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2화 피의 무게 (3)
아드리안은 여러 포션으로 겨우 출혈을 잡고 상처 부위를 붕대로 감았다. 치유의 기적이 통하지 않기에 성직자들은 기본적으로 배우는 물리적인 치료법을 적용했다.
‘어, 어떻게 이런 몸으로 살아 있는 거지?’
큼지막한 칼자국만 십수 개. 자잘한 것까지 합치면 그 몇 배는 더 많다. 이렇게 예리하고 무거운 검흔은 본 적이 없었다.
특히 옆구리의 관통상이 심각했다. 깊게 관찰하지 않아도 장기가 손상됐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위험한 급소는 아니어도 보통 사람이라면 진즉에 즉사하고도 남을 수준──
“이건…… 봉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냥 덮어.”
아드리안은 상자 위에 앉은 채 공간 이동 마법진이 작성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기절하기는커녕 꿋꿋이 의식을 유지했다.
장기가 뜯겨 나간 건 사실상 신체 일부가 손실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자연 치유만으로 복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초월자의 항상성은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능력임이 분명하리라.
그러나 성직자는 초월적인 몸보다, 고통을 따위로 치부하고 군단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는 그의 굴강한 정신력이 경이로웠다.
“대규모 <전이>까지 얼마나 남았지?”
“진행 과정을 보아하니 늦어도 대략 50분 안팎일 겁니다, 아드리안 님.”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모든 마법진은 기반의 구축이 가장 어렵습니다. 시작이 8할이라고도 하죠. 공간계는 더욱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그걸 완벽히 잡아 주셨기에 그 이상이고, 여기에 마법진 전문가 수십 명이 붙었으니 이 정도 속도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멜라드의 제자인 에단이 대대적인 마법진의 구축 과정을 보며 해설했다. 레베카는 마법진 숙련도가 꽤 높아 현장을 지원했다.
그들은 사문의 근원체를 폭파하는 임무를 달성하고 언데드 군단의 이목을 끌어서 아드리안을 구출하는 데 기여했다.
몰골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부상은 크지 않았다.
“제법 머리가 컸군. 예전에 비하면.”
“아무래도 미들로스 자치령에서 아드리안 님에게 죽을 뻔했을 때보다 크기는 했죠.”
당시 아드리안은 발로크의 강제 마법진 <콜전>에 조종당한 상태였다.
돌이켜보니 세월의 변화가 느껴졌다.
‘그래도 이 공간 마법진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돼 있다. 주군의 공간 이동진이어도 [아인베르]의 <게이트>가 아닌 이상 이만한 숫자를 한꺼번에 집단 <전이>시키는 건 불가능해.’
일반적인 복귀였다면 중상자들을 우선해서 보내야 하나, 이곳의 토벌군단은 다시 방어선 구축에 투입될 예정이다.
병기들을 우선해서 옮겨야 한다.
다음은 루아스 교국의 성직자들, 그 다음은 군단의 정예병, 그다음은 일반병. 요양이 필요한 이들은 일부 전력과 함께 남겨 둘 것이다.
테르네티아 연방의 언데드들이 대부분 북상했다면 이곳이 되레 가장 안전하다. 근처 언데드가 점령했던 도시 중 하나는 주둔지로서 이미 확보했다.
후웅.
노인이 마법진 위를 거닐었다.
“이 지점은 제가 조율하지요.”
“알겠소, 교장. 나는 저쪽을 맡지.”
일마리온은 이 대규모 공간 마법진 작성의 총괄을 담당했다. 아카데미 교장으로서 장기간 재직하고 있는 만큼 그는 다양한 지식에 해박했으니, 지식이 수준을 좌우하는 마법진 분야에서도 과연 최상위권의 역량을 자랑했다.
사문의 바깥에서 일마리온이 얼마나 많은 언데드를 흙으로 돌려보냈는지 봤던 사람들은 교육자의 강함을 진정 이해했다.
붉은 화산 클랜장 – 아르쿨이 드워프 특유의 짧은 보폭으로 아드리안에게 다가왔다.
“말만 하면 저 공성 병기들은 즉각 저 마법진 위로 옮길 수 있도록 해놨소. 그런데…… 방어선이 밀린다면 어디까지 밀릴 거라고 예상하시오?”
“주인 없는 땅. 그곳이 놈들의 한계선이다.”
크세리온 제국이 주인 없는 땅을 모조리 짓밟고 그 위를 넘볼 미래는 없다. 그리 말하는 아드리안은 아주 지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귀기가 서렸다.
“흠…….”
아르쿨이 수염을 쓸었다.
만약 주인 없는 땅으로 간다면 그하룬과 조우하게 되는 것인가.
이미 갈라섰지만 클랜들에서 양산한 공성 병기를 보고 대체 뭐라고 할지 뭔가 궁금하기도 했고, 골치가 아프기도 했다.
지금도 화산 지대에서 장인의 특색 따위 없는 도구 양산을 반대하는 정통파 드워프들이 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통이었다.
아르쿨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아드리안은 살짝 고개를 틀었다.
“대충 40분 뒤에 출발한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서 좋군.”
트리톤 마르투스는 상위 주교에게 치유를 받자마자 다른 스태프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본래 갖고 다니던 스태프는 부러졌다.
장차 헬리온 마탑을 이을 첫 번째 제자를 비롯하여 세 명의 장로와 마법사들은 그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라크디온에게 살해당했다.
“유감을 표하지.”
“전쟁터가 주요 사업 도구인 헬리온 마탑에는 이런 격언이 있지.”
죽고 죽이는 광경은 전쟁의 무게요, 그것은 피의 양을 재는 일이니. 전쟁은 누가 더 많은 피의 무게를 짊어지느냐를 겨루는 것이다.
“보다시피 내 어깨는 충분히 무겁소.”
트리톤은 그저 가만히 공간 이동진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니 그 무게만큼 되갚아줄 뿐이오.”
* * *
시타델의 풍경은 역사 속 제국의 수도를 옮겨 놓은 듯했다. 현대 인류의 도시와 비슷해 눈에 익으면서도 건축 양식 등이 달라 낯설었다.
[그으으으…….]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 기괴한 언데드가 비틀거리며 거리를 거닌다.
하늘은 탁 트여 있었으나 도심은 칙칙했다.
어두운 적막 속에서 죽음에서 태어난 이형종들의 울음소리만이 들려왔다.
‘발각되면 뼈도 못 추리겠어.’
인드렌이 새롭게 귀에 착용한 귀걸이가 소리 없이 흔들렸다.
[바르체의 묵음(默音)].
착용자의 반경 2미터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진동을 강제로 억류하고, 소리의 형태를 바꾸어 거울과 같은 차폐막을 형성해 모습과 기척을 은폐하는──아티슨 마탑의 보물 중 하나였다.
고대 아티팩트의 힘을 빌리고 있음에도 인드렌은 최대한 몸을 숨기며 이동했다.
초월자라고 유세를 떨 때가 아니었다.
저렇게나 많은 기형적 언데드에게 포위당하게 되면 시타델에서 탈출할 수 없다.
‘여긴 당장 옛 왕이 있을지도 모르는…… 크세리온 제국의 본진.
펠디안느가 무엇을 위해서 혼란을 틈타 시타델에 잠입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인드렌이 아는 후손은 짜증날 정도로 호기심은 차고 넘쳤으나 목숨을 담보로 삼을 만큼 무모한 성격은 아니었는데.
하물며 펠디안느가 보유한 은폐형 아티팩트는 그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건물을 연이어 통과했다.
아티팩트를 활용한 이상 펠디안느를 눈으로 식별할 수 없어 직감을 믿었다. 지성보다 가족으로서 이어진 혈연에 의존했다.
언데드 무리를 가로질렀다.
언데드는 시타델의 거리만이 아닌 건물 곳곳에서도 발견되었다.
인드렌이 골목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설마 지하로 간 것이냐.’
어떤 빛도 닿지 않은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눈앞에 놓였다. 펠디안느가 아래로 향했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멀리 떨어진 크세리온 제국의 황성이 보였다. 시타델 아래에서는 전투의 폭발음이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인드렌은 황성을 잠시 쳐다보고는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이윽고 사물이 구분되지 않는 어둠이 그를 에워쌌다.
내려가고 있는지, 아니면 평지를 걷고 있는지 이내 구분이 가지 않는 암흑이 펼쳐졌다.
‘이런 공간이 존재할 수 있는 건가…… 왠지 모르게 불쾌하구나.’
인드렌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소중한 것이 있다면 자식들을 빼놓을 수 없었다.
손자보다 먼 후손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으니, 그는 펠디안느가 사지로 향하는 것을 본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너는 내 핏줄이지만, 다른 후손들과는 여러모로 특별했지. 특히 마법사다웠고, 특히 과감했다. 안정을 추구하는 나와는 다르게.”
인드렌이 시선을 옮겼다.
“다만 이번 기행은 평소 너다운 절제된 과감함이 아니구나.”
“저는 평소와 다르지 않습니다, 선조님.”
펠디안느는 그와 다섯 걸음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저도 선조님의 후손답게 나름대로 안정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과 방법이 다를 뿐이지요.”
“그럼 들어 보마.”
인드렌이 물었다.
“어째서 홀로 이 시타델에 잠입했는지.”
“호호, 선조님이 함께 계시니 혼자는 아니지요.”
펠디안느가 미소 지었다.
“세계 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가르간트에서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십니까? 세상이 다시 혼란스러워질 거라며 한껏 표정을 찌푸리셨을 때 말입니다.”
“물론 기억한다.”
───선조님은 언제나 필요 이상의 변수를 극도로 싫어하셨죠. 그리고 일부는 혼란스러워도, 전체는 안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고요. 그렇죠?”
───응? 그래, 점진적인 변화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발전이니까. 그런데 그건 갑자기 어찌하여 물어보는 것이냐?”
───변화를 통제해야 한다는 선조님의 이상. 그걸 세간에서는 뭐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펠디안느가 말했다.
“운명. 그때 선조님은 자신의 이상은 운명과 전혀 다르다고 선을 그으셨죠. 당연합니다. 결국 선조님의 본질은 저항에서 비롯되었으니까요.”
“……뭐?”
“운명에는 언제나 대척점이 있었고, 예로부터 그걸 저항이라 불렀습니다. 그 둘의 대립은 세상이 탄생한 이래 결국 가장 오래된 전쟁이 되었지요.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끝나지 않은.”
곧바로 이해하기에는 두루뭉실한 정보라 인드렌은 가만히 경청했다.
“세계 회의에서 테아렐 님이 반복적으로 했던 말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 저항의 씨앗?”
“운명에 인류의 배신자가 있다면, 저항에는 씨앗이 있습니다. 저항의 씨앗. 제가 직접 명명했습니다. 때를 기다리는 그 인내가, 토양에 묻혀 아름다운 싹을 틔울 날을 기다리는 씨앗처럼 느껴졌거든요.”
너무 태연히 말해서 흘려들을 뻔했다. 펠디안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저항의 씨앗이라고.
“펠디안느 피어시아 레이트.”
“예.”
“레프라기움 마탑주와 무슨 관계냐.”
펠디안느가 손을 내밀었다.
“시타델을 옛 왕의 무덤으로 삼기에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못해도 수십 일은 시타델에 있어야 하니 천천히 질문하시지요. 대답할 수 없는 것만 빼고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펠디안느의 여유로운 그 눈빛에 순간이나마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죄책감이었다.
“그러니,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이제 보니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건 네가 유도한 것이었구나. 하긴, 그런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었다면 충분히 내 이목을 속일 수 있었을 터, 에휴.”
“죄송합니다, 선조님.”
“되었다.”
인드렌은 속았다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선조가 후손에게 화를 내어 무엇하랴. 후손의 막무가내를 받아 주는 것도 선조의 역할이다.
“그럼 말해 보거라. 옛 왕과의 전쟁 배경에 도대체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리고 운명과 저항이 진정 뭐를 의미하는지.”
* * *
베르덴이 무게 중심을 낮추며 [인테리스]를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명야>
망화의 장막이 그를 감쌌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암녹빛의 소용돌이가 들이닥쳤다. <차원 전이>로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일격에 곧 베르덴이 크게 밀려났다.
쾅! 쾅! 쾅!
마법의 여파에 어긋난 단층.
불규칙적으로 치솟은 대지의 벽을 몇 개나 몸으로 관통했다. 곡선으로 추락한 베르덴이 땅 위로 회전을 거듭해 속도를 줄였다.
‘8위계의 소멸을 웃도는 충격량. 사실상 방어가 무의미할 지경이군.’
네크바엘의 맹독에 저항하지 못하고 중독되었다면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저항력이 높을수록 몸은 곧장 항체를 만들어 독에 대항하지만, 네크바엘의 그것은 시시각각 독의 성질이 바뀌고 있다.
‘용언의 능력인가.’
마렌 왕국에서 일어난 참극은 약과다.
네크바엘이 미친 듯이 대륙을 누비며 날뛰면 어떤 피해가 생길지 훤했다.
1세기 전에 적룡이 몇 개의 도시를 파괴하고 많은 인명을 학살한 뒤 유유히 마경으로 사라진 것 이상의 비극이 반복될 것이다.
퀸터 캐스팅: <유운>
흑염의 운석이 상공에서 추락했다.
콰과과과과광!
벼락으로 변한 반토레온은 허공을 쉴 새 없이 박차 네크바엘을 타격했고, 반토레온은 집중력을 높여 놈의 날개를 노렸다.
“브레스 가능하십니까?”
[물론이네!]
베르덴은 과거의 이야기로만 남아 있는 용기사처럼 안데스에 탑승하여 마력을 방출했다. <사령의 숨결>과 <대암천>이 거체를 뒤덮었다.
네크바엘이 짙은 살의를 뻗쳤지만 초월자들은 쉽게 당하지 않았다.
영혼을 직접적으로 손상시킬 수 있는 마도의 특수 유골룡과 완숙에 가까운 8위계의 초월자 셋이 사룡을 시타델로 가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그렇게───짧지만 밀도 높은 시간이 흐른 순간.
“……!”
공간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었다.
셧다운의 전조였다.
테르네티아 연방에서 대규모 공간 이동진을 완성한 것이다. 그 변화가 끝나 <전이>를 마친 순간 공간적인 정적이 도래하리라.
그때 시타델의 어둠이 확산했다.
저도 모르게 거부감이 일어 물러나게 만들 정도로 거북한 기운이었다.
분명 운명의 권능에서 비롯된 힘일 터.
[다음에는 필히 죽여 주마.]
네크바엘은 더 싸움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사기를 점차 거두었다. 곧 운명의 인력이 네크바엘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기류가 몹시 거칠었다.
[자칫하면 휘말리겠군……!]
안데스는 커다란 날개를 펄럭여서 즉각 베르덴과 함께 물러났다.
베르덴이 의념을 전했다.
───시타델이 네크바엘을 데리고 <전이>하려는 건가?
───셧다운 기간 동안에는 연합과 마찬가지로 시타델도 공간을 넘지 못한다. 그러니 그전에 안전한 장소로 이동할 수밖에 없지. 여기에 본진을 두기에는 부담스러우니.
───이대로 시타델을 보내자는 거냐.
───권능에 의한 전이는 막을 수 없다. 하여 이미 수를 써 두었지.
데우스가 충고하듯 말했다.
───저 시타델은 마지막 과제다. 지금은 이대로 물러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
시타델을 보내자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당장 끝장을 볼 수 없으니.
다만 베르덴은 시타델 외에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네가 준비한 그 계책은 네크바엘을 시타델에 묶어 둘 수 있나?
───불가능하다.
───그럼 네크바엘이 다시 대륙 어딘가에서 날뛸 거라는 거군. 이 마렌 왕국에서보다 더 은밀하고, 더 격하게.
베르덴이 단언했다.
───내가 놈을 붙잡고 있겠다. 세계 연합이 다른 사문을 거의 다 폐쇄할 때까지.
데우스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눈을 끔뻑였다가 미간을 확 구겼다.
───연합장이 그런 짓을 벌이겠다고? 미쳤나? 개소리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