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화 새벽의 별빛 (4)
호스트의 권능이 참가자의 존재를 억누를지언정 본질은 여전하다. 또한 사도의 권능 따위로 베르덴의 본질에 영향을 주지도 못한다.
무한한 마력.
드러내지 않았다고 해도 세계수로 착각할 정도의 끝없는 마력량을, 마력 자체를 다루는 종족인 엘프가 감지하지 못할 리가 없다.
‘모르텔란이 어떻게 엘프들이 수도를 공격하게 만들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베르덴은 자신을 바라보는 엘프의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눈물로 가려진 눈빛 너머에는 복수심이 아른거렸다.
‘엘프를 이곳까지 데려와서 인간에게 살해당하게 만들었군.’
엘프는 누구보다 동족을 사랑한다.
극한의 집단주의.
같은 엘프의 고통과 죽음을 깨닫는 순간 반드시 피의 복수가 이행된다. 모르텔란은 그 점을 이용해서 엘프를 뜻대로 지휘했다.
모르텔란은 엘프의 역할을 받았기에 다른 엘프는 전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엘프에게는 동족상잔의 개념이 전혀 없으니까.
“세, 세계수의…… 화신? 화신?”
모르텔란은 이렇다 할 대처도 못 한 채로 멍하니 중얼거린다. 아군인 테아렐과 루자크 또한 비슷한 반응이었다.
“이 르위엔델……! 모르텔란을 따라서 원흉은 처단했으나 작은 드래곤과 악신의 잔재 탓에 수도를 멸망시키지 못했는데…… 저희 못난 자식들을 위해서 친히 강림하셨군요.”
엘프가 베르덴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위대한 어머니를 따르겠습니다. 어서 저 간악한 인간들의 절멸을……!”
간절하게 인간의 죽음을 바라는 엘프의 신념은 루자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복수에 어떤 타협도 없다.
엘프를 죽이면 엘프가 멸종하거나 엘프를 살해한 모든 관련자가 죽지 않으면 멈출 수 없다. 현대에서나 태고에서나 엘프의 습성은 여전했다.
그때, 베르덴이 말했다.
“너는 저 엘프가 동족으로 보이는가?”
“네……?”
“눈을 떠라.”
베르덴은 엘프 사이에 당당히 자리한 모르텔란을 가리켰다. 르위엔델을 포함한 엘프들의 눈길이 전부 그에게 향했다.
“르위엔델.”
베르덴이 다시금 속삭였다.
“눈을 떠라.”
르위엔델이 동공이 움직였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모르텔란이 순간 동요했다. 그 안에는 경악과 공포가 있었다.
왜?
어째서 동족을 두려워하는가?
엘프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녀는 놈이 내비친 찰나의 감정 변화로부터 베르덴의 뜻을 이해하고 말았다.
모르텔란은 엘프가 아니다.
르위엔델이 속을 정도로 완벽하게 엘프의 껍질을 뒤집어쓴 무언가다. 세계수의 화신께서는 바로 그걸 보셨다. 그래서 더러운 인간의 영역에 몸소 찾아오신 것이리라.
“네놈이었나?”
르위엔델의 마력이 일렁였다.
“동족을 죽인 것이.”
모르텔란은 감정을 갈무리하고는 곧바로 어조에 힘을 실었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푸욱!
르위엔델이 순식간에 쏜 화살이 모르텔란의 눈을 비스듬히 관통했다. 일부러 뇌를 노리지 않아 녀석은 즉사를 면했다.
“끄, 끄아아아악!”
모르텔란이 머리를 잡고 휘청거리다가 건물에서 추락했다. 고통 속에서 바닥을 기는 그가 흠칫하더니 퍼뜩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 부정적인 감정.
그제야 다른 엘프들도 모르텔란이 엘프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임을 인지했다. 사랑은 순간에 살의가 돼 행동으로 이어져다.
“말도 안 돼.”
모르텔란의 부들거리는 면상이 곧 베르덴에게 향했다.
“이건 사기일세! 주빈이라고 호스트에게 대체 얼마나 좋은 역할을 부여받았길랡!”
지붕에서 뛰어내린 엘프의 칼날이 모르텔란을 등 뒤에서 관통했다. 턱이 닫혔다. 모르텔란의 세 치 혀가 본인 치아에 맞물려 잘렸다.
단말마의 비명을 힘껏 지를 새도 없이 엘프들이 모르텔란을 둘러쌌으며, 그 사이를 엘프들의 화살이 파고들었다.
파육음이 들린 지 몇 초도 안 돼서 난도질당한 모르텔란은, 이 수도의 어떤 시체보다도 처참한 꼴로 살해당했다.
“동족이 아닌 자에게 속다니…… 이는, 이것은 자식으로서 다시 없을 수치…….”
르위엔델이 모르텔란의 머리뼈를 화살로 뚫고는 뒤를 돌았다. 그러고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전보다도 더 분노에 찬 얼굴로 호소했다.
“이런 짓을 벌인 자는 필시 다른 국가의 인간일 테지요…… 인간! 위대한 어머니의 화신이시여. 그게 누구입니까? 저희가 처단할게요. 부디, 부디 자식이 속죄할 수 있도록……!”
모르텔란의 배후에 다른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며 완전한 복수를 바라고, 어머니 앞에서 자식처럼 우는 것이 엘프답다고나 할까.
하지만 복수는 여기까지다.
모험의 무대는 거짓된 세계고, 엘프들은 예전에 죽은 이들이니까. 루자크처럼 이들도 호스트가 갖고 노는 영혼이다.
“이만 물러가라.”
“하지만……!”
“더 이상 놀아날 필요는 없다.”
베르덴은 부드러운 손길로 르위엔델의 머리를 쓸었다. 엘프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르위엔델은 잠시 눈에 빛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이내 복수심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람이 불었다.
수도를 습격한 엘프들은 가루처럼 흩어져 모험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대단한 걸 한 것 같은데. 뭔지 알아?”
“나도 모르겠소. 모험 게임에서…… 이, 이, 이런 광경을 본 것은 처음이오. 단언컨대 지식으로서 접한 적도…….”
루자크는 아까까지 엘프들이 있던 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베르덴은 대체 누구인가?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뿌리내렸다.
[루자크. 출발.]
* * *
엘프가 사라진 거리를 나아갔다.
길을 훤히 꿰고 있던 그는 최대한 교전을 피하며 헤르사온 왕국 수도에 있는 달빛의 종교의 대교회에 도착했다.
“왕국의 수도는 고대 유적 위에 세워졌소. 여기 왕가에서 관리하는 지하도 입구가 있지. 그 어딘가에 새벽녘의 기사가 있을 거요. 그리고 왕성으로 이어진 통로도.”
쿠우우우웅!
“이미 헤르사온 왕가의 추적대가 그녀를 노리고 있소. 교전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거요.”
군마에서 내린 베르덴 일행은, 천장이 무너지고 창문이 깨진 교회에 들어섰다.
초승달의 상징물이 폐허에 묻혀 있다.
“흐읍!”
루자크는 석재 단상을 옆으로 밀어 버리고, 아래 카펫을 검으로 갈랐다.
오랜 세월 열리지 않은 숨겨진 문이 등장했다.
[스캔 완료. 이상 없음.]
저 아래에 최근에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없는 걸 알파가 확인했다.
베르덴이 손가락을 굽혔다.
오래된 먼지가 크게 들썩이더니 손잡이가 녹슨 석재 입구가 개방됐다. 차례대로 지하도에 내려섰다. 기이한 울림이 들려온다.
어딘가에서 시작된 소리가 지하도에서 맴돌다가 깨져 버린 듯한 진동이었다.
‘소음이 계속 이어지는 걸 보니 지하도에 들어온 자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군. 어떤 지식인이 있을지 모르니 <마력 감지>는 굳이 필요하지 않으면 쓰지 않는 편이 좋을 터.’
자칫 마력으로 위치가 노출되면 베르덴 쪽으로 인파가 몰릴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서는 피해야 하는 상황이다.
“좌측은 왕성으로, 우측은 더 깊은 지하로 이어져 있소. 지하도에는 각 통로를 움직일 수 있는 장치들이 숨어 있어 길이 일정치 않소. 먼저 왕성부터 찾았다가 지하로 가는 것이 빠를 거요.”
“됐어. 혼자서도 충분해.”
테아렐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끈으로 머리를 올려 묶었다.
“테린? 그래도 혼자는 위험하…….”
“나중에 봐.”
베타는 아무렇지 않게 혼자 길을 가려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했다는 듯 베르덴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애셔 폐하. 테린을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뭐?”
베르덴이 순간 표정을 굳혔다.
테아렐은 현재 베르덴보다 높은 위계를 비교적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지만, 기껏해야 5위계 중위급 마도를 10분간 개방할 수 있을 정도다.
육체는 평범한 마법사.
베타도 약화된 이상 둘은 강적을 상대로 목숨을 장담하기 어렵다.
‘잘못하면 베타가…….’
안전이 어느 때보다 확실하지 않기에 베르덴은 망설였다. 베타가 어떤 생각으로 말했든 허락할 수 없다는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애셔 폐하.]
알파가 그를 토닥였다.
[알파는 베타. 믿음.]
알파는 베타의 선택을 존중했다. 베르덴에게 그 선택을 존중할 거나고 물으며.
결국 베르덴은 천천히 턱을 당겼다.
“……조심히 다녀와라.”
[다녀오겠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동행자가 생긴 테아렐이, 베르덴을 슬쩍 보곤 베타를 어깨에 얹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걱정하지 마. 베타는 무사히 돌려보…… 응? 왜 이렇게 무거워?”
[현실에 비해 훨씬 가벼워진 겁니다.]
“못 들겠어.”
베르덴의 불안이 가중되었다.
* * *
어쨌든.
베타는 프레임을 조작해 테아렐과 비슷할 정도로 체격을 키웠다. 약화된 저항력조차도 막강한 베타가 전위를 담당했다.
그렇게 테아렐과 베타가 좌측 길로 향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베타의 저항력과 테아렐의 마법적 능력은 이 게임이 허락하는 한계에 닿아 있다. 둘의 조합이면 웬만한 위험은 문제없다. 드래곤이나 신의 잔재와 같은 격상의 존재를 상대하는 게 아니라면…….’
객관적으로 따지면 베르덴보다 안전한 상태이나, 그는 최악을 상정하는 것이 습관이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가에 내놓은 자식 같다고나 할까.
알파가 잿빛 머리카락을 기어올라 베르덴의 좁아진 미간을 꾹꾹 눌렀다.
[애셔 폐하. 걱정 뚝!]
“알았으니까 내려와라.”
루자크가 껄껄 웃었다.
“마치 부모와 자식 같소.”
[아빠 폐하.]
베르덴은 알파를 안전한 품속에 넣고 아이젠폴을 꺼내 들었다. 알파 덕분에 불안은 좀 가셨지만 이제는 집중해야 할 때다.
벽안이 스산하게 빛났다.
베르덴이 전투 태세에 들어가자 루자크도 검을 강하게 말아 쥐었다.
“안내해라.”
* * *
밖에서, 멀리서 소란이 들려온다.
헤르사온 왕가의 병사들이 세상에 버려진 샛별의 신앙자들과 싸우는 소리다.
생존과 복수.
둘이 추구하는 바는 달랐지만 목숨을 걸었다는 점은 같았다. 누가 쓰러질 것인가. 승패가 어떠하든 결과는 변치 않으리라.
“샛별은 달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으나, 그믐에는 샛별이 더 환하게 빛난다. 달이 샛별을 질투하는가, 샛별이 달을 시샘하는가.”
왕국 지하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시의 구절이 울려 퍼진다.
“……샛별이 떨어진 새벽, 그믐의 달빛은 보이지 않으리.”
샛별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착용한 여인이 홀로 노래한다.
새벽녘의 기사.
샛별의 종교가 남긴 마지막 기사단장은 악신의 산물과 같은 공간에서 끝을 기다렸다. 그녀의 옆에는 관이 자리했다.
관에 안치된 ‘사내’의 시신은 방금 숨을 거둔 듯 생생했다.
“샛별이 마침내 지상에 떨어지는 오늘. 광기 어린 달을 시작으로 고고한 태양도, 찰나의 황혼도, 희망의 여명도 저물 거예요.”
새벽녘의 기사는 사내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우리를 죽게 한…… 당신을 죽게 한, 세상의 모든 ‘빛’은 사그라들 테죠. 부디…… 최후의 샛별이 인류의 종지부를 찍기를.”
새벽녘의 기사는 영혼이 옛적에 떠나간 사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종교가 학살당하는 광경을 본 그녀의 눈물샘은 말라 버린 지 오래였다.
“곧 따라가겠습니다, 대주교.”
* * *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갈수록 기척이 하나둘씩 가까워졌다.
“지하도에 괴물도 있었나?”
“없었소. 원 역사에서는!”
카앙!
오크 워리어가 휘두른 도끼가 갑옷을 스치고는 벽을 때렸다. 그 아래를 파고든 루자크가 미끄러지듯 놈의 사타구니를 갈랐다.
“지식인들이 개입했을 거요. 지하도를 찾았고 뭔 큰일이 생긴 것 같은데, 직접 들어가기에는 위험할 것 같으니 이들을 유도한 거겠지! 이 상황이 어떤 식으로 변하나 관찰하기 위해서!”
피로 적셔진 루자크가 기사로서 아인종 무리를 휩쓸었다. 장검이 뼈에 걸리기도 했으나, 그럴 때는 다른 한 손으로 고블린의 팔을 붙잡아 무기처럼 힘껏 휘둘렀다.
쿵!
루자크가 가쁜 호흡을 내쉬는 순간 반대편에서 큰 기척이 느껴졌다. 천장에 머리가 닿아 목이 굽어진 괴물들이 등장했다.
“트롤과 오우거까지…….”
베르덴이 팔을 뻗었다.
<어스 자벨린>
거대한 대지의 창이 직선을 관통했다. 오우거와 트롤의 가슴이 파괴돼서 붕괴했다. 트롤의 재생력은 유명하지만, 머리가 저렇게 몸과 분리된 이상 살아날 가망은 없었다.
“루자크, 이대로는 소모가 크다.”
[지름길. 필요.]
루자크가 장검에 묻은 살점과 피를 털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길이 아닌 길이 있소. 안 그래도 그쪽으로 가는 중이오. 네 번째 주빈께서는 위대한 마법사이니 분명 괜찮을 테니.”
…….
교전은 휴식이 필요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베르덴, 루자크, 알파는 횃불 없는 통로를 다시금 나아갔다. 둘은 <암시>와 <암시 부여>로 어두컴컴한 통로를 꿰뚫어 봤다.
참고로 알파는 마법이 없어도 그 시야가 어둠에 가려지지 않는다.
“이제 와서 묻는 거지만.”
“말씀하시오.”
“너는 왜 샛별의 종교를 도우려는 거지?”
루자크가 흐트러진 투구를 바로 하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샛별의 종교는 자선을 베푸는 것이 교리요. 나는 아주 먼 예전에 샛별의 그 은혜를 입었지. 단지 그뿐인 이야기요.”
동기는 보은(報恩)이라는 건가.
루자크는 심해의 지식인이 되기 전 제법 괜찮은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베르덴은 그렇게 생각했고, 알파는 생각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루자크. 괜찮은 기사.]
“하하하, 과찬이오.”
이윽고 발걸음을 멈춘 통로의 끝에는 승강기가 있었다. 마석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승강기였다.
문제는 발판이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지하뿐이다.
“먼 옛날에 망가진 시설이요. 잡고 내려갈 줄도 없고, 벽은 미끄럽지. 나 같은 사람 따위는 백이면 백, 추락사를 면치 못할 거요.”
루자크가 벼랑에 섰다.
“하지만 귀하께서는 다를 터.”
“꽉 잡아라.”
알파는 베르덴의 옷깃을 콱 붙잡았고, 루자크는 그에게 매달렸다.
“금방 바닥에 도착할 테니.”
베르덴이 일행을 데리고 당장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비행>
샛별이 거의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