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5화 초강수 (3)
쿠웅.
용검 [마그라스]를 손에 쥔 아칸드가 마치 화살처럼 선으로 뻗어 나갔다. 낮게 떠오른 앞발이 도중에 다시 지면을 박찼다.
대부분의 경비병은 아칸드의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성벽 위나 거리나 난데없는 진동에 당황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 지진?”
“기다려 봐. 아는 경비병한테 물어보고 올게.”
엘브룩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남편이, 아내를 안심시키고 성벽을 향해 세 걸음 정도 나아간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엘브룩의 성문이 붕괴했다.
외부 충격으로부터 성벽을 보호하는 보안 마법진이 물리적으로 파훼됐다. 언데드 군단에 대비한 연합의 방어 체계가 무력화되었다.
숫제 폭발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성벽에서 경비병들이 추락했고, 성문 근처에 있던 시민들은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에 뒤덮였다. 성문의 잔해가 도시를 덮쳤다.
심각하게 우그러진 거대한 금속 문짝이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뒤에서 건물들이 박살 나는 굉음이 터졌다.
“여보……?”
남편이 서 있던 자리에는 새빨간 핏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아내는 현실을 지각하지 못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이내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에 성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지 구름 너머에서 제왕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위대한 전쟁에는 희생과 구원이 공존한다.”
아칸드가 강림했다.
“그것이 전쟁의 숭고함이지.”
그가 크세리온 제국의 황제이자 옛 왕임을 누구도 당장 알아보지 못했다. 세간이 고대 왕의 외견에 대해 알 필요도, 이유도 없으므로.
다만 시민들은 엘브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엘브룩이 침공당했다.
그때 완전히 난장판이 된 거리에서 인영(人影)들이 솟구쳤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검과 갑옷이군……!”
“인간. 무투계다. 기예부터 막아.”
“그 밖에 탐지되는 것은 없네. 적은 혼자야!”
모험가들이었다.
인간만이 아니라 수인까지 포함된 미스릴 등급의 혼합 파티였다.
종족 간의 화합을 대국적으로 지향하는 이데라트 연맹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구성──그들은 길드의 명령으로 피난 지정 도시에 배치된 전력이었다.
후방에서는 마법사가 마법을 준비하고. 전방에서는 궁수의 사격으로 보조를 받은 전위들이 숫자의 이점을 살려 아칸드의 사각을 노렸다.
최소 몇 년 이상은 합을 맞췄음이 분명한 조화로운 연계였다.
아칸드는 투구도 쓰지 않은 채 제자리에서 용검을 휘둘렀다.
단지 그뿐이었다.
검로에 놓여 있던 엘브룩의 건축물들이 수평으로 갈라졌다. 그와 함께 모험가, 시민, 병사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즉사했다.
남편을 잃은 아내마저도 예외 없이 토막나 바닥에 널브러졌다.
주변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마법사가 주저앉았다.
방금까지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던 동료들의 시체가 눈동자에 비쳤다. 토벌 보수로 맞춘 무구들은 그들의 몸을 지켜 주지 못했다.
그 순간은 절망적인 슬픔보다도 경악이 앞섰다.
“어떻게, 검압만으로.”
인간의 능력을 아득히 벗어났다.
초월자?
아니, 감히 윗분들의 경지를 가늠할 수 없지만 그 이상일 것이다. 여러 단서는 마법사로 하여금 상대의 정체를 짐작하게 했다.
“옛 왕…… 아칸드.”
“너희가 운명의 영원한 순환에 합류할지, 아니면 완전한 죽음을 맞이할지 알 길은 없지만, 절망하거나 슬퍼할 것 없다.”
아칸드가 단언했다.
“결국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
어느샌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던 용검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칼날에 태양빛이 반사됐다.
크세리온 제국 검술 제1형단 – 글라로스Glaros
마법사가 여태까지 보았던 어떤 검기보다도 거대한 칠흑의, 무광의 검세가 하늘과 땅을 가르며 마법사와 엘브룩을 양단했다.
성채가 처참하게 쪼개졌다.
통신 장치를 작동하려던 엘브룩의 시장은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죽음이 번졌다. 피난민까지 안고 있던 엘브룩에서 무수한 사망자가 발생했다.
거기서 아칸드는 양손으로 용검을 붙잡아 이번에는 바닥을 향해 내리쳤다.
도시 엘브룩이 초토화됐다.
터벅, 터벅.
수만 명을 학살한 아칸드가 기반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폐허에서 걸어 나왔다. 영혼들의 생생한 움직임을 권능을 통해 인지했다.
“이상을 좇다 절대자들처럼 끝내 현실과 타협하지 않기를 바라지, 베르덴.”
베르덴은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직접 네크바엘을 전장에서 이탈시켰다.
아칸드는 황성 시타델에서 벗어나 혼자서 적진에 들어왔다.
“진정…… 그들과 다른 길을 걷는 구세주(救世主)가 되고 싶다면.”
아칸드가 남하했다.
추구하는 목적은 전혀 달랐지만, 두 사람이 이번에 내놓은 수의 본질은 비슷했다.
그들의 죽음 자체가 전쟁의 결론이니.
대전쟁의 승패를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칼날 위에 두는 것.
양측 수장이 서로 목숨을 던지는 초강수(超强手)를 두었다.
* * *
동대륙 남부의 사문 내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난해한 환경이었다.
삭막하고 드넓은 구릉.
언덕이 너무도 많아 평지가 거의 없었다.
저 멀리 구릉의 끝자락에는 처음 보는 양식의 고대 성채가 자리했다. 성벽이 대륙의 대도시급 이상으로 높은 데다가 두꺼웠다.
벽 곳곳에 언데드가 박혀 있다. 놈들이 생기를 맡고 기괴하게 울부짖었다.
언데드 군단의 규모와 전력은 예상 범위 내였지만, 커다란 성채를 축으로 한 방어 진형은 조금의 허점도 드러내지 않았다.
‘사문의 근원체는 성채에 가려져 있나. 함락시키는 데 애 좀 쓰겠군.’
유리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게다가…….’
동대륙 남부에서만 느껴지는 불쾌감의 농도가 한층 더 진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더러운 이명이 희미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그건 산 자를 언데드로의 타락으로 이끄는 기운과 소음이었다.
할디른이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정신력이 서서히 깎이고 있군. 경지가 낮거나 정신계가 단련되지 않은 이들은 장시간 버티기 어려울 거다.”
“타락의 기준점이 낮아졌다는 건가.”
“현저히 낮아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정신계의 보호는 이제 선택이 아니야.”
다크 워튼 마탑의 차기 계승자가 그리 해석했으니 사실이리라.
알데반과 같은 흑마법사들과 교황의 세력은 특히나 경계심을 높인 상태였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의미로 사기(死氣)에 민감했다.
“그나마 고위 전력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아서 다행이구만. 주기적으로 대륙을 넘나들면서 공성전을 전개하지. 레오나, 기지를 구축하라고 전해.”
“예, 폐하.”
“…….”
“단기 결전으로 끝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나 그런 불만은 접어 둬라, 가레스. 알잖아?”
유리온이 턱짓했다.
“잘못 들어가면 죽어.”
무려 벤디에를 따돌린 제국의 제3사령관과, 전투 도중에 움직임이 읽힌 극점 다수를 화살로 꿰어버린 제국의 제8사령관이 보란 듯이 성채에서 초월자들을 주시했다.
어디 들어와 볼 테면 들어와 보라는 것처럼 눈빛이 흉흉했다.
비대칭 전력과 초월자급 전력, 그 둘.
정면으로 맞붙으면 압도할 수 있겠지만 가는 길이 꽤 험난했다. 경지에 오른 자들의 전투에서는 사소한 변수 하나도 치명적.
저 언데드 군단에는 초월자들에게도 그러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는 개체들이 존재했다.
가레스가 혀를 찼다.
“알아. 시발, 누군 눈깔이 없나.”
“알면 됐다. 그보다 입버릇 좀 순화해라. 그러니까 아드리안한테 처맞지.”
“진정하십시오, 유리온.”
“아드리안도 입버릇은 안 좋습니다.”
대악마의 힘을 쓸 수 있으면 벤디에와 함께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겠으나…… 가레스는 그 정도로 정신이 나가진 않았다.
빛의 교황이 바로 옆에 있다.
대악마의 계약자임이 드러나는 순간 가레스는 대륙 공공의 적으로 전락할 것이다. 전쟁을 연이어 치르는 건 사절이다.
쿵.
토벌군단이 전진 기지를 구축하면서 공성 병기들을 설치했다. 여태껏 사문의 균열은 적들의 것이었으나, 지금은 연합의 소유였다.
대마력이 태동했다.
유니아가 에온의 마법사단을 지휘해 마력 입자포를 충전했다.
8위계에 달하는 한계 위계.
태어났을 때부터 마법사였던 유니아의 마력량은 현자들을 포함해 소사이어티의 어느 누구도 비교할 수 없었다.
“충전 완료했어요.”
“우리의 전력은 이제까지와 다르지 않다. 크세리온 제국의 껍질을 필요한 만큼 깎아낸 다음 적의 머리를 치는 것.”
유리온이 제3사령관────전쟁의 묵시록을 향해 칼날을 겨누었다.
벤디에가 활시위를 당겼다.
로마누스가 성서를 펼쳤다.
가레스가 권기를 발현하며 질주했다.
“포격 개시.”
초월자들의 공성전이 시작됐다.
* * *
데우스가 제공한 공간은 어느새 대륙의 전쟁터보다 더 참혹한 곳으로 변해 있었다.
싱그러움을 가장했던 산맥과 숲은 거의 6할 이상이 쓸려 나갔고, 그 자리는 사막에 가까울 정도로 삭막한 황무지가 차지했다.
쿠웅──────!
완전히 전개한 쌍익(雙翼)이 사방을 휩쓸자 첨예한 폭풍이 몰아쳤다. 그 안에 얽혀 있는 탁류가 베르덴을 난도질했다.
끝내 신성력을 뚫고 들어온 그것에 베이며 신혈이 흘러내렸다.
직후에 마안이 발동됐다.
회피할 수 없는 신의 기적에 직격당한 네크바엘이 비명을 질렀다.
버려진 세계가 전율했다.
부상과 선혈이 낭자했으나 둘은 아직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의 생명력은 그 어떤 종족보다도 우월하고, 신의 생명력은 물리적인 수치로 전혀 측정할 수 없는 미지의 무언가다.
‘이대로는 며칠이 지나도 대륙 복귀를 모색할 틈도 없겠군.’
베르덴이 손끝을 위로 향했다.
‘그렇다면 봉인으로.’
잿빛의 성운이 은은하게 빛나더니 무수한 빛무리가 쇄도했다. 촤르르르르륵! 잿빛의 사슬들이 네크바엘을 구속했다.
이것은 잿빛의 드래곤이 봉인된 패잔병의 감옥을 참고한 기적이었다.
[이, 까짓…….]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사슬의 일부가 날개의 피막을 관통했다. 물리적으로 뚫은 것이 아닌, 보다 개념적인 작용이었다.
신의 우주에서 사슬비가 한 번 더 쏟아져 내리더니 팔다리만이 아니라 꼬리와 목도 구속했다. 네크바엘의 머리가 점차 젖혀졌다.
크롸아아아──────!!
네크바엘이 포효하며 순수한 힘으로 봉인을 부수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베르덴은 눈부신 안광을 발산하며 압박감이 감도는 손아귀를 조였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구!
거대한 힘이 대립했다.
네크바엘은 서서히 육체가 경직되는 것을 느끼다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용혈이 쏟아졌다. 또, 그 핏물에서 짙은 안개가 퍼져 나갔다.
자욱한 독연(毒煙)이 네크바엘의 거체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베르덴이 갑자기 봉인의 무게가 깃털처럼 가벼워진 걸 느꼈다.
‘무슨…….’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자 인간의 그림자가 안개에서 뛰쳐나왔다.
<폴리모프>
네크바엘이 작은 소년의 모습을 취했다.
관자놀이에 박힌 커다란 드래곤의 뿔.
암녹빛의 양 날개.
비늘로 뒤덮인 손과 발, 그리고 손톱과 발톱.
레그리트처럼, 그러나 그녀보다 훨씬 더 드래곤의 특징이 두드러진 용인───네크바엘은 체격을 줄여 신의 봉인에서 벗어난 것이다.
쩌어엉!
베르덴이 앞세운 [인테리스]에 네크바엘의 손톱이 얽혔다.
본모습보다 힘은 다소 약해졌지만, 그만큼 무게가 가벼워진 덕분인지 속도는 베르덴과 비슷하거나 약간 앞섰다.
“하등 생물의 형태까지 빌릴 줄은 몰랐군.”
[인정하지.]
소년 네크바엘이 사납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네놈은 고룡과 대등하다.]
드래곤의 관점에서는 찬사겠지만 그걸 듣는 입장은 전혀 아니었다.
“과소평가하지 마라.”
베르덴과 네크바엘이 급속도로 낙하하면서 공방을 벌였다. 대지에 발이 닿는 것과 동시에 서로의 용언과 기적이 교차했다.
눈부신 폭음이 번졌다.
* * *
전쟁 34일 차.
공성전에 돌입한 지 3일이 지났다.
실리스는 유리온의 명령대로 사문의 균열을 지키며 주변을 감시했다.
급습을 대비해야 했다.
사문을 장악했지만 크세리온 제국은 동대륙 남부 전역을 잠식했고, 심지어 이 땅엔느 사문이 하나 더 존재하므로.
그로부터 얼마 후 칼리아가 보고했다.
“폐하, 누런 엄니 성채가 있는 남쪽 방향에서 적을 확인했습니다. 언데드만이 아니라 수인의 타락자까지, 규모가 상당합니다.”
“드디어 왔군요.”
실리스가 걸음을 옮렸다.
“에스퍼렌사 공작, 저는 따로 움직일 테니 지휘를 맡기겠습니다.
“네?”
칼리아와 칼리아의 아버지인 에스퍼렌사 공작이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실리스의 현재 신분은 에스티리아 왕국의 여왕에 국한되지 않는다.
“맡겨 주십시오.”
“네, 그럼.”
실리스는 아무도 대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걸어서 사문에서 멀어졌다. 연합군의 인기척이 이내 사라지자 실리스가 입을 열었다.
“모습을 드러내시죠.”
“어이가 없네.”
한때 주검의 영광의 세 번째 하인이었던 반추자(反芻者), 르카리아가 현현했다.
“너 따위가 날 상대하겠다고?”
주검의 영광의 초월자들이 전선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