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7화 정상 회의 (2)
전지적 베르덴 시점에서…… 선택을 받았든, 스스로 선택했든 간에 초월자는 필연적으로 독자적인 위업을 가지고 있다. 천부적인 재능을 옥토로 삼아 쌓아 올린 노력의 탑.
운명의 개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은 진실된 것이다.
그러나, 신인(神人)은 다르다.
무투계와 마법계 초월자는 자력으로 각성하지만, 신앙계 초월자는 경지와 무관하게 반드시 4대 신물의 힘이 필요하다.
성검은 성자를.
성창은 성녀를.
성서는 교황을.
성갑은 성왕을.
당장은 무력할지언정 여신의 무구로부터 자격을 인정받으면 초월적인 경지를 손에 넣는다. 그야말로 신의 선택을 받은 존재로서.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증명을 거치면서 군림하는 일반적인 초월자들과 다르게, 빛의 초월자들은 먼저 군림할 능력을 얻은 후에야 위상을 증명하는 과정을 치르게 된다.
당대의 신인들은 어떨까.
에르세티아는 역대 최초로 성창과 성갑, 두 개의 신기의 주인이 됐다. 그녀의 압도적인 신성력은 이미 공인된 바.
교황 로마누스도 진즉 세계 종교의 반석에 오른 루아스교의 지위와 체계를 깊고 넓게 다듬어 명성에 걸맞은 업적을 이룩했다.
유일하게 성자 레온하르트만이 초월자의 자격을 입증하지 못했다.
성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성자가 되기 전에는 일개 농부에 불과했으니까, 하다못해 나이도 어리니까…… 이유는 다양했다. 하나같이 납득이 가는 까닭이기도 했다.
그래도 레온하르트는 노력했다.
베르덴도 알고 있다.
성소에 침입한 드라벤과 정면으로 맞서 싸웠고, 무려 막 봉인에서 풀린 옛 왕에게 성검을 휘두르기도 했던 그의 용기는 칭찬해야 마땅하다.
다만, 그뿐이다.
결과가 그렇다. 분투했어도 결정적으로 무엇도 이루지 못했다.
주검의 영광을 막지 못했고, 옛 왕의 상대도 되지 못했다. 힘은 어느 정도 갖췄으나 위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 그의 현주소였다.
그리고.
신인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은 신인이 짊어져야 할 책임에서도 멀어진다는 것.
어째서 모든 국가는 미성년과 성년을 법적으로 구분하는가?
미성숙한 판단력으로 그릇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 선택의 대가를 온전히 부과하려면 모든 방면에서 소년에게도 성인과 동일한 대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책임의 구분이다.
베르덴의 관점에서 레온하르트는 피보호자였고, 당연히 그를 가르쳐야 하는 보호자는 에르세티아와 로마누스.
아이의 잘못은 부모가 감당해야 옳다.
레온하르트가 감정에 휘둘려서 지성체의 존엄을 짓밟아 온 로니아 국왕을 참살한 과오는 응당 성녀와 교황이 씻어야 한다.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그래서 베르덴은 레온하르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끄으읍……!!”
각각 왼팔이 절단된 성율성단의 이단심문관 셋이 신음했다. 그들의 날아간 팔이 회의장 바닥을 굴렀다. 후두둑, 피가 쏟아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철컥.
아드리안은 냉정한 눈빛으로 아무것도 묻지 않은 광검을 납도했다.
“……어?”
레온하르트는 멍하니 자신의 얼굴에 묻은 따뜻한 액체를 더듬었다. 그의 건틀릿에 찐득한 혈액이 눈에 고스란히 비쳤다.
정신계 마법에 당하기라도 한 듯 감정의 혼돈이 그의 마음을 덮쳤다.
짤막한 경악이 퍼지는 정상 회의장.
태반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당혹감을 보였고, 나머지 태반은 당황에 더해 저마다의 반응을 드러냈다.
보헤미른 임시 마탑주로 참석한 로벨린이 눈을 부릅떴다.
‘베르덴…… 대체 무슨 의도야?’
제라클 황제는 베르덴을 주시했다.
‘아무리 명분은 에온에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공식 석상에서 루아스교의 피를 보다니. 분명 배신자들로 인해서 느슨해진 동맹 관계를 다잡으려고 할 줄 알았는데…… 지나치게 과감하군. 무리수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여러 초월자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정치계 초월자로 취급받기도 하는 그는 직후 벌어질 상황을 예상했다.
광신적인 성녀가 절대 좌시할 리 없으니 최소로 잡아도 성녀와 베르덴의 무력 충돌.
심하면 국제 연합에서 루아스교와 에온이 완전히 등을 돌리는 것.
‘여러모로 베르덴의 지난 행보와 비교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세계 회의에서 베르덴은 최초의 마탑과 엘릭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세계 등 다양한 비밀을 언급하여 세력 간의 연대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배경을 읽어라.
제라클 황제는 특유의 습관처럼 정보를 더듬으며 뿌리를 찾아낸다. 생각하자. 베르덴의 동기(動機)는 무엇인가.
‘베르덴은 자신이 부재한 동안 아드리안을 앞에 세워, 800년 전처럼 크세리온 제국에 대항할 초월자 연합을 조직했다.’
대륙 최대 연합.
그의 정치적 감각이 실마리를 잡았다.
‘연유는 몰라도 베르덴은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싶어 하는군. 그래서 가장 통제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루아스 교국에 목줄을 매려고 한다. 확실히 말뿐인 타협보다는 힘과 명분을 앞세워서 찍어 누르는 편이 낫긴 할 터. 그래도 실패할 경우 에온이 감당해야 할 부담이 심각하게 크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
뭔가 깔끔하지 않다.
‘혹시 루아스교를 이렇게나 압박해야 할 이유가 따로 있는──잠깐.’
제라클 황제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지금쯤 성녀가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어야 정상이다. 아니, 애초에 아드리안이 접근하기도 전에 막아야 했을 터.
제라클 황제는 고개를 돌려 베르덴 반대편으로 눈길을 향했다.
“…….”
성녀 에르세티아가 숨소리도 내지 않고 황금빛 눈동자로 베르덴을 직시했다. 테이블 위에 올라간 한 손을 미약하게 떨며…….
* * *
속이 울렁거린다.
어지럽다.
신성력으로 발달한 감각이 반죽처럼 뒤죽박죽 섞인 것 같다. 혈색이 거의 없어졌다. 창백한 얼굴의 교황 로마누스가 이내 견디지 못하고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무엇입니까…… 이, 이 기분은…….’
구토감이 몰려오는 입가를 틀어막거나,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식은땀이 멈추지 않는다.
마치 병에 걸린 것처럼 체온이 뜨겁다가 차갑게 식길 반복했다.
인식의 초점이 맞지 않는다.
끔찍하게 심란하다.
로마누스는 난생처음 느껴 보는 혼돈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유…… 이유가 뭐지? 기점은 명백했다.
베르덴을 관측한 순간 로마누스에게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그는 어금니를 깨물고 신음마저 인내하며 상황에 적응하려 애썼다.
정체불명의 기현상을 체험하는 신앙계 초월자는 로마누스만이 아니었다.
성녀 에르세티아는 그와 다른 기분에 젖었다.
광(狂)적인 충동‘들’이었다.
‘죽여야…… 죽여야 해.’
당장이라도 성창을 소환해 베르덴을 죽여 버리고 싶다. 사지를 절단하고, 저 불손한 눈동자를 꿰뚫어 여신에게 바치고 싶다. 베르덴의 입에서 여신에 향한 찬양을 듣고 싶다.
죽이고 싶다, 죽이고 싶다, 죽이고 싶다.
형용할 수 없는 살인 충동이 그녀의 인간성과 부딪혔으나, 잔혹한 살심 앞에서 인격은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하, 하지만…….’
진정으로 살인 충동을 저지하고 있는 것은 이와 정반대의 충동이었다.
복종심.
에르세티아는 저도 모르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싶은 충동에 혼란스러웠다……. 베르덴에게 굴종하고 싶다는, 그에게 굴복하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욕구가 연신 꿈틀거렸다.
마음속 자극이 육체를 장악한다.
이대로 가다가 마음이 터져 버릴 것 같다.
콰드득……!
프로하스의 빙정암으로 만들어진 테이블을 그녀의 손끝이 파고들었다.
대항할 것인가.
순종할 것인가.
에르세티아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또한 순수한 의지로 모든 충동을 억누르면서 베르덴에게 이렇게 물었다.
“베르덴…… 당신은, 여신의 빛을 신앙할 마음이 있나요?”
……!!!
이단심문관들이 공격당하고도 즉각 반격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심을 묻는 에르세티아에게 시선이 쏟아진다.
그것은 루아스 여신을 신앙하라는 강요나 다름이 없었다.
이는 베르덴이 예상한 상황과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성녀가 이성을 잃으면 필사적으로 이를 말리는 교황과 타협점을 찾으려 했는데, 오히려 내게 루아스 신앙을 논한다?’
교황과 성녀의 반응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일단…… 베르덴은 당연히 루아스교와 끝장을 볼 생각은 없었다.
단순히 루아스 교국이 지금까지 에온에 진 빚을 위압적으로 청산해, 향후 대전쟁에서 교국이 멋대로 굴지 못하게 하려는 한 수였으니.
성율성단.
광신자.
베르덴은 성직자 개개인은 몰라도 교국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다. 루아스교에 운명의 추종자가 단 한 명도 없다니.
‘그럴 리가.’
인류의 배신자들을 밝혀 내는 이단 심문에 문제가 있거나…… 루아스교 상층부에 사도의 끄나풀이 있다, 베르덴은 그렇게 판단했다.
어쨌든.
베르덴에게 성녀와의 과도한 마찰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능숙하게 화제를 돌려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것이 마땅한 행동일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세계 회의 때의 베르덴이었다면 말이다.
‘……이것도 나의 본질이겠지.’
에르세티아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난데없는 질문은 정확히, 꽤 정확히 베르덴의 심기를 건드렸다.
다른 신을 믿으라는, 그 강압적인 요구가.
부디 루아스 여신을 믿어 달라는 에르세티아의 간절한 눈빛이.
베르덴은 신으로서 인내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들끓는 근원적인 충돌을 마다하지 않았다.
“두렵나? 에르세티아.”
“뭐가…….”
“네가 사랑하는 만큼 여신이 사랑받지 못할까 봐 우려스러운가? 그럴 생각도 없는 타인에게 신앙심을 강요할 정도로 불안한가? 내가 루아스라면 그런 식의 선교(宣敎)는 절대 바라지 않을 텐데. ”
정상 회의장은 마치 그 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고요했다.
“믿음의 강제는 되레 신의 위엄을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다.”
베르덴은 종교 그 자체로서 말했다.
“안타깝군, 루아스가 가장 아끼는 빛이 이렇게나 신앙심이 얄팍하다니.”
베르덴의 일침이 모두의 머릿속에 강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마탑주들은 물론이거니와 7대 마도왕, 대행자, 마스터, 마울러, 북부의 왕, 아르나크의 검, 키퍼, 흑해, 관제…… 또 베르덴을 관찰하던 수왕 안티아스가 일제히 입을 떡 벌렸다.
각국의 왕도 마찬가지였다.
네크로맨서 라인델과 섭리자 데우스조차 일순간 움찔거렸다.
‘어? 가주, 우리가 계획한 것보다 발언의 수위가 너무 높은 것…….’
이자벨라가 본능적으로 알파와 베타를 보호하는 순간이었다.
에르세티아는 저항과 굴종 중 하나를 골랐다.
쩌어어어어엉!!!!
성스러운 주먹이 빙정암의 테이블을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해당 부분이 움푹 파이는 것과 함께 금이 쩍쩍 갈라졌다.
“신성 모독입니다.”
의석에서 기립한 에르세티아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강대한 신성력이 맥동한다. 적의는 이미 그녀의 머릿속을 침범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베르덴이 뭐라고 변명하든 간에 더는 참지 않을 작정이었…….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주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검붉은 마력이 섬광과 같이 폭발했다. 잿빛의 건틀릿이 내리친 테이블이 분쇄되며 절반으로 갈라졌다.
“신성 모독?”
베르덴의 안광에 진심이 담겼다.
/“그래서.”
세계 회의 때와는 전혀 다른 존재감이 회의장을 압도했다. 심약한 왕조차도 강제로 의식을 잃지 않은 채 그들의 대립을 지켜봐야만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베르덴의 강경 대응에 여러 초월자도 갈피를 잃었다. 심지어 에르세티아도 너무 당황해 움찔 떨었을 정도였다.
서약자 유리온이 기겁하며 눈을 끔뻑였다.
‘아니, 왜 네가 더 화내……?’
방금 전의 대화로는 성녀가 더 분노해야 정상인 것 같은데, 혹시 신성 모독이 그렇게나 듣기 싫었나? 아니면 그 태도가?
‘젠장, 어떻게 하지?’
광신자인 에르세티아도 문제인데 이거 베르덴을 더 말려야 할 것 같다. 분위기를 보니 진심으로 둘이 충돌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유리온은 나름의 중재책을 고안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베르덴과 에르세티아의 대립으로 가려진 초월자의 존재감이 빠르게 증폭되는 걸 느끼고 옆을 바라봤다.
“음?”
“내가, 책임진다고…… 했는데.”
레온하르트는 혼돈의 도가니인 회의장에서 밑에 떨어진 팔들을 응시했다. 자신이 로니아 국왕을 죽인 탓에 부하들의 신체가 절단됐다.
다시 붙일 수 있다고 해도 레온하르트의 죗값이 타인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은 변함없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데, 왜.”
“야, 쟤 눈 돌아가는데?”
최근에 정신적으로 몰려 있던 탓에 그는 이제 감정을 주체할 자신이 없었다.
역병과 방역으로 티르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성검의 선택을 받은 후로 끊임없이 쌓여 가기만 하던 스트레스가 정점에 다다른 것이다.
───인내하라.
성검이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으나 레온하르트의 정신력은 이미 한계에 달했다. 주먹을 강하게 움켜쥔 그가 토해 내듯 소리쳤다.
“내가!!! 책임진다니까!!!!!!!!!”
성자의 갑작스러운 함성.
신성력을 폭발시킨 그는 이성을 잃어버려 본성에 지배됐다. 분노. 레온하르트의 건틀릿이 부하들을 벤 아드리안에게 향했다.
“주군 말씀 못 들었나? 넌 책임질 자격이 없다.”
“무슨 자격!!!!”
말릴 수 없다.
유리온이 언령을 발동했다.
“이그나시아가 없는데 왜 더 개판……!”
아드리안이 그에 응수하며 보이지 않는 속도로 정권을 내질렀다. 정상 회의장에서 성자와 천검이 정면으로 격돌했다.
기와 신성력이 폭발했다.
* * *
정상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노르드발트 거리에선 연회가 벌어졌다. 오랜만에 재회한 북부의 강자들이 서로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근육이 우락부락하고 얼굴에 흉터가 난 여전사가 불콰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 대륙에 가 봤어? 이번에 가 봤는데 여자들이 다 연약해 가지고 이만한 벌레만 기어다녀도 어머나 어머나,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 대더라고.”
“그게 여성스러운 겁니다, 누님.”
“여성스럽긴 지랄. 꼴불견이 따로 없던데. 거대 도끼 정도는 한 손으로 휘두를 줄 알아야 여성스러운 거지.”
“하하하하하!”
여전사가 툴툴대는 걸 웃으며 듣고 있던 북부의 사내가 시선을 높였다.
그는 초월자들이 모인 성채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저기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대화가 오가고 있겠죠?”
“뭐, 그렇겠지? 정상들이니까.”
“근데 말싸움하다가 주먹다짐 나면 그냥 좆 되는 거 아닙니까? 초월자들은 도시 하나도 쉽게 지워 버린다던데.”
“그러니까 초월자들이니.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높으신 양반들인데 싸울 거면 고상하게 싸우지 서로 치고받고 하겠냐고. 안 그래? 정치라는 것도 있는데 말이야.”
“그렇죠?”
“아, 그럼. 당연하…….”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폭음이 들렸다.
여전사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뒤를 돌아봤다. 성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정확히 회의장이 있는 장소였다.
“어머나, 시발.”
“좆 된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