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1화 세계 회의: 진실 서약 (4)
초월적 존재란 무엇일까.
누구는 죽음마저 마다하지 않고 자신만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인간계 초월자를 말할 것이며, 그리고 누구는 드래곤처럼 태생부터 차원이 다른 초월종을 떠올릴 것이다.
또 어떤 이에게 초월자는 단순히 초월적인 힘을 지닌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각자마다 정의가 다르다.
초월‘적’이라는 표현은 언뜻 분명하면서도 사실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런 두루뭉술한 용어엔 주관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베르덴의 관점에서 초월적 존재는 특정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별격의 개체.
그 판단의 척도는 순수한 강함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절개를 지닌 망치, 그하룬.
그하룬은 일반적인 드워프와는 비교가 안 되는 막강한 완력과 저항력을 자랑하지만 그래도 맨몸으로 초월자를 어찌할 수 없다.
둘 사이엔 전투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의 극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의력과 손재주 등의 측면에서는 완전히 반대다. 전설적인 드워프의 제작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영역은 명백히 어떤 상한선을 벗어난 초월의 경지에 닿아 있다.
질서의 종말, [인테리스].
광검, [실렌다르].
지배의 선고, [엘데론].
이렇듯 결과물이 증명한다.
그하룬은 인간 종족의 초월자와는 다른, 드워프 종족의 초월적 존재다. 실제로 그하룬의 수명 또한 드워프 평균의 두 배를 넘은 지 오래다.
그하룬의 형인 제라딘마저 명줄이 어떻게 그리 긴지는 의문이지만.
그렇다면 벨디른 공화국의 유골룡은 어떨까.
유골룡(遺骨龍)은 본래 드래곤이 가진 능력들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언데드라고 하지만, 그 힘은 모두가 봤다시피 격이 달랐다.
당시 준초월자였던 베르덴조차 많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생사를 넘나든 끝에 겨우 토벌할 수 있었을 정도로.
특히 서대륙에 있던 성녀의 조력이 아니었다면 패색은 더욱 짙었을 것이다.
초월 미만의 존재에게 절망과 무력감을 안겨 주는 위력을 가진 개체.
그래서 유골룡은 초월적 존재다.
반면에…….
부족한 재능으로 초월을 넘보았던, 에스티리아 왕국의 궁정 마법사단장이었던 광염(狂炎)의 레오닐 베르타나스는 애매했다.
특이 형질의 마력회로를 이용해 마녀의 심장을 자신의 스태프에 연결한 레오닐은 마력을 증폭하여 6위계 극점을 돌파했다.
암월의 꿈 없이도 자신의 노력으로 초월에 닿은 것이다.
하지만 억지로 끌어올린 경지는 불완전했고, 또 불안정했다.
굳이 말하자면 거짓된 초월자라고나 할까.
레오닐은 방심 탓에 에스퍼렌사 공작의 검기에 손바닥이 뚫렸고, 시종일관 준초월자인 베르덴에게 압도당하다가 기껏 초위 마법이랍시고 발동한 화염 마법조차 초신성에 파괴당했다.
한없이 어설프다.
레오닐의 초위 마법은 절대적인 완성도가 극도로 떨어졌다.
하긴 초위 마법을 구상하고 구체화하고 구현하는 과정을 완전히 생략하고 오직 본능만으로 내던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래도 엄연히 초위 마법으로 분류할 수는 있긴 하겠지만…… 베르덴의 <엔드베일>과 다히트의 <무암>, 그리고 발로크의 <트리슈라> 등에 감히 비할 것이 못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레오닐에게 광기는 있을지언정 이상(理想)은 없었다.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벽을 넘는 게 일생의 목적이었으니까.
일시적으로나마 목표를 이룬 그에게 남은 거라곤 자기만족뿐이었다.
초월 한참 아래의 존재에게조차 마음을 꺾게 할 만한 차이를 보여 주지 못했고.
초위 마법은 누더기처럼 조잡했으며.
목숨을 수단으로 사용해서라도 이룩하고 싶은 이상도 없었다.
베르덴은 그런 이유로 레오닐을 초월적 존재에 포함할 수 없었다.
만약 초월이란 경지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면 달랐겠지만, 초월을 이해한 현 베르덴의 기준으로는 그러했다.
세계 회의장에 모인 초월적 존재들은 레오닐과는 명백히 다른 차원에 있다.
최초의 마탑주이자 4인의 키론다르 중 하나인 텔로르는 나름대로 이상을 가졌고, 그 경지 자체는 초월의 반열이었다.
그러므로…….
유골룡.
다히트 웨스로엘.
발로크 베시아스.
텔르로 크렌드로스.
이슈르.
베르덴이 ‘직접’ 마무리한 초월적 존재는 총합 다섯이다. 진실의 서약은 이런 베르덴의 주관적인 판단을 긍정했다.
“다, 다섯?”
“다섯이라고?”
“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숫자에, 그리고 그게 진실이라는 사실에 곳곳에서 짤막한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초월자지만, 동급의 존재와 사생결단까지 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런데 다섯??’
인드렌이 실수로 흘린 와인을 처리하고는 멍하니 손가락을 접었다.
유골룡, 그리고 암월.
손가락은 두 개만 접혔다. 다른 세 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베르덴이 대체 어디서 누굴 죽였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섭리자, 라인델, 아세트로, 세렌디아를 제외한 참여자들이 놀라거나 경악하거나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이그나시아는 발로크 베시아스를 제외하고 또 베르덴이 누굴 죽였는지 알지 못했다.
그때, 해당 질문을 던진 마스터가 말했다.
“유골룡과 다히트 웨스로엘 말고도 셋이나 더 있었다니. 도대체 언제 그런 자들을 찾아 처리한 건진 모르겠지만, 그보다도 이 세상에 제가 인지하지 못한 초월적 존재가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초월자의 규율을 잊은 건──”
“아예 인지하지 못한 건 아니지. 오래전 일이라 신경 쓰지 않았을 뿐.”
“네?”
“진연(盡連), 산디른 파엔.”
약 1세기 전에 마스터가 손수 항상성을 부수고 불굴로 만들었던 초월자가 거론되자, 마스터가 순간 동요했다.
“그자가…… 아직도 살아 있었나요?”
“살아 있었지. 망가진 항상성과 신체 결손을 거의 완벽하게 회복한 채로.”
진실.
“결국 죽었지만.”
또, 진실.
베르덴은 자신이 산디르 파엔을 죽였다고 말한 적 없었다. 결과만 말했고, 진실의 서약은 그 결과만 판별했다.
극명하게 드러나는 진실과 거짓은 의도에 따라 인과를 어지럽힐 수 있다.
서약의 참여자들은 과거 실종된, 필시 죽었다고 여겨 왔던 무투계 초월자가 여태까지 연명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가 베르덴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잘못된 정보를 얻었다.
중요한 건 또 다른 초월자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생긴 것.
여기서 베르덴이 쐐기를 박았다.
“눈에 보이는 게 다일 거라고 생각했나?”
“……!”
“세상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
베르덴은 의미심장한 문장을 남기며 섭리자에게 눈길을 향했다.
“세렌디아, 그리고 벤디에 카에나르. 이로써 나는 연속으로 두 번의 질문에 대답했다.”
“베르덴이 열한 번째 규약을 충족했으므로 이후 질문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아직 베르덴은 질문 기회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주사위 눈금에는 여전히 포함된다.”
섭리자가 손짓했다.
“질문이 끝났으면 차례를 넘기도록.”
마스터가 잠시 머뭇거리며 거대한 주사위에 손을 향했다. 베르덴이 밝힌 진실은 그녀에게 깊은 사색을 강요했다.
제라클 황제와 일부 초월자들도 골몰히 상념에 사로잡혔다.
‘……유골룡, 다히트 웨스로엘, 발로크 베시아스, 키론다르, 이슈르. 분명 이렇게 다섯일 텐데.’
키퍼, 아세트로 올딘은 베르덴의 그간 행적을 알고 있었기에 직접 들은 적은 없어도 다히트만이 아니라 발로크까지 그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그리트에게서 침묵의 사막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기도 했다.
‘대체 산디르 파엔은 어디서 나온 거냐.’
그런데 산디르 파엔과 베르덴에게 접점이 있었다는 정보를 접한 적은 없었다.
방주의 일원으로서, 베르덴과 한편인 아세트로도 혼란스러웠다.
* * *
마경 속 기생의 대악마.
주검의 영광.
과거의 초월자.
진실이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실타래가 뒤엉키는 듯하다. 자신의 권역만을 신경 써 온 초월자들은 그런 기분을 느꼈다.
툭.
마스터가 기운으로 주사위를 끌어당기고는 손끝으로 툭 쳤다. 부드럽게 낙하한 주사위가 정확히 네 바퀴 굴렀다.
지금까지 그러했듯 구르는 도중 각 면에 새겨진 눈금이 변화했다.
1부터 15까지의 숫자 중, 이미 나온 5, 8, 7, 4를 제외한 값 하나가 나왔다.
“9번, 붉은 화산 클랜장, 아르쿨. 질문하라.”
“성녀.”
아르쿨이 묻는다. 그는 이기적인 드워프 중에서 가장 이성적인 난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드워프를 대표해 나온 것이다.
“그 옛 왕의 신체 부위들은 어디에 있소?”
“그건…… 거부권을 쓰겠습니다. 정보가 이렇게 외부로 새어 나갔다간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군.”
아르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더 추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답변을 거부한 이상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딱히 미련은 없다.
아르쿨이 서약에 참여한 건 순수하게 드워프를 위해서였다. 진실의 서약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정보력에서 타 세력에 밀린다는 뜻이니까.
드워프도 무대 위에 오를 때다.
아르쿨은 그런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진 채 다음 질문 대상을 정했다.
종족을 대표한 자로서.
“수왕, 당신은 일부러 세계 회의에서 분란을 유도하고 있는 거요?”
수왕이 즐겁게 답했다.
“거부권을 쓰지.”
“……!”
성녀가 흠칫했다. 수왕이 거부권을 썼으니 다음 질문엔 반드시 답해야 한다. 그 기회를 다른 참여자가 가져가는 걸 두고 볼 수 없다.
주검의 영광에 대한 정보가 어디서 나왔는지 반드시 알아야 했다.
수왕은 그런 성녀의 반응을 보면서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악취미다. 일부러 거부권을 씀으로써 성녀를 초조하게 만든 것이다.
“내가 질문을 거절한 건 나도 내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더 즐거운 게 있다면 그걸 찾겠지. 그런데 이게 왜 궁금한 거지?”
“그에 답변할 의무는 없지만…… 그래도 한마디 하자면. 만약 당신으로 인해 세계적인 전쟁이 일어나 드워프가 휘말린다면 한 가지 결심을 하기로 했소.”
아르쿨이 공언했다.
“당신의 야성을 쳐부술 무구는, 우리 드워프가 만들겠다고.”
* * *
수왕은 호기심을 내비치며 나지막이 감탄사를 흘렸다.
“호오.”
“당신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요. 세상을 전란에 휩싸이게 한 존재는 반드시 드워프의 무구로 처단될 것이오. 이 자리에서 약조하지.”
아르쿨은 대규모 전쟁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의 신체적 힘은 별 볼 일 없지만 드워프가 적이 되면 상당히 까다로워진다.
괜히 드워프가 4대 인간종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게 아니다.
“또다시 질문이 거부됐으니 다시 질문 대상을 결정하겠소. 마스터.”
이번에 아르쿨은 개인적인 궁금증까지 담아서 질문했다.
“과거 드워프 종족이 잃어버린 보물 중 일부가 당신에게 있다고 하던데. 혹시 사실이오?”
“예.”
진실이었다.
후웅.
마스터가 보란 듯이 허공에서 소지한 무구 중 하나를 소환했다. 그녀는 모든 무기의 달인이자 무기 수집가이기도 했다.
고등을 넘어선 전설적인 룬 문자가 박힌 대검이 모두의 눈동자에 반사됐다.
아르쿨이 중얼거렸다.
“……[룬벨라르].”
“먼 과거 드워프 클랜을 거부하고 다른 대륙에 자신만의 드워프 왕조를 세운, 어리석은 난쟁이 왕이 제작한 룬 무기. 드워프가 소유권을 주장해도 상관없지만 반환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요구를 할 생각은 없소. 이미 무기는 주인을 찾았으니.”
질문은 그걸로 끝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평화로운 문답이었다.
터벅, 터벅.
아르쿨이 직접 회의장 중심으로 걸어가 주사위를 들었다. 난쟁이가 던진 그것이 벽에 한 번 부딪치고는 다시 중심으로 돌아왔다.
“6이로군.”
“6번, 키퍼, 아세트로 올딘. 질문하라.”
본래 정보 수집도 겸해 베르덴을 은근히 도와줄 생각이었던 아세트로는, 우선 개인적인 흥미를 채우기로 했다.
일단 베르덴은 엘프 덕분에 진실의 서약에서 벗어난 상태였으니까.
“다크워튼 마탑주.”
“…….”
“너는 ‘금기(禁忌)’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 * *
‘대단하군.’
베르덴은 제법 놀랐다.
아세트로가 방주 내에서 지식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금기라는 단어를 접하고 라인델을 향해서 질문을 던질 줄이야.
죽음의 금기.
‘당신’의 금기.
…….
이 세계의 금기.
금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쉽사리 입에 담지 않았겠지만, 방주의 정보력이 거기까지 닿아 있다는 건 솔직히 예상외였다.
라인델이 말했다.
“키퍼가 알지 못하는 걸 내게 묻는다……. 그런 건 섭리자에게 하는 편이 합리적일 텐데.”
“섭리자나 너나 겉으로 드러난 게 많지 않은 건 사실이지.”
“그렇게 보이는가.”
라인델이 곧 머리를 저었다.
“답을 거부하겠다.”
“이유는.”
“알면 다친다.”
마치 어른이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문장이었지만 아세트로는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그나시아가 갸웃거린다.
“아니, 금기는 또 뭐야?”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서 세상에 관련된 비밀이 발설되고 있다. 아직은 파헤쳐서는 안 되는 것들이.
“성녀, 에르세티아.”
성녀는 한 번 대답했고 한 번 거부권을 썼으나, 아직 베르덴처럼 규약을 만족하지 못했기에 서약을 벗어나지 못했다.
“마경에 기생의 대악마가 실존하는 것으로 판명된다면, 루아스 교국은 모든 전력을 투입할 생각인가?”
“물론입니다.”
성녀가 즉시 답했다.
진실.
“3대 대악마의 완전한 토벌은 저희 루아스교의 오랜 비원이자, 루아스 여신께서 인류에게 부여하신 과업이니까요.”
아세트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베르덴 쪽을 바라봤다.
베르덴이 궁극적으로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제라클 황제와 함께 마경 토벌을 강하게 주장한 걸 보면, 지금이든 나중이든 이 문답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답변은 들었다. 그럼 넘기지.”
아세트로가 <염동력>을 발동했다. 회전하던 주사위는 수직으로 솟아올랐다가 떨어지며, 다른 눈금을 보여 주었다.
13.
아세트로가 잠시 멈칫했다. 대부분의 참여자도 일순간 주춤했다. 낄낄낄. 수왕과 이그나시아는 대놓고 기대했다.
“──13번, 신성, 베르덴. 질문하라.”
그 섭리자의 목소리가 조금 더 진지해진 건 과연 기분 탓일까.
벽안이 움직인다.
인드렌은 왠지 모르게 세상이 술렁이는 듯하단 착각이 들었다. 아마, 여기서 베르덴이 선택할 대상은 역시…….
“섭리자.”
초월자들의 촉각이 곤두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