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2화 새벽의 별빛 (6)
태고의 모험, 제2장: 새벽의 별빛.
한때 여러 빛이 인류를 비추었다.
달, 여명, 태양, 샛별, 황혼.
다른 빛들에게 추방당한 샛별은 추락하며 달빛을 끌어당긴다.
다섯 개의 빛이 조화를 이루었던 것처럼, 샛별의 멸망은 균형을 깨뜨려 멀지 않은 때 다른 빛의 멸망을 야기했다.
장엄한 광휘들이여.
하찮고, 같잖구나.
스스로 발광하며 모든 것을 비춘다고 여기는 그 오만이 서로를 죽게 했다. 그들은 광채가 닿지 않는 미지의 바다를 상상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경계하지 않았다.
악마의 신이 최후의 샛별을 마주했다.
새벽을 비추는 별빛과 함께 진실의 단서를 얻어 지식을 삼킬 것인가, 지식에 삼켜질 것인가. 아니면 용의 이빨에 물릴 것인가.
과욕은 유해할지언정 이는 지성체의 본성이다.
모험극에서 지식의 과업들이 얽히고설켜 새로운 역사를 이룩하니.
누가 대립할 것인가.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누가 헤르사온 왕국 수도에 있는 태고의 산물을 손에 넣을 것인가.
어쩌면 필연은 증명될지도 모른다.
* * *
새벽녘의 기사가 신적인 뜻에서 베르덴의 본질을 간파했다. 감이 좋은 수준이 아니다. 그녀는 베르덴이 근원적으로 은폐한 신성력을 정확히 목도한 것처럼 반응했다.
‘새벽녘의 기사, 그 육체 자체에서 미미한 신격이 느껴진다. 이게 원인이겠군.’
4대 신물로 신앙계 초월자가 되는 루아스 교국과 다르다. 새벽녘의 기사는 어떠한 매개체도 없이 신의 힘을 하사받았다.
이르자면 신의 화신…… 아니, 보다 직관적으로는 이 단어가 적합할 것이다.
‘신의 사도(使徒).’
‘당신’에게서 권능을 받은 사도들이 그러하듯이, 새벽녘의 기사는 샛별의 여신으로부터 힘을 받았음이 자명했다.
‘하지만 옛 왕은 내가 가진 신격을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블러디아도 마찬가지. 저 통찰력은 새벽녘의 기사만의 고유한 자질일지도.’
베르덴은 한 발짝 내디뎠다.
새벽녘의 기사가 순간적으로 앞발을 뒤로 옮기며 검끝을 겨누었다. 은은한 광채의 신성력이 안개처럼 흘러내렸다.
“샛별의 여신, 달의 여신, 태양의 신, 여명의 신, 황혼의 여신. 이 중 남신(男神)은 두 명이나 당신은 그 어느 쪽도 아니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각 경전에서 묘사하는 외형에 조금도 부합하지 않으니까요.”
그녀에게 극도의 긴장이 스쳤다.
“무엇보다 빛을 상징하는 신이 그렇게 재앙적인 신격을 가졌을 리 없습니다……!”
새벽녘의 기사의 눈동자에는 검붉은 아지랑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파멸. 말인즉슨 베르덴의 파괴적인 일면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신을 볼 수 있되 전부를 관측할 수 없는 혜안(慧眼)이 그녀의 한계였다.
“당신은, 대분기에서 살아남은 악신인가요?”
악신들은 옛적에 멸망했으나 악신이 남긴 육신은 도저히 파괴할 수 없어서 침묵의 사막에 봉인됐다고 전해진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그녀가 소유한 것처럼 아주, 극히 드물게 악신의 잔재가 외부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다만 여태까지 살아 움직이는 악신이 나타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악신의 재림.
악신들에 맞섰던 샛별의 여신을 신앙하는 자로서 베르덴을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적대하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이때까지 대분기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 내려왔나 보군. 사실상 운명전 이후로 역사 자체가 모조리 다시 쓰이게 된 셈인가.’
철그렁!
베르덴은 왕국 기사에게서 빼앗은 철창을 앞으로 툭 던졌다. 그녀에게 해를 가할 생각이 없다는 나름의 표현이었다.
“네가 생각하는 악신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관장하고 있습니까.”
“지금은 악마의 신이지.”
“악마……?”
새벽녘의 기사가 낯선 단어를 듣고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 이 태고의 시대에 악마 종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악마는 운명의 부산물이라, 운명의 개념이 탄생한 이후에 태어났기에.
베르덴이 덧붙였다.
“버림받은 자들의 신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그런 고귀한 신께서는 왜 이곳에 강림하신 거죠?”
“새벽의 별빛을 받으러 왔다.”
새벽녘의 기사가 순간적으로 목덜미를, 정확히는 갑옷 안의 목걸이를 의식하며 살짝 내려가 있던 검을 다시 세웠다.
“새벽의 별빛은 저희의 유일한 신물(神物)이라는 걸 악마의 신께서는 아시는지.”
“지금 알았다. 샛별의 종교에 관한 정보는 수중에 넣기 어렵더군. 교리상 타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거의 밝히지도 않는 데다가, 남은 네 개의 종교가 샛별의 흔적을 철저하게 지우고 있으니.”
샛별의 종교는 자선을 베풀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달빛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으나 그런데도 끊임없이 빛나는 저 샛별처럼.
샛별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다시 인지한 새벽녘의 기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별빛은, 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넌 이미 별빛을 잃었지.”
베르덴은 엘프에게 그러했듯이 그녀에게 진실을 속삭였다.
“먼 옛날에 죽었으니까.”
“죽다니요. 저는 이렇게 살아 있…….”
새벽녘의 기사가 눈을 부릅떴다.
“살아…… 있……?”
시선이 서서히 바닥으로 떨어진다. 동공이 연신 요동쳤다. 전혀 의심해 본 적 없는 자신의 생명력이 난데없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악마의 신이 뭔가를 한 건가?
신의 농간인가?
‘그런 게 아니야!’
새벽녘의 기사가 애써 검날을 세우며 빈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두통이 일었다. 물 위에 떠다니는 기름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영혼이 출렁인다.
그제야 자신의 존재를 심층적으로 관조한 그녀가 큰 숨을 들이켰다. 점멸하는 샛별의 신성력이 격동이 이는 마음을 대변했다.
혼란은…… 길지 않았다.
“하.”
새벽녘의 기사는 자조하며 칼날을 늘어뜨리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분노가 아니라 체념의 감정이 묻어난 얼굴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나요. 제가 죽은 뒤로.”
“셀 수 없이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렇군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빛은 모두…… 저물었나요?”
“네가 아는 빛들은 기록으로도 남지 않았다.”
베르덴은 과거의 영혼에게 미래의 상황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현대에는 루아스 여신을 숭배하는 빛의 종교만 존재하지.”
“루아, 스.”
새벽녘의 기사는 빛의 루아스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듯 소리 내어 몇 번 되뇌다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거의 빛들이 전부 몰락했다니, 저희의 복수가 헛되지는 않았나 보군요. 이렇게 영혼으로 남아 다른 이의 손에 놀아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베르덴은 내심 감탄했다.
상태를 자각하자마자 호스트가 구현한 모험극의 배경을 인지하다니. ‘당신’의 사도처럼 대단한 무력은 없어도 그 직관력은 신의 사도로서 손색이 없다고 볼 수 있으리라.
그때였다.
[전투. 종료?]
새벽녘의 기사를 보자마자 모습을 감춘 알파가 꼬물거리며 어두운 로브의 옷깃에서 반쯤 프레임을 내밀었다.
베르덴에게 내재된 난폭한 신의 격과 정반대인 귀여운 생김새였다.
새벽녘의 기사가 살짝 입을 벌렸다.
“그건……?”
“가족이다.”
[가족.]
베르덴과 알파가 함께 대답했다. 그들의 관계를 정리하자면 그것밖에 없었기에 달리 말을 고를 것도 없었다.
그 모습이야말로 태고의 악신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었다. 적어도 새벽녘의 기사가 보기에는 그러했다.
적의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후우웅…….
갑옷 안에서 목걸이를 꺼내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목걸이의 보석은 짙은 밤하늘의 별빛처럼 선명하고도 고고한 기운을 은은하게 빛내고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진즉에 죽은 몸. 이제 와서 신물의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 영혼을 가지고 노는 존재에게 남기는 것보단 먼 미래에서 온 신께 드리는 편이 올바를 터.”
하지만.
“모든 빛에는 힘이 있습니다. 새벽의 흔한 별빛도 그러하죠. 별빛의 산물을 빚는 것은 샛별의 신앙자의 과업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무려 985년 동안 오로지 별빛만 머금어 탄생한 신물이기에, 별의 선택을 받지 않은 이는 감히 주인이 될 수 없어요.”
손끝에서 피어나는 여광(餘光).
“그 누구라고 해도.”
베르덴을 향해 한 줄기 별빛이 날아든다.
일종의 자격 시험인가.
베르덴은 한 손을 뻗어서 아무렇지 않게 그 빛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별빛이 육체에 녹아들고…… 그의 전신이 명멸하던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아아앗───!
압도적인 성광(星光)이 일대의 암흑을 한순간에 밀어냈다.
* * *
눈이 멀어 버릴 것처럼 찬란하다.
‘말도 안 돼.’
새벽녘의 기사 본인도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그런 광휘였다. 예상했던 광경과는 비교도 안 되게 격렬한 반응에, 그녀가 멍하니 베르덴이 내뿜는 빛의 종류를 읽어 냈다.
“희미하지만…… 이미 별빛이 깃들어 있어……? 게다가 별빛뿐만이 아니라 달빛까지? 어, 어떻게 두 개의 빛을 한 몸에…….”
새벽녘의 기사는 그에게 진즉 빛이 배어 있었다고 확언했다.
그 원인은 자명했다.
베르덴은 리비안트 공국의 바르드 산맥에서의 큰 인연을 떠올렸다.
───쿨럭, 쿨럭! 하…… 자네도 느껴지나 보군. 저 포션 안에 담긴 생소하고도 기묘한 마력이. 이걸 만드느라 자그마치 15년이 걸렸지.
블랙 아워를 창립한 8인 중 하나인 현인(賢人), 하르칸 다제스트.
───이건…… 마법사에게 ‘기존에 없는 속성’을 품을 수 있게 하는 열쇠네. 복용한다면 어떤 마법사도 이르지 못한 영역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는 거지.
하르칸은 15년이 넘도록 희귀한 약초들을 채집해 갈아 달빛과 별빛으로 빚었고, 그렇게 수명과 맞바꿔 지고한 빛을 품은 포션을 연단했다.
그에 걸맞은 성신 속성과 마법도 구축했다.
암월이 지휘하는 블랙 아워가 이 세상을 짓밟는 걸 막기 위해…… 망화에 당한 몸으로, 자신의 유산을 이어받을 적합자와 변화를 기다리면서 천체(天體)와 하나가 된 것이다.
점성술에 특히 뛰어난 지식을 겸비한 하르칸은 역천의 별을 보았다.
‘신성력이 아닌, 마도로 빚은 별빛의 산물.’
베르덴은 손으로 별자리를 그렸다. 회색 별빛이 잔상처럼 허공에 남아 있다가 이내 거친 성광과 함께 걷혔다.
…….
빛이 사라졌다.
어둠이 다시 몰려들었다.
새벽녘의 기사는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눈꺼풀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새벽의 별빛을 쥔 손에 힘을 실으면서 말이다.
“……새로운 별.”
그녀의 눈동자가 살아났다.
강렬한 열망.
떨리는 손으로 잠금 고리를 풀어 목걸이를 몸에서 떼어냈다. 그녀가 지극히 공손하게, 또한 희망을 향해 손을 뻗듯 느릿하게 새벽의 별빛을 내민다.
‘저 별빛을 얻는 순간 내 과업은 끝난다. 그 즉시 모험극에서 추방되겠지. 하지만 아직 나는 알고 싶은 게 있다.’
베르덴은 잠시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전에 물어볼 게 있다.”
“예? 어떤…….”
“이 태고의 시대에서 신은 추상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실존할 텐데. 너희가 숭배하는 샛별의 여신은 어디에 있지?”
베르덴이 반쯤 열린 관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 사내는 누구냐.”
새벽녘의 기사는 경계가 완전히 풀렸는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리고 망설임 없이 베르덴의 물음에 답을 해 주었다.
“여신께서는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셨어요.”
[실종?]
“모든 계시가 끊김과 동시에 여신의 별이 이따금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그 이후였어요, 다른 종교들이 저희를 압박하기 시작한 건……. 여전히 명확한 이유는 모르나, 필시 다른 빛의 신들이 어떠한 비열한 술수를 벌인 게 틀림없습니다. 저희가 우연히 얻은 이 악신의 잔재는 그저 핑계에 불과할 뿐이죠. 샛별을 보란 듯이 짓밟기 위한…….”
새벽녘의 기사는 관 반대편에 놓인 악신의 신체 일부를 응시했다. 그것은 현재 왕국 수도를 파괴하는 거대한 괴이의 원천이었다.
다음으로 그녀가 조용히 영면에 든 관 속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분은 샛별의 총본산이 학살당할 때 희생당한 대주교입니다. 그 어떤 누구보다 자비심이 깊은……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사내는 40대로 보였고, 새벽녘의 기사는 20대로 보였으나 겉모습은 진실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내와 비슷한 나이대였다.
아마도 사도이기에 나이가 고스란히 드러나지 않은 것이리라.
베르덴이 물었다.
“미련은 없나?”
“옛 망자로서 미련은 없습니다. 그리고 대주교의 영혼은 이렇게 떠났으니 저처럼 놀아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다만……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새벽녘의 기사는 연인이자 남편인 대주교를 보며 슬픈, 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부디, 언제나 하드라스 대주교에게 샛별이 함께하기를.”
“……뭐?”
베르덴의 얼굴이 일순간 굳었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베르덴의 모든 감각이 사실이라고 소리쳤다.
하드라스.
어둠의 대악마인 녹시아스의 군단장이자, 세계의 틈새에서 베르덴의 신자가 된 강대한 악마와 이름이 동일하다.
이는 기막힌 우연 따위가 아니었다.
“잠시…….”
쿵.
지하에 둔중한 울림이 퍼졌다.
매혹적이고 섬뜩한 음성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여기 있었구나.]
베르덴과 알파는 목소리의 정체가 누구인지 즉각 간파했다. 반사적으로 진원지를 쫓아 어둑한 천장을 노려봤다.
‘블러디아.’
운명의 사도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