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mit Breaking Genius Mage Chapter Raws 1076

1076화 묵시록

제라클 황제가 상대를 가늠했다.

‘크세리온 황제. 대륙 절반을 불태운 지상 최악의 폭군이라더니 소문보다 인상적이군.’

바닷바람에 나부끼면서 어깨를 간질이는 흑발과 심연의 눈동자. 피부는 밝은 편이었으며, 베르덴처럼 수염은 없었다.

겉모습은 갓 왕위에 오른 듯한 사내였다.

그러나 사내는 800년 전에 단신으로 초월자들을 살해한 크세리온 황제, 단언컨대 어떤 모략가보다도 깊고 어두운 내면을 가진 듯했다.

‘이자는…… 진정 폭군인가?’

아칸드 리니게아 타인 크세리온.

세상은 이 타고난 초월자를 옛 왕이라 칭했다.

“회담이 성사되어 기쁘군, 제왕들이여.”

아칸드는 루아스 교국이 공개한 역사의 기록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다.
무도하거나 난폭하지 않았다.
모든 말투와 몸짓에 어진 황제의 위엄과 예의가 자연스럽게 묻어났다. 아칸드를 실제로 처음 목도한 교황 로마누스는 그렇기에 경계심을 더욱더 높이며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편한 대로 앉도록.”
“전쟁 주모자답지 않은 친절한 태도로군.”

아칸드가 섭리자의 임시 봉인을 깨고 나왔을 때 잠시나마 교전을 치렀던 7대 마도왕, 반젤리스가 보란 듯이 비꼬았다.

“내일 루네시카 안테르노아를 처형한다고 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나? 죽음의 제왕이라 불린 존재에게 그런 인간성이 남아 있을 줄이야.”
“예정보다 전령을 이틀 일찍 파견한 것은 너희의 뜻을 존중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하겠다는 현 세계의 의지를. 물론 포로 협상 또한 주제의 갈래지.”

아칸드가 세계 연합 일원의 면면을 보았다.

“나의 이해와 상대의 이해. 그 둘이 충돌하는 게 전쟁이다. 내게는 그렇다. 그러니, 이 회담은 서로의 이해를 확인하는 자리다.”
“거창한 절차다.”
“전쟁의 시작은 공평하고 대등해야 옳다.”

아칸드가 옥좌에 엄숙히 내려앉았다.

“무지하고 일방적인 학살은 무가치한 즐거움에 불과하니.”
“자신감 하나는 명성에 걸맞구나, 옛 왕.”

일부러 아칸드를 자극하려고 한 반젤리스가 내심 꿈틀거렸다.
말뜻이 아니라 말투가 거슬렸다.
지극히 오만한 수준을 넘어 놈은 본인이 통보도 없이 진즉 전쟁을 일으켰다면 세계 연합을 압살할 수 있다는 단호한 확신을 내비쳤기에.

그때, 베르덴이 의자를 짚었다.

“동감이다. 누가 누구한테 죽는지 알아야 미련이 덜한 법이지. 너처럼 감히 다시 부활할 엄두조차 못 내게 말이다.”

베르덴이 아칸드 맞은편에 앉았다. 알파는 그의 목덜미에 자리를 잡고 타원형 고리의 푸른 외눈으로 아칸드를 노려봤다.

“대화를 길게 하고 싶지 않다. 시작하지.”

직후 아드리안, 제라클 황제, 로마누스, 리반데일 대공이 베르덴을 중심으로 착석했다. 그 외의 국가급 전력의 호위들은 윗분들의 뒤에 바로 서서 아칸드의 측근들을 주시했다.

베르덴이 위협적으로 아칸드를 도발하자 주검의 영광 소속 고대 초월자들이 눈을 부라리면서 불편한 심기를 보였다.
그와 달리 초월적인 존재감을 보이는 네 마리의 언데드는 별다른 반응조차 보이지 않으며 초월자들의 기색만 관찰했다.

백골의 비올라는 어중간하게 사이에 껴서 조용히 석상처럼 있었다.

“좋다. 그럼 크세리온 제국과 세계 연합의 회담을 개최하지. 첫 번째 주제는 포로.”

아칸드가 본론을 꺼냈다.

“루네시카 안테르노의 신병을 넘겨라.”
“대가는.”
“고통과 절망.”

무거운 침묵이 대기를 지그시 압박했다.

“루네시카를 보내면 고통 없는 현실과 절망 없는 최후를 약속하겠다.”

그림멜 그롬파르는 어떻게 하든 간에 상관조차도 안 하겠다는 걸까. 하긴 그림멜은 그를 부활시키는 데 운명의 추종자들이 준 전력이었지 사실상 아칸드와의 연결 관계는 없었다.

아무튼.

‘애초에 정상적으로 협상할 의지가 없었군.’

세계 연합의 패배를 기정사실로 여기는 거만한 통첩이었는데, 베르덴에게는 최대의 자비와 아량을 베푸는 듯한 속삭임으로도 들렸다.

‘하지만 아칸드도 주검의 영광 전체를 온전하게 지휘하려면 루네시카가 반드시 필요하니 그녀를 쉽게 포기할 리 없다. 그렇다면 [아니무스]의 힘을 이용할 생각인가.’

뭐가 됐든 간에 아칸드가 루네시카를 진심으로 버릴 가능성은 없다.
바라는 바다.
베르덴의 안배가 그것이니까.

베르덴이 생각으로 암약하는 사이…… 아칸드의 말을 들은 교황 로마누스는 그 사람 좋은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고통과 절망이라면……!’

과거 크세리온 제국은 손에 닿는 모든 생명체를 학살했다.
목숨을 빼앗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생존자 하나 남기지 않고 그들의 목을 하나하나 효수하여 창대에 걸었고, 그들의 시체를 언데드로 다시 활용했다.

당시 성자의 수기는 제국에게 점령당한 도시들의 거리가 무고하고 무력한 사람들의 썩은 머리로 가득했다고 묘사했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아이마저 꺼내어 무르익지 않은 머리뼈까지 창날에 꽂았다고…… 얼마나 잔혹한 참상일지 상상만 해도 분노가 치밀었다.

물론 감정을 우선해선 아니 된다. 성자와 성녀를 남기고 온 이유가 그것이다. 크세리온 제국에 맞서서 회담을 주도하는 건 세계 연합장의 몫.

로마누스가 고개를 틀었다.
베르덴이 눈짓으로 그의 발언을 허가했다.

“……크세리온 제국은 초월자 전쟁에서 인류에 유례없는 비애를 안겼습니다. 단순한 정복 전쟁에 불과했다면 세간의 평가는 달랐겠으나, 당신은 땅과 자원보다 생명을 모독하는 걸 우선했습니다. 그리고, 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를 불태워 같은 행동을 반복하려 하고 있지요.”

로마누스가 물었다.

“대체 크세리온 제국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어떤 이유로 부활까지 해 이번에는 인류를 넘어 평화로운 세상 전체를 짓밟으려고 하는 겁니까?”

아칸드의 목적성은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하나도 없었다. 아칸드의 신체 부위를 잘라 봉인한 신인들도, 초대 네크로맨서도, 고대의 초월자들도 그가 전쟁을 일으킨 연유를 알지 못했다.

아칸드가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이 회담은 서로의 이해를 확인하는 자리라고.

로마누스는 루아스 교국의 교황으로서 크세리온 제국에서 느껴지는 혐오감보다 세계 연합에 중요한 문답에 집중했다.

이는 회담장으로 향하기 전에 베르덴과 논의한 사안이었다. 로마누스만이 아니라 회담장에 참석한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갖고 있었다.

“빛의 교황다운 질문이군. 하나 우매한 의문이다. 내게 죽음의 배경을 묻는다는 것은, 시간에게 시간이 흐르는 이유에 대해 묻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리반데일 대공이 팔짱을 꼈다.

“그러니까 너는 오직 이 대륙을 멸절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뜻인가.”
“모든 건 운명이라는 뜻이다.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는 타고난 존재 의의. 초월자로 비유하자면 나에게 주어진 이상인 셈이지. 물론 그 본질은 너희와 완전히 반대지만 말이다.”
“그런 대답으로 네 무엇을 이해하란 거지?”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순수한 결과뿐.”

아칸드가 권유하듯 한 손을 내밀었다.

“그 결과는 운명 파괴자가 쥐고 있다.”
“운명 파괴자……?”
“베르덴에게?”

반젤리스는 운명 파괴자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뒤늦게 베르덴에게 눈길을 향했다.

“은하수를 연상케 하는 돌. 그걸 꺼내 보도록.”

* * *

크세리온 황성의 보물고에는 그야말로 수많은 보고로 가득했지만, 그중에서도 남다른 보물이 세 개 있었다.

드래곤의 살아 있는 심장.
은하수처럼 빛나는 돌.
어두운 수정의 구체.

아칸드의 동생인 망국의 죄인과 생전의 황금의 죄인이, 종전 이후 연합 모래 황성에 들어가 그것들을 가지고 나왔다.

황금 비고에 보관하기 위해서.
훗날 아칸드가 부활하게 되면 세계를 지원하기 위해서.

결국 기나긴 시간이 흘러 황금 비고는 개방됐다. 그리고, 세 가지 보물은 현재 최대한 활용하기 위하여 에온이 관리하는 중이었다.

엘로리스에게 그하룬을 소개하고, 또 이자벨라가 마경 토벌군단에 들어가고 싶다고 한 날에 베르덴도 심장, 돌, 구체를 직접 확인했다.

드래곤의 살아 있는 심장은 무구의 재료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으나, 그하룬도 다룬 적이 없는 소재라서 고심 중이었고.
어두운 수정의 구체는 전황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한 아티팩트로 확인되어 비장의 수단으로 분류해 놓았다.

문제는 마지막 하나였다.

‘은하수처럼 빛나는 돌은 나조차 정체를 간파할 수 없었다. 그래서 통찰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아공간에 보관해 놨는데…… 그걸 꿰뚫어 볼 줄이야. 직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 돌은 생각보다 아칸드와 밀접하게 ‘연결’된 것 같았다.
어쩌면 ‘당신’과 연관이 있을지도.

후웅.

베르덴이 굳이 숨기려 하지 않고 은하수의 돌을 소환했다.

“오랜만에 보는군.”

아칸드가 낮게 웃었다.

“설마 그 돌이 네게 들어갔을 줄은 몰랐다. 과연. 이 또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 운명의 수레바퀴로 구축되지 않은 우연한 운명이라.”

아칸드는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에서 자기 동생을 보았지만, 초대 네크로맨서가 구축한 황금 비고와 세 명의 죄인들에 대해 모르는 기색이었다.

좋은 징조다.

아칸드가 세계 연합의 총전력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뜻이니. 놈은 별격의 강함을 자랑하나 절대로 전지(全知)하지 않다.

───{사도는 ‘당신’과 운명으로 얽혀 있다는 공통점만 가지고 있을 뿐 사도 사이에 동료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목적에 충실한 개인주의자라고 할 수 있지.}

───{기본적으로 사도는 신으로부터 힘을 부여받은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이며, 그렇기에 신앙심이 깊은 신앙자에게만 해당된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지. 블러디아가 그런 경우다. 말인즉슨 외부에서 초빙한 사도인 셈이지.}

───{어떤 의미에서 성격은 비슷하다. 물론 그 본질은 용병과 차원이 다르지만. 상기한 이유로 사도 간의 연대는 약한 편이다. 운명전이 재개되면 모를까 일단 지금은 그러하다. 그래서 정보 전달이 제한적이지.}

───{직접적인 관계자 외에 세계의 틈새에서 벌어진 상황을 정확히 아는 사도는, 현재 나밖에 없다.}

호스트의 설명에 따르면 사도는 각자 목적에만 충실하기에 아르카디옴에서의 일은 아칸드에게 일절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베르덴이 우승해 드라벤의 영혼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물론 알려져도 상관은 없다. 드라벤의 마도와 이상을 이해한 내가 주검의 영광의 머리를 빼앗으려 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할 테니까.’

베르덴이 악마의 신이 되었다는 것도 아칸드는 인지하지 못했다.
블러디아도 그랬다.

‘종합적으로 정보의 우위는 내게 있다.’

아칸드가 죽음을 극복했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베르덴은 누구든 파멸시킬 수 있다.

베르덴은 아칸드의 제국을 뿌리부터 무너뜨리는 상상을 하며 은하수의 돌을 테이블에 올렸다. 그러곤 그걸 손으로 가리켰다.

“이게 무엇이지?”
“묵시록(默示錄).”

아칸드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로 인한 너희의 미래다.”

두근.

여섯 번째 사도의 권능이 맥동했다.

돌에 깃든 은하수가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빠르게 물감처럼 바깥으로 번졌다. 리반데일 대공, 로마누스, 반젤리스, 아드리안이 즉각 반응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베르덴이 인근 정찰을 맡겼던 이들까지 바람과 번개처럼 합세했다.

그야말로 찰나.

쿵.

주검의 영광의 초월자들 세 명이 반젤리스와 로마누스와 대립했다.
전쟁의 언데드는 아드리안과 서로 서슬퍼런 검을 겨누었고, 기근의 언데드는 리반데일 대공과 기세를 부딪쳤다.
역병의 언데드와 죽음의 언데드는 반토레온과 수왕 안티아스를 다섯 발자국을 사이에 두고 시선을 교차했다.

베르덴이 말한 대로 주변에 눈여겨볼 만한 것이 있는지 확인하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대기하고 있던 안티아스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상정 이상으로 질 좋은 사냥감들이군. 여기서 끝장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하지만 내가 아는 아칸드라면 그렇게 시시하게 끝낼 리 없네.”

반토레온이 7위계였을 때 다른 초월자들과 함께 상대했던 아칸드를 흘겨보면서 호승심으로 얼룩진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나?”
“반토레온 로든 타라니스.”

아칸드도 마주 입가를 끌어 올리고는 베르덴에게 다시 시선을 향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죽음은 없다. 지금도. 하니, 경계하지 마라.”

이윽고 은하수가 주변을 에워쌌다.

“그저 세계의 미래를 엿볼 뿐이다.”

어둠에 수놓인 별들이 반짝이더니 곧 안개처럼 걷혔다. 은하수가 사라졌다.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황야의 절벽이 아닌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알파가 외눈을 빛냈다.

[멸망한 세계?]

은하수의 돌에서 비롯된 환상계는 뭐라 부연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도 없다. 생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어느 대륙의 일면.
그것은 멸망한 세계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너희의 세상이다.”

아칸드가 가볍게 손짓했다. 미래의 환상이 다시 은하수로 뒤덮이더니 직전과는 다른 또다른 세상을 비추었다.

“그리고, 이것은 저항을 포기하고 나에게 굴복한 너희의 세계지.”

죽음이 생명을 착취한다. 꺼져 가는 생명을 겨우 잡은 인간들이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죽은 자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다.
끔찍했으나 아까보다는 나았다.
그래도 살아 있으니까.

“이렇듯 너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다.”

아칸드가 운명 파괴자를 직시했다.

“네 선택은 무엇이냐, 베르덴.”
“세 번째.”

콰과과과과과과!

베르덴이 일으킨 파멸이 은하수가 보여준 환상을 부수었다. 현실의 풍경이 돌아왔다. 베르덴이 8위계 초월자로서 온전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전쟁, 그리고 승리.”
“그렇다면.”

아칸드가 몸을 일으켰다.

“전쟁을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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