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1화 네 번째 주빈 (4)
문을 열었다.
긴 복도가 나왔다.
좌우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열된 많은 방문이 있다.
‘통찰력만이 아니라 마법 또한 금지. 신체 능력도 특정 선에서 제한됐군.’
베르덴은 차분히 걸으며 첫 번째 게임의 무대가 된 환경을 관찰했다.
저택에 부여된 힘의 제약이 마치 세계의 금기를 닮았지만…… 베르덴이 아는 금기들과 다르게 별 위협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르카디옴의 금기는 격을 끌어올리는 것만으로 언제든 부술 수 있다. 하나 그 대가로 아르카디옴에서 추방되는 구조인가.’
호스트가 용인하는 수준의 육체 능력은 기껏해야 잠금장치가 없는 나무문을 강하게 여는 정도밖에 안 될 터.
무턱대고 복도를 질주하며 지식인들을 잡으려고 해 봤자 대규모 학살은 어렵다.
게임을 치르는 사이에 다른 지식인은 있는 힘껏 도망갈 테니까. 모래밭을 움켜잡아 봤자 잡히는 것은 모래 알갱이 하나뿐이다.
이곳은 그야말로 게임을 위한 장소…….
지식을 겨루는 즐거움? 서로 간의 지식 대결을 구경하는 재미? 승자가 패자를 요리해 먹는 지성체의 약육강식?
지식 게임에 참가하지 않는 운영자로서 호스트는 무엇을 추구하는 걸까. 어떤 목표를 세웠길래 지식의 만찬회를 계속 개최하는 걸까.
‘운명에 속하되 운명을 추종하지 않는 중립적인 사도.’
존재에 대한 고찰을 멈출 수 없다.
저벅, 저벅.
베르덴은 상념에 잠긴 채 하염없이 복도와 방을 거닐고, 또 건넜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문을 열려고 하는 하객과 마주쳤다.
“네, 네 번째…… 느하아악!”
하객이 미처 물러서기도 전에 베르덴의 손길이 그의 머리에 닿았다.
첨벙!
“문제, 발의하겠습니다.”
집사복을 갖춘 아귀가 등장하고 마법적 이해력 문제가 제시됐다.
일정 범위 내에서 여러 항으로 분산될 때 마력이 가장 안정적인 상태라는 마법사 간바로의 최대 분산 안정 법칙.
분산된 마력 항들은 서로 다른 값을 가지더라도 특정 조건에서 평균값을 중심으로 평형을 가진다는 도릭스 평형 모형.
마력 유효 계수를 산출할 때 필연적으로 생기는 손실을 보정하여, 이론상의 답을 단순화하는 기본학 보정 방식.
세 가지 이론이 각각 명시한 숫자가 계산 공식에 얽혀 변형된다. 집사가 요구하는 답은 역시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 단답이었다.
베르덴이 내심 지루함을 삼켰다.
‘열 번째 귀빈과 함께 제시된 문제와 비교하면 질이 떨어지는데. 숫자의 자릿수만 늘려서 풀이만 억지로 불렸을 뿐. 유니아나 카인이 와도 풀겠군.’
최대 분산 안정 법칙은 철 지난 주장이고, 도릭스 평형 모형은 마탑의 중위급 마법사들이나 실험에서 활용하는 논리다.
기본학 보정 방식은 심화 과정을 터득하지 못한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해당 교육 과정 내에서 마법학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마련된 편리한 명제다.
베르덴이 보헤미른 마탑의 말단 연구원이 되어 한창 일반 도서관을 들락날락할 무렵에 이해를 마친 마법계 학설들.
물론 천재 쌍둥이가 이 문제를 본다면 무슨 이딴 게 다 있냐며 역정을 냈으리라.
“4,918,230,913.”
아르카디옴에서 마법적 이해력 문제는 대부분 숫자의 답을 요구했다.
숫자야말로 명확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관적인 마법적 풀이의 정답과 오답을 판단할 만큼 집사들은 지식인으로서 그리 우수하지 못했다.
“정답입니다, 네 번째 주빈이시여.”
툭, 하객이 펜을 떨궜다.
“무, 무, 무슨 난이도가……?”
“문제의 난이도는 양측 지식 수준의 교집합에서 결정됩니다. 다만 네 번째 주빈과 하객의 수준 차이가 심각하기에 되레 당신의 지성과 지석에 훨씬, 훨씬 더 가까운 문제를 내야 했습니다. 네 번째 주빈께 걸맞은 문제를 제시할 수 없었다는 뜻이죠. 자, 그럼 데리고 가십시오.”
“어떻게 이게 나한테 걸맞은, 엌!”
발밑에서 물이 차오르더니 안에서 솟구친 수많은 팔이 하객을 순식간에 끌어당겼다. 그의 짧은 비명도 동시에 멀어졌다…….
베르덴이 물었다.
“탐식을 거부한 나와 테린에게 패배한 지식인은 대가를 치른다고 호스트가 그랬는데. 정확히 어떻게 되는 거지?”
“패배자는 패배에 상응하는 머릿속 지식의 분량을 직접 확정한 뒤에 그 지식을 요리사들에게 추출당합니다. 그리고 다른 패배자가 그렇듯 게임의 무대로 복귀합니다. 추출당할 지식이 부족하면 여타 상실자가 그렇듯 지식의 망령으로 전락합니다. 첫 번째 게임에 참여하면 첫 번째 게임의 종료가 선언될 때까지는 절대로 나갈 수 없습니다.”
아귀 집사가 공손히 대답했다.
“네 번째 주빈께서 혐오하시는. 지성체의 신체를 잘라서, 또는 산 채로 요리하는 행위는 없습니다. 네 번째 주빈의 일행들께 패배한 지성체들의 경우에는 말입니다.”
“그렇군.”
“외람되지만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라.”
“혹 게임에 참여한 지성체들을 동정하십니까?”
집사는 감히 주빈에게 질문하는 결례를 범하고는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베르덴의 입에서 전혀 눈을 떼지 못했다.
아르카디옴의 집사 또한 그 누가 뭐래도 심해의 지식인이었다.
“선택엔 책임이 따르지. 게임 참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한 것이니 동정하지 않는다. 그저 존엄을 무시하는 행동이 거슬릴 뿐이다. 아르카디옴을 없애 버리고 싶을 정도로.”
“…….”
베르덴의 경멸 어린 시선을 받은 집사가 머리에 달린 발광체를 빛냈다. 공포. 그런데도 아귀 집사는 희열을 만끽했다.
주빈과 이렇게 대화하는 것조차 집사 따위에게는 큰 영광이었다.
“그나저나 셸브론은 어떻게 됐지?”
집사 셸브론.
열여섯 번째 귀빈인 루자크의 명을 받고 베르덴 일행에게 거짓을 고해서 루자크와 일대일로 대면하게 만들었던 그는, 호스트에게 질책을 받고 처벌을 당할 상황에 몰렸다.
아귀 집사가 빙그레 웃었다.
“후후후, 27번째 집사 셸브론이 네 번째 주빈께 은혜를 입었군요.”
“은혜?”
“호스트께서 말씀하시길, 만약 네 번째 주빈께서 셸브론을 언급하시면 27번 집사의 신분을 돌려주고, 언급하지 않으시면 그를 지식의 매립지로 던져 버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은혜이지요.”
베르덴이 모르는 사이에 베르덴에 의해 셸브론의 삶이 결정되었다.
그는 여기서 호스트의 의도를 조금 느끼고 말았다.
‘나를…… 시험하는군.’
호기심의 발로인가.
그래야만 하는 다른 목적이 있는가.
베르덴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시험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리바안트 공국에서 베르덴을 암암리에 관찰하며 조사한 방주의 리스너에게 화를 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나 불쾌감을 내비치지 않았다.
방주의 뜻을 이해하고 움직인 리스너와 달리 이 아귀 집사는 호스트가 뭘 하는지도 모르니까. 당장의 분노는 괜한 화풀이가 될 것이다.
베르덴의 게임은 계속됐다.
귀빈이고 하객이고…… 베르덴의 범위에 들어온 순간 게임이 강제됐다. 일부는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해 다수로 지적 대결에 응했으나 그건 오히려 베르덴이 바라는 태도였다.
베르덴의 목표는 참가자를 최대한 줄여서 게임의 총시간을 단축하는 것이므로.
‘아, 압도적이다.’
게임 밖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지식의 집사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네 번째 주빈께서 세 분이시니 승리를 걷잡을 수 없구나. 패배한 참석자들이 많아서 주방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라니……!’
‘하나의 예외 없이 어떤 문제든 간에 설명이 끝난 직후에 답이 나온다. 네 번째 주빈께서는 계산 과정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인가?’
집사들이 북쪽을 보다가 얼굴이 경직됐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히히.]
알파에게 패배해서 지식을 빼앗긴 후에 무대로 돌아온 하객이, 불행히도 다시 알파에게 발각당해서 쫓기다가 잡히고 말았다.
문제가 주어지는 내내 하객은 비명을 지르다가 게임 밖으로 내쫓겼다.
‘저 하객은 지식의 망령 당첨이군.’
‘이러다 두 번째 게임이 빨리 끝나겠는데?’
‘그래도 여태까진 두 자릿수 귀빈밖에 마주치지 못하셨으니…….’
한 자릿수 귀빈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여유롭게 지식을 쌓아 갔다. 서로를 마주칠 때도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각자 인사만 나누고 갈 길 갔다.
싱겁게 첫 번째 게임에서는 결판을 내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다.
게임을 어떤 식으로 진행하든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담합이든 뭐든 해도 상관없는 것이 바로 아르카디옴이다.
그때였다.
“……헉!”
“잠깐, 저렇게 되면!”
집사들의 눈구멍이 벌어졌다.
네 번째 주빈이 방에서 방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서 방에서 방으로 이동하는 또 한 명의 지식인이 있었다.
“화, 확률의 미학이로다.”
이윽고 방문이 동시에 열렸다.
───…….
───…….
세 번째 주빈 ‘마기온’과 네 번째 주빈 ‘애셔’가 같은 공간에 들어섰다.
* * *
지적 충돌은 빠르게, 혹은 느리게 끊임없이 진행됐다.
{이제 이해하겠나? 그렇기에…… 죽음은 수단인 것이다.}
호스트는 한 손으로는 기록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기물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드라벤은 고개를 숙인 채로 보드 게임만 응시, 아니 그보단 노려보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터였다.
{드라벤 르마르크여, 운명과 저항의 개념이 진정 무엇인지 이해한 자는 극소수다. 넌 이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된 몇 없는 존재. 이곳이 바로 아르카디옴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운명의 세 번째 사도인 나만이 금기의 제한을 조건부로 해제할 수 있으니.}
“…….”
{지식의 게임은 훌륭한 조건 중 하나다. 승패를 가름해 나는 내게 주어진 ‘당신’의 권능으로 조건을 해제할 수 있지.}
“…….”
{메이트(Mate).}
지적 충돌이 몇 번째의 패배로 끝났다.
호스트가 촉수들로 순식간에 기물들을 제자리에 두었다. 전 판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지적 충돌이 준비되었다.
{자, 이제 마지막 진실이다.}
“그만…… 해. 제발.”
드라벤이 웅크려 앉았다. 양손으로 두 귀를 막고 고개를 더 숙였다. 눈가에 고인 피눈물이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제발. 그만, 하란, 말이다…….”
{고작 한 걸음 남았다. 이미 모든 걸 들었는데 더 이상 듣지 않겠다? 용기를 가져라.}
호스트의 목소리는 귀를 막아도 드라벤의 영혼에 전해졌다.
{어차피 달라질 것도 없는데.}
“아아…… 아…….”
굳건한 성채와 같았던 드라벤의 정신은 산산조각 날 듯 금이 가 버렸다. 자아를 거의 잃어버려 사실상 판단 능력을 상실했다.
호스트의 속삭임에 이지(理智)가 유도된 드라벤은 안광이 저문 눈으로 기물을…… 툭, 놓았다.
스스스스스스슥!
드라벤의 상태를 기록하는 호스트의 손길은 조금 더 빨라졌다.
{베르덴이 운명을 파괴하기 전에 대부분의 이에게는 운명의 실이 달려 있었다. 즉, 운명이란 실타래라고 볼 수 있지. 그렇다면 초월자는 ‘직선의 실’이다. 다른 실에 얽히되 제 갈 길만 가는 광기의 산물. 초월자는 운명을 꿰뚫어, ‘당신’의 뜻대로 되지 않도록 운명의 궤적에 훼방을 놓는 존재다.}
“…….”
{올다르크가 운명을 역이용해서 만든 저항자의 개념이 초월자인 것이지. 너희들이 추구하는 이상이말로 저항의 결정체다.}
“…….”
{하여 운명의 추종자는 눈엣가시 같은 초월자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상을 유도함으로써 운명의 편에 서게 했지. 드라벤 르마르크, 너는 그 결과다.}
“…….”
{물론 이 작업은 간단하지 않았다. 초월자 중에 오직 너만 성공했지. 그래도 너 하나로 인해 다수의 초월자가 직간접적으로 옛 왕의 부활이라는, 운명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니. 보람은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터.}
“…….”
[당연히 저항 세력도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너의 기억을 조작해 여제, 대제, 광명의 대재해를 옛 왕의 힘을 이용해 부활시킨 것처럼, 운명이 모르는 사이에 개입했지.}
드라벤이 멈칫했다.
“그럴 리가. 나는 분명 그들과 거래했을…… 텐데.”
{올다르크가 남긴 저항의 씨앗들. 이렇듯 그들 또한 운명만큼이나 지독하다. 그럴 수밖에. 그렇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었을 테니까.}
호스트가 기사와 병사 기물을 전진시켰다.
상대 진영을 깊게 파고들었다.
{뭐, 어쨌든. 별개로 운명의 추종자들은 초월자의 이상을 유도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성공 확률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낮으니.}
이번 지적 충돌도 역시 일방적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수백 년간 숱한 실험을 행하고 난 끝에 비로소 원하는 초월자를 만들었다. 그 이름은 단텔. 이로써 운명 자체를 이상으로 삼으며 추구하는 초월자가 탄생했으니, 이제 머지않아 ‘인공 사도’가 선택되겠지.}
승패가 갈렸다.
{다시 말해 그자는 실험의 완성품이다.}
호스트는 마법사 기물로 드라벤 진영의 왕을 파괴했다.
{너는 임시 실험체일 뿐이었고.}
“……!”
{이것이 네가 받아들일 최후의 진실이다.}
드라벤이 덜덜 떨다가 휘청거렸다. 의자가 뒤로 자빠졌다. 무릎으로 주저앉은 그의 머리가 끝도 없는 천장을 향했다.
“내가, 실험체.”
드라벤은 천국은 없다는 금기를 접하고 살인을 일삼았다. 이상을 위해 수도 없이 죽였다. 몇백 년간 대체 몇 명을 죽였을까.
먼 시대의 초월자 전쟁과 최근의 피울음 역병과 사문 개방까지 포함하여 간접적인 살인은 억 단위를 이미 넘어섰다.
죄책감은 없었다.
훗날 불멸의 세상을 구축해 영혼을 해방하면 돌이킬 수 있으니까.
죽음이 사라지면 죽은 자와 산 자를 구분하지 않아도 되며, 사후 세계가 없어지니 영혼이 고통받을 일도 사라지므로.
‘하지만 불멸의 세상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폐하는 그럴 생각 따위 없었으니까. 폐하는 오히려 영혼들을──’
드라벤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럼 나는…….’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나는 대체 왜 살아온 거지……? 그 시간을…….’
눈이 거의 뒤집혀 버린 드라벤이 힘겹게 입술을 뗐다.
“무슨 의미였지……?”
드라벤은 벼랑 끝에 몰렸다.
“내 존재에, 무슨 의미가 있었지……?”
{존재 의미라.}
호스트가 아무렇지 않게 그를 밀었다.
{너는 운명의 ‘하인’이었고, 저항의 인형이었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고유 이상을 결정하는 것마저도 철저하게 이용당했다. 이런 삶을 요약하면 이렇게 되겠군.}
지식(知識)의 비수가 꽂혔다.
{무가치한 초월자.}
쩌적.
{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가련하고 무력한 네 제자들의 영혼이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워하진 않을 텐데.}
내면에서 유리창이 깨지는 굉음이 터졌다.
사형 선고.
“───!──!!───!!!!───!!!!”
드라벤이 제 얼굴을 붙잡았다. 임시 육체를 넘어 영혼이 울부짖었다.
영혼이 무너졌다.
끝났다.
그런 직감이 들 정도로 끝없는 절망으로 가득한 절규와 비통이었다.
호스트는 선명한 감동에 젖었다.
{실로…… 실로 감미롭군.}
원치 않는 진실을 이해한 무지한 자의 비명은 언제나 별미였다. 이번엔 그자가 초월자라는 점에서 특히 진미였다.
추구하는 이상을 파괴당한 초월자의 반응 전부가 곧 새로운 지식이었다.
{최고의 아르카디옴이다.}
이래서였다!
바로 이 순간을 보기 위해서 호스트는 드라벤을 되살린 것이다!
운명이 반발하든, 저항이 노리든 간에 아무래도 좋았다. 아직 얻지 못한 지식을 위해서 드라벤의 영혼 조각을 모은 것이다.
품을 들인 보람이 있었다.
과연 기대하고 흡족할 만한 성찬이었다.
{초월자가 완전히 무너지는 걸 보았으니 다음은 베르덴 차례군. 베르덴은 과연 마지막 세 번째 게임을 어떻게 대처할지 몹시 기대가─}
호스트가 초월자 드라벤 르마르크의 기록에 마침표를 찍으려던 그때였다.
{……?!}
막대한 살의가 치솟았다.
힘의 고하는 관계없다.
호스트조차 흠칫할 정도로 잔혹하고 질척거리는 살기가 서재를 잠식했다.
“옛 왕.”
드라벤이 소리쳤다.
“옛 왕. 옛 왕, 옛 왕, 옛 왕……! 아칸드!”
그야말로 악(惡)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드라벤의 감정을 대변했다. 피로 얼룩진 그의 눈동자에 더 이상 충성심 따위는 없었다.
“아칸드 리니게아 타인 크세리온!!!!!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
무력감에 빠져서 모든 의지를 상실한 초월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드라벤 르마르크의 안광은 막대한 생기로 가득했다.
여전히 그는 이상을 추구하는 광기 어린 초월자 중 하나였다.
{꺼진 불씨와도 같았던 이상이…… 되살아났다?}
호스트의 왼손이 즉각 움직였다.
지금 드라벤의 변화도 초월자 기록에 고스란히 담겼다.
{놀랍군. 경이로워. 영혼이 송두리째 무너졌는데 이상을 잃지 않는다니. 하하하핫! 올다르크가 정말로 위험한 것들을 만들었구나.}
아무래도 새로운 지식들이 아직 전부 드러나지 않은 모양이다.
호스트의 어조가 조금 높아졌다.
{드라벤 르마르크여, 아직 영혼의 안식을 맞이할 때가 아닌 듯하군.}
“……나는.”
드라벤의 눈빛에 이성이 돌아왔다.
“아직 이상을 이루지 못했다.”
{이 와중에도 이상을 좇겠다?}
호스트가 진심으로 재차 묻는다.
{어떻게?}
* * *
베르덴과 세 번째 주빈인 마기온이 우연히 같은 방에서 맞닥뜨렸다.
조용한 대치 상황.
마기온이 이내 들어왔던 방의 문고리를 당기는 순간 베르덴이 그 자리에서 단언했다. 그건 그야말로 협박이었다.
“도주하면 첫 번째 게임이 종료될 때까지 너만 쫓겠다.”
“…….”
마기온은 잠시 계산이라도 하는 듯 고민하더니 문에서 손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