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4화 재능과 불꽃 (1)
갑자기 강력한 존재로 거듭난 블루에 대한 여러 추측과 설명을 엘프 측에게 들은 뒤.
아드리안은 각각 아케나드 마도국과 보헤미른 마탑에서 보낸 공식 및 비공식 연락을 갖고 대전당에 복귀했다.
주군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길래 다른 장소로 발걸음을 돌리려던 순간…… 심층에서 다시 주군의 마력이 감지되었다.
‘아무래도 바깥으로 나가셨다가 지금 복귀하신 모양이군.’
공간 이동에 능통한 주군과 함께 지내다 보면 아주 흔한 일이다.
그렇게 심층의 연구실로 직행했다.
“마침 계셨군요. 주군께 전해 드릴 것이…….”
아드리안이 멈칫했다.
주군의 존재감에 가려진 외부인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 것이다.
뒤통수가 개방된 인간형 괴생명체가 펄떡거리고, 물에 푹 젖은 테아렐이 조용히 대전당의 벽을 만지고 있는 모습이…….
“무슨 상황입니까?”
아드리안은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마법진을 부여해 강화한 유리와 밀도가 꽤 높은 석벽을 조합하고, 그 안을 바닷물의 농도와 똑같이 맞춘 물로 채워 넣었다.
그렇게 임시로 만든 일종의 수족관에 루자크를 집어 던졌다.
풍덩!
“이제 살 것 같구려. 어차피 그런 것으로는 죽을 수 없는 몸이 말이오.”
방금까지 물고기처럼 발버둥 쳐 놓고서는 이제 또 체면을 차리고 있다.
베르덴이 통찰력을 높였다.
‘뭐, 그래도 쉽게 죽지 않는 신체라는 건 분명해 보이는군.’
지식의 망령들에게 뜯겨 나간 팔의 단면이 이미 아물어 있다. 아니, 아물었다고 하기에는 흉터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팔뚝이 없었던 듯이 불구가 된 팔의 형태가 아주 자연스러웠다.
베르덴이 입을 열었다.
“호스트는 너로 하여금 내게 배상하게 하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 배상이 네 존재 자체인 것 같은데, 내가 이해한 게 맞는 건가?”
“정확히 말하자면 지식이오.”
유리창 건너편에서 루자크가 가까이 다가왔다.
“내 일신이 주빈께 맡겨진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쌓은 지식을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고 주빈께 제공할 의무를 지게 되오. 일종의 자문 역할을 맡은 것이라고 보면 되오. 아르카디옴에서 가장 무겁고 잔인한 처벌 중 하나지.”
“그런 것치고는 표정이 밝아 보이는데.”
“그야, 주빈께선 호스트와 동등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니까.”
루자크가 이를 드러냈다.
“위대한 지식인에게 내가 아는 걸 베푸는 것이 뭐가 두렵고 아깝겠소? 잘만 하면 주빈의 지식 일부를 내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노력에 비하면 아주 큰 과실이오.”
“…….”
“아, 당연히 주빈께서 나를 절벽에서 끌어 올려 준 것도 기억하고 있소. 지식인은 은혜를 원수로 갚지 않는 법이지. 무엇이든 물어보시오. 최대한 성의껏 답하겠소.”
아르카디옴은 상식의 틀에서 벗어난, 그러니까 아주 정신 나간 곳이었다. 존재를 실제로 먹음으로써 지식을 얻을 수 있다니?
섭식으로 진화를 꾀하는 글러트니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비슷한가?’
아무튼.
지식의 만찬회가 어떤 광경일지는 굳이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그럼 일단, 네 기원은 뭐지?”
“기원이라.”
루자크가 어깨를 작게 들썩거렸다.
“역시 나의 신비한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겠구려. 과연 주빈이오. 아르카디옴의 깊은 비밀 중 하나를 곧바로 지적하다니.”
그가 바다코끼리를 닮은 코를 쓸었다.
“나도 모르오. 애석하게도.”
“모른다?”
“아르카디옴의 배경이 무엇인지, 아르카디옴의 주민들은 또 어디에서 탄생했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소. 오직 아르카디옴을 설립한 호스트만이 진실을 알고 있지. 주빈께선 내 솔직한 대답에 어떠한 거짓도 없다는 것쯤은 이미 간파하셨을 터. 첫 질문부터 답할 수 없다는 것이 지식인을 자부하는 존재로서 적잖게 부끄럽구려.”
“호스트가 정보를 통제하고 있다는 건가.”
“지식은 독점하는 것이니까.”
루자크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아르카디옴에서는 귀빈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보다시피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호스트에게는 한낱 장난감에 지나지 않소. 지적 충돌 게임의 기물과 다를 바가 없지. 호스트의 비밀을 알아낼 자격이 있는 것은 아마 주빈 외에는 없을 거요.”
“그런 취급에 만족하나?”
“나는, 우리는 호스트가 가진 지식 일부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니까. 껄껄껄껄, 그 아찔한 감각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황홀감이 눈동자에 아른거리다가 사라졌다.
“물론 여기서 조금 더 욕심을 내면 자칫 지식의 망령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나름대로 주의하고 있소.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도 시간문제인 듯하지만. 지식인의 숙명인 셈이지.”
주인이 흩뿌린 먹이에 만족하는 생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 족속.
베르덴이 규정한 지성체의 존엄 위반으로 보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다.
바로 선택의 주체가 다른 까닭이다.
‘루자크는 충분한 지성을 갖추고 있으나 가축을 자처하고 있다. 수동적으로 희생과 고통을 강요받는 실험체들과는 달라.’
어떤 외압도 없이 진심으로 제 처지를 받아들인 것을 제한할 수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노예제를 없애도 누군가가 노예가 살아가기로 제멋대로 결정하고, 또 그렇게 행동한다면 제재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깊게 파 봐야 할 문제군.’
아직 존엄을 판단하기엔 이르다.
호스트가 도대체 어떤 운명인지, 아르카디옴의 주민이 무엇인지 등 먼저 알아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므로.
“주군.”
[상황 설명. 완료.]
알파와 베타가 에온의 위상들을 위한 정보 공유 임무를 끝마쳤다. 대상은 아드리안과 이자벨라만이 아니라 사람들까지 포함이었다.
다만 당장 외부에 파견된 간부들은 어쩔 수 없이 제외했다.
지금까지 파악한 세계의 비밀을 전부 밝히는 건 시기상조지만 일부는 괜찮다.
[그링 아르카넘]과 아르카디옴만으로는 금기에 저촉할 일은 없으니까. 호스트와 나눴던 대화 내용은 손을 조금 보면 될 뿐이다.
카인이 난생처음 보는 외형을 가진 루자크를 바라봤다.
“이 존재가 선배의 비밀과 연관된 일부…… 처음 뵙겠습니다. 에온의 아홉 번째 위상, 카인입니다.”
“소개 고맙소. 아르카디옴의 열여섯 번째 귀빈, 루자크 팔테인이오.”
“그러니까 그 세계 금서라는 3대 전설이 심해와 연결되어 있단 말이지? 그런데 이 사람 뒤통수에서 뇌가 보이는데? 징그러워!”
“징그러운 걸로 따지면 그래도 아르카디옴에서는 준수한 편이오.”
루자크의 회백색 뇌를 목격한 유니아가 기겁하며 물러섰다.
확실히 기괴한 이형종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보기에 루자크의 외형은 인간적으로 지극히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심해에 이런 지성체가 존재할 줄이야…… 과연 신성입니다.”
“역시 세상은 넓군요.”
“오오……!”
하지만 아드리안과 라테온을 제외하면 위상의 대부분이 마법사다. 그들은 오히려 호기심을 갖고 루자크에게 큰 관심을 보냈다.
베르덴이 말했다.
“루자크의 처우는 멜라드에게 일임하겠다.”
“괜찮겠습니까, 신성?”
“지식이라면 당신도 못지않으니까. 루자크에게 아르카디옴의 절차를 비롯해 문답으로 여러 지식의 답변을 기록하도록.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궁금증을 해소해도 좋다.”
루자크에게 알아낼 것은 많지만, 베르덴은 당장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며 지식을 손에 넣을 여유까진 없었다.
세력의 장점은 분담(分擔).
블랙 아워의 구성자이자 소사이어티의 창립자인 지혜의 현자라면 베르덴의 역할을 대신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멜라드가 작게 웃었다.
“네 번째 위상으로서 그런 중대한 임무를 마다할 수는 없지요. 맡겨 주세요.”
“멜라드 님이 적임자긴 하지. 근데 가주.”
이자벨라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래서 저 손님은 어떻게 할 거야?”
베타의 프레임을 콕콕 찔러 보고 있던 테아렐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에온의 위상들과 함께 설명을 들으면서, 자신이 아르카디옴에 찾아온 경위를 ‘어느 정도’는 알려 주었다.
베르덴이 팔짱을 꼈다.
“어떻게 할 것도 없다. 바로 모험가 길드 본부로 돌려보낼─”
“나도 여기 있으면 안 돼?”
테아렐이 에온의 권역에 머물고 싶다고 그에게 뜻을 밝혔다.
“이유는?”
“아르카디옴에 대해서 듣고 싶어.”
사실 모험가 길드 본부장과 그렇게 인사를 나눠 놓고서 너무 일찍 재회하면 어색할 것 같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테아렐은 그걸 굳이 입에 올리지 않았다.
“너처럼 주빈은 아니지만, 나도 아르카디옴의 열아홉 번째 귀빈으로 초대됐어. 루자크의 지식을 공유받을 자격은 있다고 보는데.”
“지식의 만찬회의 절차는 잘 정리해서 전달해 주도록 하지.”
“너도 궁금하잖아. 내가 그 호스트라는 존재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너보다는 바다에 더 해박해.”
테아렐이 심해의 색이 담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미모의 무표정한 인상이 훤히 드러났다.
“정보. 거래할래?”
벽안과 남색에 가까운 눈동자가 교차했다.
“네 신변을 에온에 맡기다면.”
“마음대로 해.”
“그렇다면 받아들이지.”
베르덴이 시선을 옮겼다.
“멜라드, 이후 루자크와 대담할 때 테아렐도 함께 데려가라. 모든 문답 과정은 전적으로 당신의 재량에 맡기겠다.”
“이제는 모험가 길드의 초월자와 동행이라. 호호, 놀라움의 연속이군요.”
“아드리안. 테아렐이 대전당에 머물고 있을 때만 감시를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주군.”
아드리안이 광검의 손잡이에 위협적으로 손목을 얹었다. 초월자라는 요소는 초월자로 대응하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테아렐은 불쾌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서 살면 돼?”
“외부에 별채를 마련하지.”
“악명이 자자한 블랙 아워의 대전당에서 지내고 싶은데. 안 돼?”
“안 돼.”
대전당은 세간에 밝혀지지 않은 에온의 기술력과 기밀로 가득 차 있다.
에온의 본거지에 초월자를 머물게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많은 위험을 수반한다. 베르덴은 굳이 부담을 떠안을 생각이 아주 조금도 없었다.
“예민하네. 조심스럽고. 알겠어.”
“알데반, 안내해 주도록.”
“명을 받들겠나이다.”
열두 번째 위상, 알데반이 마땅한 예우를 갖추며 앞장섰다. 그를 따라가려던 테아렐이 “아참.” 하고 중얼거렸다.
“이따 모험가 길드에 서신을 보낼 건데. 그것 좀 전해 줄래? 내가 어디 있는지는 알리고 싶지 않으니 경로가 발각되지 않도록 주의해서.”
“내용을 물어도 되나?”
“금환일식까지 남은 시간. 약 26일.”
호스트가 특별한 선물이랍시고 말해 준 정보는 그녀에게도 들렸다.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차치하고, 일단 대비하는 편이 현명하니까. 귀찮으면 내가 알아서 보낼게.”
“서신을 완성하면 모험가 길드 본부에 전달해 주지. 불명확한 경로로.”
“그거면 됐어.”
다른 초월자 세력의 중심부에 홀로 들어왔음에도 테아렐은 경계심을 내비치기는커녕 제 집 안방처럼 편안한 태도로 자리를 떠났다.
이자벨라가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여러모로 특이한 초월자네. 뭐, 초월자가 다 그렇지만. 성격적으로 위험하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인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지만, 저쪽에서 먼저 내민 손을 거절할 이유는 없지. 테아렐의 말마따나 그녀가 바다에 대한 지식이 가장 풍부하기도 하고.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는 제안이다.”
지식의 매립지 한복판에 떨어진 테아렐은 분명 전투를 하고 있었다, 정황상 호스트가 그 상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운명의 사도와 초월자의 연관성…….’
아르카디옴을 떠나기 직전에 호스트의 본체로 추정되는 괴수를 떠올렸다.
굉대한 존재.
단언하건대 물결치는 바다의 운명을 폐기하는 일은 베르덴에게 어떤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각오를 요구하리라.
어쩌면 테아렐은 그런 부분에서 의외의 핵심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상 적지라고 봐도 무방한 아르카디옴에서 초월자급 아군을 확보해 두는 편이 모든 상황에서 유리하다.
그때, 루자크가 끼어들었다.
“나는 무엇을 하면 되겠소?”
“잠자코 있어라. 나중에 책이라도 넣어 줄 테니.”
쿵!
베르덴이 수족관 주변을 공간적으로 아예 분리해 버렸다. 그리고 삼중으로 보안 마법진까지 덧대어서 안팎을 차단했다.
“오늘 들은 정보의 양이 꽤 많으니 소화할 시간이 필요할 거다. 금환일식을 비롯하여 정보를 정리하고, 추후에 개별적으로 임무를 전달할 테니 각자 일과를 보내고 있어라.”
궁금한 것은 많을지언정 누구도 베르덴의 결정에 간섭하지 않았다.
이처럼 서로를 위해 진실을 천천히 녹여 내려는 여정 속에서…… 베르덴은 노력하고 있고, 그의 곁에 있는 이들은 기다리고 있다.
“이만 자리하지. 아드리안은 마저 보고하고.”
“예, 주군.”
아드리안이 상황을 정리했다.
“그럼 해─”
[해산.]
그 대신 알파가 상황을 정리했다.
* * *
파직. 파지직.
블루가 검붉은 전격을 발산하며 허공을 천천히 유영한다. 누가 봐도 단순히 색과 형태만 같은 것이 아니었다.
베르덴에게서 비롯된 파멸의 마력이 블루에게 깃들었다.
“우리 블루, 진짜로 엄청 멋지다! 그렇지 않아요, 베르덴 님? 헤헤.”
페르네가 블루를 꽉 끌어안으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다시 푸른색으로 돌아온 정령이 반짝거리며 그녀에게 화답했다.
“원초의 정령보다 격이 높은 데다가 모든 마력적 성질이 역대 정령들과 유의미하게 일치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세계수의 관리자를 수호하는 가디언 엘프이자 세렌디아와 핏줄이 이어진 남동생이기도 한 카란스가 확언했다.
“완전히 새로운 정령이 탄생했습니다, 형제여.”
블루가 날아와선 카란스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한때 에스티리아 왕국에 납치된 카란스를 구하기 위해 홀로 기나긴 여정을 떠났던 숲의 정령 포레트는 블루가 되었고.
베르덴의 초월적인 마력에 의해 신(新) 정령으로 재탄생했으나…… 녀석의 자아는 포레트일 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세렌디아가 미소 지었다.
“탄생이자 진화죠. 아직 스스로 계약하는 방법을 깨닫지 못했지만 머지않아 본능적으로 온전한 정령의 능력을 부릴 수 있을 겁니다.”
베타의 어깨 프레임 위에 앉아 있는 알파가 몸을 기울였다.
[베르덴 폐하. 정령. 계약?]
“블루는 베르덴으로부터 파생. 다시 말해 창조된 존재입니다. 정령의 계약은 본질이 서로 다른 개체와 개체가 교집합을 만드는 것이기에 블루와 베르덴의 계약은 개념적으로 불가능하죠. 과연 블루가 누구를 계약자로 선택할 것인지 자신이 직접 선택할 날이 올 겁니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요.”
베르덴이 나무에 등을 기댔다.
“세계수의 관리자가 그렇게 말하니까 감이 잘 안 잡히는데.”
“엘프는 시간에 둔감하니 그리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나 시간의 개념은 상대적이기도 하고, 절대적이기도 한 것. 결국 빠르든 늦든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세렌디아가 하얗고 부드러운 손등으로 나뭇잎을 어루만졌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태고의 세상이 거의 도래했으니까요. 바로 당신 덕분에.”
“덕분이라…….”
베르덴이 손끝으로 마력을 흘려보냈다. 블루의 마력이 공명했다. 순수한 마력이 확산하면서 새해의 자연을 술렁이게 했다.
카란스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역시. 그렇게 함께 있는 걸 보니 마치 부모 자식 같습니다.”
“후훗, 엘프 관점에선 그렇긴 해요.”
“그런가.”
베르덴은 속으로 자식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몇 번 되뇌었다.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 개념이라 잘 와닿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 에스티리아 왕국에서처럼 블루와 알파가 마력을 매개체로 동화했다.
[파멸.]
파직, 콰과과과과!
알파의 손에서 뻗어 나온 현뢰가 상공의 구름을 꿰뚫었다. 앙증맞은 외눈이 잠시나마 검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입을 떡 벌린 페르네의 눈동자에 파괴된 구름 조각들이 비쳤다.
[알파. 골렘 최강.]
[축하합니다.]
반짝!
블루를 통해 강력한 마도사가 된 알파가 마법을 뽐내고, 베타는 묵직하게 손뼉을 마주치며 나름대로 환호해 주었다.
영락없는 형제였다.
거기에 페르네까지 끼어들었다. 녀석들이 즐겁게 노는 광경을 보며 베르덴이 옆에 있는 세렌디아에게 물었다.
“아르카디옴. 태초의 드래곤. 들어 본 적이 있나?”
“네,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유의미할 정도는 아닙니다. 특히 후자는요.”
무작정 꺼낸 이야기임에도 세렌디아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베르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엘프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저희의 지식은 일면에 불과할 뿐입니다. 위대한 어머니께서는 비밀들을 알고 계시지만 수많은 제약에 둘러싸여 계시죠. 그래서 당신의 궁금증을 풀어 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금은.”
세렌디아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선택을 통해 하나씩 정복하세요.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그게 가장 빠른 길일지도 모르니까요.”
“그게 엘프를 위한 길이기도 할 테고.”
“또 형제를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쿵!
카란스가 가슴을 두드렸다.
“엘프에게는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 형제가 나아가고자 하는 길에는 항상 엘프가 함께할 겁니다.”
에스티리아 왕국과 대수림에 있을 때보다 강력한 마력이 넘실거린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몰라도 급격히 성장한 힘과 경지는 세계수의 관리자를 경호하는 데 있어서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니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형제여. 뭐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단언컨대 쓰레기 같은 인간들에게 납치당했을 때와는 다를 겁니다.”
카란스의 눈빛이 이글거린다.
스르릉!
허리 양옆에 찬, 곡선형 단검 두 자루의 검신이 반쯤 드러났다.
“세계 회의를 보니 형제에게 불만을 가진 더러운 버러지들이 여럿 보이더군요. 자, 형제의 다음 행보는 무엇입니까? 혹시 그놈들을 처리할 생각이라면 제게 맡겨 주십시오. 당장 선두에 서서 목을 가져올 테니!”
“다음 행보라…….”
베르덴이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이제는 미룰 이유가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볼일부터 해결할 심산이었다.
“일단 고향 사람부터 만날 생각이다.”
라스카벨 고아원장.
베르덴과 로벨린의 유년기를 돌봐 준 사람이 지금 어레인에 있다. 형제를 위해서 활약하지 못하게 된 카란스가 시무룩해졌다.
* * *
보헤미른 마탑의 상징이 새겨진 마차들이 가도를 질주했다. 농작물이 자랄 수 없는 땅을 지나 머지않아 목적지가 보였다.
“어레인에 도착했어요, 로벨린 님.”
“그래.”
세계 회의 이후───아카데미 강의 건에 대해 레프라기움 마탑과 이야기를 마친 로벨린이 에온의 권역에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