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0화 피의 무게 (1)
우우웅…….
베르덴이 손을 대자 장막의 표면에 미세한 파동이 일렁거렸다.
마도로 구현한 고유의 장막.
‘모든 계(界)의 이동이 차단됐다.’
공간을 무너뜨린다 해도 넘어갈 수 없다. 사차원을 경유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강력한 마법적 결계는 처음이었다.
아예 부수려면 파멸의 마도를 개방해야 하는 것도 문제지만, 당장 부숴도 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특히 문제였다.
그랬다가 데우스 일행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되면 크나큰 낭패일 테니.
전장에 도착했지만 정보가 부재해 강제로 개입하기 어려운 상황…… 베르덴이 즉각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한정됐다.
기다리거나, 또는 강행하거나.
베르덴 역시 쉽게 선택을 내릴 수 없었지만 전장의 급변이 그를 부추겼다.
“연방이…….”
사고를 일부 할당하고 있는 이그나시아의 정신체에 집중했다. 7위계 정신체를 통해서 테르네티아 연방의 전장이 훤히 보였다.
피와 땀으로 목욕을 한 딘엘 왕국의 어느 기사가 소리쳤다.
───연합장님!!! 저 사문을 보십시오!!!
테르네티아 연방 사문의 형태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눈에 보일 정도의 속도로 규모가 축소되고 있다.
사문이 폐쇄 절차에 돌입했다!
‘역시 아드리안.’
승전보가 속히 전달되며 군단의 함성이 언데드의 절규를 압도했다. 그러던 도중 언데드가 전반적으로 멈칫거리거나 삐걱거렸다.
세렌디아가 미간을 좁혔다.
───흐름이 기이합니다, 베르덴.
그로부터 짧은 시간이 흐르고 언데드들이 일제히 같은 기행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연방의 토벌군단들이 당혹감에 휩싸였다.
───뭐, 뭐야, 이거?
───언데드가 후퇴를……?
치열한 전선에서 언데드가 먼저 물러났다. 사문의 근원체가 파괴된 영향인가 싶어 활기가 일었지만 곧 흉보가 귀에 꽂혔다.
전장을 넓게 주시하며 군단의 지휘관들에게 전황을 전달하던 정보원들이 소리쳤다.
───북상! 언데드가 북상합니다! 모든 언데드가 북쪽으로 향합니다!
───이런 미친……!!
베르덴을 위시한 토벌군단이 필사적으로 사문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 냈던 초대규모 언데드 군단이 북쪽으로 급속 진군했다.
크세리온 제국이 근원체가 사라진 사문을 버렸다.
델하룬의 사문을 자폭시킨 것과 다르면서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테르네티아 연방의 위치는 중앙 대륙의 최남단.
언데드가 향하는 북쪽에 딘엘 왕국, 벨마이르 왕국, 중부 수인 부족, 그리고 주인 없는 땅 등등 중앙 대륙의 중추가 존재한다.
그대로 노출되면 연합의 결속력이 흔들릴 정도의 큰 피해가 속출할 것이다.
비행정 함대와 마력 입자포로 경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지만 수가 너무도 많았다.
판자 몇 개로 해일을 막을 수 없다.
북쪽에 설치해 놓은 일부 마력 입자포 진지를 향해 죽음이 물결쳤다.
에온의 마법사들이 벗어나자마자 마력 입자포들이 휩쓸려 파괴되었다. 언데드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크게 관심도 없다는 듯 북쪽만을 고집했다.
───콰과과과과과광!! 콰과과광!!!
───우리는 저 시체 놈들을 추격한다. 하나라도 더 줄여! 발목이라도 붙잡아!
기동력을 갖춘 부대들이 언데드를 쫓으며 토벌을 거듭했지만 그런 식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면 우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르보르의 생목조차도 군단의 일부를 옭아매는 게 고작이었다.
처음부터 테르네티아 연방의 사문 공략이 가능했던 이유는, 크세리온 제국의 언데드들이 사문을 중심으로 집결했기 때문이다.
언데드 군단이 사문에서 일정 거리 이상 벗어나지 않았기에, 세계 연합은 사방에서, 그리고 장거리에서 일방적인 공세를 펼쳐 놈들의 방어 진형에 틈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유리한 구도가 지금 깨졌다.
언데드는 북쪽으로 전진하면서 행과 열을 갖추지 않았다. 방향만 같을 뿐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다분히 계획적이다. 아칸드는 패배를 염두에 두고 있었어.’
차라리 전면전을 벌였다면 효과적으로 숫자를 줄일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연합군을 등지니 전투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헤집어도 파도를 당길 수 없듯이.
규모에서 밀리는 연합의 토벌군단으로는 저 진군을 결코 저지할 수 없다. 초월자가 몇 명이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딘엘 왕국의 방어선으로는 버틸 수 없다.’
백만 단위의 언데드가 넘어가면 세계 연합의 방어 전선은 순차적으로 무너질 터.
즉각 중앙 대륙의 총력을 기울여야 했지만, 임무를 마치고 이제 사문을 탈출하고 있는 아드리안의 본대도 지원해야 했다.
제국의 한 수로 인해 상황이 긴박해졌다.
“…….”
7위계급 정신체를 조종하고 있던 베르덴의 본체가 눈을 떴다.
역시나 마냥 기다릴 수 없다.
전장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대응에 나서야 하고, 그건 사룡과의 전투가 어떻게 되었는지 명확히 알아야 결정할 수 있다.
‘돌입한다.’
베르덴이 마법적 이해력을 최대로 발휘하며 마도의 장막에 집중했다.
다름 아닌 데우스가 개척한 마도 일부를 해석하는 것은 베르덴에게도 가장 어려운 작업 중 하나로 꼽힐 터였지만…….
그나마 다행히도 눈앞의 고유 마법은 ‘마법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 * *
바다는 물의 순환을 일으켜 온 대륙에 여러 생명의 싹을 틔우고, 그렇게 떨어지는 비는 열을 식히며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을 보듬으니.
지식인들은 생명의 개념을 넘어서 지성의 원천으로 물을 지목한다.
투두둑…….
살아 있는 것의 수분이 부패했다. 체내에서 흐르며 지성을 유지시키는 그것이 극독이 되어 도리어 생명을 앗아 갔다.
초월자들의 존재감에 덮여 살랑거리던 풀과 나무가 그 자리에서 썩었다.
고인 물은 불길한 암녹색의 빛으로 물들었고, 지하 깊은 곳에 축적되어 있던 오래된 지하수마저도 곧 변질되었다.
벌레가 들끓었다.
생기(生氣)의 요람이 타락하니 뒤틀린 생명들이 이 땅에 강림했다.
환경에 따른 진화와 퇴화의 과정을 무시해 버린, 효율적이면서도 비효율적인 모순적인 외형과 기능을 가진 것들이 태어났다.
숱한 공방에 초토화되고, 또 붕괴되고 있는 마렌 왕국의 평야는 더 이상 이전의 풍경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때 힘의 파장이 그들의 영역을 강타했다.
데우스 위덴이 어디서도 듣도 보도 못한 무기술로 절도 있게 몰아쳤다.
드래곤의 발톱과 스태프가 서로 부딪쳤는데 둘이 동시에 밀려났고, 데우스는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지 않은 채 접근전을 유도했다.
섣불리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매서운 공세 속에서 마력이 번뜩이는 순간.
쩌엉─────!
보이지 않는 충격파가 작렬해 네크바엘의 머리가 크게 들렸다. 신경질적으로 이빨이 맞물리는 소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살벌한 안광을 번뜩이며 녀석이 휘두른 양 날개와 꼬리가 허공을 갈랐다.
‘믿기지 않는군. 그 레프라기움 마탑주가 이렇게나 대담한 면모를 갖고 있었다니.’
저만한 거체를 정면으로, 심지어 근접전에서 무려 박빙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인드렌으로 하여금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전투법이 왜인지 베르덴이나 반젤리스와 흡사한 듯한…… 아니, 쓸데없는 생각이야.’
인드렌이 냉큼 상념을 지우고 네크바엘의 움직임에 간섭했다. 우드득. 직전 포효로 어긋난 어깨와 부러진 팔뼈를 억지로 맞추었다.
반토레온과 안데스는 놈의 좌우에서 날아들면서 데우스를 보조했다.
<사령의 숨결>
안데스가 마도를 기반으로 한 고유 브레스를 토해 드래곤의 영혼에 피해를 입혔고, 그 순간 초월자들이 각자의 연산을 끝마쳤다.
데우스, 인드렌, 반토레온이 서로 다른 방위에서 팔을 내뻗었다.
마도의 광채로 뒤덮인 시야.
<연리의 수조>로 사방이 틀어막힌 평야의 중심이 궤멸해 가라앉았다.
[…….]
오랫동안 현대 마법계의 정점에 자리했던 마탑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고도의 연계는 고룡이라고 해도 쉽사리 압도하지 못했다.
드래곤이 초월종이라면 그들은 종의 한계를 극복한 초월자들이다.
콰과과과과과광! 콰과과과광!
멈추지 않고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 너머에서 곧 마법들이 날아들었다.
날개로 방어하던 네크바엘이 숨을 짧게 들이켰다.
“……!”
암녹색의 광선이 순식간에 지상을 휩쓸었다. 이내 장벽처럼 솟은 죽음의 기운이 초월자들과 네크바엘의 사이를 일시적으로 갈랐다.
그리고.
쿠오오오오오…….
사룡 네크바엘이 한 팔을 펼쳤다.
거대하고도 날카로운 손아귀에서 심상치 않은 와류(渦流)가 몰아쳤다.
옛 왕과 다른 종류의, 그러나 한없이 순수한 죽음의 기운이 파동을 퍼뜨리며 공간을 오염시키더니 찰나에 거창의 형태로 변화했다.
어두운 에메랄드빛이 기괴하게 뒤섞인 창신에서는 끈적한 기포가 끓어올랐고, 창끝에서 떨어지는 독액에 노출된 공기는 검게 타들어 갔다.
네크바엘이 몸을 비틀었다.
[익투스 베쉬마(Iktuth Veshma).]
드래곤의 일부만이 본능적으로 체득하는 용언(龍言)이 평야에 내리꽂혔다.
대지의 균열에서 간헐천처럼 뿜어져 나온 암녹색의 지하수가 사방을 덮쳤다.
맹독의 해일 속에서 수만 마리의 뱀이 찢겨 죽는 것 같은 파열음이 메아리쳤다.
세계가 그와 같은 색으로 물들었으며.
바람마저 중독돼 질식했고, 더러운 호수가 일대를 아우르며 평야의 약 4할이 삶을 허락하지 않는 불모의 공간으로 전락했다.
“저것이 용의 언어……!”
인드렌은 마도를 전력으로 개방하며 급상승하다가 숨이 턱 막혔다.
두근.
심장이 발작했다.
‘장막이 한순간에 부식됐다. 공기에 스치듯이 닿은 것만으로도 중독되는가. 이대로 독이 뇌까지 전해지면 돌이킬 수 없을 터.’
“큽…….”
인드렌은 피가 역류하며 내장이 뒤집어지는 고통에 휩싸였지만, 이보다 훨씬 더 심한 격통을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에서 이미 느껴 보았다.
검붉은 마력을 몸속에서 추출했던 경험을 살렸다.
피부를 통해 흡수된 맹독을 몰아내곤 핏물과 함께 뱉어 낸 뒤, 호흡을 갈무리할 틈도 없이 제유의 마도를 집중해 지팡이를 강하게 휘둘렀다.
<편경(偏徑)>
불모의 땅에서 역으로 쏟아지는 물방울들의 궤도가 극미하게 비틀렸다. 소나기를 일일이 쳐 내는 연산력에 머리가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미처 비껴 내지 못한 것은 안데스가 직접 온몸으로 차단했다.
둘이 출혈을 감내하며 만든 틈새, 반토레온은 곧장 벼락처럼 파고들며 뇌경의 영역에서 뇌(雷)의 정수를 불러들였다.
천공의 우레가 반토레온을 강타했다.
맹독은 타올라 중화됐다.
정뢰의 마도가 장기만이 아니라 핏줄까지 뻗어 나가 전신을 마력회로로 삼았다. 그렇게 극한까지 끌어올린 출력을 한데 모으기까지.
“그 비늘로 이것도 견딜 수 있겠느냐!!!”
산화의 공도(共倒).
<뇌림>
초위 마법을 시전한 반토레온이 푸른 빛살이 되어 네크바엘에게 쇄도하니.
────────────!
지평선이 광명으로 물들었다.
장대한 폭음과 후폭풍이 뒤늦게 이어졌다.
많은 번개 줄기가 요동쳤다. 반토레온이 자랑하는 벼락 특유의 고열에 대기에 아지랑이가 생겼고, 물은 기화했으며, 땅은 벌겋게 물들었다.
이를 직시한 것만으로도 시신경이 불타 버릴 수준의 경이로운 파괴력이 확산했다.
데우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투확!
스태프에서 사출된 한 줄기 광선이 사룡을 강하게 타격했다. 아예 꿰뚫지는 못했지만, 반토레온에 의해 손상된 비늘은 확실히 깨졌다.
암녹색의 핏방울이 천천히 떨어져 이미 죽은 지면을 깊게 녹였다.
고룡이 피를 흘렸다.
다른 이들은 가능성을 보았지만, 데우스는 보다 경계심을 높였다. 드래곤은 상처 입었을 때가 특히나 위험하므로.
[그래…….]
넘실거리는 어두운 안개.
[대우해 주마.]
네크바엘은 대륙 공용어로 해석할 수 없는 언어를 외기 시작했다.
사룡의 용언이었다.
무엇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어 일단 거리를 벌리며 태세를 정비하려고 하자……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인드렌이 눈을 부릅떴다.
“저건 설마.”
[시타델…….]
크세리온 제국의 새로운 황성인 시타델이 공간을 넘어 강림했다. 그건 천리의 마도로 펼친 장막을 어떤 저항도 없이 통과했다.
데우스는 생각했다.
‘적당한 때에 도착했군.’
이미 예상한 바였기에 무표정한 겉모습만큼이나 동요는 없었다.
네크바엘과의 전투가 조금 더 길어졌다면 애매하게 밑천을 드러내야 했겠지만, 그러지 않게 됐으니 그가 바라는 흐름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여섯 번째 사도는 이 땅에 내려올 일은 없다. 시타델은 네크바엘을 회수하고 다시 전선에서 멀리 떨어질 것이다.
아칸드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해하고 있기에 그렇게 확신했다.
데우스가 본격적으로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 주의를 끌려던 순간 멈칫했다.
‘<연리의 수조>에 누군가가 간섭했다.’
시타델이 네크바엘과 연결된 운명적 인과로 통과한 것과는 달리 그의 고유 마법 자체가 멋대로 개조당한 것 같은 감각이 작용했다.
이런 마법적인 이적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는 그가 알기로 두 명밖에 없었다.
* * *
마법진의 특성을 보유한 마도의 장막 일부를 여러 파편으로 세분화한 다음 층을 나누었다. 절반의 층은 그대로 남겨 폐쇄를 유지하고, 남은 절반의 층은 넓게 확장시켜 베르덴 자신을 에워쌌다.
한쪽 문이 닫힌 채 한쪽 문이 열렸다.
‘그리고 복구와 개방.’
베르덴을 둘러싸고 있는 층을 원래대로 되돌려서 폐쇄를 대신하게 하고, 폐쇄를 유지하고 있던 절반의 층은 개방했다.
열린 문이 닫히고, 닫힌 문이 열렸다.
그 결과 폐쇄를 유지한 채 층과 층 사이에 있던 베르덴이 장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손상과 변화 없이 파훼한 것이니 이로 인해서 내부에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을 터.
베르덴이 곧장 넓은 평야를 가로질렀다.
‘찾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범위한 전투의 흔적이 보였고, 네크바엘과 네크바엘을 상대하고 있는 초월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크세리온 제국의 시타델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