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3화 급진전 (9)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켁!]
아에로돈이 뒤늦게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압력을 인지했다. 육체와 영혼을 압도당한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목이 제대로 붙잡혀서라기보단 당혹감이 너무 큰 탓이었다.
갑자기 동력원에서 등장한 존재는 모종의 마법에 의해 외모가 불분명했지만…… 아에로돈이 물리적인 죽음을 맞이했던, 약 330년 전 그날의 기억 속 존재감과 아주 흡사했기에.
그때, 숨통이 약간 트이는 게 느껴졌다.
[케, 케흑. 오, 올다, 올다르크…….]
아에로돈은 날개와 다리를 휘적거리며 거의 축 늘어졌다. 정신이 혼미하다. 그는 올다르크의 손에 매달려 있다시피 했다.
해츨링이라고 해도 드래곤답지 않은 무력한 모습이었다.
당연한 순리다.
그 4대 고룡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괴물 앞에서 아에로돈은 한낱 피식자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투가 전혀 성립하지 않을 뿐이지, 겁에 질려서 아무 말도 못 할 정도로 천공룡은 심지가 나약하지 않았다.
[왜…… 네가 여기에 있는지 모, 모르겠지만…….]
아에로돈의 시선은 여전히 동력원의 근원에 거의 닿아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올다르크보다 저 마력의 집합체가 더 중요했다.
[너, 제정신이냐……?!]
+내 정신은 그 무엇보다도 선명하다, 천공룡 아에로돈+
올다르크가 손아귀를 폈다. 바닥에 툭 떨어진 아에로돈이 아주 크게 숨을 들이쉬며 목을 붙잡고 켁켁거렸다.
살짝 눈물이 고인 녀석이 호흡을 가다듬지도 않고 소리쳤다.
[이 올다르크 놈아! 그런, 그런 미친 짓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터무니없다! 불가능해! 절대로! 결국 ‘당신’이 완전히 깨어나면 당장이라도 알아차릴 텐데……! 이 시대에서 ‘당신’과 전면전이라도 벌일 작정이냐!!]
마탑의 동력원에서 걸어 나온 올다르크가 아이를 대하듯 아에로돈을 굽어보았다.
외형은 흐릿하게 보일지언정 고귀함은 감출 수 없었다.
+운명의 개념엔 반대하지만, 그것은 이미 정해진 미래다. 운명전은 종전이 아닌 정전, 아직 나와 ‘당신’ 중 한 명이 죽지 않았으니+
[그건 나도 알아!!]
아에로돈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네놈이 패배를 딛고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고 해도 전력의 차이는 극명하다. 당연히! 그걸 좁히겠다고? 저런 말도 안 되는 ‘무기’를 써서? 다시 한번 말하마! 그건 ‘당신’도 고려하지 않을 정신 나간 발상─]
아에로돈이 덜컥 입을 다물었다.
머리를 굴려라.
올다르크가 동력원을 구축한 것은 아마 ‘당신’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뭔가가 더 있다.
초대 마도왕은 자신보다 훨씬, 훨씬 더 멀리 볼 줄 아니까.
사아아아…….
소름 끼치는 묘한 흐름이 하늘색 비늘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걸 인식하자마자 아에로돈이 눈을 부릅떴다.
‘그, 금기!!’
아에로돈이 예전에 알아낸 바에 의하면 금기의 자격을 얻는 조건 중 하나는 스스로 선택해 초월에 도달하는 것.
올다르크는 당연히 초월의 격을 갖췄지만 정말로 금기를 다룰 줄은 몰랐다. 그에 대해서 들어 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어? 아니, 잠깐만. 이건 내가 알고 있는 금기가 아니잖아. 관조하는 존재…… 세계수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금기란 세계를 대상으로 한 절대적 규율이자 법률이며, 세계수를 통해 반영되는 공연한 의지가 아니었나?
어쨌든 위험하다.
결국 금기를 건드려, 그 선을 넘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발설 금지는 물론이거니와 해당 주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아에로돈이 모든 사고력을 현실에 몰아넣으면서 두 발짝 물러났다.
올다르크는 여전히 서서 천공룡을 응시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 상황이.
그 비밀이.
저 존재가.
미지에서 새어 나온 공포가 아에로돈의 마음을 잠식했다. 녀석이 꿀꺽 침을 삼키고는 최대한 강한 어조로 물었다.
[대체, 목적이 무엇이냐.]
올다르크가 답했다.
+희망+
키이이이이잉.
아에로돈이 들어오면서 닫아 놓았던 동력실의 문이 개방되었다. 생소한 마력이 느껴진다. 누군가 들어온 것이다!
올다크르에 정신이 팔려 있던 아에로돈이 아차 하며 고개를 돌렸다.
“누가 함부로 헬리온 마탑에 발을 디디는가!”
헬리온 마탑의 제1전투사단장, 울카르 듀인이 스태프를 겨누었다.
경고 없이 즉각 대응에 돌입했다.
마도 <게윈다르(Gewindar)>
대지 속성이 깃든 날카롭고, 무거운 돌퐁이 세 방향에서 회전하며 쏘아졌다. 그 파괴력은 거뜬한 마법적 성문도 단숨에 뚫어 버릴 정도.
울카르는 헬리온 마탑의 이인자이자 공성 마법의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이다.
샤아아아아아아악!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와 함께 아에로돈의 머리 위로 고유 마법이 지나갔다. 울카르는 상대를 자세히 살피기 전에 본능만으로 누굴 먼저 제압해야 할지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에…… 올다르크가 고개를 약간 움직였다.
울카르에게 시선이 전해졌다.
투확!
마법의 형태가 다시 마력으로 돌아가며 마도가 강제로 닫혔다. 마력회로의 모든 기능이 일시적으로 정지했다.
마력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체중을 지탱하고 있던 다리가 무너지며 울카르가 쓰러졌다.
항거할 여력이 없었다. 격차를 느끼고 두려움에 떨 시간도 없었다. 미처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뒤틀릴 시간도 없었다.
몸과 정신의 반응 속도가 현상을 전혀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데구르르…….
직후 6위계 상위 마도사에 손에서 지팡이가 굴러떨어졌다. 정적의 서늘함이 아에로돈의 꼬리를 핥는 듯했다.
올다르크가 손을 튕겼다.
<기억 조작>
울카르의 머리에서 나온 최근 기억이 마력으로 구현되어 펼쳐졌다. 시각화된 여러 장면이 시시각각 왜곡되거나 소거되었다.
그렇게 새롭게 편집된 거짓의 기억이 울카르의 머리에 다시 스며들었다.
[기억을 건든 것이냐……? 그런 종류의 마법은 자신…… 혹은 상대가 마법적인 균형을 위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않느냐. 그 위력이라면 저 마도사의 뇌 기능 일부가 손상되었을 텐데. 역시 악랄하기 짝이 없구나……!]
+기억 마법의 대가로 신체, 또는 정신의 손상을 야기하는 것은 얄팍한 경지다. 진정한 마법적 존재는 ‘제약’으로서 균형을 조율하지. 상대방에게 응분의 기억을 제공하거나, 기억 마법의 대상으로 지정할 수 있는 횟수를 제한하거나+
의식을 잃어버린 울카르의 가슴이 주기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호흡이 멀쩡하다.
신체적 기능은 무사하고, 정신적으로도 문제는 없어 보였다.
올다르크의 가르침이 진실인지 확인하느라 눈을 끔뻑거리던 아에로돈이 이내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서 조금 더 멀리 떨어졌다.
[설마 내 기억도 조작하려는 것이냐?! 올다르크 놈! 그렇게 해서 진실이 감춰질 거라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그대의 기억을 건드릴 예정은 없다+
올다르크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의 <기억 조작>은 한 개체에게 두 번 이상 걸 수 없으니+
[……뭐?]
아에로돈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이미 내 기억을 조작한 적이 있다고……? 대, 대체 언제?]
아에로돈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네놈이 나를 죽였던 그날에?!]
+그대의 눈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분수에 맞지 않게. 그래서 정작 제대로 아는 것은 많지 않고, 감히 봐서는 안 될 것에 흥미를 갖게 되지+
올다르크가 다가와 아에로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무슨 애완동물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았으나 아에로돈은 그 손을 떨쳐 낼 수 없었다.
[내 육체는…… 어디에다가 쓴 것이냐.]
+희망의 일부에+
철컹!
개념으로 이루어진 쇠사슬이 아에로돈의 존재를 스쳐 지나갔다. 뭔가가 잠기는 것 같은 소리가 영혼에 울려 퍼졌다.
+침묵에 잠긴 지식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지. 그대는 무사할 거다. 이후 억지로 입을 열지만 않는다면+
마탑의 동력원이 지닌 본질. 그리고 아에로돈과 올다르크의 갑작스러운 만남과 그들이 나눈 대화는 금기로 봉인되었다.
등을 돌린 올다르크가 멀어진다.
초대 마도왕의 불명확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에로돈이 황급히 물었다.
[베르덴! 보헤미른 마탑의 동력원이 사라지는 날 운명의 수레바퀴가 무너진 이 상황! 전부 네놈하고 세계수의 계획이었나?!]
+베르덴+
올다르크가 걸음을 멈췄다.
+단 한 명의 인간이 운명을 거부하고, 동력원을 멋대로 활용했다. ‘당신’도, 나도 감히 상정하지 못한 변수였지. 세계 회의를 이용해 운명의 실을 끊어 버린 것도, 긍정적인 사상을 담아 만든 내 분신을 스승으로 삼은 것도, 그 외에도+
태초의 마법사라고 불렸던 그가 헬리온 마탑의 동력원을 응시했다.
+그래서 해석하는 중이다+
[베르덴을?]
+미지를 해명하는 것은 마법사의 본능이니+
올다르크가 말을 이었다.
+그날 운명의 수레바퀴가 무너진 다음, 베르덴의 시작점으로 추정되는 리비안트 공국의 파이테 남작 영지부터 되짚어 보고 있다. 오랜만의 순행이라서 그런지 퍽 즐겁더군+
다름 아닌 올다르크 본인이 베르덴의 과거를 직접 살펴보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에, 아에로돈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하, 한가하구나, 올다르크. 그렇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 것이냐? ‘당신’이 깨어나면 어쩌려고.]
+이미 ‘당신’은 눈을 떴다. 그리고 내가 현실에 개입하면 할수록 ‘당신’의 잠든 의식도 빠르게 경계 너머로 이끌리겠지+
동력원이 발광한다.
+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올다르크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희망을 보고 싶다면 끝까지 살아남도록+
파아아아앗!
마탑의 동력원에서 터져 나오는 푸른빛.
순간적으로 얼굴을 가렸던 아에로돈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올다르크의 모습과 존재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오직 고요히 명멸하는 동력원만이 하늘색 동공을 가득 채웠다.
허전한 정적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드래곤의 비늘 깊숙이.
그 감각이 직전의 상황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망했다.]
아에로돈이 동력원을 노려보며 어금니를 깨물곤 서둘러 동력실을 떠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력원은 마탑의 근간을 지켰다.
울카르 듀인이 동력원 앞에서 깨어난 것은 얼마 후의 일이었다.
* * *
“헬리온 마탑의 동력원에서 이상 마력 파장이 발생해 동력실의 당직자들이 의식을 잃고, 그 마력을 감지한 울카르 듀인이 홀로 동력실에 진입해 사태를 겨우 해결했다고 하던데.”
원래 이른 저녁에 마칠 예정이었던 아르나크 제국과 헬리온 마탑의 회담은, 예기치 못한 사태로 중단됐다.
동력원에서 원인 모를 문제가 일어난 탓이다.
보헤미른 마탑에서 동력원 폭주 사태가 발생한 사례가 있는 만큼…… 울카르에게서 직접 보고를 받은 헬리온 마탑주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대피시켰다.
정보를 은폐하지 않으면 헬리온 마탑의 이름값이 떨어질지도 모르지만, 자칫 동력원이 폭주하기라도 해서 자신을 포함한 고위 마도사들이 죄다 사망하면 끝장이었다.
심지어 미적거리다가 아르나크 제국의 황제와 아르나크의 검의 신변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을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명성과 안전.
둘 중 뭐가 중요한지는 명백했다.
그렇게 트리톤 마르투스로부터 아주 정중한 상황 설명을 들은 뒤, 일찍 귀국길에 오른 제라클 황제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에로돈, 네가 원인인가?”
무사히 헬리온 마탑 외부에서 합류한 아에로돈이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한 거 아니다.]
“…….”
제라클 황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동력원에서 뭘 알아냈지?”
[그건…….]
아에로돈이 볼을 긁적거렸다.
[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얼마나.”
[조금 많이…… 아니, 꽤 많이? 그러니까 동력원에 대해선 당분간 신경 끄거라. 다른 지식이라면 뭐든지 알려 줄 테니까…….]
아에로돈이 계속해서 쭈뼛거린다. 평소 “이 몸은 천공룡이다!”라며 자신만만하게 외치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리반데일 대공이 어떻게 할 것인지 시선만으로 물었다.
제라클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아에로돈이 입을 다물기로 결심한 이상 침묵을 깨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드래곤은 아주 까다로운 종족이었다.
‘틀림없이 마탑의 동력원에서 어떤 정보를 얻은 것 같은데…… 저 꾹 닫은 입을 어떻게 열지 방법을 모색해 봐야겠군.’
제라클 황제가 나름대로 해결책을 생각해 내는 동안, 아에로돈은 올다르크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고심했다.
‘내 기억의 어느 부분이 조작되었는지 찾는 것도 문제지만, 진실을 발설하면 여지없이 즉사. 생각을 깊게 해도 죽을 수도 있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베르덴이 훨씬 더 중요한 존재인 모양인데…… 녀석에게 정보를 알려 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좋지? 올다르크가 움직이고 있고, ‘당신’은 이미 깨어났다니……!’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운명전의 후반부가 전개될 것이다. 고작 해츨링에 불과한 아에로돈이 살아남을 확률은 거의 없다.
성체였어도 열에 아홉은 죽을 텐데, 이런 작은 몸으로 뭘 할 수 있겠나.
‘대체 어떻게 하면.’
다만 아에로돈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보호해 줄 조력자가 아니었다. 그 ‘당신’과 올다르크의 전쟁에서 베르덴이 뭔가를 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은 전혀 없었다.
전쟁이 재개되면 세계는 초토화될 터.
‘어떻게 하면 대륙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아에로돈에겐 세상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다.
* * *
하늘섬, 아크.
방주의 다섯 선장───세계의 주시자, 다리시아 스텔라가 자신의 방에서 필기구를 집어 든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부드러운 회색의 천으로 가려진 눈가가 이따금 움찔거렸다.
“어감은, 이게 좋을 것 같고…… 의미는…… 이게 그 사람한테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 단어들을 엮으면…….”
스윽, 슥.
다리시아는 맹인이지만 주시자라고 불리는 만큼 남다른 시야를 갖고 있다. 종이에 글씨를 쓰는 것쯤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초침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이윽고.
“……! 됐다.”
지난 몇 달간 고민을 거듭하고, 최근 몇 주 동안 다듬어 온 명칭이 그녀의 유려한 필기체로 마침내 형태를 갖추었다.
다시 몇 번이고 되뇌어 봐도 이보다 좋은 단어의 조합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리시아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동료를 위한 웃음이었다.
“이거라면 분명 마음에 들어 하겠죠?”
방주의 다섯 번째 선장인 세계의 주시자가, 방주의 여섯 번째 선장을 가리키는 고유 명칭을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