴이 마력을 조작해 커다란 3차원의 구체를 조형했다. 그중 1할도 안 되는 부분이 검붉은색으로 차츰 물들었다.
“세기를 거듭할수록 연금술계는 발전해 다양한 치료 포션이 개발되고 있다. 엘릭서 이외에도 에온은 어떠한 신체적 부담도 없이 외상을 치료하는 특수한 포션을 갖고 있지. 신체 결손? 일반적인 연금술로는 무리지만 에온이 진행하는 의체 프로젝트로 상실한 사지의 기능 대체가 가능해.”
연합군 근거지의 하나뿐인 응접실이 발표장으로 변했다.
마도 축제의 연장선 같았다.
“현재 진행형인 기술만 해도 이 정도다. 마법계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지. 무엇보다 이 모든 걸 누리기 위해서는 명확한 대가를 치러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루아스교도 구조적 측면에서 마법계를 감히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 있지.”
루아스 교국의 기적은 신성력을 소모함으로써 발현된다. 말인즉슨 신앙심 말고는 다른 재화가 필요 없는 것이다.
편리한 힘이지만, 그렇기에 평등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힘이다.
신인은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부활시킬 수 있고. 대주교급 이상의 성직자 일부는 신체 결손을 치유할 수 있다.
상위 주교는 물론이거니와 주교 중에서 치유의 기적을 전공한 성직자들은 신체 부위만 남아 있다면 절단된 단면에 붙일 수 있다.
이런 기적들을 펼칠 수 있는 그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반면에 그러한 기적이 절실한 인간은 셀 수도 없으니…….
누구는 되살려 주고.
누구는 사라진 팔을 되찾아 주는데.
왜 나는 저버리는가?
아무리 루아스교가 무상의 자비를 베풀어도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없으므로, 구원받지 못하는 인간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고위 성직자들이 죽도록 노력하는 걸 이해해도 불만의 씨앗은 결국 움트고 만다. 타인이 쏟은 땀보다 자신이 방금 흘린 피 한 방울이 더 진하고 가깝기 때문이다.
기적을 나눌수록 신앙심은 옅어지는 아이러니.
그래서 꽤 오래전에 루아스교는 기적에 제한을 걸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고위 기적을 민간에 베푸는 걸 완전히 금지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왕족과 귀족조차 간곡히 빌어도 허용하지 않으니 자연히 아랫사람들은 거의 불만 없이 종교의 법에 순응했다.
한 사람의 신앙은 신분과 재산의 고하를 따지지 않는다.
루아스교의 관점에서는 사실 귀족이나 평민이나 종교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고, 평민은 귀족보다 훨씬 더 많았으니.
인류가 최고위 기적을 누릴 자격을 박탈한 대신 루아스교는 수많은 신도를 지켜 낼 수 있었고, 적당한 기적에 기부 명목의 헌금을 받아 영리 종교의 외피를 최대한 피하면서 활동 범위를 넓힐 수 있었다.
루아스교는 그렇게 세계 종교가 되었다.
“믿음에는 저마다의 근거가 있다. 우리를 보듬어 줄 거라는 확신. 그래서 루아스교는 사람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 종교의 표상이 훼손될까 봐 두려워서 비용을 치르고 기적을 행사하는 형식 대신 자발적인 헌금을 누누이 강조할 정도로.”
“…….”
“종교가 대놓고 추구할 수 없는 영리(營利). 우린 이걸 이용할 거다.”
루아스교와 다르게 마법계는 이익을 따지는 것에 있어 사회의 눈총에 아랑곳할 이유가 없다. 신앙적인 믿음에 기반하지 않았으니까.
얽매일 교리도 없다.
사람들은 마법계가 자신을 지켜 줄 거라고 믿지 않는다. 경험해 본 적 없는 기술을 기대할 뿐. 그래서 마법계는 종교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사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루아스교가 당장 할 수 없는 것부터 시작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루아스 교국이 제한한 신체 결손의 회복을 의체 프로젝트가 도모한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석을 이용해 골렘 의체를 쓸 수 있다. 의체와 의체에 적합하게 가공된 마석은 새로운 기술 ‘상품’이 될 예정.
이 소식에 사람들은 돈을 밝힌다며 원색적으로 비난할까?
천만에.
오히려 희망을 느끼겠지.
팔다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본래의 삶을 되찾을 테고, 그들은 의체에 관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경제 활동에 힘쓸 터.
마법이라는 이름의 기적은 이 잔혹한 세상에서 또 하나의 실존적 신앙이 될지니.
그렇게…… 사람들의 생각은 잔잔한 물결처럼 흐를 것이다.
빛이 없으면 마법이 있다고.
이로써 마법계는 금전적 이득을 취하면서 감사를 받고, 믿음을 얻고, 세계 종교를 부분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옛 왕과의 전쟁에서 활약하면 그 기조는 원하지 않아도 더 심화한다. 루아스교 자체의 권력이 약화할수록 반대급부로 초월자 연합은 국제 사회의 중심에 가까워질 거고.”
화아아아아악.
마력 구체가 서서히 검붉은 색채에 잠식되더니 곧 하나의 색만이 남았다. 초월자들의 시선이 눈앞에 드리운 빛에 모였다.
“이게 내가 제시하는 연합의 방향성이다.”
베르덴이 마력을 거두었다.
“궁금한 점 있나?”
“물론 있습니다.”
벤디에가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실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성자의 잘못이 아니었더라도 교국을 압박할 작정인 것 같은데…… 에온이야 어떻게 움직이든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사실상 에온의 기술력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인데 왜 이 초월자 연합을 끌어들이려는 거죠?”
유리온이 같은 의견을 더했다.
“세계 종교와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휘하에 두는 건 확실히 예상 밖의 제안이었어. 최근에 루아스교가 너를 비롯해 주변의 세력에 크고 작은 빚을 지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루아스교의 입지를 반드시 약화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아드리안이 답했다.
“루아스교는 배타적이니까.”
베르덴이 첨언했다.
“초월자 전쟁의 진실을 숨기고 숨기다가 들키고 나서야 진실을 뱉었지. 그리고 주검의 영광에 옛 왕의 신체를 빼앗기는 등 수습 불가능한 사달을 냈고. 한데 반성은커녕 고개를 쳐들고 있다.
“음, 그렇긴 하지.”
“언데드의 천적이란 이유로 내버려 두면 오히려 분열의 단초가 될 거다. 국제 사회를 하나로 엮으려면 모난 돌을 눌러 놓을 필요가 있어.”
베르덴과 아드리안이 눈을 마주쳤다. 아드리안은 결국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해하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벤디에, 어째서 에온이 아니라 초월자 연합으로 영향력을 넓히는 거냐고 물었나? 내가 세계 회의에서 상호 연결을 유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드리안이 내가 부재한 사이에 초월자들을 모아서 이 연합체를 구성한 것과도 같은 이유고.”
“세계 회의라면.”
벤디에와 유리온이 가르간트의 세계 회의장에서 있었던 광경을 떠올렸다. 베르덴이 연설하다시피 하며 던진 단어들 또한 말이다.
초월적 존재 다수 살해, 그들이 모르는 세상을 경험한 베르덴, 운명과 예언.
‘운명…….’
벤디에가 기억을 곱씹었다.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 지하에서 부활한 옛 왕은 베르덴에게 강한 관심을 보였으며, 곧 베르덴을 운명 파괴자라고 지칭했다.
“옛 왕이 깨어난 그날 인류의 배신자들이 성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학살을 저지른 뒤 남김없이 사망했다. 용검의 소재를 공개한, 종적이 묘연해진 이데라트 연맹장과 레논 버나드. 하나같이 조직적인 움직임이었지. 섬에서 우리를 노렸던 비공식 초월자 또한.”
“그 녀석 말인가.”
유리온이 팔뚝의 흉터를 쓸었다.
단검을 쓰는 초월자.
예전에 하이랜디아에 멋대로 침입한 놈은 이번에 옛 왕이 부활하는 장소에 등장해 베르덴을 노리려고 하다가 아드리안에게 중상을 당하곤 자취를 감췄다고 전해졌다.
“당신은 배신자들의 배후를 알고 있군요.”
“알고 있다. 규모도 알지 못하고, 또한 내가 아는 걸 이 자리에서 전부 말할 수도 없지만 편의상 놈들을 이렇게 부르도록 할까.”
베르덴이 입술을 달싹였다.
“외적(外敵).”
초대 마도왕에 의해서 탄생한 초월자들은 운명에 굴복할 수 없다. 이상을 위한 광기는 정해진 굴레에 얽매이는 걸 본능적으로 거부하므로.
말인즉슨 운명에 대항하려면 초월자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현재로서는 말이다. 그 위에 인간, 수인, 드워프, 엘프…… 악마라는 살을 하나씩 붙여야 할 필요가 있다.
“대륙은 외적에 직면해 있다.”
아드리안이 고안한 초월자 연합은 베르덴의 길과 맞닿아 있었다. 그것은 운명에도, 저항자에도 속하지 않은 세 번째 세력의 본격적인 시작이 될 것이다.
* * *
로니아 왕국과 하부 수인 부족에서 사문에 의해 발생한 참사는 에온이 주도적으로 정리하고 있으나, 로니아 왕국을 권역으로 두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울러, 가레스 시릴리아드였다.
언데드가 모조리 물러난 뒤 동대륙 남부는 무척 조용했다. 죽음의 문이 있는 장소는 멀리서 접근을 통제했다.
“아빠, 저희 어디로 가요……?”
“쉿!”
델하룬의 근위사단장인 미라셀을 필두로 왕국의 잔당을 지휘했다. 국왕이 실종된 로니아 왕국민들과 일부 귀족들은 숨죽인 채 따라야만 했다.
미라셀이 작게 말했다.
“블라드는 찾았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갑작스러운 언데드 군세의 급습으로 계명 집행 부대와 떨어져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림낙스의 간부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림낙스의 수장이 실종됐다.
…….
수습이 한창이던 그때 가레스는 인적 하나 없는 동굴에 있었다.
[만족스러운 결과였노라.]
기생의 대악마 – 이페아카른의 음성이 어둠 속에 흘렀다.
[초월자 연합이라는 명분이 생겼으니 베르덴을 가까이서 관찰하라. 그 파괴적인 마력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닥쳐.”
가레스는 동굴 바닥에 앉은 채 얼굴을 사납게 구겼다.
초월자로서 패배했다,
그것도 시퍼렇게 어린 초월자한테.
솔직히 말해서 전력은 엇비슷했고, 전반적으로 가레스가 약간 우위를 점했지만 놈이 마지막에 보인 알 수 없는 힘에 짓눌리고 말았다.
‘분명 본능을 여지없이 내보였다. 초월자로서 나보다 더 높은 경지에 가까워졌다는 건가.’
무슨 차이가 승패를 갈랐을까.
도대체 아드리안은 무엇이 그리도 특별하길래 짧은 세월에도 불구하고 초월에 적응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 하는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둠이 감춘 끈적한 촉수가 보였다. 아드리안은 순수한 초월자지만, 가레스는 대악마와 계약을 맺은 불순물이 섞인 초월자였다.
어쩌면 그 차이가 초월자로서 다른 양상을 보인 걸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초월기에서 밀려서 신경이 끊어졌을 때 감정에 크게 격동해 <악마화>로 몸을 회복하여 아드리안을 죽이려고 했으나, 바로 그 순간에 기생의 대악마가 속삭였다.
이는 기회다.
자유를 누리려면 지시를 따르라.
반항하지는 않았다.
초월자로서의 대결에 패배했는데 <악마화>까지 쓰는 것은 역시 추했으므로. 패배자의 치욕은 온전히 가레스의 것이었다.
“……고대 초월자들은 어떻게 됐지?”
[이미 동대륙 남부의 두 사문을 개방하고 모습을 숨겼노라. 이제 중요치 않노라. <악마화>를 시험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겠노라.]
이페아카른은 아쉬워하지 말라면서도 느릿하게 말을 덧붙였다.
[이와 별개로…… ‘너머’에 이변이 생겼노라.]
“너머?”
[세계의 틈새를 이르는 다른 이름이노라.]
“세계의 틈새는 또 뭔데.”
[네가 딛고 있는 이 첫 번째 세계와 다섯 번째 세계를 나누는 경계이노라.]
알 수 없는 단어들의 나열에 가레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놈의 촉수가 자세한 설명 따위는 없다는 듯 꿈틀거렸다.
“아는 게 많아서 좋겠군.”
[나의 지식이 풍부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지식을 게걸스럽게 탐하는, 바다의 비린내를 풍기는 촉수가 존재하는 이상.]
가레스는 비린내 풍기는 촉수가 뭔지 캐묻기도 귀찮았다.
귀찮기보다는 짜증이 났다.
“그래서 그 세계의 틈새란 곳에서 무슨 이변이 생겼다는 거냐.”
[이변의 원인은 알 수 없노라. 하지만 그 여파는 대륙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겠지.]
이페아카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악마들의 출현 빈도가 증가할 것이니라.]
3대 대악마가 악마종의 출몰을 예고했다.
* * *
수많은 생명체가 해부돼 지식이 되고, 실험체가 되어 신인류의 초석으로 빚어지는 글러트니의 중심 실험실이자 본거지───탐식의 조정소.
“후우…….”
실험 구역에 갇힌 조각가 호세가 오늘도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