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5화 동력원 – 2
바람이 불자 초원이 잔잔히 일렁였다.
세계수는 엘프의 모습으로 다가와 베르덴과 두 걸음 정도를 사이에 두었다.
당혹감은 잠깐이었다.
베르덴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곧 적응했다. 호흡을 길게 다스렸다. 여러 단서를 맞추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이 현상을 이해하려고 했고, 결국 이해했다.
초대 마도왕은 베타와 함께 대수림에서 반영구적인 동력원을 고안했다. 현대에서 무한한 마력을 발산하는 동력원의 기반…….
그 과정에서 초대 마도왕은 세계수의 특성을 깊게 연구했다고 한다.
‘그런가, 그랬던 건가.’
베르덴은 왜 세계수가 동력원 설계에 필요했는지 깨달았다. 세계수와 동력원의 본질은 단순히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세계수가 시작점이었다.
“마탑의 동력원은 당신의 것이었군요. 새로 창조된 것이 아닌.”
10대 마탑의 동력원의 정체는 가장 강력한 금기로 얽혀 있다.
초대 마도왕이 제정한 것이다.
베르덴은 금기에 손을 내민 셈이었지만 그 기이한 기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완전한 정답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세계수에서 비롯된 동력원의 진정한 실체.
초대 마도왕이 동력원으로 완수하려는 궁극적인 목적.
베르덴은 아직 두 개의 열쇠를 얻지 못했다.
세계수가 미소 지었다.
“저는 존재하기 위해서 탄생했습니다. 세계를 품고 있으나, 무엇도 소유하지 않죠. 하지만 베르덴, 그대는 달라요. 이는 선천으로 종속된 것과, 후천으로 자립한 것의 차이입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손끝으로 베르덴의 가슴을 툭 찍었다.
정확히 심장 부위였다.
“근본에서 파생된 것이 완성되면 새로운 근원이 됩니다. 부모로부터 자식이 독립하여 하나의 가정이 두 개의 가정이 되듯이.”
세계수가 속삭였다.
“베르덴, ‘그’ 세계는 온전히 그대의 것입니다.”
싱그러운 초원이 물결쳤다. 바람이 멎자 세계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익숙한 거대한 그림자가 베르덴을 덮고 있었다.
뒤를 돌아봤다.
내면세계에서 보았었던 거대한 나무가 태초의 땅에 터전을 두고 있었다. 마음이 이끌렸다. 천천히 다가가 줄기에 손을 얹었다.
“나의 세계…….”
베르덴은 자신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베르덴은 온몸이 뿌리에 얽힌 채 동굴에 있었다.
동대륙이 잔잔히 흔들렸다.
* * *
마법도시 비렌테를 몰락시키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행정을 온전히 빼앗는 것도 아니니까.
그저 학살할 뿐.
언데드 군단으로 비렌테의 주 병력의 시선을 끌고, 도시 내에 잠입해 수뇌부를 암살한다. 다시 말해 강자 몇 명만 처단하면 도시의 방어 체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머리가 없어진 팔다리는 쓸모가 없어지는 것처럼 모든 집단이 다 그렇다.
마법 협회장과 마법 자주 연대의 리더.
오더스와 셀레스터, 둘 다 죽이면 이곳의 지휘부는 날아가는 셈이고, 오더스만 처리해도 비렌테의 전력에 큰 공백이 생긴다.
마법도시 함락이 코앞이었다.
“……뭐?”
하지만 나크텔은 열매를 수확하기 직전에 멈춰야만 했다. 언데드의 속삭임이 시타델에서의 새로운 명령을 전달했다.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당최 믿을 수 없는지 언데드에게 몇 번이나 사실을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나크텔과 비렌테의 방어진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오더스가 중얼거렸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혹 연합 본부에서 원군이 온 건가? 초월자가?”
“그렇다면 다행이겠습니다만…….”
당장은 그들도 들은 바가 없었다.
나크텔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터라 상황을 유추할 정보가 부족했다. 어쨌든 어떤 변수가 생긴 건 분명해 보였다.
“쯧.”
“……!”
수백 년 전에 암리의 주인이라고 불리며 세간의 두려움을 샀던 나크텔이, 인상을 찌푸리며 오더스와 셀레스터를 비롯한 이들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걸음을 돌렸다.
그를 따라 최상위 언데드들도 어둠 속으로 기척을 감췄다.
비렌테의 마법사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방어진은 거의 무너졌고, 무너지면 곧 초월자와 결전을 벌여야 했다.
승산은 명백히 상대가 더 높았는데 오히려 상대가 선뜻 물러났다.
그리고 먹통이 된 통신 장치를 대신해 도시 지하로 전언이 들려왔다.
“언데드가, 크세리온 제국이 후퇴합니다! 저희가 이겼습니다!”
마법의 성벽을 부술 듯이 몰아쳤던 언데드 군세가 물러나고 있다.
오더스는 계속 가만히 선 채 나크텔이 향한 어둠을 응시했다. 그자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당혹스럽다.
승리를 앞두고 비렌테에서 퇴각한 나크텔도 그와 같은 심정이었다.
“난데없이 후퇴 명령이라니…… 뭐가 어떻게 된 것인가.”
폐하의 어명은 아니었다. 하지만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지시였다. 왜냐하면 퇴각 명령을 내린 주체가 두 번째 하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크텔은 옛 왕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결국 뿌리는 주검의 영광이었다.
두 번째 하인의 명령은 즉각 모든 전투를 중지하고 고대 의식장에서 재집결한 뒤 시타델로 복귀할 채비를 갖추라는 것.
여러 방면에서 이유를 헤아리려 했지만 당최 알 수 없었다. 설마 시타델이 위태로울 리도 없을 텐데, 왜 이 시점에서 전쟁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판단을 직접 내린 것인지…….
‘루네시카 안테르노아,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초월자 나크텔은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은 전조를 느꼈다.
어쨌든, 가 보면 알게 되리라.
* * *
“나크텔과 르카리아에게 제각기 의식장의 좌표를 전달했습니다. 공간 이동이 가능해졌으니 늦어도 하루 내로…… 루네시카 님의 다른 영혼 조각들과 조우할 겁니다.”
“그래.”
“…….”
루네시카와 티아즈라가 어두운 시타델 황성 복도를 거닐었다.
또각, 또각, 또각.
정적과 죽음으로 물든 공허한 공간에서 두 사람의 발소리가 퍼져 나갔다.
티아즈라는 심란해 보였다. 그것은 인생의 방향을 모조리 흔들 진실을 들은 자의 얼굴이었다. 머리로는 받아들였으나, 시선만은 바닥에 떨군 채로 떨림을 거두지 못했다.
루네시카는 서슬 퍼런 날붙이처럼 차갑고 단호한 표정이었다. 예리하게 벼려진 감정이 눈동자를 통해 엿보였다.
쿠웅!
텅 빈 황성의 알현실에 들어섰다.
루네시카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충성심 또한 없었다. 남은 것은 증오와 분노뿐이었고, 그녀는 그걸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부활한 옛 왕에게 깊은 충성과 진심을 바쳤던 길을 지르밟았다.
“…….”
권좌 앞에 당도하자 옆에 놓인 작은 원형 테이블이 보였다.
테이블에는 세계 지도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 위엔 크세리온 제국과 세계 연합의 전력을 상징하는 섬세한 기물들이 놓여 있었다.
세 개의 대륙 곳곳에 자리 잡은 기물의 위치가 곧 옛 왕의 수였다.
루네시카가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모서리를 잡아 내쳤다.
쿠당탕!
세계 지도가 반대로 엎어지고, 기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원형 테이블은 낮은 소리를 내며 굴러가다 이내 멈췄다.
“폐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약속하셨다. 모든 영혼이 고통받지 않는 세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 폐하께서 그리던 신세계였고, 첫 번째 하인 드라벤 르마르크의 이상이었으며, 나, 두 번째 하인 루네시카 안테르노아의 이상이었지. 또한 주검의 영광의 염원이었어. 그 의지는 무려 800년이 넘는 세월에도, 거짓된 빛이 목을 겨누어도 불변했다.”
루네시카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아하하, 이런 희극도 없을 거야. 추구하는 이상을 송두리째 기만당한 아둔한 초월자들이 대체 또 어디에 있을지.”
“…….”
“다시 물을게, 티아즈라 모튼. 후회 없어?”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이치입니다. 그것이 옳기에.”
티아즈라는 그제야 의심과 망설임의 족쇄를 벗어던졌다.
“함께하겠습니다, 루네시카 님.”
우리는 옛 왕에게 물을 것이다. 당신은 정녕 불멸의 세상을 꿈꾼 적이 있는지, 그리고 왜 거짓으로 죽음을 이끌었는지…….
그렇게 대답을 듣고 나면 충신으로서 배신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리라.
티아즈라는 결정을 내렸다. 단언하건대 며칠 내로 복귀할 나크텔과 르카리아도 그녀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이상을 향한 열망을 이용당하는 건 어떤 초월자도 견딜 수 없을 테니까.
“……오직 불멸의 세상을 위해 모든 걸 바쳤으니, 이제 다시 돌려받아야겠지. 이상의 실현에 방해되는 왕 따위, 우리에게 존재 가치는 없어.”
루네시카가 강렬한 살의를 뻗치며 옛 왕의 권좌에 앉았다.
“아칸드를 폐위시킨다.”
반역.
크세리온 제국이 회수한 루네시카의 마지막 영혼 조각이 기억의 봉인을 부수고, 아칸드의 기만에 관한 모든 진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베르덴과 연계하는 내부 분열의 계획까지도 말이다.
시타델의 루네시카는 통신 장치 따위 갖고 있지 않았지만 바깥의 상황은 꿰고 있었다.
당대의 세 번째 하인, 만연의 랑데르크가 병원체를 매개로 삼아 세계 연합과 주검의 영광 사이에서 정보를 은밀히 전달하고 있었으니까.
알파가 통신 장치로 다른 루네시카와 접촉하면, 그 루네시카가 랑데르크를 통해 시타델의 루네시카에게 정보를 넘기는 구조.
아칸드는 스칼룸 단층협에서 압도적인 격전을 벌인 끝에 퇴각했다. 시타델로 돌아오지 못했으니,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일 터.
지금이 적기였다.
쿠웅.
알현실이 닫혔다. 그 안에서 초위 마법이 연산됐다. 초월자들이 배신감으로 옛 왕을 새롭게 맞이할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깥과 이어진 감각을 철저히 끊고 마도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베르덴의 안배는 적진의 심장부에 꽂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그때였다.
쿠구구구구구…….
실페라 자치령에서 이동하고 있던 시타델이 갑자기 공간을 뛰어넘었다.
* * *
약 수십 일에 걸친 반젤리스의 활약으로 셧다운이 해제되고, 아칸드가 스칼룸 단층협에서 연합군의 벽을 끝끝내 넘지 못하고 후퇴하면서 연합 본부에 새로운 활기가 돌았다.
여러 소식이 이어졌다.
정체불명의 비행정을 타고 나타난 인물이 프로하스 사문을 단신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문을 수호할 사령관이 죄다 토벌되었다고 하나, 거인 언데드의 강함을 생각해 보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는데.
그 인물은 주저 없이 곧장 사문 내부로 들어가, 다른 사문들과 다르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근원체를 찾아 이동했다.
연합군은 그의 발자취를 쫓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산으로 가득한 사문 내부에서 결국 그를 놓쳤다고 했다.
알파와 베타는 프로하스 사문의 입구만 지키라고 명령했다.
그 외에는 절대 관여하지 말라는 추신도 덧붙여서.
“동대륙 제2사문. 반젤리스 폐하께서 추가 증원과 함께 공략을 시작하셨습니다. 마울러께서는 먼저 공간 마법진으로 이에 합류하셨으며, 마스터와 교황께서는 제1토벌군단과 제2토벌군단과 함께 하루 내로 전장에 당도할 예정입니다.”
“드디어…… 드디어 끝이 보이는군요.”
현재 희생 끝에 9개 중 5개의 사문이 폐쇄됐다.
프로하스 사문과 동대륙 제2사문마저 끝내면 이제 두 개밖에 남지 않는다.
마경과 옛 왕.
적룡의 출현 탓에 마경 토벌군단이 어떻게 됐는지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언데드가 나오지 않는 걸 보면 공략을 이미 끝냈거나 현재 진행 중일 가능성이 있었다.
정보가 부족해서 희망을 품었다. 믿음으로 불안을 지웠다.
“비렌테를 비롯하여 일부 도시에서 언데드 군단이 물러났다고 하네. 게다가 주검의 영광의 초월자까지. 어찌 된 영문인지 조사해야겠어.”
“아르나크 제국 국경에선 리반데일 대공 저하께서 제5사령관과 충돌 중.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제국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 남은 지원을 보내 쐐기를 박는 것은 어떻습니까?”
[제라클 황제가 필요 없다고 합니다.]
“아, 넵.”
전장은 여전히 치열하나 그래도 전반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명치를 누르는 압박감이 조금이나마 가시며 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크세리온 제국은 현대 역사에 기록될 최대, 그리고 최악의 악(惡)이었다. 국제 사회가 연합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결국 승패가 갈렸다.
크세리온 제국의 비대칭 전력은 죄다 날아갔지만, 세계 연합은 비교적 건재했다. 전면전이든 뭐든 패배할 확률이 현격히 낮아진 것이다.
“후우…….”
페일이 손수건으로 늘어붙은 땀을 닦아내며 복도로 나왔다. 청량한 공기와 시원한 바람이 필요해 창가에 똑바로 섰다.
초월자도 감지하지 못하는 공간.
수천 명의 병력을 양성할 수 있는 규모.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거대한 하늘섬.
굴곡이 완만한 녹빛의 대지.
그 탁 트인 정경.
고산 지대인 하이랜디아의 협곡 끝──고대의 문 너머에 있는 이곳은 연합의 본거지로 삼기에 이보다 적합한 곳은 드물 것이다.
본거지 말고 휴양지로 써도 좋을 만한, 잠깐.
“……?”
페일의 시선이 고정됐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상공에 거대하고, 또 어두운 하늘섬이 소리 없이 놓여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즉각 이해했다.
시타델.
페일이 살면서 가장 빠른 속도로 통제실을 박차고 들어갔다.
“엎드려!!!!! 시타델이다!!!!!!!”
존댓말을 할 여유도 없었다.
모두가 눈을 부릅뜨는 사이 베타가 마력의 장막을 전개했다. 직후에 시타델에서 날아온 거대한 쇠사슬이 연합 본부를 직격했다.
* * *
시타델에는 랑데르크의 병원체가 상주하고 있었지만, 시타델의 위치 정보와 이동 방향을 매번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산맥을 보고 대륙 어디쯤인지 간파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시타델이 하이랜디아로 <전이>한 것은 예고도 없었고,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던 터라 정보를 전달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발각됐는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콰아앙! 콰아앙! 콰아앙!
시타델에서 연이어 두께가 수백 미터에 육박하는 쇠사슬이 쇄도하여, 연합 본부로 지정된 고대 성채를 뚫고 들어갔다.
이윽고 죽음의 기운이 명멸하더니 모든 쇠사슬이 일제히 폭발했다.
────────────!
세계 연합 본부가 궤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