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9화 세계 회의: 폐회 (1)
운명전에서 패배한 저항자들은 대부분 운명에 귀속되었다. 앞으로 태어나 살아갈 존재들도 정해진 미래를 약속받았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시작과 끝의 조율을 마치고, 시간이 그 끝에 도달한 순간 영원한 반복이 계속될 것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다시 뒤집을 수 있는 건 건 태초의 마법사이자 최후의 저항자──올다르크만이 유일했다.
이미 패배가 결정된 상황에서도 ‘당신’을 잠들게 만들어 운명의 완성을 아주 먼 미래로 유예시키는 데 성공한 그가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올다르크는 이후 종적을 감췄다.
물론 선택권을 빼앗기지 않은 극소수의 저항자는 올다르크가 끝끝내 목숨을 잃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필시 ‘당신’과의 사투에서 입은 부상을 회복하고 있을 거라고 여겼다. 또한 언젠가의 승리를 준비하고 있을 거라고도…….
어쨌든 결과적으로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조율이 진행됨에 따라서 운명의 실들이 생겨났다.
이윽고 오랜 시간이 지나자 마치 거미집처럼 세상은 운명에 뒤덮였다.
그 과정에서 올다르크의 선택을 받은 존재들은 운명에서 일부 벗어날 수 있었지만, 결국 기껏해야 운명의 실이 작동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멈춘 것에 불과했다.
이는 운명적 흐름을 그대로 역이용한 결과물 중 하나였다.
올다르크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는 이상 운명의 실은 끊을 수 없으리라, 그것은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래서 섭리자와 대행자는 운명의 수레바퀴가 만들어 내는 수많은 미래를 엿보고, 거의 모든 변수에 대한 대비를 준비했다.
훗날 더 완벽해진 존재로서 돌아오실 올다르크를 위해서.
‘앞날이…… 거의 보이지 않아.’
대행자의 특별한 시야에 각자마다 몇 가닥 남지 않은 운명의 실이 비쳤다. 처음 느껴 보는 해방감과 불안감이 뒤엉켰다.
최후의 저항자께서도, ‘당신’도 온전히 재림하지 않은 상황인데 운명의 수레바퀴가 망가지고 운명의 잔재마저 흩어지고 있다.
더군다나 베르덴의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은 세계의 정상들이다. 이제 그들의 영향력은 다시 주변으로 퍼져 나갈 터.
‘이제 세계의 운명 탈피는 시간문제…….’
운명의 개념이 생기기 이전 시대로의 회귀가 예고되었다.
예기치 않은 자유가 임박했다.
대행자는 심호흡하다가 자연스럽게 입가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불리(不利) 속에서 그나마 끌어낸 유리(有利)가 이렇게 무용지물이 되었군요.”
“우린 언제나 불리했다. 그동안 미래의 정보를 얻은 것은 작은 발버둥일 뿐. 승리와 패배의 간극을 뒤집으려면 기적이 필요하지.”
“그래서 여전히 관망할 생각인가요?”
“행동의 때는 더욱 가까워졌다. ‘당신’의 승리와 우리의 대비가 전부 무색해져 버린 이 혼란은 오히려 그분께서 기꺼워하실 상황일 테니.”
섭리자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곧 ‘난전’이 도래할 것이다.”
운명의 사도들, 저항의 씨앗들, 운명 속에서도 선택권을 잃지 않은 괴물들, 두 세력에 속하지 않은 신시대의 제3세력.
결국 운명전은 재개되리라.
그렇게 섭리자와 대행자가 이제부터 벌어질 여러 상황을 추측하려던 도중이었다. 강한 존재감이 실린 음성이 분위기를 환기했다.
‘마무리하려는 기색이 없군.’
‘본론이 더 남았나?’
그렇다.
운명을 일부 폭로했음에도 아직 베르덴의 발언은 끝나지 않았다. 레프라기움 마탑의 두 사람은 가만히 귀를 열었다.
“예언에 대비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터놓고 말해서 우스운 일이지.”
베르덴이 특정 청중들을 주목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정해진 운명론을 뿌리로 둔 예언 따위가 대륙을 위협하다니. 그중에서도 감히 너희를, 우리 초월자를.”
초월자는 존재가 다할 때까지 자신만의 이상을 추구한다. 그런데 그 이상을 이룰 수 없다고 운명이 정했다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천만에.
이런 운명이 실재한다면 초월자들은 저항하고, 또 저항할 것이다. 그 운명이 이상을 이룰 수 있다고 정해 두었다 해도 다르지 않다.
초월자들은 본인이 주도하지 않은 이상의 실현을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애초에 현 초월자의 기원은 최후의 저항자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외부 요인에 특히 반항적이다.
이그나시아가 히죽거렸다.
“아하하, 너무 당연한 걸 말하네. 그따위 인과를 용납할 수 있는 녀석이 대체 어디에 있겠어? 그래서 결론이 뭔데?”
“운명은 기다리는 자에게 온다고 하더군.”
베르덴이 보란 듯이 손가락을 강하게 굽혀 주먹을 쥐었다.
“그러니 반대로 선택할 수밖에.”
겁화로 증폭된 초월적 격이 극대화됐다. 순수한 존재감의 파동이 후폭풍처럼 세계 회의장을 한차례 휩쓸었다.
“본디 예언은 실현됨으로써 완성된다. 그렇다면, 사전에 막아 절대적 인과가 설정된 운명에 모순을 일으키면 어떻게 될까.”
베르덴은 하나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 * *
세상엔 자기 실현적 예언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예언을 막으려는 시도가 오히려 그 예언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베르덴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차라리 바라던 바였다.
침묵의 사막에서 얻은 경험으로 보건대 운명에는 완성도가 존재한다. 준비되지 못한 상태로 실현되는 운명은 불완전한 것이다.
그 예로 이슈르는 신격을 이루었으나 완숙해지지 못한 채 베르덴과 조우했고. 그렇게 죽었다. 그렇게 하나의 운명적 예언은 파멸되었다.
분명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루아스 교국이 수백 년에 걸쳐서 옛 왕의 부활을 저지하고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다만…… 베르덴의 목적은 바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초대 마도왕과 ‘당신’.’
과거를 잊어버린 작금의 현대는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단순히 선택을 강요당하고 끌려다닐 뿐이다.
저항의 주체인 초대 마도왕조차 세상에는 뜻을 감추고 있다.
그렇기에 베르덴은 상호 연결을 통해 세 번째 세력의 형성을 유도했다. 마냥 운명이 들이닥치길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이를 위한 근거는 있었다.
세렌디아가 이자벨라에게 생명의 묘목을 건네며 말했던 것처럼 베르덴에게는 운명의 반대되는 개념인 선택이 있다.
천공룡 아에로돈은 베르덴으로 인해서 운명의 실타래가 남아 있을지언정 선택할 권리를 찾는 자들이 많아질 거라고 언급했다.
‘즉, 내 영향을 많이 받을수록 운명에서 점점 벗어나게 된다.’
적어도 운명──그러니까 ‘당신’에 대항할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세계 회의는 아주 훌륭한 수단이 되어 주었다.
적은 많고.
전력은 부족하다.
베르덴의 경지도 끝에 닿지 않았다. 그럴진대 초대 마도왕에게서 승리한 ‘당신’의 세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반드시 베르덴 일행만 맞서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세계의 권력자들에게 운명에 대한 비밀을 일부 공유함으로써 그들이 향할 미래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이야말로 베르덴이 숙고해서 내린 선택이자 새로운 저항이었다.
‘이제부턴 공동 책임이다.’
알다시피 ‘당신’은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고, 초대 마도왕도 보이지 않는 지금 베르덴은 최대한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어 놓을 작정이었다.
사막에서 만인에게 숭배받는 자 → 사망.
시체의 산 위에 앉은 군주 → 주검의 영광.
대지를 향해 숨결을 토해 내는 드래곤들 → 마경.
거대한 인간들 → 북부의 감시자가 봉인 중.
빛을 중심으로 집결한 인류 → ?
하늘을 향해 스스로 무릎 꿇고 왕관을 바치는 초라한 왕 → ?
물결치는 바다 → ?
‘몰가른의 미래 벽화에 새겨진 일곱 개의 예언 중 세 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세 개는 파악했으며, 나머지 하나는 처리했다.’
위협이 한둘이 아니지만 베르덴은 굳이 운명의 일부분만 거론했다.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걸 많이 드러내 봤자 설득력만 떨어질 테니까.
지금은 초점부터 잡는 게 중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까지 언급한 건 순전히 흑해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바다에 대해 가장 자세히 알고 있는 초월자였으니까.
키퍼가 말했다.
“예언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예언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면 그만이라는 말인가?”
“간단하네.”
“생각해 둔 계획은 있는 건가요?”
“뜸 들이긴.”
질문이 빗발쳤다.
베르덴은 세계 회의장이 조금 잠잠해지길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다만 참석자들이 기대했던 대답과는 종류가 달랐다.
“이 자리를 빌려 에온의 기술 하나를 공개하지.”
“기술?”
베르덴이 구슬 형태의 골렘을 꺼내 보였다.
“이 골렘의 명칭은 ‘기억 골렘’. 시각적인 기억을 저장해 언제든 임의로 재생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지. 간단히 시범을 보이겠다.”
달칵.
즉시 기억 골렘을 작동시켰다. 베르덴이 적당한 속도로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곤 벽 한쪽을 향해 기억 골렘을 재작동했다.
마력의 빛이 조사되면서 직전에 기록된 기억이 영상으로 재생되었다.
“오…… 오오……!!”
펠디안느가 빠르고 조용하게 손뼉을 마주치며 감탄사를 흘렸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려왔다.
뜻밖에도 새로운 고대 골렘 기술이 공개되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마치 마도 축제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제라클 황제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타인의 기억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저것만 있으면 정보전에서 그야말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겠군. 첩보전에서도 더욱…… 정치에서도 활용 가치는 무궁무진…… 약점을 잡아 정적을 끝장내는 것도 훨씬 더 쉬워질 터…….”
입가를 가리고 있었기에 무슨 말을 하는지는 베르덴에게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정치와 관련된 생각을 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아무튼.
“이 기억 골렘만 보전한다면 그때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다시 볼 수 있다.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지. 이를테면…….”
베르덴이 뒷말을 강조했다.
“탐사라든가.”
“……!”
“그런 의미에서 다시 제안하지.”
베르덴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드리안이 거수했다.
“참석자의 권한으로 세계 의장에게 마경 정벌 대의제의 재발의를 요청한다.”
베르덴은 두 번의 의제 권한을 모두 사용했지만, 아드리안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한 번 부결되었던 안건이 다시 테이블에 올랐다.
“지금까지 확보한 마경의 정보에 기억 골렘이 더해진다면 마경 탐사는 역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진행될 거다. 심지어 압도적인 정확도로. 그런 만큼 지원은 확실해야 하지. 단서를 얻은 다음에 다시 세계 회의를 개최해서 의제를 논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냉큼 손부터 떼는 게 아니라…….”
벽안이 참석자들을 둘러봤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예언은 실존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경에는 예언에 실린 드래곤이 있다. 별개로 기생의 대악마까지. 약 1세기 전의 적룡의 습격처럼 놈들은 언제든 우리의 터전을 불태울 수 있다. 그런 강대한 위협들이 뻔히 코앞에 있는데도 조사하지 않고 방치하는 건 우매한 판단이지. 서로가 분담한 책임조차 감당하기 싫어서 그런 거라면 더욱이.”
“…….”
“아까 제라클 황제가 말했듯이 아르나크 제국과 에온이 마경 탐사의 선두에 설 거다. 인력, 재원, 기술 등 나머지는 손만 거들어도 좋다. 과실을 조금이라도 나눠 받고 싶다면.”
베르덴이 등을 돌렸다.
“그럼, 선택하도록.”
선언의 여운을 위해 <전이> 없이 계단을 올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베르덴이 제라클 황제를 슬쩍 바라봤다.
‘어디서 에온을 이용하려고.’
에온은 제라클 황제의 몇 마디 말에 떠밀려 마경 탐사에 강제로 참여하게 되었다. 베르덴 역시 본래 그의 제안에 동의할 생각이긴 했지만, 막대한 지출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하나 다른 국가들과 세력들이 참여한다면 재정적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효율의 향상.
노력과 자원을 아끼고 결과를 극대화하는 것, 그것이 통치자의 덕목이었다.
“천검, 아드리안 첸버스가 마경 정벌 대의제를 재발의했다. 베르덴의 별도 발언이 끝난 지금부터 10분 뒤 재투표를 시작하겠다.”
10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자 참석자들이 저마다 입을 가린 채 논의를 시작했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시끄러운 느낌이었다.
베르덴은 느긋하게 표결 시간을 기다렸다.
‘이형종 공존에 대한 대의제의 개정으로 첫 번째 단추를, 실리스를 통한 대륙 무역 협정으로 두 번째 단추를, 로벨린이 주선한 아카데미 강의로 세 번째 단추를 끼웠다.’
이로써 대륙 단위로 서로를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상호 연결이 구축됐다. 이러한 구조적 강점은 외적에 대해 강한 방어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섭리자의 조력을 받아 최초의 마탑으로 소사이어티 논란을 돌파하고, 운명적 예언을 언급해 마지막 네 번째 단추마저 채웠다.’
베르덴이 진실의 서약에서 굳이 ‘데우스 위덴’을 언급한 것엔 많은 이유가 함축됐다.
최초의 마탑을 거론할 건데 네가 직접 증인을 자처해 근거를 뒷받침해라…… 그렇지 않으면 강제로 최초의 마탑에 대한 여러 기밀을 더 공개할 수밖에 없다…… 세간에 감춰진 최초의 마탑의 정보처럼 다른 중요한 비밀도 밝힐 것이다…… 그래도 레프라기움 마탑은 방관할 것인가?
사실상 협박에 가까웠다.
여기서 섭리자는 데우스 위덴이 맞냐는 물음에 ‘그렇다’라고 답했다.
다시 말해, 베르덴이 최초의 마탑주임을 긍정할 것이며…… 무엇을 하든 간에 제지하지 않겠다는 뜻인 셈이었다.
그것이 최초의 위계 마법사인 데우스 위덴이란 이름에 담긴 무게였다.
쿵.
섭리자가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지금부터 첫 번째 대의회에서 논의된 마경 정벌 대의제 재표결을 시작하겠다. 투표 절차는 이전과 동일하다. 전원, 찬반 의사를 표하라.”
안건의 주제는 같았고.
결과는 이전과 달랐다.
첫 번째 표결에서는 반대표를 던진 루아스 교국, 서약자, 마스터, 마그누스 은행장, 디아문 마탑 등이 마음을 바꾸었다.
진실의 서약과 베르덴의 폭로가 그들을 설득한 것이다.
“……찬성 37표, 반대 12표. 전체 참석자 49인 중 3분의 2 이상이 찬성했으므로, 마경 정벌 대의제는 통과되었음을 선포한다.”
쿵. 쿵. 쿵.
반대는 있었지만, 그렇게 한 번 부결된 대의제마저도 통과했다.
‘공들인 보람이 있군.’
베르덴은 당초 생각해 두었던 단추를 모두 채운 것도 모자라, 마경 정벌이라는 변수까지 품에 안아 옷매무새마저 가다듬었다.
원하는 건 전부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