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4화 초강수 (2)
불현듯 떠오르는 생전의 기억이 네크바엘의 뇌리를 스쳤다. 악신들이 멸망하고, 대륙이 긴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머나먼 시대.
해츨링일 때부터 그의 세상은 온통 영원할 것만 같은 회색빛이었다.
[감히.]
태초의 용과 함께 긴 시간을 향유했던 탈리시아는 오래전에 적룡 사르칸드라에게 패배해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증오가 일었으나 그뿐이다.
탈리시아는 이제 여섯 번째 사도가 행사한 ‘당신’의 권능에 의해 육체와 영혼이 타락해 버린────사룡 네크바엘에 불과하므로.
운명의 고리에 목줄처럼 얽혀 있는, 허나 운명이든 저항이든 전부 멸절시키고 싶은 욕망만이 곧 전부이자 진심.
네크바엘은 오로지 운명을 위한 도구이면서 파괴의 화신이니, 생각과 감정이 존재하되 결국 어떤 의미도 없는 허울에 불과하다.
그럴진대 오장육부가 찢어질 듯이 진정으로 부아가 치미는 것은 왜일까.
으드드득!!!
본질이 바뀌었지만 근간은 남아 있다. 네크바엘은 탈리시아라는 지성체를 기반으로 해 탄생한 고룡임은 불변하다.
[감히 누구를 참칭하는가!!!!!!!!!!!!]
네크바엘은 가장 원대한 잿빛을 제 것처럼 다루는 베르덴을 용납할 수 없었다.
쏴아아아아아──────
폭우가 쏟아졌다.
하늘은 어두워졌고 수많은 빗방울이 3차원 변방을 잠식했다. 시야가 거의 가려졌다. 암녹빛 독기에 땅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잔혹한 빗소리가 베르덴의 고막을 가득 채울 무렵 빗줄기가 한쪽으로 쏠렸다.
용조(龍爪)가 허공을 찢어발겼다.
탈리시아가 물과 일체화할 수 있듯이 네크바엘은 탁수(濁水)와 동화될 수 있다. 타락한 물에 닿은 모든 공간은 그의 영역이니, 어떤 생명체도 사룡의 격노를 피할 수 없으리라.
쩌적.
그때 네크바엘의 발톱이 점차 밀려났다.
[기어이 용의 이능까지……!]
베르덴은 왼쪽 어깨의 견갑을 내세워 네크바엘과 힘을 겨루었다.
[아인베르]는 애초에 초대 마도왕이 드래곤의 고유 능력을 재현하기 위해서 실험적으로 제작한 진화형의 아티팩트.
오랜 실패작이었던 로브는 잿빛의 용이 불어넣은 힘을 토대로 베르덴과 함께 진화하여 신의 무구이자 완성작으로 거듭났다.
<드래곤 스케일>
잿빛의 신성력을 동력으로 삼아 [아인베르]가 용의 비늘을 재현했다. 그것은 마법적인 장막처럼 떠올라 주신을 보호했다.
심지어 신성력은 거인 네르가를 창조하는 대가로 일시적으로 사용이 불가능해진 마안의 모든 기능을 되살렸다.
네크바엘의 시야에서 사라진 베르덴.
<신성 아케인: 심판>
머리 부분이 잿빛의 구체에 둘러싸인 [인테리스]가 좌측에서 쇄도했다. 네크바엘의 비늘에 도달하는 순간 신의 서광(瑞光)이 폭발했다.
세계의 틈새에서 베르덴은 악마 군단장 하드라스와 함께 두 번째 사도────인간계 최초의 왕과 사투를 벌였다.
당시에 최초의 왕은 가르간트에서 세계수에게 받은 금기 제약으로 권능의 반을 사용하지 못했고, ‘당신’의 신기를 사용했음에도 전력의 7할밖에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베르덴은 접전 끝에 가까스로 그를 세계 밖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건 막 8위계의 경지와 신격을 자각했을 때의 이야기.
대륙에 돌아온 베르덴은 마법적인 경지를 갈무리해 최적화했으며, 그 신체(神體)에 적응했고, 신의 사도를 빚어냈다.
세계의 틈새에서 태어나는 악마들은 베르덴을 향해 기도하니, 그 신격만은 이미 태고의 시대에 군림했던 고대 신들과 다르지 않은 수준에 이르렀다.
비로소 기적(奇跡)이 일어났다.
그들을 중심으로 인공적인 자연이 쓸려나가 평지로 화했다. 땅이 뒤늦게 움푹 가라앉았고, 산맥은 산산이 쪼개져 붕괴했다.
그야말로 신의 철퇴.
분출하는 후폭풍에 쉴 새 없이 퍼붓고 있던 폭우가 잠시 멎었다.
툭, 투둑.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난기류는 금세 가라앉았다.
거대한 파괴의 현장에서 네크바엘은 머리가 옆으로 꺾인 채, 또 비스듬히 몸체를 기울인 모습으로 거체를 지탱하고 있었다.
‘고대 신과는…… 다르다.’
네크바엘의 안면에서 흘러내린 오염된 피가 커다란 웅덩이를 이루었다. 비늘이 파열됐다. 고통이 육체와 영혼을 자극했다.
신성력에 깃든 특유의 광기.
자유가 없다.
지독히도 폐쇄적이다.
신앙의 대상이기에 필연적으로 군림하게 되는 신의 본질을 역행하고 있다.
‘변질된, 진정한 신.’
오직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마땅한 신의 권리마저 버리는 집요함은, 운명전에서 보았던 ‘당신’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베르덴이 발산하는 힘의 종류는 겉보기만 ‘당신’과 같은 게 아니었다.
[진정 ‘당신’의 전철을 밟겠다니.]
네크바엘이 고개를 되돌렸다.
[그 끝에 낙원이 있을 것 같으냐, 파괴자.]
“지상 낙원을 바란 적은 없다. 세계를 내 힘 아래에 두고자 할 뿐이지.”
네크바엘이 불러낸 비구름 위로 우주의 암흑이 도래했다.
성체의 구름이 형성됐다.
<신성 아케인: 성운(星雲)>
잿빛의 별들이 운명을 비추었다.
“나의 이상을 위해.”
[허상이기에 이상(理想)이거늘.]
네크바엘이 다시금 폭우와 동화되었다. 베르덴이 양손으로 [인테리스]를 붙잡고 잿빛의 잔상을 남기며 이동했다.
서로 다른 신의 감각과 용의 본능이 상대의 모습을 포착했다.
[네크투르 칼마(Nektur Kalma).]
네크바엘의 발톱 사이에서 피어난 와류가 무수한 쐐기의 형태를 이루었고, 그것이 방출되며 범위 내를 모조리 초토화했다.
동시에 초신성이 추락해 네크바엘이 자리한 지역을 분쇄했다. 섬뜩한 섬광이 번뜩였다. 성운에서 666개의 별빛이 몰려들었다.
기적과 용언이 난무했다.
─────! ─! ───! ──! ─────!
베르덴과 네크바엘은 점멸하듯이 세계의 곳곳에서 찰나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다시 잔상을 남기더니 수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현현했다.
그들이 충돌할 때마다 지물은 파괴되었으며 지형의 형태는 변형됐다. 크고 작은 상처는 늘어갔지만 둘 중 어느 누구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쿵.
광대한 날개가 공간을 짓눌렀다.
네크바엘이 입을 벌려 주변 일대에 만연한 사기를 끌어모았다. 히아레마르 내해의 섬에서 보았던 것보다 밀도가 훨씬 더 높은 힘의 집합체에서 암녹색 광채가 격하게 번쩍였다.
비탄의 숨결.
최대로 발현된 사룡의 브레스가 광선처럼 거짓된 세계를 가로질렀다.
‘우선해야 할 것은 네크바엘의 격리.’
베르덴이 피하지 않고 맞섰다. [인테리스]의 오브에 신성력을 집중시켰고, [아인베르]로 또다시 드래곤의 이능을 발현했다.
죽음의 색채가 벽안을 가득히 채운 순간 베르덴이 스태프를 내질렀다.
‘그러니 진부터 빼놓는다.’
신의 잿빛은 순수한 부활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거부한 반역의 상징.
<위천(違天)의 숨결>
회색의 광류가 세계로부터 빛을 앗아 갔다.
먼 변방에서 시작된 힘의 격랑이 곧 3차원 전체로 확산했다.
* * *
쿠구…….
세계 연합 본부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예민한 사람들은 멈칫했지만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이내 다시 업무에 몰두했다.
대륙 전역에서 그러했다.
지진이라고 할 수 없는, 착각이라 여기고 지나갈 정도로 미약한 진동이었기 때문이다.
탁.
베타는 모두가 알아보기 쉽도록 전쟁의 타임라인을 게시했다.
중요한 변곡점들은 대충 이러했다.
1. 테르네티아 연방 – 폴테인 평야: 개전.
2. 델하룬 사문 폐쇄 (옛 왕, 제2사령관, 제4사령관 기습).
– 크세리온 제국이 사문의 근원체를 자폭시킨 탓에 대량의 언데드가 대륙 각지로 <전이>.
3. 앞마당 장악.
– 마스터: 제8사령관 조우. [동대륙 남부]
– 서약자: 제6사령관 토벌. [동대륙 남부]
– 마스터: 제3사령관 전투. [동대륙 남부]
4. 앞마당 장악 성공. 병기 후송.
5. 펜드렌호 사문 폐쇄 (제4사령관 토벌 추정).
– 펜드렌 호수의 이형체: 완전 소멸.
6. 테르네티아 연방 사문 폐쇄 (제2사령관 및 제9사령관 토벌)
– 테르네티아 연방에 있던 초대규모 언데드 군단이 북상.
7. 마렌 왕국 – 사룡 네크바엘 및 시타델 출현.
– 테르네티아 연방에서 마렌 왕국으로 <전이>한 세계 연합장께서 연합군의 사문 폐쇄를 우선해 사룡과 함께 전장에서 이탈.
– 시타델 어딘가로 <전이>
– 테르네티아 연방 토벌군단의 주요 전력이 대규모 <전이>로 복귀.
– 아케나드 마도국의 동력원 정지.
8. 셧다운 시작.
[타임라인 게시 완료했습니다.]
마렌 왕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숨기지 않고 공개했다. 베르덴 폐하께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야 말하지 않으면 모르니까. 무지는 자칫 의심과 불신 그리고 분열로 이어지는 법이다.
[알파, 방어선 구축 계획은 어떻습니까?]
[……확인. 공유.]
알파는 아주 조금 늦게 반응했지만 대수롭게 여길 것은 아니었다.
베타가 평면 지도를 받았다. 지도 위에는 알파가 완성한 새로운 방어 체계가 그려져 있었고, 옆에 여러 주석이 달려 있었다.
베타는 이를 빠르게 확인하며 이해했다.
알파가 그동안 게시판을 바라봤다. 베르덴 폐하와 사룡 네크바엘이 전장에서 완전히 이탈했다는 대목에 주목했다.
힘에 의한 자유.
희생.
책임감.
알파는 베르덴 폐하를 이해한다. 베르덴이 바라는 이상도, 이상에 기반한 신념도, 신념을 완성하기 위한 처절한 자기희생도.
그리고 창조주로부터 버려진 골렘들을 보살피는 그 따스함도.
알파는 베르덴 폐하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베르덴 폐하께서 이상을 이룩하도록 조력하는 것이 되레 베르덴 폐하를 극도로 위험하게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처럼 너무도 많은 것을 지키기 위하여 베르덴 폐하께서 계속 무리해야 한다면…….
‘용납. 절대. 불가능.’
알파는 그 무슨 일이 있어도 베르덴을 잃을 생각이 없었다.
베르덴과 세계.
한 번의 선택으로 둘 중 하나만을 구해야 한다면 당연히 베르덴 폐하다.
설령 베르덴 폐하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 * *
동대륙 남부.
사문 바로 근처에서 불규칙적으로 들려오던 마력 입자포의 폭음이 마침내 멎었다. 연기가 치솟은 땅에 언데드 군단의 잔해가 가득했다.
유리온 하이로스가 검을 어깨에 얹으면서 가볍게 숨을 뱉었다.
“후, 드디어 확보했군.”
진군 끝에 사문의 앞마당을 확보한 제1토벌군단과 제2토벌군단이 현대 병기의 화력에 힘입어 말 그대로 전장을 뭉개 버렸다.
서약자, 마스터, 교황, 마울러는 선두에 서서 특수 개체급과 최고위 언데드, 그리고 많은 산 제물을 바친 타락자 다수를 토벌했다.
그렇게 마침내 죽음의 균열에 도달했다.
“테아렐하고 아드리안은 진즉 사문을 폐쇄했는데, 우리는 이제 시작점이라. 큰소리 떵떵 쳤는데 얼굴도 못 들겠네.”
벤디에가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쪽은 외부에서 병력을 붙잡는 사이 신속히 사문의 근원체를 파괴하는 전략을 썼으니까요.”
동대륙 남부에서는 마음의 타락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에 불안 요소를 남길 수 없다. 그래서 언데드들을 전멸시키면서 진군해야 했으니,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당연했다.
교황 로마누스가 말했다.
“사령관들이 이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아 저 안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장이 펼쳐져 있겠지요. 쉽게 결판을 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장기전이라는 거지, 뭐. 그래 봤자 며칠 안에 끝날 테지만.”
“며칠도 아깝다.”
가레스가 죽은 언데드를 짓밟았다. 그는 펜드렌호 사문이 공략되기 전에 베르덴의 명령을 받고는 혼자서 <전이>해 동대륙 남부에 합류했다.
“너희들은 내 뒤나 쫓도록.”
“하하, 그러다 죽어도 모른다.”
유리온이 뒤를 돌아 연합군을 마주했다.
“에스티리아 여왕, 뒤를 맡기마.”
“목숨을 걸겠습니다.”
실리스 리벤 디 에스티리아가 단호히 답했다. 그녀 본인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경험도 경지도 현저하게 부족한 마법사이자 왕이니.
다만 이그나시아가 처음으로 들인 유일한 제자라는 점이 밖에서 사문을 수호할, 초월자들의 배후를 지킬 자격을 부여했다.
유니아가 심호흡했다.
카인의 목에 걸린 [새벽의 별빛]이 흔들렸다.
칼리아가 베르덴이 준 룬 검을 쥐고 드레드미어의 갈기를 쓸었다.
“자, 그럼.”
유리온이 다시 돌아서서 사문을 노려봤다.
“마저 끝내자고.”
전쟁 31일 차.
동대륙 남부의 분쟁 지대를 휩쓴 연합군이 타락의 사문에 진입했다.
* * *
이데라트 연맹국은 지금 전개되는 전장과 꽤 멀리 떨어져 있다. 히아레마르 내해와 가깝기는 해도 아홉 개의 사문은 그곳에 없었다.
대륙 곳곳에서 발견되는 언데드 무리도 아직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연맹국의 북서쪽에 자리한 ‘엘브룩’은 한가로웠다.
“셧다운이 시작됐다던데.”
“셧다운? 그게 뭔데?”
“아, 무식하긴. 신문 좀 읽으라니까.”
피도 시체도 없는 성벽 위에서 경비병들이 사담을 나누었다.
“셧다운이 뭐냐면 대륙 전역에서 <전이>가 안 되는 사태를 말하는 거야. 세계 연합에서 붙인 명칭이라고 하던데.”
“대륙 전역에서? 그럼 대륙 간 공간 이동진은?”
“그건 또 된대.”
“왜 되는데?”
“몰라, 내가 마법사도 아니고.”
경비병이 길게 하품했다.
“아무튼 그렇다네.”
세계급 전쟁이니 뭐니 해도 그들에게는 먼 나라의 이야기나 다름없다. 연합이 목숨을 던져 가며 크세리온 제국을 막아 준 덕분에 이전의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은 도시가 적지 않기에.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그저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응?”
그때 경비병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멀리 뭔가가 보였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있었다.
“망원경 어디에 뒀더라?”
“저쪽에.”
옛날 비품으로 구비해 둔, 마법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망원경으로 시야를 확대했다. 전반적으로 시꺼먼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기사……?’
전신 갑옷을 두른 정체불명의 인간은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드는 거대한 검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에 망원경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어?”
인간이 몸을 기울였다.
도시를 향해.
이윽고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어……?”
“뭐, 뭐야, 갑자기!”
베르덴은 연합 본부에 머무르지 않고 최전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꿈꾸고 있다.
그럴진대 어찌 시타델에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무릇 제왕이라면 친림(親臨)을 주저하지 않아야 하니.
대륙에 상륙한 옛 왕───아칸드가 도시 엘브룩을 향해 단신으로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