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4화 군단들 (6)
침묵의 사막을 다녀온 레그리트는 방주에게 모든 것을 밝히지 않았다.
초대 마도왕, 인공 골렘, 관리자, 세계수, 고대 신, 운명, 운명의 실, ‘당신’, 징조들, 최초의 마탑의 진실, 대분기, 운명전 등 독단적으로 방주에 공유할 사안이 아니었기에.
그래서 레그리트는 나름대로 해당 자료의 등급을 구분했고, 혼자 힘으로 알아내지 못한 내용 대부분을 함구했다.
베르덴과의 비밀 엄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침묵에 감춰진 미지.’
쉐오른 장로는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물론 대수림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 그는 이게 세계수의 일부임을 간파하지 못했다.
다만 레그리트의 보고에 뭔가 빈 구석이 있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을 뿐.
‘거절할 수 없는 선물이구나.’
레그리트와 베르덴이 모종의 정보를 은폐했다고 해도 방주의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어련히 알아서 할까?
신뢰할 수 없었다면 처음부터 방주의 선장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자네들이 이렇게 문을 열어 주었으니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나의 몫이겠지. 발견과 탐구에서 오는 감정까지도.”
침묵의 사막에 무엇이 존재할까? 무엇이 있길래 선장들이 비밀에 부쳤는가? 인류가 공략할 수 없었던 미개척 지대의 기원은 무엇인가?
내면의 피가 끓는다.
방주의 후보로 선정됐을 때처럼.
늙어서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선물은 기쁘게 받겠네.”
쉐오른 장로가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천으로 감싸 품속에 넣었다. 방주의 도서관, 라이브러리의 주인의 표정은 마치 신비의 단서를 습득한 마법사의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다음은 아세트로의 차례로군.”
흔들리는 공간이 쉐오른 장로와 베르덴의 대화가 끝났음을 알렸다.
탁.
아세트로 올딘이 자리로 돌아왔다.
정상 회의의 참석자.
균형의 조율자.
마경 토벌군단의 주력 중 하나.
이 단안경을 쓴 마법계 초월자가 방주와 관련된 문제로, 어째서 베르덴 자신을 개인적으로 찾았는지 얼추 짐작은 갔다.
베르덴이 물었다.
“레이라 건인가?”
“그렇다.”
아세트로가 서류 더미를 넘겼다. 필체는 베르덴 이상으로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각 페이지에는 과연 편집증적일 정도로 제법 많은 주제, 본론, 그리고 주석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내가 집필한 레이라 정리본이다. 그녀를 곁에서 감시하는 데 참고하도록.”
베르덴이 가볍게 내용을 훑었다.
“레이라가 이걸 보면 경멸할 것 같은데, 사람을 이렇게나 자세히 연구하다니.”
“레이라와 계약했다고 추정되는 기생의 대악마만 조사할 게 아니니까 어쩔 수 없지. 가급적이면 들키지 마라.”
“조심은 해 보지. 용건은 이걸로 끝인가?”
“하나 더 있다.”
아세트로는 새로 채운 따뜻한 차로 입술만 살짝 축였다.
쉐오른 장로가 말했다.
“광명의 대재해는 세계 연합에 속해 있고, 자네와 전투를 벌인 뒤 사문으로 도주한 여제의 행방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네.”
“하지만 대제의 위치는 확인했다.”
대제, 라이칸 투르가르드.
반토레온과 히스릴과 같은 현대에 온전히 부활한 고대의 초월자.
또한 초월자 전쟁의 주역 중 하나.
‘그리고…… 초대 마도왕이 드라벤을 이용해서 옛 왕의 권능으로 부활하게끔 유도한 존재. 저항을 위한 안배다.’
8위계급 초월자를 되살린 건 저항자 측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 텐데. 그리 생각하면 ‘옛 왕의 대적자’를 조력하기 위한 전력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옛 왕에 대적하는 자가 누군지 아직 확증이 없다는 거지만.’
첫 번째 사도, 빛으로 이루어진 존재.
정체 불명.
대적자 불명.
두 번째 사도, 아서 타렌폴드.
인간계 최초의 왕.
대적자 불명.
세 번째 사도, 호스트.
바다의 신.
대적자는 흑해, 테아렐.
네 번째 사도, 블러디아(가명).
드래곤‘들’.
대적자는 테아렐의 추측에 따르면 재액의 토벌자, 마의 공포.
다섯 번째 사도, 거인.
고대종.
대적자 불명, 어쩌면 거인을 얼음 속에 봉인하고 있는 북부의 감시자이자 북부의 왕, 에레스 아인드겔 프로하스.
여섯 번째 사도, 아칸드 리니게아 타인 크세리온.
옛 왕.
대적자 불명.
일곱 번째 사도, 이슈르.
사막의 신.
대적자는 아마도 키론다르.
‘정황상 아칸드의 대적자는 초대 네크로맨서와 세 명의 죄인 중에 있을 것 같지만 이 가설엔 허점이 있다. 경지의 현격한 차이. 상식적으로 맞수는 절대로 불가능해. 그렇다고 고대 초월자 중 하나가 대적자로 생각되진 않는데…….’
‘당신’의 세력 이상으로 저항자의 세력은 거대한 베일에 싸여 있다.
베르덴에게는 그랬다.
대적자가 세부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낼 필요가 있다. 데우스 위덴과 메이아에게서 들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대제의 위치를 듣는다고 해서 내가 활용할 수는 없겠지. 방주를 통해 얻은 정보는 오직 방주에 관련된 안건에만 쓰는 게 규칙이니까.”
“방주에서 이 전쟁에 개입해야 한다고 결정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뭐, 아직 윗분께서는 판단하지 않으셨지만.”
“음, 옛날의 방주와는 다르니 말일세.”
방주의 입장에서 1차 초월자 전쟁과 2차 초월자 전쟁은 사뭇 달랐다.
아크의 유무(有無).
800년 전과 달리 하늘섬을 보유한 방주의 전력은 차원이 다르게 비대해졌고 강해졌기에 전면에 나서면 결국 드러나고 만다.
하지만.
집단이 발각당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인류를 돕는다는 선택지는 없다.
지켜보거나.
온 힘을 다하거나.
방주가 지금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중대한 사안에서 분열을 부를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개요는 알아 둬라. 대제는 델하룬 북부에서 세력을 조직하고 있다. 대대적이면서도 은밀해서 겉으로 잘 보이지 않더군.”
“규모는?”
“고작 수백 명에 불과하다.”
아세트로는 말을 덧붙였다.
“다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대제는 과거 초월자만을 위하는 세력의 황제로서 동대륙 전체를 지배했던 사내니까.”
“만날 수 없는 과거와 현재가 교차했으니 마찰은 피할 수 없네. 전쟁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 뒤도 감히 마음을 놓기 어려운 국면이 펼쳐지겠지.”
쉐오른 장로는 국제 사회의 복잡다단한 정세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참으로 난세로군.”
* * *
아세트로 올딘과 쉐오른 장로가 주인 없는 땅을 떠나고, 그들과 같은 자리에서 베르덴은 다른 방주의 일원들과 면담했다.
경이의 답파자 직속으로 조직된 부대를 대표해 나온 이는 세 명.
“겨우 다시 뵙게 되었군요. 여섯 번째 선장 직속 정보원으로서 베르덴 님과 아크 정보망의 연결을 담당하게 된 리스너입니다.”
리비안트 공국에서 베르덴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방주의 일원, 리스너.
“그간 멀리서만 존안을 뵈었는데 이렇게 직접 인사드리게 돼 영광입니다, 선장님. 경이의 답파자 직속 부대장으로 임명된 에길입니다.”
방주의 이념에 헌신하는 최상급 용병이자 용병 길드장, 에길.
“아니, 대표격만 오는 건데 왜 나도 여기에……?”
“그야 베르덴 님과 인연이 깊으니까요. 자, 어서 자기소개 하세요.”
“……테온, 입니다.”
리비안트 공국에서 박사의 부하로 활약하던 도중 베르덴을 암살하려고 했다가 기막히게 엮여 버린 전직 글러트니 암살자, 테온.
그리고.
방주의 후보가 두 명.
“이야, 엄청 깍듯해졌네? 형님한테 반말 찍찍거리더니. 테온, 글러트니 출신다운 기개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닥쳐 좀, 제발.”
“얘도 철들었나 봐요. 아무튼! 형님의 활약상은 정말로 매일같이 듣고 있었어요! 존경합니다, 베르덴 형님!”
렌 발하그 장로의 제자이자 방주의, 로크.
“잿빛 로브, 멋지네요. 그리고 8위계에 도달한 거 축하드려요.”
미스릴 등급 모험가, 핏빛검 레이라.
에길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베르덴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리스너의 말마따나 여러모로 베르덴과 사연이 얽힌.
베르덴이 말했다.
“여념이 없어서 이제야 얼굴을 보게 되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지. 그나저나 부대 구성은 방주에 맡겼는데, 부대장으로 꽤 거물이 인선됐군.”
“과, 과찬이십니다, 선장님.”
에길은 방주의 일원으로서 환희를 감추지 못하고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전심(全心)으로 보필하겠습니다, 가련한 인류를 위해.”
모험가 길드처럼 대륙 각지에서 활동하는 용병 길드엔 본부가 없다. 길드 하나하나가 독립체이기에 길드장만 있을 뿐이다.
수백 명의 용병 길드장, 그중 영향력을 따지면 에길은 대륙의 용병 업계에서 네 손가락 안에 든다고 평가된다.
탁월한 대인 관계 능력.
대륙에서 활동하는 선장의 수족이자 귀로서 더할 나위 없는 인재인 셈이다.
짝짝짝.
로크가 손뼉을 마주쳤다.
“이렇게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응당 파티를 해야 마땅하지만…… 여기서 웃고 떠들기에는 바깥 상황이 별로네요, 형님.”
박수를 멈춘 로크가 기립했다.
“저는 용병으로서 형님이 이끄는 세계 연합에 들어갔습니다.”
“시련보다 더한 시련이 될 거다.”
“전 시련 쪽이 아니지만 그런 건 따지려고 후보로 있는 게 아니라서요. 렌 발하그 스승님에게 배운 모든 것 이상을 쏟아 낼 겁니다.”
“그래.”
베르덴이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무운을 빌겠다, 로크.”
“베르덴 형님도 무운을 빕니다.”
로크가 힘차게 그의 손을 쥐었다.
“야, 테온. 너도 나하고 같이 전쟁에 참전하잖아. 어색하게 굴지 말고 와. 무려 세계 연합장이자 8위계 초월자인 형님과 악수할 기회라고?”
“크, 크흠.”
테온이 쭈뼛쭈뼛 일어섰다.
테온은 로크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그동안 같이 활동한 세월이 있는데 혼자 사지로 보낼 수 없지 않는가.
의리 때문에 죽을 생각은 없지만.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글러트니를 배반하고도 여태껏 목숨이 붙어 있는 테온이었다. 그는 이번에 자신의 운과 명줄이 얼마나 대단하고 질긴지 제대로 시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베르덴은 그대로 한 명 한 명씩 차례대로 악수를 나누었다. 이후로 짧은 대화가 오갔다. 그러나 그걸로 충분했다.
이자벨라의 개인 연구실에서 리스너, 로크, 에길, 테온이 다시 세상으로 나갔다.
달칵.
문이 닫혔다.
베르덴은 레이라와 단둘이 남았다.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네요. 리비안트 공국의 도시, 로리엔. 그곳에서 소울 트리를 토벌했을 때로부터 벌써 4년이나 지났다니.”
레이라는 칠흑의 투구를 벗었다. 눈부신 금발이 나부꼈다. 루아스교도 해주하지 못한 악마의 저주가 깃들어 대부분의 사람에게 공포를 선사하는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제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거.”
“…….”
“역시 악마와 연관된 문제인가요?”
* * *
베르덴은 생각했다.
아세트로의 정리본 내용은 레이라에 대한 다양한 가설이 중점이었다.
───악마의 저주가 심화될수록 강력한 신체 능력과 재생력 발휘.
───저주의 반작용
───정신 침식.
───배척. 타인이 레이라의 맨 얼굴을 인식한 순간 강렬한 부정적 감정에 휩싸임. 저항에 실패하면 공포에 빠짐. (단, 베르덴은 예외. 원인은 파악되지 않음).
───레이라의 고향: 테르네티아 연방의 헤스니어 마을.
───세계의 주시자가 레이라를 방주의 후보로 선정할 때 마을을 관측한 바 있음.
───그런데 재확인 결과 헤스니어 마을은 이미 6세기 전에 멸망한 상태.
───레이라가 모험가 길드에 들어오기 전의 행적 파악 불가능.
───가면을 쓰고 다니는 그녀에 대한 목격담이 전무.
───보헤미른 마탑의 동력원이 폭주한 년도, 과거에 채취한 레이라의 혈액이 찰나에 변화.
───붉은색 -> 검은색 -> 붉은색.
…….
아세트로가 수집한 정보들은 저마다 여러 가설의 기반이 되었는데, 수십 개의 주제 중에서 베르덴이 주목한 것은 레이라와 그녀를 저주한 악마의 관계에 대한 가설이었다.
───레이라를 저주한 악마가 기생의 대악마가 맞다고 가정하면, 일반적인 악마 숭배자 및 계약자와 정반대의 사례를 보이고 있다.
───악마는 인간을 농락의 대상이자 가축으로 여긴다. 악마와 인간의 힘 차이가 클수록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강력한 악마는 나약한 인간을 죽음으로 몰며, 고통과 비극을 양분으로 삼는다.
───기생의 대악마가 제1차 대성전에서 죽은 군단의 대악마와 같은 전력을 갖고 있다면 레이라는 대항할 수 없는 존재다. 대악마의 뜻이 곧 레이라의 운명인 셈이다.
───그런데 기생의 대악마는 저주를 제외하고 레이라에게 간섭하지 않고 있다. 사실상 방치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것은 상식적인 강대한 악마와 나약한 인간의 관계로 해석할 수 없다.
───게다가 레이라는 위험에 처할 때만 악마의 저주를 받아들여 경지 이상의 힘을 끌어낸다. 악마의 계약과 흡사하다. 즉, 기생의 대악마가 그러한 활용을 용인하고 있는 것이다.
───기생의 대악마가 내린 저주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온화하다.
───마치 기생의 대악마가 레이라를 보호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므로, 이 가설의 결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기생의 대악마가 레이라를 어떤 의미로 자식처럼 소중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떴다.
‘레이라가 기생의 대악마조차 제멋대로 관여할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것.’
아세트로의 머릿속에 박힌 악마에 대한 편견에는 반박할 거리가 많지만, 어쨌든.
후자의 결론은 마음에 들었다.
‘기생의 대악마는 마경에 몸을 숨겼다. 레이라는 최소 6세기 이상 존재해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외모는 자연스럽게 젊다. 이 정도면 확신은 못해도 의심은 할 수 있지.’
6대 전설 – 투열석 – 절대방벽: 판델라.
소유주에게 영원한 수명을 가져다주는 태고의 산물은, ‘이름 없는 자’가 주인이 되어 세상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숲에 봉인했다.
그 숲은 변이를 거듭하여 현대에서는 마경이라고 부르는 미개척 지대가 되었다.
베르덴은 속으로 물었다.
‘레이라, 네가 ‘이름 없는 자’인가?’
그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만약 추측이 사실이라면 레이라는 현재 일종의 기억상실증에 걸린 상태일 테니까. 이성적인 반응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무의식.
레이라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의식 속의 의식을 건드려야 한다. 무릎이 망치에 맞으면 반사적으로 다리가 올라가는 것처럼.
느닷없이 허를 찔러야 한다.
베르덴은 시험 삼아 테아렐의 방식을 모방하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시험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주전자를 쥐었다.
레이라가 찻잔을 들었다.
“감사…….”
“판델라. 이름 없는 자.”
“네?”
“투열석.”
“……??”
레이라가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느닷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전혀 안 통하는군.’
아무래도 기억상실이 무의식까지 깊게 뿌리를 내린 듯하다.
혹은 테아렐의 방법이 형편없거나.
베르덴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모른다면 됐다. 기생의 대악마에 대한 정보는 계속 수집하고 있지만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무리하지 마세요. 눈앞의 위험부터 어떻게 하는 게 급선무니까요.”
“그래서 전쟁 말인데.”
“아, 네.”
“테르네티아 연방 토벌군단에 들어가고 싶다면 넣어 줄 수 있다. 연방은 네 고향이니까.”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솔직히 말해 전 아무데나 상관없습니다. 어디든 준비되었으니 연합장의 뜻에 따를게요.”
“그런가.”
베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판델라.”
“아까부터 판델라가 뭔데 그러는 거죠? 기생의 대악마와 상관이 있는 건가요?”
“혼잣말이다. 그럼 테르네티아 연방 토벌군단에 넣어 두도록 하지.”
“……네. 그보다 질문이 좀 있는데요.”
두 사람은 이번 전쟁에 관한 내용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주로 레이라가 질문하면 베르덴이 답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긴 문답은 아니기에 시계의 분침은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만 올라가지.”
“그러죠.”
레이라는 그래도 궁금증이 좀 풀렸는지 만족한 듯 베르덴을 뒤따랐다.
베르덴이 문고리를 잡은 순간이었다.
“판델라.”
“아니, 그게 뭔데 자꾸 그래요??”
여전히 원하는 반응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무의식이 자극되지 않는다면 이처럼 반복적인 인식 강요가 해답이 될 수 있으니.
기억날 때까지 허를 찌르듯이 단어를 속삭이는 것도 방법이다.
* * *
각 대륙에서 토벌 군단의 준비가 끝나가고 있다.
동시에 베르덴과 옛 왕의 최후 회담이 임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