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7화 총집결 (2)
검성 프리발트가 무릎을 꿇은 채 어깨를 들썩이며 연신 호흡했다. 영락없는 생존자의 모습이었다. 몸에 여러 체액이 묻어 있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무래도 사문 폐쇄 작전이 실패한 듯했다.
‘큰일이다……!’
마경에 생겨난 사문은 옛 왕을 제외한 사문 중에서 위험도가 가장 높게 책정됐다.
하여 마경 토벌군은 소수의 최정예로 구성됐는데, 그 대부분이 복귀하지 못했다면 세계 연합의 전력 한 축이 아예 날아간 셈이었다.
안 그래도 전황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어 더욱 좋지 않았다.
일단 자초지종을 들어야 했다.
본대는 어떻게 되었는지.
본대를 뒤따라간 지원대는 어떻게 되었는지.
마경을 경계하면서 프리발트와 거리를 두고 조심히 다가갔다. 마경에는 기생 생물이 있다. 당장 언데드가 아니어도 확인이 먼저였다.
“검성, 괜찮으십니까? 나머지는,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
프리발트는 대답 대신 기진맥진한 얼굴로 뒤쪽으로 턱짓했다.
쿠웅.
마경의 경계 너머에서 굉음이 들려오더니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곧바로 힘을 발산하며 대응하려고 하자 뭔가가 날아와 널브러졌다.
울대부터 가랑이까지 갈라진, 그 안쪽에 수천 개의 이빨이 쫙 돋아난 육족보행 이형종의 시체였다. 누가 봐도 마경에 서식하는 생명체였다. 머리가 터져 죽은 듯했다.
“설마…….”
여러 기척이 다가왔다.
그건 괴물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면면을 확인한 연합군의 눈이 점점 커졌다. 부상을 입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살아남지 못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마경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지쳐 쓰러지거나 안도하는 반응을 보였을 뿐, 그 얼굴은 결코 실패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쿠웅…… 쿵…… 쿵…….
마경 내부에서 불규칙적인 굉음과 진동이 이어지는 가운데 연합의 마법사가 말했다.
“사문은?”
이자벨라가 답했다.
“폐쇄했어요.”
이번에는 그녀가 물었다.
“대륙은요?”
마법사가 대답했다.
“마경을 포함해 여섯 개의 사문이 폐쇄되었으며, 현재는 시타델을 공략하는 중입니다.”
“……!”
크세리온 황성을 공략?
마경에서 곤욕을 치르는 동안 세계 연합은 승기를 잡은 모양이었다. 다만, 희소식치고 마법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난 뒤에.
“보다시피 저희 측에 부상자가 많습니다.”
“적룡 사르칸드라로 인해 본래의 군영은 잿더미가 되고 사상자가 많아 최후방의 주둔지로 후퇴했습니다. 그리로 안내해 드리죠.”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옮겼다.
이자벨라 너머의 마경에.
“그런데 저 소리는 대체……?”
“추적대가 있습니다.”
“예? 사문이 폐쇄됐는데 추적대라니요?”
“언데드는 아니에요.”
이자벨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프리발트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도 아예 질려버렸다는, 악몽을 꾼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차라리…… 차라리 언데드가 낫죠.”
수십 일 동안의 장정을 요약하자면, 사문을 폐쇄한 뒤 어떻게든 합류하는 데 성공한 생존자들은 두 개의 부대로 나뉘었다.
이자벨라와 마탑주들이 후퇴를 담당해 부상자들을 옮겼고, 초월자급 군단의 최고 전력이 그들의 호위를 맡았다.
마의 공포, 메이아, 레그리트, 셰로엘, 참극 토끼, 아세트로 등은 마경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 끔찍하게 뒤틀린 존재들을 상대했다.
놈들은 단순히 강하다거나 위험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르칸드라의 장난감.
그것은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됐다. 지성체의 존엄을 그렇게나 짓밟는다는 것 자체가…….
* * *
중앙 대륙의 템플과 포르메네 자유국 사이에 세계 연합 최후방 주둔지가 존재한다. 옛날 전쟁에 쓰였던 요새 도시를 기반 삼은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특히 치료소가 북적거렸다.
“꺼억…… 헉…… 꺽…… 헉……!!!!”
“포션! 어서 포션 가져와!!”
전신에 화상을 입은 이가 발작했다. 사르칸드라의 화염에 당한 희생자였다.
신체에 스며든 적룡의 열기는 자연적으로 바깥으로 빠지지 않고 시간에 따라 점진적으로 더 깊이 내부를 파고들어 갔다.
마치 칼을 살갗에 대고 서서히 저미듯 장기를 향해 나아가는 것 같아, 치유의 기적으로 회복시켜도 금방 화상이 다시 번졌다.
근본적으로 칼날을 제거하지 않는 한 상처는 계속 생겨날 수밖에.
한기에 관련된 연금술 재료들로 제작한 냉기 저항 포션으로 화염 침식 증상을 완화할 수 있었지만, 이는 겨우 속도만 늦출 뿐이었다.
그마저도 포션을 거듭 복용할수록 효과가 점차 감소했다.
“끄륵…….”
발작이 멈췄다.
사인은 소사(燒死)였다.
사르칸드라의 불길은 전염성이 없는 불치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르칸드라의 습격이 있었던 약 1세기 전의 기록을 참고하면 치료 대책은 하나밖에 없었다. 화상 부위를 전부 도려내는 것. 화기(火氣)를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극단적인 수단이었다.
인간을 기준으로 해 피부의 3할 아래, 동시에 2도 화상 아래면 외과적 수술과 빛의 기적 그리고 포션 치료를 병행해 구명이 가능하다.
수인족은 기적을 받지 못하지만 자체적인 생명력이 뛰어나 포션만으로도 그와 같은 부상 정도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다.
말인즉슨 피부 표면적의 3할 이상이 약 3도 이상의 화상으로 덮였으면 살릴 수 없다. 게다가 열상 정도가 어떻든 간에 흡인 화상의 경우에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방치하면 방치할수록 생존 확률은 급격하게 떨어진다.
그런데 사르칸드라에게서 살아남느라 그 자리에서 응급처치도 받지 못하고 최후방으로 이송된 생존자가 대부분이었다.
“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꽉 잡아요! 마법사! 어서 정신 마법으로 진정시켜 주세요!”
베르덴이 암흑가 로아프라에서 구출한 남매 중 한 명인 샤를로트가 다른 성직자들과 함께 힘껏 환자를 억눌렀다.
정신계 마법사가 당장 그를 기절시키려던 순간 전신 화상을 입은 환자가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 체내의 기를 폭발시켜 자살했다. 환자는 고위 무투계 전사였다.
부르르…… 환자였던 고깃덩어리가 축 늘어졌다.
샤를로트는 순간 패닉에 빠졌지만 끝끝내 감정을 삼키고 다른 환자를 돌봤다. 그래야만 했다. 남동생과 암흑가로 납치되어 성대가 잘려 나갔을 때보다 지금이 더 아팠다.
한편 샤를로트의 스승이자, 그녀의 성대를 치료해 준 성직자 카를로는 다른 전장에 투입되었다가 이곳 최후방으로 옮겨졌다.
그는 언데드 군단과 충돌한 이후 정신병이 생긴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어…… 그의 영혼은…… 이미 루아스 여신의 곁으로 갔을 텐데…… 안 돼…… 안 돼…… 대체, 왜, 언데드가……?”
현실이 지옥인가.
지옥이 곧 현실인가.
전쟁과 죽음, 그리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은 몸과 마음을 죽였다.
한편.
“여기 포션 가져왔습니다!”
샤를로트의 동생 에이든은 전쟁에 자원한 아카데미 예비 입학생으로서 최후방 진영에서 여러 가지 잡일을 맡았다.
1~2위계 마법사들은 유의미한 전력으로 취급받지 못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워낙 경황이 없는 터라 누구도 에이든을 신경 쓰지 않았다.
에이든은 묵묵히 물자를 옮겼다. 그러다 끈이 풀린 천막 너머에서 호흡기를 착용한 환자가 한 명 보였다. 중앙 대륙 4강이자 브라오닉 스트롬의 제자, 그는 푸른 공포, 바리건트였다.
‘저 사람…… 죽어 가고 있어.’
바리건트는 적룡의 숨결에 간접적으로 휘말려 전신 화상을 입었다. 곧장 치료를 받았다면 살 수 있었으나 때를 놓쳤다.
최후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적룡이 남긴 저주가 골수까지 미쳤다.
이데라트 연맹국에서는 그를 살리려고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지만 실패했다. 사실상 가망이 없었다.
숨이 끊기면 천으로 얼굴을 덮고, 희생자의 명단에 바리건트라는 이름을 올린다…… 그뿐인 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바리건트는 절반쯤 눈을 뜨고 있었지만 미동하지 않았다.
체념이었다.
이미 화상은 장기까지 물들인 터라 죽음을 피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적어도 죽을 때만은 편안하고 싶어 수술을 포기했다.
시체가 될 고위계 마도사.
새파랗게 어린 1위계 마법사.
천막에는 둘밖에 없었다.
‘베르덴 님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밝히라고 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그래…… 맞아. 실패해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 베르덴 님이라면 그렇게 말씀하셨을 거야.’
게다가 왠지 잘될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에이든은 속으로 결심하더니 바리건트에게 천천히 손을 얹었다.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직후 에이든의 특이 형질이 발현됐다.
치유의 마력.
에이든의 마력 자체에는 치유 능력이 깃들어 있다. 이는 현대 마법계에서 보고된 적이 없는 특수 사례에 속했다.
손끝에 집중된 마력의 빛이 바리건트에게 닿은 지 몇 분이 지났다.
바리건트의 마력이 요동쳤다.
“쿨럭!!!”
바리건트가 토혈했다. 발작하듯이 상체를 일으킨 그가 연신 피 섞인 기침을 토해 냈다. 쿨럭, 쿨럭! 핏줄이 바짝 선 눈동자가 에이든을 향했다.
“어, 엇…… 죄, 죄송해…….”
“바리건트 각하!!”
마침 사람이 오다가 기침 소리를 들었는지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에이든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서둘러 다른 천막 틈으로 도망쳤다.
“각하……!”
다급히 뛰어온 연맹국의 마법사는 이내 바리건트의 모습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어코 예상했던 때가 온 것이다. 바리건트는 자신이 토해 낸 핏물로 얼룩져 있었다.
누가 봐도 죽음의 징조였지만 바리건트의 목소리는 전보다 생생했다.
“마력이…… 내 마력과 동조해, 치유 작용을……?”
내부를 관조해 보니 장기와 뼈에 미친 불의 기운이 물러갔다.
물론 이는 일시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사경을 헤맬 터.
“결정을, 번복하겠다. 수술…… 큽, 수술을 시도해 보지……!”
“각하, 하지만 그 몸으로는.”
“가능하다…… 지금이라면.”
바리건트의 눈빛은 생존 욕구로 번들거렸다.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엄청난 고통이 따르겠지만 본인이 하겠다고 했기에 수술이 진행되었다.
사실 그런 상태에서도 수술이 가능한지 실험적인 정보가 필요한 터라 마법사들과 성직자들은 거절하지 않았다.
수술대 위로 올라간 바리건트는 생각했다.
‘누구냐, 그 마법사는.’
위계가 아주 낮았으니 어떤 특수한 마도의 능력은 아닐 터였다.
특이 형질인가, 혹은 고대 혈통?
둘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해 보였지만 치유의 마력은 듣도 보도 못했다.
‘나이는 기껏해야 스무 살 언저리…….’
바리건트는 에이든의 이름을 몰랐지만 그 얼굴은 똑똑히 기억했다. 살아남는다면 마법계 후배에게 빚을 진 것이니.
그렇게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친 뒤 의식을 뚜렷이 회복하고, 침상에 누운 채로 육체 안정을 되찾고 있을 무렵이었다.
임무를 마친 마경 토벌군단이 최후방에 당도했다.
그리고.
바리건트처럼 거동이 가능한 부상자들은 전장으로 향할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들을 이끄는 건 역시 초월자들이었다.
“사르칸…… 드라…… 어디…… 로…… 갔나…….”
“포, 포르메네 자유국에서 레프라기움 마탑주님과 충돌했다고 합니다. 정보에 의하면 완전히 불바다가 되어서…… 접근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마의 공포─데미안─은 자유국이 있는 남쪽으로 고개를 향했다가 발을 돌렸다. 그는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장소에서 별도로 아세트로, 레그리트와 함께 모였다.
“방금 다리시아의 말로는, 윗분께서 이미 대륙에 내려오셨다더군. 예상대로 사문이 인류의 위험이라고 판단하신 모양이다.”
“…….”
“뭐, 정말인가? 윗분께서 직접?”
“그래, 그리고 방주의 함대는 렌 발하그 장로께서 지휘하실 예정이고. 우리는 관계자임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전쟁에 임하면 된다.”
아세트로가 단언했다.
“지금부터는 일방적인 섬멸전이다.”
시타델의 공성전으로.
* * *
신의 사도를 결정짓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신을 대변할 수 있는가.
* * *
동대륙 남부에 마지막 남은 사문을 폐쇄하기 위해 제1토벌군단과 제2토벌군단의 주 전력이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부득이하게 전투 속행이 불가능한 인원은, 남부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점령한 하스토우 요새에 남았다.
그중에서 오로지 에온의 소규모 비행정 한 척만이 에스티리아 왕국으로 향했다. 선체에 시신 한 구가 보관되어 있었다.
다름 아닌 제8사령관에게 심장이 관통당해 사망한 카인이었다.
“…….”
하레스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메마른 눈물 자국이 흉터처럼 남았다.
소사이어티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십수 년 동안 보아 온 카인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카인의 창백한 피부를 믿기 싫었다.
시리도록 참담했다.
무엇보다 카인의 희생을 감당해야 했을 유니아의 심정을, 카인을 자식처럼 키운 세 현자가 극복해야 하는 슬픔을 가늠할 수 없었다.
유니아는 어떻게든 카인을 선배에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마치 그렇게만 하면 카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처럼 희망 섞인 목소리로…….
“베르덴 폐하.”
하레스는 그분보다 더 위대한 마법사를,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 초대 마도왕이 살아 돌아온다고 할지언정 변치 않을 마음이었다.
그는 블랙 아워 찬탈전, 보헤미른 마탑 전면전 등 전설과 함께했다. 한 명의 마법사가 세계를 휘어잡는 삶의 궤적을 두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 힘으로 죽은 인간의 부활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솔직히 회의적이다.
그건 마법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지 않은가?
절박감이 만든 헛된 희망.
절망을 압도하는 믿음.
도대체 그 무엇이 유니아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는지 모르겠지만, 하레스는 그녀가 현실을 받아들일 때까지 뭐든 할 생각이다.
그는 소사이어티의 일원이며, 대마력을 하사받은 에온의 마법사다.
그리고, 사도가 강림했다.
“모든 삶은 천칭(天秤)과도 같고, 선택은 무게추와 같습니다.”
“……?!”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레스가 번개처럼 지팡이를 빼 들었다. 어떠한 기척도 느끼지 못한 탓에 식은땀이 확 쏟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적의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아름다운 여인과 면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레스는 그녀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엘로리스……?”
“선택에 따라 균형과 불균형 사이에서 모든 존재는 비로소 자신의 무게를 알게 되죠. 미래에 얻을 영원과 현실의 찰나. 갈림길에서 카인은 기꺼이 희생의 길을 걸었습니다.”
엘로리스가 앞으로 나아간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압도감과 분위기에 하레스는 그녀를 만류하지 못했다. 그저 가만히 서서 눈동자로 그녀를 좇을 뿐이었다.
엘로리스가 깨끗하고 새하얀 천으로 덮인 카인 앞에서 기도했다.
“샛별의 여신께서 가로되, 한 줄기 작은 빛으로도 모든 이를 위할 수 있고, 버려진 자들의 신께서 가로되, 희생은 자처하는 것.”
잿빛의 신성력을 품은 샛별의 사도가 아주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장엄하고 숭고한 의식인 듯, 그리고 먼저 사도가 된 존재로서 후배를 이끌듯이.
“안식에서 멀어지십시오, 희생의 사도───카인.”
잿빛의 섬광이 폭발했다.
……!
눈부신 광채가 순식간에 하레스의 시야를 회색의 빛으로 물들였지만, 이상하게도 엘로리스와 카인의 모습만은 또렷했다.
카인의 목에 걸려 있는 [새벽의 별빛]이 발광했다. 샛별의 신물이 신성력에 반응하더니 마치 동화되듯이 차츰 진정되었다.
규칙적으로 확산하는 은은한 파동이 새로운 사도를 맞이했다.
카인이 [새벽의 검]을 움켜쥐었다.
* * *
온몸을 보호하듯이 부드럽게 덮고 있던 뿌리들이 저절로 물러났다. 의식을 잃은 멜라드, 마우펠, 시엘을 지나쳤다.
도중에 통신 장치를 하나 챙겼다.
바깥으로 나오자 편안한 얼굴로 쓰러진 제니아와 에네트가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과 비교도 안 되게 울창해진 숲과 거목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동대륙이 보였다.
“…….”
베르덴은 심신을 관조했다.
마도는 진정됐다.
엘릭서가 그 과정에서 소모되었는지, 아니면 이제 엘릭서로는 완벽하게 회복하기에 부족한 건지 파멸의 흔적이 육신에 일부 남아 있었다.
오히려 좋다.
한계와 한계 너머, 그 경계야말로 베르덴에게 가장 자극적인 촉매였으니까.
지금이 최대 전력을 발휘하기에 용이했다.
후웅.
통신 장치로 채널을 연결했다. 며칠이 지나서 전황은 또 달라져 있을 터였다. 세계 연합군의 다급한 통신을 잠시 엿들어 정보를 취합했다.
‘그렇게 됐나.’
즉각 판단을 내렸다.
……!!!
……!!
베르덴의 존재감이 잠들어있던 다섯 명을 한꺼번에 깨웠다. 신성! 동굴에 있던 인원들이 서둘러 바깥으로 나온 순간이었다.
<게이트>
푸른 마력이 중앙 대륙으로 이어진 공간의 틈새를 열어젖혔다.
“전쟁이 길었다.”
대마력으로 의식을 치르기 전의 불안정한 상태와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괜찮냐고 물을 것도 없었다.
“이만 끝내지.”
에온의 정점이 그곳에 있었다.
* * *
여섯 번째 사도는 버려진 자들의 신에 의해 떨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