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2화 급진전 (8)
강력한 파동이 스쳐 지나가면서 아르카디옴의 주민들이 휘청거리고, 지식의 매립지를 가득 채운 지식의 망령들이 잠잠해진다.
폭음의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던 베르덴이 미간을 좁혔다.
‘마법.’
틀림없다.
어떤 계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 어딘가에서 강력한 마법이 발동했다. 가볍게 흘려 넘길 수 있는 위력이 아니다.
직감으로 판단하건대 시전자는 최소 극점, 혹은 그 이상에 준하는 경지일 터.
‘마법계 초월자가 여기 있는 건가?’
만일 그렇다면, 그리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비공식 초월자가 아니라면 후보는 단 한 명으로 좁혀진다.
베르덴이 알기로 바다와 깊이 연관된 초월자는 그녀밖에 없으므로.
멀리 있는 어둠을 뚫고 인간의 형체가 날아온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지식의 매립지 정중앙에 추락한 누군가가 해류를 조작했다. 물 위로 붕 뜬 퇴적물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마법사의 정체가 드러났다.
흑해, 테아렐.
욱신거리는 팔의 상태를 관조한 테아렐이 주변의 무수한 시선을 감지했다. 지식의 망령들이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봤다.
“이형종?”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망령들이 끔찍한 괴성을 내며 일제히 테아렐에게 달려들었다. 루자크를 산 채로 씹어 먹으려고 했을 때 이상의 반응이었다.
지식은 존재에 깃드는 것.
그러므로 강대하고 고고한 존재는 방대하고 깊은 지식을 갖기 마련이다. 망령들은 초월자를 향해서 겁 없이 이빨을 들이밀었다.
지식을 잃어버려 무지성 짐승이 되어 버린 자들의 본능이었다.
<아르마레>
테아렐의 주변으로 소용돌이가 형성되더니 이내 역회전하며 확산했다. 살인적인 흐름이 지식의 망령 상당수를 찢어발기고 뭉개 버렸다.
그러나 형태가 으스러진 망령들은 죽지 않은 채 붕괴된 신체 조각과 다시 하나가 되어 본래의 새까만 형상을 되찾았다.
‘생명력은 약해. 하지만 육체 절반이 파열되어도 죽지 않아. 무슨 이형종이지?’
테아렐이 보기에 이 칠흑의 점토 같은 괴물들은 모종의 불명성을 가진 듯했다.
딱히 경악스럽지는 않았다.
이형종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능력을 더러 갖고 있으니까. 모험가로서 활동하며 셀 수 없이 경험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이형종은 세포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없애 버리면 대부분 사멸한다.
바다의 주인이 코앞에 있다.
단순히 숫자만 많을 뿐인 잔챙이들에게 할애할 시간은 더 이상 없다. 그녀의 초월적인 격이 흑해를 잠식했다.
파지지지지지지직!
여덟 갈래의 뇌격이 쇄도해 테아렐에게 돌진하는 지식의 망령을 강타했다.
푸른빛이 잦아든다.
바싹 타 버린 육체를 수복한 지식의 망령들이 번개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뒤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테아렐의 시선도 그들과 같은 방향을 향했다.
“……? 베.”
“이름은 말하지 말고. 일단 올라와라.”
베르덴이 이쪽으로 오라며 짧게 턱짓했다. 그의 순수한 마력도, 난폭한 존재감도 마법계 총회의와 세계 회의에서 느꼈던 것과 동일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감각으로 상황을 판단한 테아렐이 물의 흐름을 타고 절벽 위에 착지했다.
어둡고 짙푸른 눈동자에 베르덴, 알파, 베타가 한꺼번에 반사됐다.
“왜 너희가 심해에…….”
바다의 주인에게 한껏 쏠려 있던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제서야 테아렐은 거대한 아르카디옴과 그를 둘러싼 기묘한 환경을 인지했다.
“여긴 어디?”
{아르카디옴에 온 것을 환영한다.}
호스트가 현명한 노인처럼 뒷짐을 지며 테아렐을 환영했다. 2m를 아득히 넘는 장신. 그의 창백한 문어 머리에 달린 촉수가 꿈틀거렸다.
“바다의 주인.”
“잠깐.”
베르덴이 만류하기도 전에 테아렐의 고유 마법이 시전됐다.
<카노 마렌시스>
휘아아아아아아아아!
체내를 파열시키는 음파가 바다를 매질로 삼아 굽이쳤다. 정면으로 다가오는 마법을 향해 호스트가 길쭉한 손가락을 펼쳤다.
인위적으로 정지된 바닷물이 매질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 그에 따라 파동의 일부는 소멸되고, 일부는 반사되었다.
테아렐이 오른팔을 휘둘러 반사된 마법을 바다의 구체에 가둔 다음 압축시키며, 그 안에 담긴 마력을 회수했다.
톡.
베르덴에게서 도약한 알파가 헤엄쳐 테아렐의 어깨에 안착했다. 이곳의 환경은 대기가 아니라 물로 이루어져 있다.
[정지. 대화 중. 전투 아님.]
“대화?”
테아렐이 호스트를 직시했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를 여기까지 날려 버린 바다의 주인과 창백한 문어 머리 이형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필시 전자가 본체이리라.
“저런 거하고 대화하는 거 아니야.”
[인정.]
“인정하지 말고 말려야지.”
베르덴이 직접 테아렐을 막아 세웠다. 다시 둘이 서로를 인식했다. 혹시나 싶어서 다시 한번 확인해 봤지만 진짜가 맞았다.
“대체 여긴 어떻게 온 거지?”
테아렐이 대답했다.
“헤엄쳐서.”
아무리 흑해라고 하지만 헤엄쳐서 아르카디옴에 올 수 있는 건가? 그 광활한 바다에서 이곳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
대체 무슨 확신이 있었길래 심해 속의 심해까지 직접 찾아온 걸까.
하필이면 이 시점에 말이다.
‘어쨌든 테아렐의 말에 따르면…… 아르카디옴이 리버레아스처럼 다른 3차원 공간에 있는 건 아니라는 건 이걸로 확인된 셈인가.’
베르덴은 아르카디옴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기억 한편에 넣어 두었다.
테아렐이 물었다.
“그래서 설명은 언제 할 건데?”
“그건…….”
{해안 도시의 여인.}
호스트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테아렐과 마주 섰다. 그의 말을 들은 그녀가 똑바로 호스트를 올려다봤다.
{나비의 날갯짓이란 놀라운 것이지. 벌레보다 못한 힘을 가진 마법사의 발악이 이 세상의 인과를 사정없이 비틀었으니. 네가 아르카디옴에 오는 날이 먼 훗날로 정해졌으나, 지금 이 순간 내 영역에 발을 디딘 것처럼.}
“무슨 소리야?”
{나야말로 네가 찾던 바다의 두려움이다.}
호스트가 단언했다.
{내가 네 이상(理想)이다.}
테아렐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시선을 감당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네 스스로를 얽맨 ‘초월’이라면 나를 쳐 죽여야 마땅하겠지. 하나 그게 가능할지는 차치하고 시기가 맞지 않다. 네 번째 주빈이 참석하는 지식의 만찬회가 거의 다가왔으니.}
호스트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루자크를 죽이려 했던 인어 귀빈이 빈 유리잔을 들고 미끄러지듯이 다가왔다.
촤악.
그녀는 어떤 시대에 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고급스러운 나이프로 자신의 손목을 베었다. 혈향이 코끝을 스쳤다.
기이하게도 피는 바닷물에 섞이지 않고 천천히 흘러내려 유리잔을 채웠다.
“우후훗, 아르카디옴의 열세 번째 귀빈이 기꺼이 지식을 바칩니다.”
호스트는 피가 담긴 유리잔을 건네받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걱정할 것은 없다. 불청객이라고 해서 내쫓을 생각은 없으니. 지적 수준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자격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테아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멍청하다는 거야?”
{내가 너를 열아홉 번째 귀빈으로 아르카디옴에 초대하겠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애셔에게 듣도록 하라.}
호스트가 인어 귀빈의 피를 마셨다. 입에 머금고 깊이 음미했다. 그러고는 잔을 내밀어 약간 남은 피를 베르덴에게 권유했다.
당연히 베르덴은 거절했다.
{개개인의 편식은 취향에 따르는 것이니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만찬회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 것마저 존중받아야 할까.}
호스트가 마저 잔을 비웠다. 인어 귀빈이 텅 빈 유리잔을 가져가며 얼굴을 붉혔다. 호스트를 향한 눈빛이 열정적이었다.
{아르카디옴을 개최하기 전에 정식으로 연락을 취하겠다. 오늘처럼 불쾌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안심하도록.}
호스트가 저택으로 돌아간다.
“설명은 그게 전부인가?”
{안 그래도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한데 예기치 않게 귀빈의 수가 늘었으니 호스트로서 준비를 좀 더 서두를 수밖에. 아르카디옴의 절차에 관련된 안내는 다른 지식인이 맡아도 충분하고.}
쿠오오오오───
갑자기 심해가 번쩍이고, 빛에 늘어진 정체 모를 그림자가 아르카디옴을 덮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늘함.
너 나 할 것 없이 베르덴, 알파, 베타, 테아렐이 뒤를 돌아봤다.
대도시보다도 거대한 존재가 아주 멀리서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촉수를 천천히 흔들거리며…….
{특별히 선물을 주마.}
호스트가, 팔을 잃은 루자크 옆에 멈춰 서서 반쯤 몸을 돌렸다.
{금환일식까지 26일 남았다.}
“……!”
동시에 베르덴의 품속에 있던 [그링 아르카넘]이 멋대로 나왔다. 책장이 활짝 열리며 다른 공간으로 이어진 통로가 개방되었다.
베르덴 일행이 아르카디옴에 왔을 때처럼 암흑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대륙의 지식인이 심해에서 사라졌다.
{‘당신’과 올다르크가 주도하는 전쟁에서 생명은 제물이고, 죽음은 수단이며, 영혼은 도구이니.}
호스트가 지적 호기심을 보이며 베르덴이 사라진 장소를 바라보았다.
{완성되지 않았을뿐더러 고집스럽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네가 어떻게 진실에 도달할 것인지. 흥미롭게 지켜보도록 하지.}
* * *
세계 금서에 의한 강제 공간 이동이 끝나자마자 베르덴이 주변을 파악했다. 블랙 아워의 대전당 심층 속 공간이 벽안에 비쳤다.
알파와 베타와 함께 [그링 아르카넘]의 반응을 실험했던 장소로 돌아온 것이다.
뚝…… 뚝…….
확실히 심해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 온몸이 물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행의 숫자가 늘었다.
“여긴 또 어디?”
테아렐이 대전당의 벽을 가볍게 두드리며 태연히 물었다. 그리고 방의 한가운데에는 낯익은 존재가 앉아 있었다.
열여섯 번째 귀빈, 루자크.
루자크는 당황하지 않은 채 호기심 넘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호스트의 말이 베르덴의 뇌리를 스쳤다.
───그렇지 않다. 이는 주빈에게 실례를 범한 대가일 뿐이지. 너희들을 위한 배상은 루자크의 처벌 이후에 집행될 것이다. 루자크의 재산으로.
───안 그래도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한데 예기치 않게 귀빈의 수가 늘었으니 호스트로서 준비를 좀 더 서두를 수밖에. 아르카디옴의 절차에 관련된 안내는 다른 지식인이 맡아도 충분하고.
아무래도 정황상…… 호스트는 루자크란 존재를 베르덴에게 넘겨 버린 듯했다. 루자크는 그걸 인지하고 있고.
벽안을 마주친 루자크가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방금 호스트께 아르카디옴 개방 전까지 네 번째 주빈을 모시라는 통보를 받았소. 짧은 시간이나, 잘 부탁드리겠소. 다만 그전에 주빈께 간곡히 부탁할 것이 하나 있는데.”
“뭐지?”
“혹시 물 있소?”
루자크는 아르카디옴의 주민이다. 그의 신체는 육지가 아니라 바다에 맞춰져 있다. 물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펄떡펄떡.
루자크가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서는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꿈틀거렸다. 베르덴이 서둘러 그의 신체를 물로 감쌌다.
그때였다.
베르덴이 아드리안의 존재감을 느끼고 대전당의 밀실을 개방했다.
“마침 계셨군요. 주군께 전해 드릴 것이…….”
아드리안이 테아렐과 뭔지 모를 기괴한 이형종을 보고는 멈칫했다.
“무슨 상황입니까?”
“나중에 설명하겠다. 용건은?”
외부인이 있기에 아드리안은 일단 공식적인 건만 전달했다.
“아케나드 마도국에서 초대장이 왔습니다.”
* * *
마탑의 동력원은 완전한 것이기에 아주 엄중한 보안은 없다.
보헤미른 마탑의 동력원 폭주 사태 이후에도 그 관념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과거 보헤미른 마탑과 블랙 아워의 전쟁 당시에 디아문 마탑의 동력실까지 침입한 암월이, 동력원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떠났다는 정황이 제법 큰 근거가 되었다.
[됐다!]
덕분에 아에로돈은 위험한 난관 없이 동력실의 보안을 파훼할 수 있었다.
키이이잉.
마지막 보안문이 열린다.
순수한 마력이 가득한 공간.
눈부신 푸른 광원을 코앞에서 마주한 아에로돈이 길게 심호흡했다. 긴장이 되긴 했다. 그 올다르크가 대체 무슨 이론과 이유로 이걸 만들었는지 처음으로 밝히는 것이니까.
[자, 이제 확인해 볼까?]
아에로돈이 낮은 웃음을 흘리며 주저없이 용의 발톱을 동력원에 찔러 넣었다.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서 그 내부를 헤집고는, 천공룡의 능력을 최대로 활성화해서 동력원의 본질을 파악하려 애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동력원의 근원에 접근한 아에로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
아에로돈이 떨기 시작했다.
[어어, 어…….]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너무도 당황스러워서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격하게 동공을 떨던 아에로돈이 기겁했다.
[올다르크, 이런 정신나간미친새──]
콱.
무언가가 동력원에서 나와 아에로돈의 목을 붙잡았다. 손이었다. 순식간에 제압당한 천공룡의 눈앞에 인간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쉿+
올다르크가 침묵을 강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