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2화 세계 회의: 진실 서약 (5)
침묵의 사막의 메마른 태양은 완숙한 신격을 얻기도 전에 처단당했다.
여전히 남은 사도들은 운명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지만, 현재 상황은 운명의 수레바퀴가 예견한 어떤 가능성에도 없던 것이다.
운명은 뒤틀렸다.
‘당신’이 잠든 사이 ‘당신’의 표층 의지가 무궁한 세월 동안 조율했던 운명의 흐름은 이미 통제를 잃고 무질서로 뒤덮이고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
‘……인정하마.’
베르덴으로부터 비롯된 변화는, 섭리자의 예측을 크게 벗어났다. 고작 3~4년이라는 시간 만에 베르덴은 자신만의 탑을 쌓았다.
한계를 찢어발긴 천재.
새삼 시간은 상대적으로 흐른다는 걸 깨달았다.
섭리자는 스스로 판단의 주체가 아니라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며 언제나 한발 물러난 태도를 견지하긴 했지만…… 메이아가 왜 그리도 베르덴의 모든 행보를 우려하는지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나비의 날갯짓은 거대한 폭풍이 되었다.’
베르덴은 마법계 총회의에선 선을 지켰지만, 이 세계 회의에선 멈추는 방법 따위 모른다는 듯 거의 폭주하고 있다.
섭리자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떨치는 게 베르덴의 목적임을 간파했다.
다만 베르덴이 중심이 되는 두 번째 대의제에서, 그가 대체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계 회의를 줄곧 지켜본 결과 베르덴은 초석을 쌓는 듯했다.
뭐가 됐든 재해에 가까울 터였다.
과연 자신으로 인해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그는 인지하고 있을까.
한 명의 마법사로 인해 ‘당신’은 약간 눈을 떴고, 최후의 저항자께서는 반쯤 깨어나셨다.
더는 돌이킬 수 없다.
이제 와서 시곗바늘을 잡아 뜯어도 시간은 계속 흐를 것이다. 멈추면 도태된다. 과거 끝을 맺지 못한 운명전의 재개가 가까워지고 있다.
‘당신’도, 최후의 저항자께서도 완전하게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문득 섭리자는 수백 년 만에 내면이 조금 크게 떨리는 기분을 느꼈다. 솔직히 달가웠다. 본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는 건 거대한 운명을 알지 못하는 존재의 특권이었으므로.
‘그래서 내게 묻고 싶은 게 뭐냐, 베르덴.’
필시 이번 문답을 통해서 두 번째 대의제를 위한 마지막 준비를 갖추려 할 텐데…….
최후의 저항자, 태초의 마법사──초대 마도왕의 소재에 대해 궁금한가?
단둘이 있으면 모를까, 그걸 이 자리에서 묻지는 못할 것이다.
단언하건대 올다르크 루인 아케나드라는 이름이 가진 파급력은 베르덴이 제어할 수 없다. 게다가 그건 주인 없는 땅의 권역이 주제인 두 번째 대의제에서 쓸 만한 정보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세력이 뭔지 알고 싶은가?
분명 이것도 아니다.
‘당신’의 정체는 금기니까. 공식적으로 ‘당신’에 대해 거론돼서 누군가가 그 본질에 대해 가늠하다간 대재앙이 벌어진다.
‘다행히 베르덴은 ‘당신’의 금기가 지닌 위험성을 조금은 알고 있다. 이제까지처럼 금기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겠지. 죽음에 대한 금기처럼.’
그럼 운명의 수레바퀴를 거론할까?
애매하다.
이건 질문이라기보다는 폭로에 가깝다. 무엇보다 개념이 방대하기에 질문 하나만으로는 세계에 충격을 주기 어렵다.
저항자들은 어떨까.
글쎄.
이전 질문과 마찬가지로 남들이 듣기에는 생소한 주제다. 보다시피 이 세계 회의의 흐름과는 조화롭지 못하다.
하면 마탑의 동력원의 정체를 묻고 싶나?
주제넘다.
베르덴뿐만이 아니다. 그건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알아도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다.
‘마족, 초월자, 대악마, 세계수, 고룡, 옛 왕, 세계 금서 – 그링 아르카넘, 6대 전설, 글러트니, 방주, 세 명의 죄인, 고대 석판, 징조, 광신자, 프로스티움의 거인, 무한…….’
기억의 저편, 그 아득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무수한 정보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섭리자는 베르덴을 둘러싼 모든 요소를 하나둘씩 떠올렸다. 그렇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동안 녹안과 벽안이 서로 마주쳤다.
베르덴이 묻는다.
“레프라기움 마탑주, 혹은 섭리자. 네가 ‘데우스 위덴’인가?”
베르덴으로부터 최초의 마탑이 활동했던 시기에 사용했던──섭리자의 실제 이름이 지금 이 자리에서 공개되었다.
그와 동시에 섭리자는 곧 있으면 다가올 두 번째 대의제에서 베르덴이 어떻게 상황을 주도할 것인지 확실히 통찰했다.
“감당할 수 있겠나, 베르덴.”
* * *
‘레프라기움 마탑의 주인이 질문에 질문으로…….’
7대 마도왕, 반젤리스가 짧은 수염을 천천히 쓸고 있다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 섭리자의 눈빛에 잠시 짙은 감정의 색채가 스쳤다.
“데우스 위덴? 섭리자가 그런 이름이었어?”
“나도 처음 듣는구나.”
“그러고 보니…… 레프레기움 마탑주는 이제껏 본명을 밝힌 적이 없었군.”
데우스 위덴은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서약 참여자들의 집중력이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어째서 베르덴이 섭리자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무슨 의도를 질문했는가?
섭리자는 왜 저렇게 과민하게 반응하는가?
…….
베르덴이 툭 던진 한마디로부터 수많은 의문이 파생됐다. 초월자들은 분명 어떤 기막힌 내력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진즉 데우스 위덴을 알고 있는 세렌디아는 그저 조용히 풍경을 구경했다.
제라클 황제가 엄지를 굽혀 손톱으로 검지의 피부를 느릿하게 긁었다.
무의식적인 손짓이었다.
‘뭔가 있군. 아주 큰 것이.’
평생 경험한 것과는 규모가 다른 정치의 흐름이 느껴진다. 겉모습만 보자면 마치 베르덴이 섭리자를 이용하려는 듯하다.
제라클 황제가 보기에 베르덴은 정치인의 소질이 다분했다.
적과 아군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오직 목적을 위해 상대를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근본적인 역학이다.
베르덴이 말했다.
“질문은 내가 했을 텐데.”
“감당할 수 있냐고 물었다.”
섭리자는 14 규약도 지키지 않은 채로 물러서지 않았다. 한데 그건 분노나 흥분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어 보였다.
오히려 섭리자는 고요했다.
차분하게 묻고 있다.
베르덴에게 진정 그런 각오가 있는 건지 알고 싶다는 듯이.
“감당 못 할 거면 시작도 안 했다.”
“그렇다면…….”
섭리자가 단언했다.
“내가 데우스 위덴이다.”
서약의 눈이 번쩍인다.
진실.
베르덴이 추측한 대로, 섭리자는 키론다르 넷이 만든 마력 연공법을 통해서 첫 번째 위계 마법사가 된 그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는 처음으로 각성 과정을 겪은 마법계 초월자일지도 모른다.
약 15세기 전부터 현대까지, 초월자라는 개념은 초대 마도왕이 위계 마법 체계를 구축하면서 창조한 것이므로.
“부연 설명이 필요한가?
“지금은 됐다. 아직 두 번째 소의제도 끝나지 않았으니까.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하지.”
“마음대로 하도록.”
베르덴과 섭리자 사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합의가 오갔다.
이그나시아는 ‘그게 무슨 뜻이야?’ 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베르덴은 고개를 저으며 기다리라는 뜻을 보냈다.
이미 준비는 갖췄지만, 원하는 상황을 촉발할 사람은 베르덴이 아니었다.
‘저 새끼, 뭘 꾸미고 있는 거지?’
마울러가 불쾌하다는 듯 찌푸린 눈살로 베르덴의 얼굴을 쳐다봤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웠는데, 일단 기분은 더러웠다.
라인델은 아까까지 손도 대지 않았던 와인을 살짝 맛만 봤다.
“질문 차례를 넘기겠다.”
베르덴이 거대한 주사위를 둘러싼 공간 자체를 비틀었다. 직후 한껏 휘어진 공간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면서 인력이 발생했다.
순간 허공에 뜬 주사위가 수백 바퀴를 돌고는 제자리에 착지했다.
“15번, 레프라기움 마탑주, 섭리자…… 데우스 위덴.”
섭리자는 자기 자신을 호명하고는 상원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올리며 손을 모았다.
“직전 베르덴에게 독단적으로 질문했으므로 내 차례는 생략하겠다. 이는 서약의 규약을 일부 무시한 책임을 지기 위함이다. 이의가 있다면 거수하라.”
참여자들이 멀뚱멀뚱 쳐다봤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 질문하기 싫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남이 이의를 제기할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도, 딱히 낼 만한 이견도 없었다.
그렇게 섭리자가 얻은 질문 기회는 공식적으로 제외되었다. 하지만 대신 질문을 했다는 것 자체는 인정되었다.
“이로써 나는 한 번의 질문에 대답했고, 한 번의 거부권을 행사했으며, 한 번의 질문을 했으므로 열한 번째 규약을 만족했다. 나, 레프라기움 마탑주는 질문 대상에서 제외된다.”
15명 중에서 베르덴과 섭리자가 빠졌으니 질문 대상자는 13명이고, 지금까지 8명이 질문을 했으니 질문 기회는 4번 남았다.
확.
섭리자가 손끝을 까딱거리자 주사위가 바닥에 닿은 채로 회전했다. 연속된 마찰음이 어수선한 주변을 환기했다.
물론 베르덴과 섭리자를 향한 관심은 전혀 줄지 않았지만 말이다.
“11번, 성녀, 에르세티아. 질문하라.”
드디어.
성녀는 주사위 눈금을 보자마자 즉시 수왕에게 물었다.
“주검의 영광에 대한 정보, 출처가 누구죠?”
“출처라…….”
수왕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른다만.”
* * *
“……?”
성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녀가 곧바로 서약의 눈을 올려다봤다.
진실.
서약은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최근에 정체 모를 놈이 수인들의 이목을 속이고 나를 찾아왔다. 그러곤 주검의 영광이란 조직에 대한 정보를 건네주더군. 그뿐이다, 내가 아는 건.”
“그게, 다라고요?”
“철저하게 외견을 감추고 있어서 얼굴과 체형도 알 수 없었지. 관심도 없었다, 당시 내 흥미를 끈 건 루아스 교국이 은폐한 기밀이었으니. 그래서 그냥 보내 줬지.”
“그런데 왜 아는 척을──”
“아, 그거.”
수왕이 말했다.
“그냥.”
성녀가 부드럽게 눈꺼풀을 닫고는 천천히 눈가를 어루만졌다. 농락당했다는 사실에 정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 같았다.
그런데도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는 걸 보면, 과연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성녀를 광기 어린 신앙자로만 여겼던 베르덴도 다시 볼 정도였다.
다만 마스터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수왕은 한 번의 질문에 대답했고, 한 번의 거부권을 행사했으며, 한 번의 질문을 했으므로 열한 번째 규약을 만족했다. 세 번째로 질문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하지.”
수왕은 서약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
성녀는 말없이 고밀도의 신성력으로 주사위를 멀리서 굴렸다.
다음 눈금은 1이었다.
“1번, 서약자, 유리온 하이로스. 질문하라.”
“흐으음.”
서약자는 애초에 그 비공식 초월자에 대해 물으려고 했으나, 내심 질문 대상으로 정한 섭리자가 서약에서 제외된 탓에 고민에 빠졌다.
마찬가지로 베르덴에게도 질문을 던질 수 없는 상황이다.
‘남은 참여자 중에 단검을 다루는 초월자에 대해 뭐라도 아는 녀석은 없을 것 같은데. 라인델이 그나마 유력하기는 하나, 그 눈을 보면 비공식 초월자든 뭐든 전혀 관심도 없어 보이고. 주사위 운이 좋지 않았군.’
그럼에도 묻느냐, 아니면 다른 질문을 하느냐.
결국 선택한 건 후자였다.
무의미한 아쉬움보다는 새로운 정보를 하나라도 더 얻는 것이 이득이었다.
“제라클 황제, 갑자기 마경 정벌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뭐지?”
제라클 황제는 대답할지 거부할지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다.
“예언을 봤다.”
“예언? 아까 레논 버나드가 보여 줬던 예언처럼 말인가?”
“그와 비슷하다. 언젠가 드래곤들이 날아와 이 땅을 불태운다고 하더군. 달리 여러 이유가 더 있긴 하지만 그게 결정적인 계기지.”
진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예언 같은 걸 맹신해 그런 제안을 한 거냐며 비웃었을지도 몰라도, 아르나크 제국의 황제의 말이기에 신빙성은 높았다.
게다가 레논 버나드가 첫 번째로 읊었던 고대의 시가 드래곤──아마도 적룡, 사르칸드라와 관련되어 있기도 했고 말이다.
‘드래곤에 진짜 뭔가가 있는 건가…….’
그런 작은 의심이 초월자들의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했다. 유리온은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주사위를 굴렸다.
남은 기회는 두 번.
“2번, 아케나드 7대 마도왕, 반젤리스 루인 아케나드. 질문하라.”
“그럼, 세렌디아.”
반젤리스는 진실의 서약 도중에 나온 의혹들을 되새김질하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베르덴과 좀 더 친해지면 물어볼 작정이었다.
서약의 문답 형식은 구조적으로 세밀한 대답을 얻기 어려웠다.
그래서 개인적인 호기심을 따랐다.
“에온과 엘프가 동맹을 맺은 이유는, 오직 베르덴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세렌디아가 긍정했다.
“베르덴은 저희와 비슷하기에.”
“비슷하다…….”
반젤리스가 속으로 숨을 삼켰다.
‘베르덴의 마력이 극도로 순수한 건 알고 있지만, 엘프가 그렇게 여길 정도였나. 재능이나 특질이나 더할 나위 없다. 역시 내 추측이 맞는 것 같군.’
반젤리스는 벅찬 마음으로 베르덴의 내력에 대해 다시 상기하고는, 어떠한 미련도 없다는 듯 마법으로 주사위를 굴렸다.
남은 기회는 한 번.
툭.
“10번, 계외, 이그나시아. 질문하라.”
“어라, 내가 마지막이야?”
“쯧.”
제라클 황제과 라인델은 질문 기회를 얻지 못해도 담담했지만, 가레스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짧게 혀를 찼다.
‘이용할 수단이 하나 줄었군. 뭐, 어차피 내가 노리는 건 두 번째 대의제니 상관은 없지만.’
가레스의 목표는 이미 정해져 있다.
아직도 그 마음은 변치 않았다.
“음, 그런데 베르덴하고 섭리자한테 질문을 못 하니까 막상 물어볼 게 없잖아? 서약에서 제외된 녀석한텐 질문하면 안 돼? 물론 상대방이 허락하는 경우에.”
섭리자가 지적했다.
“열한 번째 규약에 의하면 진실의 서약을 지켜볼 ‘수’ 있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 본인이 수락한다면 질문 대상으로 지목이 가능하다.”
“오, 그러면 수왕!”
“음?”
이그나시아가 고개를 휙 돌렸다.
“넌 빛의 여신 루아스를 어떻게 생각해?”
수왕이 가만히 이그나시아의 시선을 바라보다가 흔쾌히 답했다.
“순수하고 성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수왕이 루아스를 극찬했다.
그때, 서약이 맥동했다.
삐이이이이이익─────!
환한 빛이 저물고 어두컴컴하고 불길한 빛이 회의장을 뒤덮었다. 진실을 말할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반응이었다.
즉, 거짓.
“…….”
성녀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 중심으로 향했다. 그에 동조하듯이 수왕도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마스터가 입술을 달싹였다.
“섭리자.”
“말했을 텐데.”
섭리자는 근엄하게 권좌를 지켰다.
“어느 정도의 감정적 마찰은 문제 삼지 않겠다고.”
성녀와 수왕이 고작 세 걸음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거운 긴장감이 공간을 억눌렀다.
수왕이 입을 열었다.
“할 말 있나──”
콰아아앙!!
성녀가 순식간에 수왕의 머리를 붙잡아 회의장 밑으로 처박았다. 단단한 바닥이 으깨지며 그 사이로 수왕의 머리가 반쯤 파묻혔다.
성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다시 한번 말해 볼래요?”
“크크크큭.”
잔해 더미 사이로 수왕이 이빨을 드러내며 몸을 들썩였다. 물리적 마찰이 발생했다. 기어코 성녀의 분노가 임계점을 크게 넘은 것이다.
“주검의 영광이 그렇게 주장한다지. 루아스는 거짓된 신이라고.”
수왕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서서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성녀인 네가 보기에도 그런가?”
“수왕, 안티아스.”
성녀가 오른손을 폈다. 광명이 터져 나오며 성창, 그란테르가 소환됐다. 끝을 모를 살기와 신성력이 뒤섞였다.
“신성 모독이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엉망이 된 회의장을 보며 베르덴이 나지막이 말했다.
“너 때문이다, 이그나시아.”
“응, 나 때문이야.”
이그나시아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가슴을 폈다. 역시 쾌락주의적 성향만 따지자면, 수왕보다 이그나시아가 훨씬 더 악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