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1화 피의 무게 (2)
‘시타델이 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사고를 가속했다.
시타델의 언데드 전력에 더해 아칸드와 네크바엘을 상대할 수 있는지 계산했다. 지금 당장 불러올 수 있는 전력을 전부 투입한다면 대립할 수는 있겠으나 승산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기에 선을 그어야 했다.
시타델과 충돌하게 되면 그것은 사실상 결전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전쟁의 명운을 걸기에는 일러도 너무 일렀다.
‘그래, 일단 상황 파악부터.’
베르덴은 존재감을 은폐한 채로 데우스에게 의념을 보냈다.
네크바엘은 초월자들 너머로 시타델을 불쾌한 듯 응시하고 있었다. 베르덴의 기척을 알아차린 기색은 전혀 없었다.
───왜 시타델이 이곳에 있는 거냐.
───네가 마렌 왕국으로 온 걸 보면 다른 전장에 여유가 생겼나 보군. 어느 사문이 폐쇄됐지?
데우스는 대답 대신 질문으로 돌려줬지만 베르덴은 군말 없이 전황을 공유했다. 네크바엘의 영향력 때문에 통신이 연결되지 않아 정보가 부재할 테니.
───펜드렌 호수. 그리고 최근에는 테르네티아 연방.
───사령관은.
───제4사령관의 토벌 여부는 끝끝내 확인되지 않았으나, 펜드렌 호수의 사문 폐쇄로 그 내부에 갇힌 채 사라졌고. 제9사령관과 제2사령관은 아드리안이 지휘한 군단이 테르네티아 연방의 사문에서 확실히 처리했다.
데우스는 내심 미간을 좁혔다.
‘그 권속들을?’
직접 상대해 본 적은 없었지만, 여섯 번째 사도를 보좌하는 묵시록의 언데드의 위험성을 세계 연합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직 여섯 번째 사도의 ‘목적’을 이루는 데 쓰이는, 그로부터 각각 권능을 하사받아 오직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개체들.
경지를 넘어 ‘당신’으로부터 파생된 권능을 다루는 하인들.
제4사령관의 권능은 상성이 맞지 않는 존재가 감히 접근할 수도 없고.
제2사령관의 권능은 홀로 연합의 토벌군단 하나를 완전히 궤멸시킬 수 있다.
세계 연합에서 비대칭 전력으로 분류했듯이 연합의 비대칭 전력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큰 피해를 감수해도 맞서는 것조차 어렵다.
묵시록의 권능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으면 조금은 선전할 수 있을 터였지만, 데우스는 선택의 여지 없이 함구해야만 했다.
그들의 권능을 설명하려면 필연적으로 여섯 번째 사도의 목적을 발설해야 하고.
그것은 금기에 저촉되는 일이므로.
‘베르덴은 사문에 진입할 수 없다. 지금은 연합의 비대칭 전력 중 어느 누구도 두 사문에 합류할 상황이 아니었을 텐데. 다른 변수가 있었던 건가.’
펜드렌호 토벌군단장은 테아렐이다. 제4사령관은 상성에서 테아렐을 압도하므로 다수라고 해도 장시간 버틸 수 없다.
테르네티아 연방 토벌군단장은 아드리안. 아무리 제2사령관이 역병을 퍼뜨리면 약화되는 약점을 갖고 있다고 해도, 아드리안과 레온하르트가 오래 맞설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적어도 그 둘에게서 승전 가능성을 보려면 비대칭 전력에 준하는 강자가 맨 앞에 서서 흐름을 주도해야 했을 텐데…….
‘그러나, 결국 승리는 승리.’
승리 배경은 나중에 따져도 늦지 않다.
세계 연합이 가용할 전력은 크게 손실되었겠지만, 그 대가로 사문과 권속을 둘이나 처리했으니 대승이라 평가해도 좋으리라.
제3사령관은 동대륙 남부에 있는 이상 깊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가 진심으로 의식하는 것은 정해져 있다.
여섯 번째 사도, 네크바엘, 제1사령관……그리고 크세리온 제국에 속하지 않아 옛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운명의 하수인들.
데우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계획은 이 중에서 여섯 번째 사도와 네크바엘만 남는 순간 실행된다. 그리고 그 준비는 지금 시타델을 불러냄으로써 이미 절반은 끝난 셈이다.
베르덴이 의념을 이었다.
───그런데 테르네티아 연방의 사문이 폐쇄되자 근방의 모든 언데드가 북상하기 시작했다. 토벌군단의 남은 역량만으로 추적해서 저지하는 건 불가능. 이걸 그대로 방치하면 방어선은 차례대로 무너지겠지.
───그렇다면 언데드를 앞질러 전선을 새로이 정비하는 수가 유일하겠군. 아직 7대 마도왕이 공간을 안정화시키지 못했는데, 판단은 섰나?
───……그래.
베르덴은 대대적인 결정을 내려야 했다.
───셧다운을 감수할 수밖에.
* * *
테르네티아 연방의 사문이 성공적으로 폐쇄됐다.
언데드 정예군은 빠져나오지 못했고 아드리안은 살아남았다. 그렇게 베르덴(정신체)과 짧게 회포를 풀었지만 시간은 그들을 풀어주지 않았다.
“주군, 한데 이곳의 언데드는…….”
“갑자기 북쪽으로 향했다.”
베르덴은 아드리안에게 의념을 보내며 주변에 모인 지휘관들에게 전달했다.
“서둘러 막지 않으면 최소 중앙 대륙의 3할 이상이 초토화되겠지.”
───마렌 왕국에 사룡만이 아니라 시타델까지 현현했다. 더 이상 이 정신체를 유지할 여유가 없을 것 같군.
“테르네티아 토벌군단은 최대 규모의 공간 이동으로 복귀해 중앙 대륙의 군대와 함께 방어선을 구축한다.”
───여력이 되면 통신을 연결하마.
“이제부터 셧다운에 돌입한다.”
반젤리스의 동력원으로 애써 유지하고 있는 공간 안정은 한계가 임박했다.
이 와중에 대규모 공간 이동을 발동하면 동력원은 정지할 것이고, 공간 정전이 발생하여 모든 대륙에서 정상적인 <전이>가 불가능해진다.
크세리온 제국도 처지는 동일하다. 제국은 연합이 안정시킨 공간 좌표를 이용해 다른 방식의 <전이>를 활용하고 있다.
양측 다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없는 사태.
그것을 셧다운(Shutdown)이라고 명명했다.
화아아아아악!
베르덴은 정신체에 남아 있는 순수한 마력을 전부 끌어모았다. 정신체가 소지하고 있던 아티팩트 등은 미리 세렌디아에게 넘겼다.
무한의 마도로 공간 이동 마법진의 거대한 기틀을 작성하며 통신 장치를 연결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만한 규모로 공간에 충격을 가하면 한순간에 임계치를 돌파하는 거니 여파가 매우 심할 거예요. 공간이 어떤 식으로 왜곡될지는…… 아예 계산이 불가능한 영역에 있어요, 오라버니.
메드레일의 우려는 알고 있지만 감행하지 않으면 연합은 의의를 잃어버린다. 위험할지언정 지켜야 할 것은 지키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반젤리스에게 더 서둘러 달라고 전해 주도록.”
통신 채널을 변경했다.
거대한 공간 마법진이 작성되어 보랏빛이 진하게 명멸했다. 기틀은 거의 구축됐다. 나머지는 에온 소속 마법사들이나 공간 마법진에 해박한 고위 마법사들이 완성할 것이다.
한꺼번에 최대한 많은 인원과 병기를 이동시키려면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래도 기반은 완벽하니 시간이 크게 소요되지는 않을 터였다.
“알파, 베타. 방어는 맡기마.”
───확인.
───확인했습니다.
녀석들의 씩씩한 대답을 듣자마자 통신 장치를 벗어 메르퀴엔에게 던졌다. 이로써 정신체는 어떤 물건도 갖고 있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마법진의 토대가 준비됐다.
보랏빛이 발광했다.
베르덴은 그 빛에 휩싸였다. 정신체를 더는 유지할 수 없어 사라지는 과정이었지만,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공간을 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 전장에서 우리는 한층 더 승리에 가까워졌다. 그러니 스스로를 의심하지 마라.”
베르덴이 군단 전체를 향해 말했다.
“나는 다른 전선으로 이동하겠다.”
아드리안이 부상으로 힘겨운 상태에서도 어렵게 예를 갖추었다.
“추후에 뵙겠습니다, 주군.”
“추후에 뵙겠습니다!”
앉아 있든 서 있든 정신을 차리고 있는 연합군이 일제히 경의를 표했다. 연합장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이들 중에서 진심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베르덴은 그들을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파아아아앗…….
한계에 다다른 정신체는 <전이>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소멸했다.
펜드렌 호수와 테르네티아 연방에 동시에 아우르는 베르덴의 기만책은 두 사문 폐쇄와 사령관의 토벌에 기여하며 고요히 끝을 맺었다.
* * *
파앗.
정신체에 할당한 사고력이 돌아오면서 베르덴의 머리가 맑아졌다.
병렬 사고는 특기였기에 별다른 불편함은 없었지만 그래도 역시 본체 하나에만 집중하니 편안하다는 느낌이 확 들았다.
───셧다운은 이르면 32분, 늦어도 1시간 21분 이내에 돌입할 거다. 그보다 어째서 시타델이 이곳에 있는지 대답을 아직 못 들었는데.
───네크바엘을 회수하러 왔다.
───아칸드는 보이지 않는군.
───아칸드는 내려오지 않는다.
베르덴은 그 확신의 근거가 무엇일지 생각하면서 턱을 당겼다.
───뭔가 계획이 있군.
───셧다운이 시작될 때까지 네크바엘을 붙잡는 것. 필요한 건 시간이다.
데우스가 묘한 수를 준비하고 있다. 말하는 걸 보아 상당한 계책을 마련한 듯했다. 베르덴은 당연히 그를 돕기로 결정했다.
데우스는 속내를 거의 드러내지 않지만, 이럴 때는 믿을 수 있다. 최초의 위계 마법사. 그는 초대 마도왕과 어쩌면 가장 가까운 저항자이므로.
베르덴이 [인테리스]를 다잡았다.
───선두는 내가 맡지.
즉각 <비행> 속도를 높였다. <베일>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네크바엘이 반응했다.
허공을 노려보던 놈의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한층 더 두드러졌다.
[파괴자.]
네크바엘이 거침없이 포효했다. 무형의 충격파가 사방을 뒤엎었다.
베르덴은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돌진했다.
<차원 전이>
연속적으로 사차원을 넘나들면서 드래곤 로어에서 벗어났다. 스태프와 함께 회전을 거듭하면서, 흑염의 창날이 형성하여 어두운 잔상을 남겼다.
네크바엘의 영역으로 제 발로 들어간 베르덴이 이내 스태프로 그를 겨누었다.
드래곤의 발톱이 들이닥쳤다.
심장이 박동했다.
망화의 마도가 증폭했다.
<무관(無貫)>
거대한 암흑의 섬광이 뻗어나가 네크바엘의 전신을 집어삼켰으니.
소멸의 창이 작렬했다.
콰아아아아아아─────────!
개전 마법과 델하룬 사문 폐쇄를 거쳐, 이제야 베르덴은 분신도 위장도 없이 본모습으로 진정 전선에 복귀했다.
* * *
베르덴은 제4사령관을 상대하기 위해 네르가를 탄생시키는 과정에서 마안을 크게 할애한 터라, 지금 마안의 즉발성에 기댈 수 없었다.
그럼에도 마법의 시전 속도는 사실상 거의 다르지 않았다. 압도적인 연산력이 기계 이상으로 마법들을 찍어 냈기에.
천지가 격동했다.
베르덴의 무한한 마법 폭격에 이어 데우스의 고유 마법이 가해졌다.
지면이 가라앉은 광경이 눈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초위 마법의 반동을 제법 회복한 반토레온이 신이 난 듯 번개의 폭우를 떨어뜨리고, 안데스는 드래곤의 특성을 이용해 공세에 가세했다.
네크바엘은 용언을 발동했다.
지상은 무지막지한 폭음과 굉음으로 얼룩져 지진이 멈추지 않았다.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영역이 쩍 갈라지는 것이 훤히 보였다.
하늘섬 시타델은 서서히 네크바엘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짓을 벌일 것 같은 음험함을 풍기면서 말이다.
시타델 내부에 도사린 수많은 언데드가 움직이려 했다.
탁.
그 시타델에 펠디안느가 몰래 올라탔다.
‘잠입 성공했군요.’
언데드는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마도 시타델의 주인조차도. 펠디안느는 아티팩트의 힘을 빌려 시타델 내부 도심으로 진입했다.
그런 펠디안느를 뒤따르는 초월자가 한 명 있었다.
‘대체 뭘 하려는 게냐, 펠디안느……!’
우연히 혼자서 시타델로 향하는 펠디안느를 포착한 인드렌이었다. 후손이 무슨 미친 짓을 벌이려는지 알 수 없지만 좌시할 수 없었다.
인드렌은 고대 아티팩트의 힘을 빌려 펠디안느의 발자취를 몰래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