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1화 공방전 (2)
하늘성은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지만 이론적으로 구현이 가능하다.
다만, 아직 대외적으로는 공상의 영역이다.
비행정의 동력원을 몇 개나 연결해도 섬에 준하는 질량을 띄울 수는 없다.
그 위에 또 대도시가 건설되어 있다면 더욱이…… 만에 하나 성공한다고 해도 머지않아 추락하여 지상을 초토화시킬 게 뻔했다.
‘그렇군, 저게 그 시타델인가.’
에온의 식별 골렘 때문에 이식자들의 행동 반경은 상당 부분 축소되었지만, 이미 대륙 곳곳에 뻗어 있는 글러트니의 뿌리는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골렘만 주의하면 세계 연합이 다루는 세부 정보를 탈취할 여력은 있다.
옛 왕의 성채.
발리온이 기척을 지우고 몸을 낮춘 채 아주 천천히 유영하고 있는 하늘섬을 주시한다. 본 적이 없을 만큼 사기의 농도가 짙다.
그가 있는 곳은 ‘실페라 자치령.’
중앙 대륙에 있으며 대수림과 주인 없는 땅 사이에 자리한 독립국으로, 대수림과 접해 있는 만큼 우거진 산림이 특징이며.
사용하는 도로가 한정되어 있고 자원 또한 풍족한 터라 험준한 산맥을 웬만한 인간이 굳이 오갈 이유가 없으니…… 저렇게 거대한 비행체가 여태껏 발견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할 터.
‘설령 찾아냈다고 해도 세계 연합에 보고하기 전에 전부 죽었겠군.’
시타델은 낮은 높이로 비행하고 있다. 구름 너머와 섬 아래에 필시 은폐에 특화되었을 기형적인 언데드가 다수 도사리고 있는 게 확인된다.
발리온이 먼저 존재감을 지우지 않았다면 진즉에 발각됐을 것이다.
‘그야말로 사지(死地).’
주검의 영광에 대해서는 400년 전 방주의 선장으로서 활동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루아스교에 결국 전멸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옛 왕을 부활시킬 줄이야. 불멸의 세상이라는 허황된 이상을 꿈꿀 자격은 있던 모양이었다.
세계의 주인은 옛 왕을 포함한 구인류의 시체 위에 설 신인류가 될 테지만───아무튼.
‘속도는 낮으나, 그 방향은 북서쪽…… 과연, 이대로 주인 없는 땅을 침공할 셈인가.’
실페라 자치령의 국경을 북서쪽으로 넘어가면 바로 주인 없는 땅이 나온다.
주인 없는 땅과 시타델의 충돌, 그렇게 되면 승패와 무관하게 에온의 권역은 궤멸에 한없이 가까운 피해를 입을 터다.
나쁠 것 하나 없다.
바라는 바다.
베르덴은 글러트니 최대의 적수일뿐더러, 고맙게도 국제 사회를 약화시켜 준 크세리온 제국도 결국 말살 대상이니까.
둘이 공멸한 끝에 죽기 직전인 베르덴만 남는다면 더할 나위 없다. 베르덴의 귀한 생체 조직을 손에 넣을 기회다.
───스스로 피를, 흘리려, 하지 않고, 그저 남의 피만, 탐내는…….
───소인배!
문득 호세가 내지른 일갈이 기억 속에서 제멋대로 메아리쳤다.
발리온이 이마를 붙잡았다.
구부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강하게 눌러 뇌를 억지로 자극했다.
‘주제도 모르는 것이.’
그놈이 무의식적으로 발현한 기적의 영향력에서는 분명히 벗어났다.
한데 발리온의 본능이 이미 사라졌어야 할 기적의 잔재를 멋대로 붙잡고 있었다. 본능이 먼저 동아줄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감히 자신에게 이런 수작을 부린 호세에게 살의가 끓었지만, 바로 그렇기에, 이단 신앙의 근원을 규명할 필요성을 진심으로 실감했다.
‘키르에의 판단이 맞았다.’
그것이 기, 마력, 신성력처럼 신인류의 거름이 될 구인류의 유산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신성력 개념을 해명할 열쇠.
양막에 잠겨 있는 신인류의 태아가 보다 완벽해질 수 있다면 그까짓 구인류의 죽음을 유예하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일단 물러난다.’
감정은 어느 정도 진정됐다. 물론 탐식의 조정소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소식을 취합해 보니 이 전쟁의 결말이 그리 멀지 않은 듯했으니까.
오직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고, 발리온은 준비된 자였다.
“……?!”
그 순간이었다.
쿠우우────쿠구구구구구구……!
시타델이 갑자기 진동했다.
지축이 떨렸다.
발리온은 동요하지 않고 몸을 더 낮추면서 안력을 높였다.
‘방향이…… 바뀌었다?’
북서쪽으로 느긋하게 나아가던 시타델이 우측으로 틀기 시작했다. 북동쪽. 가속이 가능한 것인지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게 보였다.
당장 실페라 자치령의 북동쪽에는 세 개의 국가가 놓여 있다.
노덴 공국, 하이랜디아, 라그벨 왕국.
그중에서 거리상 가장 가까운 것은 하이랜디아와 노덴 공국이다.
“…….”
옛 왕이 무슨 전략을 꾸미는지는 모른다. 주인 없는 땅보다 뭐가 더 중요하다고 다른 나라로 선회한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발리온은 신중히 생각했다.
글러트니의 장기 이식 등으로 각성도 없이 초월의 벽을 넘어선 고유의 경지.
현 방주의 지도자 정도가 아니라면 자신을 죽일 수 없다. 또한 살아남고자 한다면 어떤 경우라도 목숨을 건질 수 있다.
시타델은 물리적으로나 마법적으로나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 유지되고 있다. 옛 왕은 주검의 영광이 바라는 불멸의 세상, 그 이상을 넘어선 비밀을 숨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구인류에는 배신자들이 있다. 주검의 영광을 도와 성소 습격 사태에 일조한, 발리온조차 파악하지 못한 조직이 대륙에서 암약하고 있다.
구인류의 배신자도 구인류다.
파악해서 몰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옛 왕은 구인류의 배신자와 연관성이 있다. 시타델에 그 단서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으며, 발리온은 단신으로 시타델에서도 살아 돌아올 확신이 있었다.
잠시 숙고한 끝에 판단이 섰다.
탓.
발리온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죽음으로 가득한 시타델을 추적했다.
* * *
빛 한 점 존재하지 않는 시타델의 지하에 선조와 후손이 있다. 그들은 종합 서열 2위인 아티슨 마탑의 중추이며 힘이었다.
관제라 불리는 인드렌 피어시아 레이트가 바닥에 앉아서 중얼거렸다.
“운명과 저항…… 세상의 이면에 그런 것들이 있는 줄 꿈에도 몰랐구나. ‘당신’이라는 세계의 지배자도, 인류의 배신자들의 정체도, 그 옛 왕이 운명의 사도란 것도, 네가…… 테아렐이 찾고 있던 그 저항의 씨앗 중 하나라는 것도.”
인드렌이 질문할 때마다 펠디안느는 기탄없이 답을 해 주었다.
모든 질문을 받아 준 건 아니었다.
말하지 못하는 게 있고, 또 발설할 수 없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인드렌도 대답을 들을 수 없었던 질문은 애써 되묻지 않았다.
“난 늘 네가 특이한 자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살아 있는 초대 마도왕의 세력에 남몰래 속해서 세계를 지배하는 세력과 대립 관계를 이루고 있다니. 참…… 참, 뭔가 대견하기도 하고 막 말이 안 나올 정도로 황당하기도 하구나. 이렇게 입으로 떠들고 있는데도 머리는 전혀 못 따라가는 느낌이야.”
“호호호, 선조님의 혈통이 어디 가겠습니까.”
“외적으로 네가 나와 닮은 부분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면 다른 핏줄이라고 오해했을 거다. 아무튼, 몇 가지만 더 물으마.”
인드렌은 여전히 당혹스러웠지만 억지로 납득하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의 진도가 전혀 나가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일단 들을 수 있는 건 전부 듣자. 생각을 정리하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옛 왕을 포함하여 운명의 사도들을 상대하기 위한 저항의 씨앗이 대적자라면, 씨앗인 너도 그중 하나인 거냐?”
“애석하게도 전 그저 씨앗입니다. 대적자는 좀 더 특별합니다.”
“당대의 아티슨 마탑주보다 특별하다니. 뭐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하구나.”
“특별함의 의미는 저마다 다른 법이지요.”
펠디안느는 왠지 모르게 연민이 느껴지는 웃음을 지었다. 녀석은 대적자가 누구인지 알려 주지 않았기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 ‘당신’이 금기란 수단으로 정보를 제한했다고 했었지. 금기의 내용이 무엇인지 편린이라도 들어 볼 수는 없겠느냐?”
“어렵습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선조님께서 알고 계신 존재로 예를 든다면…… 음, 이페아카른 정도가 아니면 안 될 테지요.”
인드렌이 눈을 끔뻑거렸다.
“이페아카른이라면…… 기생의 대악마? 섭리자가 마경에 있다고 세계 회의에서 밝혔던 그……?”
“극소수의 타인에게 금기를 공유하는 것, 기생의 대악마는 그런 게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저도 정확한 힘의 인과는 모르겠습니다만.”
대악마까지 운명과 저항에 관련되어 있다. 도대체 연관되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거대한 호수를 양동이로 퍼 올리는 것과 진배없을지도 몰랐다.
세계는 넓다.
인드렌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펠디안느.”
“예, 선조님.”
“그래서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면 되는 것이냐.”
인드렌을 시타델로 잠입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펠디안느다. 당연히 비밀스러운 문답을 주고받기 위한 행동은 아닐 것이다.
펠디안느는, 저항자 세력은 인드렌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
“시타델은 옛 왕이자 여섯 번째 사도를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
“이곳이 존재하는 이상 옛 왕은 돌아갈 곳이 있고, 시타델이 자유로운 이상 옛 왕을 궁지로 몰 수 없지요. 그러니───”
펠디안느가 단언했다.
“마침내 ‘때’가 되면 선조님의 초월로 이 하늘섬이 이동하지 못하도록 대륙에 고정시켜야 합니다. 세계 연합이 모든 전력을 투사할 수 있도록.”
“시타델을 제한적으로 봉인시켜 연합이 오를 틈을 만들겠다?”
인드렌이 턱을 쓸다가 이내 무슨 계획인지 이해가 간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내 초위 마법으로 이만한 질량을 고정시키는 게 가능할지는 의문이지만, 아예 불가능했다면 너희가 그런 계책을 준비하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구나.”
그가 우려를 표했다.
“우리가 그 ‘때’를 기다리는 사이 대체 얼마나 많은 인명이 스러지고, 또 혼란이 가중될지.”
“이것이 최선입니다, 선조님. 이것보다 효율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테지요. 그리고 전쟁에서 만인의 죽음을 감당하는 것은 필연.”
세간에서 개혁의 선동가라 불린 펠디안느 피어시아 레이트는 소년의 모습인 인드렌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희생은 불가피합니다.”
모든 것은 정해진 수순에 따라…….
* * *
사람들은 매끄러운 언덕을 구르는 공처럼 모든 게 순탄하게 진행되기를 바라지만, 애석하게도 태초부터 세상은 자갈밭이었다.
한 번 튀면 돌이킬 수 없다.
그 변수는 시간이 더해져 이미 모두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세상을 열었다.
아이샤 속 히안테가 숨을 삼켰다.
‘시작된다.’
10대 마탑의 동력원을 완전히 장악하여, 세계수의 권능을 손에 넣은 베르덴이 대륙에 직접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 * *
디아문 마탑의 동력실은 현재 수십 일 동안 완전히 폐쇄된 상태였다.
그 안에서는 7대 마도왕이 동력원을 이용한 특수한 마법진 배열로 사문에 의해 뒤틀린 공간을 안정시키는 고도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후웅.
디아문 마탑의 마법사들이 순간 스쳐 지나간 기묘한 울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도 잠깐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울림이 점점 더 커졌고, 마법적 감각으로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드디어……!”
공간이 안정되고 있다.
셧다운 현상이 끝나 가고 있다.
7대 마도왕───반젤리스 루인 아케나드.
발이 묶여 있던 세계 연합의 마지막 비대칭 전력의 출전이 임박했다.
* * *
델하룬 사문이 폐쇄되고 중앙 대륙으로 넘어온 지 날이 제법 지났다.
쿵쿵쿵쿵쿵쿵쿵쿵쿵!
델하룬에서 옛 왕과 맞붙는 사이에 수인 대부족을 급습하고 도주한 대학살의 수인…… 몇 날 며칠에 걸쳐 놈을 끈질기게 추격하던 거대한 수인이 갑자기 평원과 산맥의 사이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지면에 선명한 족적을 남긴 그가 한순간에 가파른 산을 타고 솟구쳤다.
“찾았다.”
손톱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풍압이 뻗어 나가 구름을 갈랐고, 동시에 구름 너머에서 날개가 달린 그림자가 재빠르게 기동했다.
수왕───안티아스.
대학살의 수인───바르카젤.
바람 소리가 채 닿기도 전에 발차기가 안티아스의 허리에 직격했다. 그 와중에 안티아스가 놈의 발목을 붙잡아 함께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바르카젤의 날개짓보다 더한 완력이 그를 지면으로 내던졌다.
두 명의 수인이 각자 다른 장소에 처박혔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기도 전에 굉음이 일고 지축이 짧게 떨렸다. 서로를 향하여 정면으로 돌진한 사나운 야성이 교차했다.
대참수.
바르카젤의 날개에 가죽이 갈라진 팔과 어깨에서 피가 튀었고, 이어진 발차기가 순식간에 안티아스를 절단할 듯이 해당 상처를 내리찍었다.
그리고 안티아스가 직선으로 뻗은 손아귀로 그대로 바르카젤의 안면을 강타.
콰아아아아앙!
충격파가 거칠게 확산했다.
칠흑의 날개를 활짝 펼쳐서 제동을 건 바르카젤이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수인족 중에서는 극히 드물게 기존 생물과 다른 복합적인 신체 구조를 타고난 수인이 탄생하곤 한다. 너, 그리고 나처럼. 돌연변이와도 같은 육체 능력은 수인족으로서 축복을 받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
안티아스나 바르카젤은 특정 동물에 국한되지 않는 생김새를 지녔으며, 그런 존재들은 최소 한 분야 이상에서 일반 수인과는 격이 다른 능력을 보였다.
“과연 힘 하나는 대단하구나. 수왕 안티아스.”
“도주는 포기했나?”
“사냥감을 충분히 끌어냈으니.”
바르카젤은 안티아스의 추적을 깨닫고 모든 흔적을 지웠다. 본래 따돌리려고 했지만 추적 능력이 성가신 터라 생각을 바꾸었다.
안티아스를 고립시켜 사냥하기로 말이다.
시간을 들여 안티아스를 조력할 전력이 따라오지도 못하게 경로를 어지럽게 꼬았으니, 그를 계속 따라온 안티아스는 완전히 혼자가 된 셈이다.
“가장 위대한 생물이라고 불린다고 했었나? 그리 여겨질 만한 육체이기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없는 시대에서의 이야기지.”
“아, 내 이명이 탐났나? 대학살의 수인.”
안티아스가 조소했다.
“성녀에게 압도당한 주제에.”
“패배한 것은 인정하지. 하지만──”
“한 명의 수인으로서 네놈이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마터면 그 유전자가 수인 대부족에 퍼질 뻔했으니.”
안티아스가 진심으로 정색하더니 마치 식은땀을 흘리는 것처럼 얼굴을 쓸었다.
“성녀에게 개처발린 도태 인자가 내 피에 섞였을 거라고 생각하면 끔찍하군.”
안티아스는 무식하지 않다. 그가 읽은 책만 산을 이룬다. 권모술수에도 능해 상대의 심리를 자극하는 데도 도가 텄다.
재밌을 것 같다고 세계 회의에서 분탕을 일으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바르카젤도 제법 사냥을 할 때 입을 놀릴 줄 알지만 안티아스의 그것은 차원이 달랐다.
타고난 육체를 중시하는 수인에게 유전자는 자존심 문제다.
“지금…… 뭐라고?”
“번식하지 말고 나가 뒈지라고.”
안티아스가 낮게 웃었다.
사냥 시작.
베르덴과 약조한 44일이 지나기 전에 바르카젤의 머리를 취하리라.
* * *
용검과 충돌하면서 초대 마도왕이 내준 검이 일부 손상됐다. 박살 나진 않았다. 다만 그 충격은 계속해서 쌓여 갔다.
그러니 피하는 게 상책이지만 히스릴에게는 그렇게 여유가 많지 않았다.
‘대응이 안 되네. 무구 없이 맨몸이었으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고 죽었겠어.’
초월자들을 압도하고 있던 아칸드의 움직임을 전부 눈으로 익혔는데, 막상 맞붙으니까 몸이 잘 따라 주지 않는다.
위압적인 존재감이 실질적으로 벽을 한 번 더 넘은 초월자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칠 정도라니, 과연 운명의 사도라는 괴물다웠다.
‘하지만, 빈틈이 없진 않아.’
히스릴은 품속에 숨겨 둔 비수를 의식했다.
루기나 혼의 창촉.
그것을 아칸드에게 찔러 넣는 게 초대 마도왕에게 부여받은 역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