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4화 모험극 (2)
비장의 한 수가 있다면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 둬야 한다.
비책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대의 행동과 심리를 억제하며, 불리해진 순간을 단번에 반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 기왕 모험극에서 마주하게 됐으니. 시늉만 하는 건 아깝지. 운명 파괴자와 이렇게 대면할 기회는 이제 없을 테니.’
블러디아는 아주 농밀한 살의를 내뿜고 있었으나 베르덴을 이곳에서 끝내 버릴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게임에서는 죽어도 죽지 않으니까.
지식인을 먹어 치워서 무작위로 지식을 빼앗을 수 있을 뿐이다.
그녀는 베르덴이 가진 지식이 탐났다.
어떻게 운명조차 두려워 감히 손도 대지 못했던 10대 마탑의 동력원을 완전히 없앨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호스트가 지닌 [세계 기록서]가 있다면 알아낼 수 있지만, 놈은 ‘당신’이라고 할지라도 기록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선악의 중립자.
이는 태고의 시대부터 호스트를 가리키는 이명 중 하나다.
그러니 별수 있나.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또한 블러디아는 그런 베일에 싸인 지식보다 궁금한 게 있었다. 개인적이고, 생물학적인 의문이랄까.
‘궁지에 몰리면 너는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블러디아는 베르덴의 ‘바닥’이 궁금했다.
그래서 먼저 숨겨 둔 수를 썼다.
……!
블러디아가 한 손으로 아이젠폴을 붙잡고 철창을 막으며 입을 쩍 벌렸다. 인간형 상태이기에 본체보다 턱이 훨씬 작다.
한계까지 당겨진 양쪽 입가가 찢어졌다. 직후에 성대에서 무거운 울림이 진동했다.
드래곤 로어(Roar).
블러디아의 약화된 작은 포효가 지근거리에서 쏟아졌다.
베르덴이 철창을 허공으로 던지고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뻗었다.
블러디아의 입을 틀어막듯이.
‘로어. 드래곤의 종족 특성을 전부 열화된 규모로 사용할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브레스까지…….’
트리플 캐스팅: <에어레일>
베르덴이 바람의 길을 구현하여 공기라는 매질을 타고 흐르는 함성을 분산하려고 했으나, 충격을 전부 감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살가죽이 깊게 찢어지며 손이 튕겨 나갔다.
전신이 떨렸다.
벼락에 맞은 것처럼 충격파가 장기를 진탕시키고 신경을 자극했다.
그러나 블러디아도 힘의 소모가 컸는지 움직임이 둔해졌다. 하긴 아이젠폴에 의해서 기력을 가파르게 소모하고 있는 상태이기까지 했으니.
‘빈틈.’
베르덴이 부러진 손뼈에 힘을 실었다. 검지와 중지를 살짝 굽혔다. 동시에 왼손을 올려 아이젠폴에 엮인 그녀의 손등을 눕게 만들었으니.
<염동력>
──콰드드득!
철창이 당장에 날아와 블러디아의 검지를 절단했다.
‘블러디아에게 드래곤의 비늘은 없다.’
있어 봤자 심장과 같은 급소들을 적당히 보호하는 게 고작일 것이다. 로어로 확신했다. 유골룡도 단번에 성벽을 부수는 드래곤의 포효가 베르덴의 팔 하나도 터뜨리지 못했다.
‘모험극에서 특화된 특성은 이 발톱.’
드래곤의 발톱을 제외하면 현 베르덴의 마법과 무기로도 손상을 입힐 수 있다.
공중에 떠오른 그녀의 일부처럼 말이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발톱이 달린 검지가 빙글빙글 회전한다. 그리고 떨어지면서 블러디아의 얼굴을 잠시 가렸다.
어느새 굳어 있던 그녀의 입가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
베르덴은 당황스러웠다.
블러디아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지금 베르덴에겐 일격이 닿지 않는다. 그런 거리였다. 브레스를 뱉어도 대처할 수 있다.
드래곤의 오만함인지 그녀는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종족 특성만으로 바로 베르덴을 궁지에 몰아넣을 방법은 없다.
무엇을 노렸는가.
파앗!
블러디아가 잘린 검지를 순간 붙잡더니 과감하게 앞발을 내디디며 팔을 휘둘렀다.
눈속임?
베르덴은 전혀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머리와 상반신을 비틀었다. 용의 발톱에는 독이 있다. 스쳐도 위험하다.
곧바로 들이닥칠 블러디아의 오른손을 경계하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그 순간.
[시야가 좁아졌구나.]
촉각이 곤두섰다.
‘설마.’
베르덴은 뒤로 시선을 던졌다. 베르덴을 지나친 블러디아의 발톱이 새벽녘의 기사에게 곧게 쇄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블러디아가 노리는 것은 새벽녘의 기사가 아니었다. 점차 꺼져 가는 빛은 더 이상 위험이 되지 않을 테니까.
하드라스의 시신을 이용해서 새벽녘의 기사에게 치명상을 안긴 것처럼…… 그녀가 원하는 목표는 그 옆에 있었다.
알파.
베르덴은 그걸 이해하고 말았다.
“막으면 안──”
애석하게도 알파는 헌신적이었다.
베르덴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알파가 마지막 샛별을 지키려고 앞으로 나왔다. 하드라스에 관련된 정보가 중요했으니까…… 그 단서가 베르덴 폐하에게 중요했으니까.
빛이 가려지며 몰려드는 암흑처럼 용의 악의가 드리웠다.
“새벽의 길잡이시여……!”
새벽녘의 기사가 힘겹게 기도를 외쳐 알파에게 보호막을 씌웠다. 궤도가 미세하게 틀어졌다. 이윽고 강한 충격을 받은 알파가 새벽녘의 기사의 몸 위에서 나가떨어졌다.
콩!
알파가 주저앉았다.
핵은 피했다.
피했지만 블러디아가 작정하고 노린 터라 무사할 수는 없었다.
알파는…… 미니 골렘 프레임의 오른팔이 완전히 산산조각 난 것을 보았다.
[아야.]
정적이 내려앉았다.
블러디아가 생각하는 그림이 아니라는 듯 가볍게 혀를 찼다.
[열등종이라도 사도인 만큼 끈질기구나. 샛별이 남긴 잔재 따위가. 인공 골렘이라서 통각도 없으니 영 반응이 시원찮…….]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운명전에서 극히 드물게 경험한 살의가 드래곤의 본능을 두드렸다. 시선을 바로 했다. 그리고 베르덴의 얼굴을 보았다.
[뭐, 그래도.]
그제서야 블러디아가 입가를 비틀고는 송곳니를 드러냈다.
[제대로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 같군.]
촤아아악!
아이젠폴이 아래에서 위로 휘둘러졌다. 가슴과 얼굴이 얕게 갈라졌다. 눈 하나가 날아갈 뻔했음에도 그녀는 도리어 거리를 좁혔다.
‘좋은 표정이구나……!’
블러디아는 첫 번째 귀빈으로서 강렬한 지식욕을 지니고 있다. 아르카디옴의 지식 게임은 제약이 있어 귀찮지만 아주 가끔 이렇게 흥미진진한 지식을 손에 넣을 기회가 있어, 만찬회에서 탈퇴하지 않고 여태껏 신분을 유지해 왔다.
운명을 파괴한 유일무이한 존재는 어떤 바닥을 보여 줄까.
팔꿈치를 한껏 끌어당긴 블러디아가 약한 복부를 겨냥했다.
콰지지직!
드래곤의 발톱이 베르덴의 육체를 마치 두부처럼 쉽게 꿰뚫었다. 이번엔 그녀가 당황했다. 환영 따위가 아니었기에.
촉감으로 느껴진 뜨거운 피와 부들부들한 장기, 전부 실체였다.
‘이성이 날아가서 악수(惡手)를?’
블러디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콱!
베르덴은 포효에 망가진 오른손을 그녀의 입에 쑤셔 박았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벌한 벽안이 그 눈동자에 반사됐다.
용의 이빨로 손을 절단하기도 전에 입안에서 마법의 불길이 점멸했다.
트리플 캐스팅: <화염구>
콰아아아앙!
폭발과 폭음이 두 사람을 뒤덮었다.
짙은 화염 속에서 다급하게 뛰쳐나온 블러디아가 물러났다. 포효를 지르느라 찢어진 입가의 상처가 훨씬 더 커졌다.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내 목을 부여잡은 그녀가 휘청거리며 상체를 말았다.
[컥! 커흑……!]
화상으로 뒤덮인 점막.
순간적으로 작은 포효를 내질러서 폭발력을 줄인 덕분에 머리가 터지는 건 면했지만 입이 아예 엉망이 되어 버렸다.
‘성대가 다쳤다. 브레스는 가능해도 로어는 더 쓸 수 없겠군.’
해진 헝겊처럼 너덜거리는 턱을 손으로 받치면서 목소리를 냈다. 고통 탓에 기어 나온 땀방울이 피부를 적셨다.
[파멸적이구나, 애셔.]
직전의 폭발로 인해 베르덴의 오른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면이 불타 버렸기에 출혈은 없었다.
[하나, 내게 불덩이를 먹인 대가로. 너는 발톱에 찔렸다. 내가 제조한 용독은 수십 초, 내로 너의 생체 조직을 파괴하겠지.]
“그 눈.”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혈관들이 하나둘씩 불거진다. 중독 현상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베르덴은 감정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눈부터다.”
베르덴도 비장의 패를 꺼냈다.
<무한 - 망화(亡火)>
태고의 모험이 허락하는 5위계급의 검은 불꽃이 현현했다.
* * *
창조된 이후 처음으로 골렘 연구 시설에서 나온 알파는 베르덴과 함께 세상을 여행했다.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밀도만큼은 높았다.
그러는 동안 알파는 줄곧 무사했다.
미니 골렘을 이용하는 이상 알파는 파괴되더라도 죽지 않고, 단지 본체로 돌아가기 전의 기억만 사라질 뿐인데도…… 베르덴은 보호자로서 철저하게 알파를 지켰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드리안, 이자벨라, 베타와 다르게 알파는 전투 능력이 없으니까. 베르덴이 스스로 선택해서 짊어진 책임이니까.
새벽녘의 기사에게 대답한 것처럼 서로가 서로의 가족이니까.
그런 알파가 피해를 당했다.
알파는 고통을 느끼지 않지만, 생체 조직이 없어 독에 당할 일도 없지만, 목숨에 지장이 없지만, 그런 건 안도감을 줄 수 없었다.
‘알파가 다쳤다.’
베르덴에게는 오직 그것 하나만이 중요했다.
화르르르륵!
육체에 스며든 용독이 소멸된다. 이런 기분은 꽤 오랜만이었다. 복수를 완수했음에도 베르덴은 여전히 복수의 감각을 잊지 못했다.
마도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1분 미만.
충분한 시간이다.
<쇄례(碎列)>
날카롭게 쏘아져 나간 칠흑의 화염이 블러디아 근처에서 폭발했다.
파괴력을 감당할 수 없다고 본 건지 블러디아가 범위를 벗어나고는 그대로 좌우를 연속으로 박차며 접근했다.
마안을 염두에 둔 것이다.
멀리 떨어져 봤자 시야에 포착되면 마법을 피하기 어려우니. 베르덴은 거리의 이점을 무시했다. 오만한 눈동자를 부수는 그림은 이미 완성했다.
[무자비한 광기……! 운명전에서의 올다르크와 판박이구나!]
드래곤의 발톱이 망화를 베어 가르며 아이젠폴을 강타했다. 베르덴의 몸에 절상이 생겼다. 반작용으로 블러디아가 소멸에 휘말렸다.
퍼어엉! 퍼엉! 콰아아아앙! 카가가가가가가강!
16초의 공방.
블러디아는 뛰어난 각력으로 집요하게 사각만을 노렸다. 육신이 소멸하고 있어도 발톱에 실린 살기는 무뎌지지 않았다.
촤아악!
베르덴의 목 가죽이 조금 갈라졌다.
‘운명 파괴자도 꽤 지쳤군. 그래, 용독이 통하지 않아도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감내할 수 없는 부상은 고스란히 남았으니.’
블러디아가 앞발을 축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무릎을 꿇었다.
[나도 마찬가지구나.]
침강의 처형 – 아이젠폴.
블러디아의 기력이 거의 쇠락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오른팔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유희는 여기까지인가.’
꾸구구구국.
아이젠폴을 내던진 베르덴이 한 손으로 철창을 당겼다.
망화가 창에 집중됐다.
‘에온 식(式) 창술──베르카엘룸.’
베르덴이 창시한 고유 무기술과 마도를 결합한 마도 창술이, 억눌린 장력이 풀리듯 단 하나의 일점을 향해 돌진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조차도 허무로 되돌리는 고유 마법.
<무관(無貫)>
쩍.
소멸의 개념이 실린 창격이 블러디아의 팔뚝과 심장을 관통했다. 이 마법의 특징은 일시적으로 특성 자체를 무효화하는 것.
열화된 드래곤의 발톱 일부는 막아 내지 못하고 무참하게 부러졌으니.
쿠웅!
블러디아가 뒤로 쓰러졌다.
철창은 소멸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무리한 마도 운용에 제한 시간이 단축되어 탈력감이 몰려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아이젠폴을 주웠다가는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없을 것 같다.
으득.
베르덴이 비틀거리며 그대로 블러디아의 상체에 올라탔다. 품속에서 투척용 단검을 꺼내서 있는 힘껏 내리찍었다.
단검이 블러디아의 왼쪽 눈에 박혔다.
푸슉!
폭발에 날아간 손 대신 손목 단면으로 바닥을 짚고는 가까스로 단검을 뽑아 지체 없이 오른쪽 눈을 노렸다.
[크흐흐, 크흐흐하핫…… 여러모로 올다르크와 닮았지만…… 유사할 뿐, 역시…… 아무리 봐도 핏줄은 아니구나.]
블러디아가 힘없이 외팔을 굽혀 베르덴의 손목을 차단했다. 서로 힘이 부족했다. 단검이 그녀의 마지막 남은 수정체 앞에서 덜덜 떨렸다.
[올다르크는 고고하기에…… 너처럼 처절해질 줄 모르거든…… 오만함으로, 드래곤을 비웃고. 패배로 인해 짙어진 광기로…… 그 ‘당신’을 내려다보려고 할 뿐…….]
블러디아는 섬뜩하기 짝이 없는 베르덴의 벽안을 관찰했다.
처절하고, 또 처절하다.
손에 넣은 것을 무엇도 잃고 싶지 않다는 각오가 보였다. 복수심이 심해처럼 깊다. 무엇이 그를 운명 파괴자로 이끌었는지 알 것 같았다.
[복수. 그게 네 바닥이구나.]
“닥쳐라.”
베르덴이 어금니를 깨물고는 체중을 실어 단검을 억지로 내리그었다. 쫙! 블러디아의 남은 눈이 세로로 갈라졌다.
아직 부족하다.
알파의 팔을 부순 대가로는.
베르덴은 숨통마저 끊기 위해서 블러디아의 목을 찌르려고 했다. 시야를 빼앗겼음에도 그녀는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쿵──────!
아주 멀리서…… 아마도 지상에서 발생한 굉음이 지하도 전체에 전해졌다. 그와 함께 블러디아의 몸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과업을…….”
[대마법사 탈라칸을 죽여라. 이게 내가 부여받은 지식의 과업이지. 어렵게 길들인 드래곤이 막 놈의 숨통을 끊은 모양이구나.]
피눈물을 흘리는 블러디아가 즐길만큼 즐겼다는 듯 속삭였다.
[모험극은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