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7화 아르카디옴 (2)
참석자들의 대화는 베르덴에게도 들렸다.
‘세 번째 주빈이라고?’
베르덴은 가면의 존재가 향해 오는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통찰력을 발휘했다.
시선 너머에서 일렁이는 감정과 생각을 직관으로 간파하려 했다.
……!
그때 뇌리가 번뜩이며 베르덴의 고유한 육감이 제한되었다. 테아렐도 나름대로 통찰력을 발휘하고 있던 중이었는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관자놀이를 씰룩였다.
‘환경이 변했다.’
비유하자면 귓속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먹먹한 기분이었다.
통찰을 그만두자 이물감은 사라졌다.
‘호스트가 수를 썼군. 여기서 초월자의 통찰력은 반칙이라는 건가.’
가면의 존재는 난간 위에 잔을 내려놓고 벽으로 물러섰다.
당장 접근하지는 않았다.
정말로 세 번째 주빈이라면 원치 않아도 얼굴을 맞댈 상황이 올 것이다. 놈이 특별하지 않은 존재에게 주빈의 자격을 주었을 리 없으니까.
만약.
첫 번째 주빈이 ‘당신’이고.
두 번째 주빈이 초대 마도왕이라면.
과연 세 번째 주빈은 누구인가.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베르덴 일행이 만찬회장의 중심부로 걸음을 옮긴다.
그를 따라서 일제히 눈빛이 따라왔다.
“오…… 하나하나가 별미구려. 다른 때 같았으면 만찬회의 주찬(主饌)이 되었을 텐데.”
루자크는 어느새 재료를 알 수 없는 와인과 핑거 푸드를 손에 들고 식욕을 돋우었다. 팔이 하나밖에 없는데 요령이 좋았다.
만찬회를 직접적으로 경험한 적 있는 지식인은 분위기를 즐겼다.
테아렐이 물끄러미 가까운 식탁을 내려다봤다.
“역시 손도 안 대는 게 좋겠지?”
[응. 안 돼.]
호스트가 말했었다.
지식을 위해 서로 먹고 먹히는 것.
그보다 고상한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아르카디옴에 참석한 괴이한 지식인들은 서로를 잡아먹는다. 루자크를 흘끔거리는 여자 귀빈은 그의 뇌의 절반을 탐했었다.
일반적인 인간은 아니니 식인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겠으나 그에 한없이 가까운 행태.
지식과 섭식을 연결한다면 만찬회에 올라온 이 요리들은…… 인간과 같은 ‘지성체’를 재료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루자크의 설명에 따르면 일반 음식이 나올 때가 더 많다고 하지만, 그냥 음식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게 문제였다.
‘생각만 해도 역겹기 짝이 없군.’
설마 이쪽 방면에서 글러트니보다 더한 괴물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방금까지 옆에서 대화를 주고받은 이를 만찬으로 내놓는 연회라니.
그때였다.
탁.
불이 꺼졌다.
회장(會場)이 어둠에 휩싸였다.
공허한 암흑 속에서 무언가가 꾸물거리며 베르덴 일행의 사이를 지나쳤다.
마치 촉수 같은 질감이었다.
만찬의 장식이나 다름없는 하객을 포함해 예정된 참석자들이 전원 집합한 것을 확인한 주인이 마침내 존재감을 드러냈다.
천장의 빛이 계단만을 비춘다.
{존재의 연원을 의심하는 지식인들이여. 무지를 거부하는 오만한 지성들이여.}
검은색 리본이 특징인 기묘하고 특이한 턱시도를 갖춰 입은 호스트가 2층의 갤러리로 올라가는 계단의 중간에서 등장했다.
{그대들이 들어선 이 저택, 그대들이 초대된 이 만찬회는 끝없는 사유의 해부대이자 인식을 소화하는 기관────아르카디옴.}
호스트가 가슴에 기다란 손을 얹었다.
{나는 이 만찬회의 호스트이자, 모든 지식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개념이며, 질문과 대답이 서로를 파괴하는 순환을 관장하는 자다.}
천천히 내려오는 계단 위 그림자.
난간을 쓰는 적막의 손길.
{이제 그대들에게 제공될 것은 그저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감정의 찌꺼기만이 아니다. 지성의 잔해를 손에 넣을 기회. 누군가가 추구했던 진리의 편린을 음미해 소유할 자격을 논하게 될지니. 씹어라, 그리고 삼켜라. 지식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고결한 지식인의 도리다. 이 세상이 그런 그대를 혐오한다면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겨라.}
호스트가 저택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세계가 질문이라면, 아르카디옴은 답이다. 이미 그대들은 초대됐고, 내게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만이 그대들의 깊은 지성이 여타 지성체와 궤를 달리한단 증거일지니. 자, 지식의 만찬이여.}
그가 어둠에 가려진, 집사의 은반에 놓인 샴페인 잔을 들었다.
{패자는 기록되어 영원히 남을 것이며, 승자는 더 우월한 지식인이 돼 소멸을 거부하고 영원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저택 전체가 환해졌다.
{참으로 기쁜 순간이다. 세 번째 주빈 ‘마기온’, 네 번째 주빈 ‘애셔’, 첫 번째 귀빈 ‘블러디아’가 한자리에 모였으니. 이보다 호화로운 아르카디옴은 여태껏 없었다. 지성체들이여, 우리와 함께한 존귀한 지식인들을 위한 축배를.}
아르카디옴에서는 가명을 사용한다.
호스트가 샴페인 잔을 머리 위로 뻗었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많은 지식인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잔을 아주 높이 들었다.
베르덴을 정면으로 마주 본 호스트의 목소리가 바다에서 들려왔다.
{그대의 지식을 찬미하라.}
찬란한 지성을 위해.
{아르카디옴을 시작한다.}
고고한 지식인들의 함성과 박수갈채가 심해에 울려 퍼지며, 비로소 진정한 지식의 만찬회가 막을 올렸다.
* * *
만찬이 재개된다.
아주 긴 세월 동안 아르카디옴에서 살아남으며, 숫자 서열을 하나씩 높여 온 상류 귀빈들이 두 명의 주빈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일부 귀빈은 아르카디옴에 오랜만에 참석한 첫 번째 귀빈을 찾고 있었다.
먹잇감을 보는 듯한 안광.
포식자를 대하는 듯한 떨림.
주빈들과 첫 번째 귀빈의 고유한 지식을 원하는 지식인은 많았다. 그것은 누구도 엿보지 못한 특별한 지식이었으므로…….
그들에게 도전한 지식인은 도리어 지식을 모조리 빼앗겨 지식의 망령으로 전락하기도 했지만 그런데도 이들은 망설임이 없었다.
오직 광기 어린 지식욕만 가득했다.
나는 다르다!
각자 평생 쌓아 올린 지식의 탑이 귀빈들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게 했다. 미식을 위해서 상류의 귀빈은 기꺼이 제 것을 빼앗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순간…… 한 자릿수의 귀빈들이 멈칫했다.
등장하자마자 짧은 개막 연설을 마친 호스트가 귀빈들 앞을 지나친 것이다.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그렇게 호스트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네 번째 주빈에게 다가갔다.
{처음 참석한 자들을 위한 간단한 연설이었는데, 어떤가. 아르카디옴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마음에 잘 와닿았나?}
베르덴이 말했다.
“지식을 위한다면 어떤 행동도 추잡하지 않다는 연설 말인가?”
{제대로 이해했군.}
평소처럼 심해의 색이 아른거리는 드레스를 입은 테아렐이 팔짱을 꼈다. 그녀는 각자 무리를 짓고 있는 하객들과 귀빈들을 둘러봤다.
“그래서, 만찬은 이게 전부?”
{이는 개막식을 위한 식전일 뿐. 아르카디옴의 정수는 게임이다. 서로 지식을 겨루어 승패를 정하고, 승자는 패자가 가진 지식을 갖는 것이지. 이미 루자크 팔테인에게 들어서 알고 있을 텐데.}
“알면서 물어봤어.”
열여섯 번째 귀빈인 루자크는 베르덴에게 범한 실례를 만회하기 위해, 호스트의 명령으로 대륙까지 따라 올라갔다.
블랙 아워의 대전당에서 머물며 루자크는 많은 정보를 건넸다. 아르카디옴의 절차는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개막식.
게임.
폐막식.
아르카디옴마다 세부적인 내용은 달랐지만 항상 이 순서로 진행됐다.
베르덴이 물었다.
“지식의 게임은 언제 시작할 예정이지?”
{성급하군. 만찬을 즐겨라, 애셔. 너희를 위해서 특별히 엄선한 재료들로 만든 음식이니까. 대륙에서 구해 왔지. 인간과 같은 고위 지성체는 함유되어 있지 않으니 안심해도 좋다.}
“안 먹어.”
{성의를 알아주지 않는 손님이군.}
호스트는 아쉽다는 듯 문어 머리에 달린 촉수를 쓸다가, 맛이라도 보는 게 어떻냐는 듯 슬쩍 그릇을 내밀었다.
[쯧.]
[치우십시오.]
베르덴의 양어깨에 앉은 알파와 베타가 외눈을 빛내며 쳐내려고 했다.
호스트는 {행패를 부리려 하지 마라. 올다르크의 피조물들.}이라며 냉큼 핑거 푸드가 담긴 그릇을 다시 테이블 위에 두었다.
{아르카디옴의 기본은 식사다. 지식 또한 섭취로 취해야 하지. 그런 독자 행동으로는 넌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다.}
“내 방식대로 알아내겠다고 말했을 텐데.”
{분명 그랬지.}
호스트가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하지만 좋지 않다. 게임에서 승리한 지식인이, 그것도 주빈이 표면적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분위기가 식고 말 테니까. 이는 호스트로서 좌시할 수 없는 부분이지. 그래서 나름의 공정성을 위해 대안을 마련해 보았다.}
인공 골렘들이 갸웃거렸다.
[대안?]
{게임에서 승리할 때마다 이 내게 질문할 권리를 주겠다. 질문의 등급은 세 가지다. 두 자릿수 귀빈을 이기면 ‘하급’, 한 자릿수 귀빈을 이기면 ‘중급’, 첫 번째 귀빈이나 세 번째 주빈을 이기면 ‘상급’. 지극히 간단한 규칙이다. 급이 높아질수록 내가 응해야 하는 질문의 수위도 높아지지.}
패자를 먹지 않는 자는 패자가 가진 지식 대신에 질문의 권한을 얻는다.
오직 베르덴 일행을 위한 새로운 룰이었다.
하급은 세 개.
중급은 두 개.
상급은 한 개.
다만 급에 따른 각 질문의 개수는 한정된다.
테아렐이 흥미를 보였다. 그녀도 아르카디옴의 음식을 먹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굶어 죽기 직전까지 간다면 모를까.
“예를 들어 답변의 정도는?”
{중급 질문권을 얻으면 네가 초월자로서 어째서 나를 바다의 두려움으로 여기며 내 죽음을 이상으로 추구하게 되었는지 설명해 주겠다.}
“……!!!”
초월자가 고유한 이상을 품게 된 근본적 원인을 알려 주겠다니. 저건 테아렐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선택‘받은’ 초월자.
베르덴과 아드리안처럼 선택을 내린 초월자와는 다른, 대부분의 초월자가 이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서 호스트는 이 초월자들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선택을 받았는지 알려 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상급 질문권으로는…….}
호스트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며 베르덴, 알파, 베타에게만 들리도록 그의 음성이 퍼져 나가는 범위를 한정했다.
{올다르크의 목적, 혹은 ‘당신’이 창조한 운명의 원천 등에 대해서 답해 주지. 그들의 금기에 가려진 이 세상의 진실을.}
“……!”
베르덴이 경악했다. 알파와 베타도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호스트에 대한 의문이 더 많아졌다.
‘이놈은…… 뭐지?’
이렇게 난해한 상대는 처음이었다.
행동만 봐서는 누구의 편인지 모르겠다. ‘당신’의 사도인 호스트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추측할 길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호스트가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정도면 동기는 충분한 것 같군.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넘치게 흘러야 비로소 잔이 가득히 채워질 수 있는 법이니.}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지식인들이여, 이번 아르카디옴에서는 처음으로 ‘특별 손님’을 초대했다. 내가 직접 세상의 저편까지 가서 데려온 지식인이지.}
만찬회장의 천장 표면이 심해의 어두운 바닷물로 뒤덮였다.
그것이 거울처럼 베르덴과 호스트 등을 비롯한 이들의 모습을 반사하더니, 곧 다른 풍경을 비추기 시작했다.
아르카디옴 바깥에 있는 절벽, 지식의 경계.
그 아래 지식의 매립지가 있다. 지식을 과분하게 탐하다가 존재마저 상실한 망령들의 땅. 모든 지식의 망령은 죄인의 지식을 먹어서 자아를 되찾아 다시금 지식을 갈구하기를 반복한다.
루자크는 베르덴에게 실례를 범한 죄목으로 팔 한쪽을 뜯어 먹혔다.
쿵───!
지식의 매립지에서 강한 충격이 발생했다. 해저 지진에 저택까지 진동했다. 직후 매립지에서 인간의 형체가 튀어나왔다.
마법으로 지식의 망령들을 쓸어버리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죽음의 기운이 만연했다.
절벽 위로 솟구친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저택을 발견했다. 주저 없이 돌진해 오는 모습을 본 호스트가 촉수를 튕겼다.
벌컥!
저택의 문이 열렸다.
특별한 손님이 위압감을 흩뿌리며 호화로운 저택 안에 들어섰다. 잠시 호흡과 마력을 갈무리한 손님이 지독한 안광을 번뜩였다.
“호스트란 놈을, 내 앞에…….”
살의를 내비친 특별 손님이 눈을 부릅떴다. 그가 베르덴을 보았다. 베르덴도 특별 손님과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왜 그링 아르카넘이 세계 금서로 취급되었을까. 왜 그링 아르카넘을 통해서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을 테지.}
호스트가 웃음기가 짙게 서린 목소리로 베르덴의 어깨를 잡았다.
“설마…….”
{이것이 그 답이다.}
호스트가 특별 손님을 소개했다.
{특별 손님 ‘하인’이다.}
지식의 개념은 지성체에 의해 탄생했다.
그럼 지식이 잊히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기록은 해석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이니 지식의 주체가 되는 존재가 계속 존재하면 된다.
그런 뜻에서 몸은 스러질지언정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혼이 존재하는 한 지식은 영원하니…….
그링 아르카넘은 죽음을 맞이한 영혼에게서 직접 지식을 구할 수 있다.
{옛 왕에 대한 정보. 필요하지 않나?}
“네가 왜 여기에…….”
주검의 영광의 첫 번째 하인, 드라벤 르마르크가 돌아왔다. 베르덴을 마주한 그가 당혹감을 보이다가 전신의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마도 <명운(命殞)>
드라벤이 베르덴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