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8화 마도국으로 (2)
알버트 윈디로브가 그러했듯───초월자를 등에 업고, 정정당당하게 디아문 마탑주가 되려고 했던 반타룬 타레시온.
그는 세계 회의가 끝난 직후 끔찍한 절망감과 위기감을 동시에 느꼈다.
‘최악…… 최악이다.’
10대 마탑과 에온의 반목을 유도하려던 델하룬의 대왕의 계획이 크게 어그러졌다. 그것도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말이다.
최초의 마탑주라니?
설마 천 년도 전에 세워졌다고 알려진 마탑으로 반격할 거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단 말인가? 증거로 전설 속의 엘릭서까지 내보이면서.
결국 소사이어티의 반 마탑 체제 활동은 역으로 정당성을 얻었다.
이에 더해서 소사이어티를 적대해야 할 마탑들은 신성의 듣기 좋은 말 몇 마디에 감화되었는지 적의를 가라앉혔다.
세계 회의의 주인공은 신성이었다.
그런 와중에 최초의 마탑주라고 하기에는 신성의 나이가 너무 젊지 않냐면서, 반타룬은 지능이 떨어진 소리를 해댔다.
세상에 승계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마탑주가 대체 어딨다고.
결과적으로 반타룬은 마탑주 후보로서의 입지가 불안정해졌다.
초월자를 배경으로 두었으니 당장은 아니더라도, 이대로 가다간 머지않아 알버트 파벌이 득세하리라는 건 자명했다.
강자에게 사람이 모이는 법이다.
패색이 짙어질수록 반타룬의 파벌은 모래성처럼 와해될 것이다. 그렇기 되기 전에 이 상황을 역전할 기회가 그에겐 절실했다.
꿀꺽.
반타룬은 최대한 숨소리를 죽이며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델하룬 특유의 삭막한 분위기가 감도는 알현실의 공기는 더없이 무거웠다.
“…….”
델하룬의 대왕──마울러, 가레스 시릴리아드가 권좌에 앉아 있다. 아무 말 없이, 이따금 팔걸이를 툭 두드리면서.
신성이 제기한 ‘주검의 영광’과의 연관성 탓에 루아스교에 협조해야 하는 마울러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것이 당연했지만……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감정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반타룬은 그것이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정적임을 이해했다.
그때였다.
“불과 20대에 각성한 마법계 초월자…… 난놈은 난놈이더군.”
“예상이 크게 빗나갔습니다.”
제복을 갖춘 여인───델하룬의 근위사단장, ‘미라셀’이 평소처럼 뒷짐을 진 채 경건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신성과 우호 관계로 추측되는 세력, 신성의 실제 경지, 신성의 내력, 정보 등 감춰진 부분이, 세간에 드러난 것들보다 아득히 더 많았습니다. 이 이상의 추측은 무의미할 정도로. 현재로서 동대륙 복속은 불가능합니다.”
마울러가 따분하다는 듯 물었다.
“대안은.”
“혼란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미라셀이 세계 회의를 토대로 새로운 전망을 구상했다.
“다른 안건은 차치하고, 주검의 영광이라는 고대 흑마법사 세력과 루아스교와의 정면 대립이 베일을 벗었습니다. 주검의 영광의 궁극적인 목적은 옛 왕의 부활, 즉 루아스 교국이 보유한 옛 왕의 신체 부위를 손에 넣는 것이 목표입니다. 루아스교의 전력으로도 수백 년 동안 뿌리 뽑지 못한 만큼, 전 가까운 시일에 주검의 영광이 대규모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전쟁의 여파가 어떨지 지금으로서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범세계적인 혼돈은 반드시 야기될 겁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상대적으로 불리한 형국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전쟁터에서 누가 죽든 간에 이상할 것 없으니까요.”
반타룬은 ‘내가 뭘 듣고 있는 거지?’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울라가 물었다.
“그렇다고 하는데. 네놈은 어떻게 생각하지?”
“저, 저는.”
반타룬이 침을 삼켰다.
“그래도 초월자들을 암살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크지 않나 싶은─”
“머리가 안 돌아가나?”
콱.
어느샌가 마울러의 큼지막한 손아귀가 반타룬의 이마를 붙잡았다. 손가락에 조금만 힘을 줘도 그 약한 머리는 터져 버릴 터였다.
“내가 원하는 건 동대륙이다. 신성하고 천검, 두 놈을 죽이는 건 번거로울뿐더러 나중에 처리해도 될 문제지. 그렇다면 대체 누굴 죽여야 에온의 권역이 축소될까.”
“에온의 간부, 호, 혹은…….”
반타룬이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에온의 비호를 받는 권력자입니다……!”
“그래, 네놈의 경쟁 상대처럼.”
마울러가 얼굴을 가까이했다. 강철처럼 흔들림 없는 눈동자 속에 반타룬의 두려움에 질린 얼굴이 아른거렸다.
“디아문 마탑주가 되는 것 외엔 네놈에게 가치가 있나?”
“어, 없습니다……!!!”
“그럼 준비해라. 멋대로 계산하다가 처분당하지 말고.”
마울러가 손을 거두었다.
“이 새끼 돌려보네.”
델하룬의 근위사단이 반타룬을 데리고 알현실을 떠났다. 초월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마탑주 후계자의 덜떨어진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세계 회의 안건들은 예정대로 진행해라. 모나지 않게 적당히.”
“예, 가급적 관망하겠습니다.”
“예외로 히아레마르 내해 탐색대엔 전력을 좀 더 할애한다. 그 용검이라는 게 어떤 물건인지 내 눈으로 봐야겠다.”
“알겠습니다.”
미라셀이 명령을 고스란히 기억하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히아레마르 내해 탐색은 초월자가 없는 세력도 참가하므로, 탐색대에는 초월자가 개입할 수 없다는 조항이 추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찰이 생기면 수습하기 어려우니 공식적으로는 그렇겠지.”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그 조항은 지켜지지 않을 겁니다.”
초월자가 여러 수단을 이용해서 제대로 숨으려 든다면, 초월자가 아닌 이들이 그를 식별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발견했다고 해도 대처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라는 바다.”
마울러가 다시 권좌에 몸을 실으며 혈기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비공식적으로 초월자가 죽으면, 아무도 명분을 들이밀지 못할 테니.”
과연 히아레마르 탐색에 어떤 초월자들이 숨어들 것인가.
마울러는 개인적으로 에온의 천검이 개입하기를 바랐다.
아드리안 첸버스.
그 시건방진 초월자 새끼 말이다.
* * *
베르덴의 마도 <파멸>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
첫 번째, 지속적인 파멸.
검붉은 마력에 오래 노출될수록 실체는 파괴되어 없어진다.
물리적 수준을 넘어 본질까지 파괴하는 위력을 생각하면, 이론상 베르덴이 장기적으로 없앨 수 없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활용법은 급박한 전투엔 적합하지 않다. 상대가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니까. 그 부분을 보완하는 것이 다음 방식이다.
두 번째, 순간적인 파멸.
베르덴은 마도와 전격 속성을 결합해 <파멸>의 전도성을 극대화했다. 바로 그 결과물이 검붉은 번개, 현뢰(伭雷)다.
이를 연단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베르덴은 파멸의 개념을 통달하기 위해서 먼저 물질적으로 접근했다.
물질 손상.
파멸의 본(本)은 애초에 파괴이므로.
파지지지지직──!
현뢰가 발광하며 뻗어 나갔다. 마력을 거두자 일순간 금속 합금 구체를 파고든 파멸의 전류가 곧 사라졌다.
그하룬이 턱수염을 쓸었다.
“손상이 없어. 이 정돈 너끈히 버티는군. 이번엔 지속적으로 마력을 가해 봐라.”
“그러지.”
콰과광!
베르덴이 구체에 떨어뜨린 낙뢰의 지속 시간을 늘렸다. 마력과 집중력이 더해지자 사방이 검붉은 색채로 물들었다.
그하룬은 대충 두 발짝 물러나면서도 구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만!”
베르덴이 즉시 현뢰를 흩어 버렸다.
“역시 아무런 손상도 없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여기까지인가. 구조적으로 저항력과 분산력을 최대한 높여서 순간적인 충격에는 막강하지만, 물질 자체의 한계 탓에 시간 제한이 있다. 장기적으로도 견딜 수 있는 걸 제작하려면 최상위 금속 합금 이상의 소재가 필요해.”
“예를 들면?”
“최소 드래곤의 머리뼈는 있어야 할 거다. 아니면 저항력이 특출난 드래곤 소재를 쓰거나.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야기지.”
드래곤의 두개골은 [인테리스]의 제작에 사용한 소재 중 하나다. 말인즉슨 그 정도 물건이 아니라면 파멸을 오랜 시간 버틸 수 없단 뜻이었다.
휙.
그하룬이 금속 구체를 베르덴을 향해 가볍게 던졌다.
“그래도 순간적인 출력을 시험하기에는 충분할 거다. 그 현뢰란 마법이 일순간에 구체를 손상한다면 한 단계 성장했다고 봐도 좋겠지.”
“단순해서 좋군.”
“그게 의뢰 내용이었잖냐.”
그하룬은 그 결과에 나름대로 만족한 듯 시원한 술을 꺼내 들이켰다. 이리저리 금속 구체를 살펴보던 베르덴이 물었다.
“이거, 명칭이 뭐지?”
“아직 안 정했다. 뭐, 굳이 복잡하게 지을 필요는 없겠지. [탈라지움]. 그게 이름이다.”
탈라지움.
고대어로 ‘신’과 ‘방패’의 단어를 어순대로 합친 합성어였다. 신의 방패와 파멸.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내력이 있어 보였다.
“항상 고맙다, 그하룬. 나중에 의뢰할 게 생기면 또 부탁하지.”
“훙, 갑자기 인사는 무슨.”
그하룬이 콧방귀를 한번 뀌곤 다시금 크게 술을 들이켰다. 그가 수염과 입가를 적신 술을 팔뚝으로 쓸었다.
“이제 뭐 할 거냐. 그거 들고 골방에 틀어박혀서 명상이라도 할 건가?”
“그것도 일과에 넣을 생각이지만 물론 전념하진 않을 거다. 무작정 시간만 쏟아붓는다고 해서 경지를 한 차원 높일 수는 없을 테니까. 아케나드 마도국의 초대가 코앞이기도 하고.”
베르덴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 자리를 비우기 전에 마저 할 일이나 해야지.”
* * *
어레인 성채에 방문한 틸버 스팬기어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이런 식으로 계산해서, 골렘의 실제 움직임에 필요한 마력값을 도출하라는 말씀이신 거죠?”
[정확함. 이제 활용.]
“예, 해, 해 보겠습니다.”
틸버는 작은 손으로 깃펜을 꼭 쥐고는 알파가 낸 문제를 풀었다. 인공 골렘이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동력을, 크기와 무게, 구조 등을 기준으로 계산하는 간단한 과제였다.
틸버의 계산식을 빤히 바라본 알파가 외눈을 빛냈다.
[쯧. 다시.]
참고로 문제가 간단하다는 이야기는 알파와 베타 기준이었다. 대체 뭐가 틀렸는지 모르는 틸버가 눈을 끔뻑거렸다.
“아…… 아아! 그럼 이렇게 계산하는 거군요!”
[떽.]
알파는 달콤한 말보단 차가운 이성으로 가르침을 베풀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알파가 그동안 보고 배운 사람은 베르덴이니까.
한편으로 다른 방에서는…… 베타는 치안 유지를 맡은 골렘 부대를 점검했고, 베르덴은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보고에 집중했다.
“반타룬 타레시온이 세계 회의에서 그 망신을 당했으니 가만히 있진 않을 거다. 정확히는 그 뒤에 있는 마울러가. 그러니 천천히 반타룬에게 압박을 가해라. 놈이 무엇을 하든 간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하하, 마탑 개새끼들 괴롭히는 건 내가 전문이지. 여긴 걱정 말게.
───암살에는 철저히 대비하겠습니다.
디아문 마탑 건은 오스가르와 그레이브에게 일임했다.
전투와 색적에 탁월한 고위 마법사도 추가로 파견했으니 그림낙스의 수장이 다시 온다고 한들 큰 문제는 없다.
베르덴이 통신 장치를 조작하자 다른 사람과 또 연결되었다.
───신성, 현재 미스릴 수급량이 1차 목표에 도달했다. 이그나시아 측에서 전달한 양이 예상보다 훨씬 많더군. 당장 대전당으로 보내 올노르드에게 인계하겠다.
오스테아 마탑주, 수호의 현자, 메드란트 케덴은 미스릴 수급을 맡았다. 미스릴은 영창 마법에 특화된 금속인 스펠라이트의 원재료다.
“오스테아 마탑의 특별 연구비를 포함해 자금은 충분히 마련해 뒀으니 로베르트에게 받아 가라. 그럼 2차 목표도 부탁하지.”
똑똑똑.
베르덴이 통신을 마치며 <염동력>으로 집무실을 개방했다. 리엄, 레베카, 에단이 차례대로 들어와서 보고를 올렸다.
“어레인 내 아티슨 마탑의 대륙 간 공간 이동진 기초 건설이 거의 끝났어요.”
“암흑가 로아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주인 없는 땅의 도시 증축 계획서입니다, 베르덴 님.”
베르덴이 빠르게 계획서를 훑어보고는 책상에 놓인 문서를 그들에게 전달했다.
“내가 고안한 대륙 간 공간 이동진의 독자적인 설계도다. 준비 단계까지만 완성해라. 마무리는 내가 지을 테니. 리엄은 건축 물자가 부족하지 않도록 신경 써 주고.”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듀말과 연계해 달레힌의 이형종 거주 구획 수립을 지원해라. 어디까지나 듀말이 주도할 테니 어려운 일은 없을 거다.”
일제히 대답한 세 사람이 어레인 성채의 개인 집무실을 뒤로했다. 베르덴은 그 이후에도 눈과 손을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히아레마르 내해 탐사단 조직.
마경 탐색 논의를 위한 대리인 파견.
대륙 간 무역 협의.
…….
베르덴은 에온의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파견하기 위한 고민을 이어 나갔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에온의 고유 마력 운용법이 될 대마력과 최초의 마탑에서 얻은 영창 마법에 관한 이론에도 시간을 할애했다.
물론 외적인 활동도 놓치지 않았다.
“우앗?!”
회전을 거듭하다가 순간적인 중력의 변화로 무게중심이 깨진 유니아가 넘어졌다. 그녀는 드러누운 채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카인은 이미 그 옆에 엎어져 있었다.
“움직임이 많이 부드러워졌군. 임기응변도 꽤 나쁘지 않고.”
“하아, 하아…… 가르친 보람, 있지?”
“글쎄, 아직은.”
“너무해!”
유니아가 장난스럽게 소리를 내지르며 박차듯 상체만 일으켰다. 꿀꺽. 그녀가 기진한 모습으로 한껏 물을 들이켰다.
그렇게 천재 쌍둥이를 위한 짧은 훈련이 끝날 때쯤 연락이 왔다.
───주군, 아케나드 마도국 도착했습니다.
“누가 왔지?”
───제렌 체드윌. 조사국장이라고 합니다.
“조사국장…… 특이한 인선이군. 알겠다.”
베르덴이 통신 장치를 유지하면서 공간 이동진을 작성했다. 특유의 보랏빛 색채가 베르덴과 유니아, 그리고 카인을 감쌌다.
베르덴이 통신 장치를 대전당 내 다른 사람에게 연결했다.
“곧 마도국으로 떠난다. 채비를 갖추도록.”
대답이 돌아왔다.
───알겠어, 가주.
이자벨라 데이로스.
아케나드 마도국으로 향하는 주요 인선에 그녀가 포함됐다.
간단한 이유였다.
이자벨라의 가문은 본래 마도국의 명문가였고…… 이자벨라의 신체와 융합한 특수 개체에 대한 기록이 마도국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