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5화 재능과 불꽃 (2)
서대륙의 발데라 왕국…… 그 남쪽 변방에 자리한 라스카벨은 이 세계에 휘몰아치는 폭풍과 동떨어진 마을이다.
외부인의 왕래가 적을뿐더러 근방의 도시에서 제작한 신문을 찾아보기도 어려우니 소문에 어두울 수밖에 없다.
“큽…… 쿨럭, 쿨럭……!”
한때 전장에서 활약한 마도사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은퇴한 사람에게 정보원이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살인조차도 드문 변방에서 수십 년이란 세월을 보낸 노인은 진즉 평범한 라스카벨의 주민이 된 지 오래였다.
“……후우.”
종군 마법사, 월릭이 힘겹게 손수건을 꺼내서 입가를 닦았다. 침에 피가 섞였다. 잠시 숨을 몰아쉰 그가 찬장에서 약병을 꺼냈다.
꿀꺽.
식도가 순간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든다 싶더니 곧 시원해졌다.
불안한 숨소리도 차분해졌다.
연금술로만 제조할 수 있는 특효약이라서 상당히 비싼 물건이다.
사실상 그로선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은퇴 전에 재산이 제법 있었다고 한들 다 늙은 마당에 무슨 돈이 있을까? 연줄도 예전에 끊긴 지 오래다.
나무 의자에 주저앉은 월릭이 빈 약병에 시선을 두었다.
“대체, 왜 우리를 도와준단 말인가.”
현재 주인 없는 땅을 통일한 에온은 그 초월자 세력이라는 걸 얼핏 들었다.
어째서 세계의 규칙마저 무시하는 엄청난 집단의 간부가 라스카벨 고아원에 도움의 손길을 내민 건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더군다나 덤으로 딸려 온 자신에게 집과 약까지 무상으로 내주다니…….
‘이유 없는 호의야말로 무서운 것인데.’
월릭은 내심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처지에 자조했다. 의심한들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할 수 있는 건 없다.
작년에 다른 마법사들처럼 암월의 꿈을 꿔 위계 돌파 연산식을 터득했지만, 그 반작용을 견디기에는 몸이 너무 약해졌다.
이 또한 재능의 한계다.
하늘이 부여한.
아무리 전공을 세워도, 아무리 마법을 공부해도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고아원을 핍박하는 이들에게 한마디 할 줄 알고, 고아들을 위해서 간단한 마법을 보여 주는 게 월릭의 분수에 맞는 삶이었다.
신체적 장애가 있는 대신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지닌 아이에게 열어 준 길은, 마법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뿐이었다.
그게 고작이었다.
타인을 끝까지 책임지거나, 이뤄지지 않을 꿈을 위해서 목숨마저 내던지는 치열한 분투는 월릭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인생은 떠내려가는 나뭇잎과 같다.
결국에는 별로 의미가 없었던 고단한 생애에서 깨우친 유일한 교훈이었다.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미련하고 공허한 짓이다.
월릭은 한동안 상념에 사로잡혀 있다가 지팡이를 짚고 집을 나섰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처음 보는 신문이 발에 채었다.
“마일라가 갖다 놓은…… 아니군.”
옆집의 문 앞에도 신문이 놓여 있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별도의 비용 없이도 모든 가구에 배부된 듯했다. 천천히 신문을 펼쳤다. 아주 예전에 읽었던 신문에 비해서 가독성이 몇 배는 좋아진 것이 느껴졌다.
‘변방 마을에서는 듣도 보도 못할 소식들이 훤히 보이는구나.’
세월에 따른 기술의 발전이 체감된다.
특히 시각적 요소가 그러했다.
각 면의 주제가 정교한 그림으로 보이니 읽는 게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그림 아래엔 ‘라미샤’라는 이름이 함께 했다.
그림을 넣은 화가인 모양이었다.
월릭은 잠시 문틀에 기댄 채로 어레인의 신문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페이지를 넘기던 도중…… 그의 손과 눈동자가 멈췄다.
“어…….”
신문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한, 어딘가 낯익은 사내의 얼굴. 해당 그림 주변은 어레인에서 몇 번이고 들은 익숙한 이름으로 가득했다.
“베르, 덴…… 베르덴. 설마.”
월릭은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썼던 라스카벨의 고아를 떠올렸다. 그 앳된 얼굴이 신문 속 주인공과 겹쳐 보였다.
단순한 동명이인이 아니었다.
그 베르덴이다.
바로 그 베르덴이었다.
살아 있었다.
보헤미른 마탑의 동력원 폭주 사태에 휘말려 4년 전에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월릭은 베르덴의 생존 사실보다도, 글과 그림으로 묘사된 그의 명성과 위신이 믿기지 않았다.
“어, 어떻게…….”
월릭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어떻게 그 재능으로 마법사가 된 것이야……?”
* * *
어레인 성채.
로벨린이 팔짱을 낀 채 창틀에 기대어 도시의 정경을 바라봤다.
“이런 개발 속도라면 머지않아 대도시로 분류될 수 있겠는걸. 주인 없는 땅의 수도답달까. 과연 신생 세력답게 진취적이기도 하고.”
“자금과 인력이 준비되니 나머지는 알아서 잘 진행되더군.”
베르덴이 따뜻한 코코아를 로벨린에게 건네고는 벽에 등을 기댔다. 창가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나란히 섰다.
로벨린은 부드러운 코코아를 한 모금 맛본 뒤, 다시 홀짝였다.
“입맛에 맞나?”
“뭐, 조금은?”
베르덴이 피식 웃었다.
“어릴 때부터 넌 단 걸 좋아했었지. 고아원에서 특식으로 사탕이 나왔을 때는 나중에 먹겠다고 아껴 뒀다가 잃어버린 적도 있었고.”
“잃어버린 게 아니라 도둑질당한 거야.”
“그랬을지도 모르지.”
로벨린이 재차 반박하려다가 새삼 코코아의 온기를 느꼈다.
따뜻하다.
그렇다.
이런 일상적인 분위기는 언제나 그녀가 원했던 것이었다. 보헤미른 마탑에 들어가기 한참 전부터, 라스카벨 고아원에 있을 때부터, 줄곧.
로벨린이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며 살짝 베르덴과 거리를 좁혔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하고 잘 지내고 있어?”
“예를 들면.”
“그러니까…….”
로벨린은 별뜻 없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이자벨라라든가, 칼리아라든가. 저번에 칼리아와 만나서 친분을 쌓은 적이 있는데 아직 그 사람은 따로 마주친 적이 없어서.”
“죄다 여자군.”
“그냥, 신기하잖아. 보헤미른 마탑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고아원에 있을 때도 여자하고 같이 어울린 적이 없던 넌데.”
“너는 왜 제외하지?”
“아.”
로벨린의 말문이 막혔다. 막상 떠들다 보니까 자신을 간과했다. 인원을 셀 때 본인을 빼놓고 한 명이 부족하다고 소리치는 것도 아니고.
“나야…… 솔직히 여자라고 하기보다는 가족에 가까우니까. 그렇잖아? 서로 태어났을 때부터 같이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틀린 말은 아니지.”
베르덴이 창가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이자벨라나 칼리아나 세간에 알려진 대로다. 당연히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겉과 속에 괴리는 없지.”
로벨린은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과감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결혼하게?”
“갑자기 훅 들어오는군.”
“내가 아니면 누가 이런 걸 묻겠어?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이에 베르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남녀 관계를 이야기하면 나올 수밖에 없는 주제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아직은. 당장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니까.”
“시기상조라는 거구나.”
“그리고 부모와 자식이라는 말도 딱히 와닿지는 않는다. 아마 평범한 가정이라는 걸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로벨린은 저도 모르게 엄지 바깥쪽으로 아랫배를 문질렀다. 자식. 아이. 그녀도 막연히 상상만 해 봤을 뿐 진지하게 고민한 적은 없었다.
행복한 먼 미래를 꿈꾸기에는 여유도, 상상력도 부족했으므로.
“나도 모르겠네.”
무엇보다도 자신 따위가 그렇게 이기적인 앞날을 바라도 되는 걸까. 결국에는 그녀가 방관자나 다름없다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인데.
로벨린이 반쯤 마신 코코아를 조심스럽게 창틀에 올려 두었다.
베르덴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하긴. 당장 대응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닌데 언제 그런 걸 생각하고 있겠어? 급이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에온의 정점인 너나, 임시 보헤미른 마탑주인 나나 편히 쉴 시간도 없는데. 그럼, 어쨌든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로벨린이 화제를 돌렸다.
“레프라기움 마탑 측에서 아카데미 강의 날짜를 마도 축제 기간 내로 희망했어. 그걸 받아들이겠다면 세부 일정은 에온에 맡기겠대.”
무리한 위계 돌파로 골치를 썩이고 있는 마법계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가르침.
세계 회의에서 직접적으로 거론된 그 중요성과 화제성을 고려하면 마도 축제는 가장 적절한 무대가 될 것이다.
다만, 공교로운 점이 있다.
마도 축제에서 공개될 테오도르의 소환 마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세계적인 문제였다.
‘히아레마르 내해 탐사와 겹친다.’
호스트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금환일식이 일어난 후───용검, 마그라스의 소재가 드러난 후 5일이 더 지나면 봄으로 계절이 바뀌면서 4년 만의 마도 축제가 시작된다.
우연히 용검을 빨리 찾아낸다면 모를까.
히아레마르 내해의 규모를 고려하면 탐색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터였다. 세계 각국이 나선다고 해도 말이다.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두 시기가 맞물릴 수밖에 없다.
‘생각이 과한 걸지도 모르지만…….’
용검은 옛 왕과 관련되어 있고, 섭리자는 초대 마도왕과 직결되어 있기에 무엇도 가볍게 흘려 넘길 수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
“편할 대로 해. 어차피 네 핑계 대고 오늘 일정은 전부 비워 뒀으니까. 뭣하면 통신 장치로 말해도 되는 거고.”
“늦어도 저녁까지는 결정하지.”
베르덴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그가 벽에서 등을 뗐다.
“지금 막 아이들과 함께 임시 고아원에 돌아왔군. 이만 출발할까.”
“그래.”
로벨린이 작게 심호흡했다.
“그동안 편지로만 연락했지, 이렇게 직접 뵙는 건 오랜이라서 긴장이 되긴 하네. 그나저나 너를 보시면 어떤 반응일까? 원장님 성격이 예전 그대로라면 펑펑 우실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있지.”
로벨린이 선명한 붉은 눈동자로 베르덴을 슬쩍 올려다봤다.
“어떻게 보면 우리 ‘어머니’니까.”
* * *
“집이다아아!”
“배고파요!”
“저 먼저 씻어도 돼요?”
“나는 마지막으로 씻을 거니까 좀 더 놀래여!”
라스카벨 고아원장, 마일라와 함께 장을 보고 온 아이들이 아기새처럼 삐약거린다.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하는 건 늘 쉽지 않았지만, 마일라는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어김없이 아이들을 데려갔다.
최소한 한 명이라도 말이다.
이렇게라도 장 보는 법을 가르치고, 사람이 많은 거리에 익숙해지게 해야 나중에 자립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자자, 옷부터 털고 들어가고. 세 명씩 같이 씻는 거 잊지 말고. 오늘 저녁은 스튜니까, 혹시라도 끓는 물에 델 수 있으니 주방에 들어올 때는 꼭 큰 소리로 말해야 한다?”
“네, 원장님!”
“네에!!”
“스튜에 고기 많이 넣어 주세여!!”
“그래그래.”
라스카벨 고아원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이전 원장님을 도와 아이들을 돌봤던 마일라는 아이들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물론 지금 아이들이 순진하고 말을 잘 듣는 덕분이기도 했다.
‘월릭 할아버지도 스튜를 좋아하시니까 최대한 넉넉히 만들자. 많이 남으면 며칠에 걸쳐서 먹어도 되니까.’
마일라는 습관처럼 생활비를 계산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어? 신문?’
아이들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 뭔지 모를 신문이 있었다. 잘못 배달 왔나? 그렇게 생각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마일라 원장님.”
마일라가 깜짝 놀라며 장바구니를 든 채로 뒤를 돌아봤다.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로…….”
굳이 물어볼 것도 없었다.
마일라는 평범한 여인이지만 라스카벨 고아원의 아이들을 전부 기억한다. 그건 원장으로서 당연한 의무였다.
“로벨린이다!!”
활짝 웃은 마일라가 장바구니를 내려놓을 생각도 못 하고 로벨린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다가 넘어지니까 천천히 오세요.”
“그 로벨린이 이렇게 다 컸─”
아니나 다를까 발이 뒤엉킨 마일라가 순식간에 균형을 잃었다. 장바구니가 허공을 가르고 그녀의 얼굴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
마일라가 눈을 질끈 감았지만 다행히도 넘어지진 않았다.
아마 로벨린이 잡아 준 모양이었다.
“아하하, 미안. 너무 반가워서……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니? 혹시 지나가다가 우연히…… 아, 아니면 라스카벨 고아원을 찾아온 거야? 내가 경황이 없어서 너한테 따로 연락을 못 했는데. 너무 잘됐다. 너한테 줄 선물도 있었는데. 그나저나 몸이 되게 커졌구나. 엄청 남자다울 정도…… 어?”
로벨린의 품속에 안겨 있다고 생각한 마일라가 손을 더듬거렸다. 방금 본 로벨린의 체구와 전혀 맞지 않는 근육의 감촉이 전해졌다.
마일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침 집 밖으로 나온 여자아이가 마일라와 붙어 있는 사람을 보더니, 눈빛을 반짝거리며 두 사람을 손으로 가리켰다.
“원장님이 멋진 오빠하고 같이 있다!”
“뭐라고!”
우르르.
아이들이 집에서 몰려나왔다. 어린 구경꾼으로 사방이 떠들썩했으나 마일라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와 기억은 오직 낯익은 사내만을 비추고 있었기에.
“너, 너는…….”
베르덴은 잠시 할 말을 골랐다가 나지막이 인사를 건넸다.
수십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여인에게, 또 자신에게 베르덴이란 이름을 준 그녀에게.
“오랜만입니다, 원장님.”
“베르덴.”
마일라가 눈에 서서히 물기가 차올랐다.
“분명 마, 마탑에서 사고가, 있었다고…….”
“목숨은 건졌습니다.”
“진짜…….”
마일라가 조심스럽게 길게 팔을 뻗어 베르덴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베르덴이 다섯 살 때 그러했던 것처럼.
문득 베르덴과 로벨린이 한눈에 담겼다.
여덟 살에 불과한 아이들이 보헤미른 마탑에서 준 400만 엘크를 침대에 두고, 멋대로 고아원을 떠나 마탑으로 향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다, 다행이다…… 둘 다, 건강해서…… 정말로 다행…… 내가……!”
손끝으로 베르덴의 로브를 쥔 마일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안도한 듯, 그리고 미안한 듯.
그녀는 베르덴이 살아 있다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며 한참을 울었다.
* * *
“헉, 허억, 헉……!”
월릭이 지팡이로 빠르게 바닥을 짚으며 임시 라스카벨 고아원으로 향했다. 베르덴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해가 기울면서 황혼의 물결이 거리를 붉게 물들였다.
“……!”
누군가 우는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이윽고 마일라와 아이들의 집에 도착한 월릭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곳에는 예전에 보았던 두 아이가 성인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보헤미른 마탑의 로벨린.
그리고.
“……베르덴.”
신체의 마법적 재능이 전무했던 무재(無才)가 초월적인 존재가 되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