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3화 세계 회의: 마찰 (1)
중앙 대륙을 기준으로 대륙 세계 회의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에 개최되었다. 대륙마다 어느 정도의 시차는 있지만, 그로부터 약 하루가 지난 지금 세상은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
여전히 세계 회의는 끝나지 않았다.
언제 끝날지는 모른다.
가르간트를 찾아온 사람들은 도시 중앙에 자리한 커다란 마름모 십이면체를 이따금 바라보며 색다른 새해의 시작을 즐겼다.
“따뜻하네요…….”
아카데미 종합 이론학 조교, 이리스가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아카데미 종합 이론학의 데일 교수와 학생 테오도르와 함께 세계 회의장이 훤히 보이는 카페 창가에 앉아 있었다.
마법계에 소환 마법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자 하는, 일명 소환 모임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커피와 약간 쓴맛과 달콤한 맛이 어우러진 녹색 차, 그리고 핫초코가 그들의 속을 데웠다.
“어찌저찌 일 년도 이렇게 지나가는 건가.”
데일 교수가 들끈 한숨을 내쉬었다.
“올해는 마도 축제가 있는 해군. 벌써 4년이라는 세월이 흐를 줄이야. 그보다 이번에는 잘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이번에는요?”
테오도르가 아차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사건이…… 전에 듣기로 상황이 엄청 심각했다고 하던데요.”
“너희들은 당시 마법계가 어땠는지 자세히 모를 수밖에 없겠지. 각 국가와 세력의 고위층이 최대한 혼란을 제어하기 위해서 보헤미른 마탑 관련 정보를 철저하게 은폐했으니까. 그 소식이 세간에 제대로 퍼지기 시작한 건 동력원 폭주 이후 1~2년 정도 지났을 때쯤이었지.”
데일 교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게다가 테오도르, 너는 그때 아카데미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잖아. 여기 이리스는 동대륙에서 모험가로서 활동 중이었고.”
“헤헤…….”
이리스는 모험가 시절을 떠올리며 멋쩍은 듯 웃었다. 좋은 기억도 물론 많았지만 좌절한 적도 많은 시간이었다.
“아무튼. 상황이 심각했냐고? 그렇다마다. 정말 난리도 난리가 아니었어. 그 마도 축제가 하루아침에 마도 장례식이 되었을 거라고 누가 알았을까? 교장님도 말문이 막혀서 한동안 말씀을 못 하셨지.”
마탑 종합 서열 4위 및 무력 서열 2위의 보헤미른 마탑이 반파됐다.
동력원이 폭주한 탓에.
데일 교수도 현실을 부정할 정도로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동력원 폭주 사태를 접하자마자 언제나 활기로 가득 찼던 마도 축제는 긴급하게 막을 내렸다. 특히 다른 마탑들은 제 동력원의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지. 마탑들이 그렇게 당황한 건 나도 처음 봤어. 바로 다음 해 아카데미에선 마법 역사학을 개정할 정도였고. 음. 돌이켜 보면, 그 일이 최근 마법계가 극도로 불안정해진 시발점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
이리스가 방금 주문한 치즈 케이크를 포크로 살짝 잘라 입에 넣었다.
“그런데 다른 마탑들은 괜찮나요? 생각해 보니까 제대로 전해 들은 게 없는 것 같아서요.”
“지금껏 별말이 나오지 않은 걸 보면 딱히 눈에 띄는 문제는 없는 모양이야. 그, 작년, 아니 재작년에 블랙 아워가 디아문 마탑주를 살해했을 때도 디아문 마탑의 동력원에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다고 봤는데 여전히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기도 하고. 또 동력원이 폭주하는 일은 아마 없겠지.”
“그건 정말 다행이네요.”
“그래,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마법계, 더 나아가 이 세상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성장해 온 건 전적으로 동력원 덕분이니까. 정순한 마력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자원을 과연 또 어디서 구할 수 있겠어.”
데일 교수는 보다 넓은 시야로 세상을 주도하는 동력원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언뜻 보기엔 허술해 보일 때도 많지만, 그의 높은 식견은 아카데미의 어느 교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암월, 다히트 웨스로엘은 역사적 초월자다. 좋은 의미로도 그렇고, 안 좋은 의미로도 그래. 마탑의 동력원은 완전하다는 통념을 부순 것도 모자라 마법사들로 하여금 한계 위계를 넘을 수 있게 만들었으니…… 마법계의 절대적인 명제 둘이 그대로 무너졌다. 만약 암월이 살아 있었다면 영향력이 정말 어마어마했을 거야.”
테오도르가, 데일 교수가 내린 암월의 평가에 진지하게 동의했다.
“실제로 암월의 꿈 사태 이후 암월을 숭상하는 마법사가 많아졌다고 들었어요. 학생들 사이에서 블랙 아워의 업적들을 공부하는 동아리를 만들고 싶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고요.”
“악행은 악행이고, 위업은 위업이니까. 단언컨대 다히트 웨스로엘이란 이름이 사라지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거다. 마법계가 송두리째 뒤바뀌거나, 세계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이리스가 은근슬쩍 물었다.
“……그럼, 신성께서는요?”
“무시무시한 블랙 아워의 3대 지도자, 주인 없는 땅의 대군주, 용살자, 에스티리아의 절대자, 에온의 수장, 현 마법계의 새로운 별! 여기서 또 무슨 말이 필요할까? 보헤미른 마탑주를 살해하고 부상을 당한 암월을 처단한 거라고 해도, 그 위상은 절대로 가볍게 볼 수 없지.”
데일 교수가 녹색 차를 빙빙 돌렸다.
“그 암월 이상의 대업을 이룰 수 있을지는 몰라도 베르덴 님 또한 이견의 여지 없이 영원의 역사에 이름을 새기실 거다. 아, 물론 에온에서 우리 소환 마법을 지원해 줘서 하는 말은 아니니까, 그 점은 명심하도록.”
“하하하하.”
“네, 명심할게요.”
이리스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컵으로 가렸다. 그런 대단한 사람과 잠시나마 모험을 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그녀의 하늘색 눈동자에 다시금 세계 회의장의 웅장한 자태가 비쳤다.
문득 개회식 때 보았던 초월적 존재들의 면면이 떠올랐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그 암월과 동격, 혹은 이상의 존재라니.
새삼 세계 회의란 것이 얼마나 대단한 행사인지 실감하며 소름이 돋았다.
테오도르가 물었다.
“저 세계 회의에선, 분명 저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이야기가 오가고 있겠죠?”
“물론이지.”
데일 교수가 찬사를 보내듯 찻잔을 들어 세계 회의장을 가리켰다.
“분명 저곳에선 평범한 사람이 감히 견딜 수조차 없는, 한없이 진중하고 근엄한 회의가 진행되고 있을 거다. 한번 구경이라도 했으면 좋겠건만.”
“막 싸우시지는 않겠죠? 회의하다 보면 갈등이 깊어질 때도 있잖아요.”
“뭐? 하하하하하. 설마. 언쟁이 좀 벌어질 수는 있어도 실제로 부딪치시는 일은 없을 거다.”
데일 교수가 그럴 리가 없다며 웃다가 차분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건 재앙이니까.”
* * *
쩡───!
신의 성창과 짐승의 손톱이 충돌하는 순간 빛과 굉음이 터져 나왔다. 회의장이 들썩였다. 두 사람은 서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성녀가 광신(狂信)에 물든 시선으로 물끄러미 앞을 응시했다.
빛의 눈동자 안에 담긴 수왕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쿠구구구구……!
창대와 손톱이 떨리며 초월적인 기세가 사방을 뒤덮었다. 두 사람이 딛고 있는 바닥이 무너지다 못해 움푹 파이고 있었다.
아드리안이 팔짱을 꼈다.
“과연 신앙계 최강자라고 할 만하군요, 주군.”
성녀가 수왕의 완력을 능히 견딘다.
비록 서로 전력의 일부만 드러냈을 뿐이지만 그래도 대단했다.
인간은 기, 마력, 신성력, 이 세 가지 힘을 주로 다루지만, 수인은 오직 순수한 신체 능력만이 강함의 전부다.
그런 수인 중에서 역대 최강의 생물로 평가받고 있는 존재가 바로 수왕이다.
수왕과 근접전에서 합을 맞출 수 있다는 건, 신체 능력만 놓고 보면 무투계 초월자와 견줘도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쿵!
그때, 진실의 서약의 미참여자를 위한 칸막이가 몇 개 부서졌다.
아드리안, 리반데일 대공, 에레스, 흑해, 대행자, 성자, 교황이 심상치 않은 여파를 감지하고 상황을 확인하러 나온 것이다.
흑해가 턱을 괴었다.
“기어코 맞붙었네. 도중에 수왕이 계속 시비를 걸었나 봐?”
마스터가 말했다.
“그것도 그런데, 마지막에 이그나시아가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다.”
리반데일 대공과 흑해가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레스는 작게 감탄하며 흥미롭게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았고, 대행자는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섭리자를 흘끔거렸다.
“후우.”
“아, 음.”
교황이 한숨을 내쉰다. 딱히 성녀를 급하게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성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불편한 모습을 보였다.
일부 칸막이가 손상된 이후 나머지 칸막이도 곧 사라졌다. 진실의 서약이 진행되는 동안 푹 휴식하고 있었던 참석자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니아가 하품을 하며 눈가를 비비다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뭐, 뭐야, 이게 갑자기? 갑자기 왜 싸워?!”
칸막이 내부는 너무 조용하고 편안해서 실컷 자고 있었는데, 막 깨어나 보니 성녀와 수왕이 숨이 막힐 정도로 살벌한 힘을 내뿜고 있다.
그야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자벨라와 라테온도 멍하니 회의장 중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과 호위들이 입을 떡 벌렸다.
베르덴이 뒤로 팔을 뻗어 유니아를 조금 더 안쪽으로 밀었다.
“우리 뒤에 있어라.”
“응, 알았…… 읏!”
가볍게 움직이고 있던 수왕이 피가 끓고 있는지 점차 속도를 높였다. 팔을 휘두를 때마다 눈을 뜨기 어려운 돌풍이 몰아쳤다.
그 일격 하나하나를 피하고 쳐 내던 성녀가 순간 거리를 좁혔다.
이그나시아가 손가락을 겹쳤다.
“무대를 훨씬 더 넓혀야겠네.”
따악──!
상원과 하원 테이블은 그대로인 채 회의장의 풍경만 바뀌었다. 애초에 이곳은 이그나시아의 초위 마법으로 구현된 환상.
그녀의 의지만 있다면 세계 회의 공간은 어떤 형태로든 변모한다.
광활한 자연이 펼쳐졌다.
주변엔 완만한 언덕이 만들어 낸 굴곡진 초원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는 여러 숲이 우거져 있으며, 가장 바깥쪽엔 산맥이 줄지어 솟아 있다.
사방이 밝다.
자연의 향취가 코끝을 스쳤다.
단순히 겉모습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 범위도 그만큼 넓어진 것이다.
동시에 신성력이 폭발했다.
발바닥이 뜬 채 나가떨어진 수왕이 온몸으로 숲 하나를 작살 냈다. 지면에 한 손을 박아 넣어 제동을 건 그가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
“소문은 바람이고, 실상은 폭풍이라.”
기분 탓이 아니라 아까보다 전신의 근육이 더 커진 모습이었다.
“사냥할 보람이 넘치는군.”
수왕이 상체를 낮추고 양 팔꿈치는 한껏 등 뒤로 당기며 자세를 잡는다. 그가 각력에 집중하자 지면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그나시아가 손뼉을 쳤다.
“아하핫, 이기는 편 우리 편…… 어?”
그때였다.
콱!
성녀가 빛살처럼 들이닥쳐서 이그나시아의 목을 잡아채고는, 그대로 나아가 푸른 초원 한가운데에 짓누르듯 꽂아 버렸다.
목을 붙잡힌 상태로 지면에 처박힌 이그나시아가 물었다.
“이게, 뭐 하는, 짓?”
“그럼 그따위로 행동했는데 제가 가만히 둘 줄 알았나요? 계외, 이그나시아. 당신 또한 루아스 신을 간접적으로 모욕했습니다. 하나 신성한 빛은 언제나 아량을 베푸는 법.”
성녀가 미소 지었다.
“당신도 빛을 신앙할 건가요?”
“이런, 어째.”
이그나시아가 마주 웃었다.
“난 종교 같은 거 안 믿는데?”
“그럼 죽으세요.”
기적도 아닌 순수한 신성력이 환상으로 만들어진 대지를 붕괴시켰다. 허공에서 나타난 이그나시아가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그깟 종교 안 믿는다고 죽으라니. 역시 광신자 아니랄까 봐───”
성창, 그란테르가 날아왔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광!
이그나시아가 서 있던 허공을 휩쓴 거대한 빛이 산맥을 뚫고 나갔다. 과거 유골룡의 머리 위로 떨어진 일격보다 더 강력한 한 방이었다.
수왕이 속삭였다.
“어딜 보나.”
초월자의 신체마저 가르는 다섯 개의 손톱이 성녀의 눈앞에 드리웠다. 그러자 한순간에 성창이 그녀의 손에 돌아왔다.
콰앙!
초원에 흔적을 남기며 밀려난 성녀가 성창을 한 바퀴 돌리며 균형을 잡았다.
“나한테는 빛을 신앙할 거냐고 안 물어보는 건가? 응?”
“어차피 당신은 그럴 생각 없잖아요. 그리고 다 끝내고 물어도 늦지 않습니다. 팔다리가 잘려도 회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크하하, 그것도 그렇군.”
광기에 피부가 저릿거린다.
루아스교의 최강자와 수인족 최강자가 교전에 돌입했다. 창날과 손톱의 날이 쉴 새 없이 계속해서 부딪친다.
그럴 때마다 초원의 초목이 버티지 못하고 뿌리째 뽑혀 흩날렸다.
쉬익───!
수왕의 손톱이 자아낸 열풍(烈風)이 성녀의 옆을 지나쳐 상원을 향해 날아갔다. 근처에 닿기도 전에 아드리안이 광검을 뽑아 쳐 냈다.
“이런 미친 연놈들이.”
“풋.”
마스터가 아무도 몰래 입가만을 가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
베르덴이 옆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말리지 않을 건가?’
‘정 원한다면 개입해도 좋다.’
섭리자는 뒤쪽을 향해 턱짓했다.
두 사람은 의념의 전달 없이 눈빛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섭리자는 갈등이 끝까지 갈 때까지 놔둘 계획은 없어 보였으나, 그렇다고 지금 당장 중재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데우스 위덴, 그냥은 도와주지 않겠다는 거군.’
어쩔 수 없다.
“주군, 제가 제지하겠습니다.”
“아니.”
베르덴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가지.”
진실의 서약으로 기껏 주목도를 높였는데, 이 이상 불필요한 갈등으로 시선을 빼앗기는 건 별로 좋지 않다.
무엇보다 성녀가 아주 엇나가 버리기 전에 막는 게 우선이었다. 지금 수왕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그것대로 곤란하기에.
초석은 완벽하게 쌓아야 한다.
터벅, 터벅.
베르덴이 상원에서 내려간 순간, 갑자기 낯선 그림자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수왕께서 사냥 중이시오. 그러니 신성은 기다려 주시오.”
수인 대부족의 염소 수인 부족장───산왕(山王)이 흥분에 찬 콧김을 내뿜었다.
수인 대부족에는 여러 부족장이 있고 그들은 수왕 휘하에서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아 수인족의 힘으로서 군림한다.
수왕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서 소문이 퍼지지 않은 것이지, 실제로 그중엔 초월적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강자도 있다.
그리고 산왕은 수인족의 초월적 강함에 가까운 수인이었다.
힘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경지.
괜히 수왕의 호위 중 하나로 발탁된 것이 아니다.
‘베르덴. 인간계 초월자 중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존재 중 하나라고 들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위기감이 그리 느껴지지 않는군.’
다른 왕이 그간 수집한 정보로 베르덴을 위험한 인물로 꼽았지만, 산왕은 직감적으로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호승심이 일었다.
강자를 상대로 도전 정신을 불태우는 것은 수인족 전사 대부분이 가진 본능이었다.
쿵쿵!
산왕이 갑옷으로 덮은 제 가슴을 두들기며 도발했다.
“적적하다면 이 산왕이 상대해 주겠소.”
“비켜. 다친다.”
“전사가 어찌 다치는 걸 두려워할까? 여흥은 될 거라 생각하오만.”
베르덴이 산왕의 거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한 걸음 내디뎠다. 그걸 승낙으로 해석한 산왕이 곧장 야성을 끌어올렸다.
겁화(劫火)
그때, 베르덴이 억지로 가라앉혀 놓았던 망화의 불길을 풀어 헤쳤다.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으나 내면에서는 무한의 마력을 장작으로 삼은 흑염이 그야말로 미친 듯이 타올랐다.
산왕이 식은땀을 쏟아 냈다.
‘위, 위험!!!!!!’
베르덴이 [인테리스]를 소환해 가볍게 수평으로 휘둘렀다. 무기를 꺼내 들 새도 없이 즉각 방어 태세를 갖춘 산왕의 몸이 크게 꺾였다.
터엉───!
지면에 몇 번이고 충돌한 산왕이 거대한 언덕과 부딪쳤다. 언덕이 폭발했다. 드넓은 초원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수왕의 다른 호위들이, 그 수인 부족의 왕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산왕이 일격에…….’
갑작스럽게 큰 폭으로 변화한 베르덴의 존재감을 초월자들이 주목했다. 미증유의 압력이 느껴졌다. 마법계 총회의에서 느낀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위압감이었다.
베르덴이 반파된 언덕에 파묻힌 산왕을 향해 한마디 던졌다.
“앞으로 용기와 객기는 구분하도록.”
여흥으로 삼을 만한 것도 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