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6화 정상 회의 (1)
베르덴 일행이 도착하기 불과 몇 분 전…….
정상 회의를 기념하는 건지 노르드발트의 하늘은 고요했다. 어쩌면 기념이 아니라 폭풍 전야의 정적을 모방하는 걸지도 모른다.
지금의 국제 사회에서 최초로 개최된 긴급 정상 회의의 주제는 ‘전쟁’이었으니까.
대륙 전쟁.
세계 전쟁.
……초월자 전쟁.
현대에 감히 이와 비견될 만한 대규모 분쟁이 있었을까.
에스티리아 왕국과 벨디른 공화국의 전면 전쟁, 마스터의 초월자 처단, 특수 개체 발호, 마탑 전쟁, 보헤미른 마탑과 블랙 아워의 대립…… 대륙에 기록될 웬만한 충돌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약 800년 전의 초월자 전쟁, 제1차 대성전, 종족 전쟁, 마탑의 동력원 폭주 등만이 동급의 사건으로 평가될 수 있으리라.
세계는 역사의 현장에 놓여 있다.
그걸 알지 못하고 극지 요새를 찾아온 사람들은 없다. 대륙의 정상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마침내 시작되는 정상 회의의 회의장은 소수의 빈자리만 남겼다.
“…….”
수십 명의 인원이 착석해 있었으나 굳이 담소를 나누지 않았다.
일개 왕들은 대개 착잡한 얼굴로 억울한 심정을 은근히 내비쳤다.
왜 하필이면 자기 대(代)에서 고대 국가의 제왕이 부활한단 말인가? 근 수십 년 동안 실질적인 전쟁을 치러 본 국가는 절대로 많지 않았기에 가늠할 수 없는 긴장감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제라클 디안 세레아노르 아르나크 황제는 불편한 공기 속에서 무심하게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를 머금었다.
프로하스의 특산품 중 하나였다.
식도를 타고 넘어간 따스한 온기가 곧 깊이 몸을 데웠다.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회의장이 조금 덥게 느껴질 정도였다.
제라클 황제와 눈이 마주친 에레스 국왕이 싱긋 미소 지었다. 프로하스와 아르나크 제국은 우호적인 관계였다.
예전부터 황제는 에레스의 이질적인 강함을 알았고, 에레스는 황제의 비범함을 간파했다.
쿠웅.
회의장이 개방됐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아직도 참석하지 않았던 10대 마탑의 정상 중 하나가 당당히 등장했다.
아티슨 마탑주 – 펠디안느가 나름의 예의로 작게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정상 여러분. 중요한 업무가 있어 예정보다 좀 더 시간을 지체하고 말았군요. 하마터면 지각할 뻔했습니다, 호호호.”
“어서 오시오, 아티슨 마탑주.”
참석자들의 눈인사와 마탑주들의 환영을 받으며 그는 자리를 찾았다. 옆자리에 앉은 관제의 인드렌이 의념으로 물었다.
───뭐 하다가 이제 오느냐. 아티슨 마탑까지 비워 놓고.
이에 펠디안느가 중성적인 미소를 짓는다.
둘은 피로 이어진 선조와 후손.
언어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대충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인드렌이 이내 미간을 좁혔다.
───음? 마탑 외부에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무, 무슨 프로젝트? 전쟁에 대비해서 말이냐? 언제부터? 마도 축제 이후부터?
인드렌은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에서 파멸이 몸에 스며든 탓에 폐관을 해야만 했다. 어찌나 지독했는지 그의 봉인 마법에 진전이 있을 정도.
아무튼 회복에 몰두하느라 아티슨 마탑의 운영을 거의 살펴보지 못했다. 관여는 하지 않아도 지켜보는 것이 번외 장로의 몫이었다.
“마법사는 준비하는 자가 아닙니까.”
펠디안느는 두고 보면 알게 될 거라면서 어깨를 으쓱이고는, 준비된 의석을 크게 둘러보더니 화제를 돌렸다.
“……교국의 성녀님께서 돌아오셨군요. 신변에 문제가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루아스교의 신자로서 한시름 덜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자리를 비워 죄송합니다, 아티슨 마탑주.”
성녀 에르세티아가 이전보다 화사한 존재감을 은은히 표출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두 번째 신열을 극복한 신인(神人).
그녀는 자신이 부재한 동안 희생당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제부터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남다른 광기가 아른거린다.
성녀가 억누른 분노는 신앙심과 뒤섞여 가공할 의지가 되었다. 초월자들이 세계 회의 때와는 다른 무언가를 직감했다.
수왕 안티아스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육감이 반응을 마쳤다.
‘세계 회의 때보다 확실히 강해졌군. 존재의 격이 달라졌다. 신기와의 연결이 한층 더 견고해진 것 같은 느낌인데.’
안티아스는 천부적인 감각으로 자신의 세상을 세분화한다. 인류의 배신자를 찾아내는 것도 그러한 능력의 일환이었다.
기, 마력, 신성력.
인간이 다루는 세 가지 힘을 구분하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 안티아스는 성녀의 신성력을 감지하면서 그 힘을 측량했다.
‘재밌겠군.’
성녀는 마치 시한폭탄 같았다. 툭 건드리면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 이유야 뻔하다. 정체 모를 수인하고 결전을 벌이고 의식을 잃어버린 동안에 옛 왕이 부활하고 로니아 왕국은 반파되었으니.
그녀는 자신의 부재중 발생한 인명 피해에, 물론 인간 한정으로, 부채감을 느끼고 있으리라.
세계 회의 때처럼 도발하면 어떻게 될까?
그때처럼 도중에 끝나진 않을 것이다.
안티아스는 성녀의 역린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지 생각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그가 국제 사회에 매번 얼굴을 보이는 것은 이런 즐거움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 펠디안느가 말했다.
“그나저나 저보다 늦는 분들이 있군요.”
의석에 없는 사람은 일곱 명이었다.
베르덴.
아드리안.
테아렐.
메이아.
데우스 위덴.
레온하르트.
이그나시아.
여기서 아드리안은 충직하게 베르덴을 기다리고 있고, 레온하르트도 성채 바깥에 있다. 노르드발트에 도착하지 않은 것은 그러므로 다섯 명이다.
“베르덴 님은 다른 용무가 있는 듯하고, 데우스 님이야 신비주의이니 그렇다 치는데…… 테아렐 님과 이그나시아 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모험가 길드 본부장 – 살베르 웬디시르가 고개를 저었다.
“테아렐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그녀가 언제 돌아올지는 저로서도 알 수 없습니다.”
초월자의 개인적인 일.
즉, 이상.
길드 본부장이 애써 더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아서 납득했다.
다음으로 서약자 – 유리온 하이로스가 계외, 정확히는 계외의 최측근이 어제쯤에 보내온 서신을 짧게 요약했다.
“이그나시아는 마법 연구하느라 바쁘다던데.”
“마법 연구요?? 이 시국에 말입니까??”
“그래, 이 시국에.”
“미친년.”
마울러 – 가레스 시릴리아드가 가감 없이 계외를 비난했다. 미친년이 맞긴 했다. 세계 전쟁이 코앞인데 연구한답시고 긴급 회의에 불참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이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마법계 초월자답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전쟁에는 직접 참여한다고 하니 걱정은 말라는군.”
7대 마도왕 – 반젤리스가 턱을 쓸었다.
“차라리 잘되지 않았나. 이그나시아는 의제보다 쾌락을 중시할 테니까. 있어 봤자 괜히 혼란만 가중할 거다.”
“조금은 자중할지도 모르죠.”
“내기하겠나?”
“싫습니다.”
마스터 – 벤디에 카에나르는 이그나시아의 변호를 포기했다. 세계 회의에서 수왕과 성녀가 충돌한 것은 결국 그녀 때문이었다.
“이제 15분 남았군요.”
교황 – 로마누스가 남은 시간을 입에 담았을 때 다시 문이 열렸다. 소식 불명이었던 네 명 중 한 명이 모습을 보였다.
“레프라기움 마탑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섭리자.”
“의석은 저쪽이오, 대행자.”
섭리자 – 데우스 위덴은 고요한 환대를 받으며 착석했다. 대행자 – 메이아도 말없이 데우스 옆쪽에 자리했다.
어째서 늦었는지 그들은 먼저 설명하지 않았고, 누구도 묻지 않았다.
자세히 대답해 주지 않을 테니까.
데우스가 여태껏 쌓아 올린 신비주의자 이미지의 성과였다. 데우스는 베르덴의 빈자리를 한번 보고는 눈을 감았다.
1분이 경과하고, 2분이 지났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
노르드발트 위 먼 상공에서 강력한 공간 파장이 발생했다. 베르덴이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초월자의 존재감은 하나가 아니었다.
‘테아렐과 베르덴이 함께?’
아르나크의 검 – 로드릭 리반데일 대공이 의문을 품었다. 다른 이들도 그러했다. 둘이 왜 같이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회의 시작까지 8분.
어쨌든 베르덴과 테아렐까지 왔으니 참석자들의 소식은 전부 파악됐다.
베르덴 일행이 이곳 성채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감지하고 있을 때였다. 복도에서 각국의 인원이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며 다급하게 회의장으로 들어와 정상들에게 속삭였다.
“……그런가.”
제라클 황제가 음험한 웃음을 흘렸다. 베르덴의 손에 무엇이 들렸는지 들은 이들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화했다.
역시나 루아스교 사람들의 반응이 가장 컸다. 클 수밖에 없었다.
“과연 초월자 연합의 수장다운 행동력이군.”
“실로 그렇습니다.”
세계수의 관리자 – 세렌디아가 보란 듯 눈웃음을 지었다.
인간은 긴장했으며, 수인은 기대했다. 엘프의 미소는 깊어졌다. 드워프는 분위기를 살피며 수염을 긁적거렸다.
기다림은 끝났다.
* * *
“고생하셨습니다, 주군.”
“어서 와, 가주.”
“오래 기다리게 했군.”
[안녕.]
[지각은 면했습니다.]
베르덴은 전리품처럼 연맹장의 머리를 대놓고 들고 성채 앞에 다다랐다. 아드리안과 이자벨라가 즉시 그의 곁을 차지했다.
테아렐은 그들과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는 한 발 뒤에서 걸었다.
그리고.
베르덴을 가까이서 맞닥뜨리게 된 레온하르트의 손이 떨렸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정신이 어지럽다. 뭔지 모르겠지만 거부 반응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뭔가…… 우러러봐야 할 것 같단 이상한 기분이…….
“……아.”
베르덴과 눈이 마주친 레온하르트가 다급하게 머리만 숙였다. 시선을 피한 것이다. 로니아 왕국 건에 대해서 사과해야 하는데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에게 잠시 눈길을 둔 베르덴은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 회의장이 있는 성채에 진입했다.
뒤에 남겨진 레온하르트는 이 순간 제자리에서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베르덴이 말했다.
“전부 다 왔나?”
“이그나시아를 제외하고 올 사람은 다 왔어.”
“이그나시아가?”
“마법 연구하느라 오기 싫대.”
베르덴을 통해 사차원을 경험한 이그나시아는 대악마의 피난처인 리버레아스를 관측했다. 그녀는 이후 혼자서 리버레아스로 가 보겠다며 마법 연구에 몰두했다.
‘그렇다고 정상 회의까지 안 와?’
베르덴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그나시아답군.”
“미친년입니다.”
아드리안은 지금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계단과 복도를 올라, 약 3분 정도 남았을 때 회의장의 문이 보였다.
참고로 유니아를 비롯한 위상들은 다른 장소에서 대기 중이었다.
긴급 정상 회의는 세계 회의와는 ‘성격’이 아주 다를 것이기에 베르덴, 아드리안, 이자벨라, 알파, 베타만 입장할 예정이다.
“가주, 그런데 그건…….”
“추종자들의 근거지를 급습했다니 아는 얼굴이 있더군.”
[전리품.]
베르덴은 연맹장의 머리를 들어 보였다.
“분위기 잡기로는 제격이겠지. 아르카디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끝나고 설명해 주마. 이야기할 게 많아.”
문이 움직인다.
“그럼 ‘예정’대로 진행한다.”
“알겠습니다.”
쿠웅.
베르덴이 선뜻 정상 회의장에 들어섰다. 에온의 수장이 돌아왔다. 방금 소식을 들었음에도 그와 함께 있는 테아렐을 직접 목격한 길드 본부장이 눈을 부릅떴다.
휙, 툭툭툭.
앞으로 던져진 이데라트 연맹장의 머리가 원형 테이블 중심에 떨어졌다. 그 안에서 얼마 남지 않은 피가 조금 낭자했다.
“테, 테리웬…….”
다종족 최고 외교관이자 임시 연맹장을 맡게 된 브라오닉 스트롬이 눈을 질끈 감았다. 평화를 사랑한 친우의 일그러진 표정…… 아무리 인류를 배신했다고 하나 너무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테아렐과 함께 성소 학살의 주범이자 배신자의 소재를 발견해 즉결 처형했다. 경위는 회의 도중에 밝히도록 하지.”
등장과 동시에 분위기를 압도한 베르덴은 에온의 의석에 몸을 실었다.
차례대로 테아렐과 흑해가 착석했다. 이자벨라는 알파와 베타를 데리고 베르덴과 아드리안 사이에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뒤늦게 회의장으로 온 레온하르트가 성녀 옆을 차지했다.
곧이어 시계가 정각을 알렸다.
“긴급 정상 회의 참석자 가운데, 불참을 선언한 이그나시아와 사망한 로니아 국왕을 제외한 전원을 확인했다.”
데우스는 지체 없이 의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주 안건은 옛 왕.”
세계 회의 때와 전혀 다른 긴장감이 회의장을 잠식했다. 그렇다. 이것은 고대의 제왕을 토벌하기 위한 논의의 장이었다.
“긴급 정상 회의의 개회를 선언한다.”
* * *
쿵. 쿵. 쿵.
데우스가 손끝으로 회의 개시를 알렸다. 목적이 분명한 정상 회의였기에 절차는 최대한으로 생략될 것이다.
“발언 희망자는 거수하라.”
베르덴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먼저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다. 지금 마무리 짓지 않으면 괜히 회의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니.”
“허가하겠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루아스 교국.”
“…….”
“에온의 계명 집행 대상인 로니아 국왕을 성자가 살해했다고 들었다. 에온이 붙잡은 죄인을, 성자가 동의도 없이 직접.”
베르덴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묻겠다. 그들이 성자와 함께 에온의 행사를 방해한 이단심문관들인가?”
회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에온은 루아스 교국에 한 가지를 요구했다.
그날 로니아 왕국에서 성자를 도운 성율성단의 일원들을 참석시키라는 것…… 교국은 어쨌든 간에 대대적인 해명과 사죄를 해야 했기에 반발 없이 에온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성자가 말했다. 여전히 가슴이 불편했지만 조금 적응했기에, 베르덴을 겨우 똑바로 보면서 답변할 수 있었다.
시야에 들어온 이데라트 연맹장의 머리는 애써 무시했다.
“그렇습니다, 신성. 하나, 전적으로 제가 책임질 잘못이지 이들은…….”
“그렇군.”
베르덴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드리안.”
“예, 주군.”
“잘라.”
잘라……?
레온하르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드리안이 눈 깜짝할 사이에 광검을 빼 들며 이단심문관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교황과 성녀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베르덴에게서 느껴지는 기이한 뭔가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에…… 결국 가장 먼저 대응에 나선 초월자는 레온하르트였다.
광검과 성검이 충돌했다.
레온하르트가 막았다고 생각한 사이 보랏빛의 검로가 수놓였다. 그 흐름은 이미 레온하르트의 뒤에 닿아 있었다.
촤아아아아아악!
당시 성자를 막으려 했던 라테온, 세를로, 카인. 그 셋을 방해한 이단심문관들의 팔이 허공에 떠올라 선혈을 흩뿌렸다.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베르덴이 냉혹하게 단언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광신자들의 피비린내가 나는 회의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