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0화 혈연? (1)
늦은 점심으로 배고픔을 해결한 로크가 기지개를 켰다. 겨울의 추위와 햇빛의 따스함이 상당히 느낌이 좋았다.
“오, 여기가 좋겠는데?”
대충 소란스러운 카페로 들어간 로크가 구석에서 주문한 음료와 디저트를 받고 자연스럽게 [노이즈]를 기동했다.
아티슨 마탑에서 고가에 판매하는 매직 아이템이 주변 공기를 일그러뜨렸다.
이걸로 대화가 새어 나갈 경로는 차단되었다.
“요즘 글러트니의 활동이 뜸하긴 하네……. 저번에 베르덴 형님하고 선장님이 글러트니의 수장하고 만난 이후부터 그런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테온이 포크로 케이크를 자르며 말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글러트니의 암살자였잖아.”
“아, 또 지랄이군. 암살자 운운하는 거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냐? 글러트니에서 방주로 전향한 지 이제 3년이 넘어가는데.”
“베르덴 형님 암살하려다가 뒈질 뻔한 지 벌써 3년이나 지났구나. 하하하.”
테온이 포크를 투척하려다가 참았다. 로크가 더 강했으니까. 대신 훗날 갚아 주기로 하며 마음속으로 복수를 적립했다.
“글러트니의 세 번째 송곳니가 살해당했고, 루펠 사후 다섯 번째 송곳니가 된 녀석도 죽었으니 위축될 수밖에 없겠지. 게다가 에온의 식별 골렘이 이식자를 분간할 수 있다며. 다른 곳은 몰라도 에온의 권역에는 얼씬도 못 할 거다.”
“캬, 역시 베르덴 형님이야. 완전히 글러트니의 천적이잖아? 내 안목이 정확했어.”
테온이 피식 웃었다.
“처음에 반말 찍찍거리다가, 베르덴이 이식자들 그냥 죄다 패 죽이는 거 보고 태세 전환한 거. 기억 안 나나?”
“…….”
리비안트 공국에서 베르덴을 처음 마주한 로크는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 아니면 말을 높이지 않는다며 건방지게 굴었었다.
로크가 헛기침했다.
“설마 형님이 그렇게 강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시발, 나는 오죽했을까.”
글러트니의 박사가 내린 명령에 따라서 베르덴을 찾아갔던 과거를 떠올렸다. 암살을 위해 여관의 침대 밑에 숨었던 그때를 말이다.
여관의 상층부가 폭발하고.
도시 한복판에서 마법이 날아오고.
만약 그 지하 상가에서 도망치지 못했다면 아마 죽었겠지. 테온은 괜히 목을 어루만지며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아무튼. 선장 즉위식은 언제일 것 같냐?”
“조만간일 것 같은데. 뭐, 스승님께서 연락해 주실 테니 기다리면 되겠. 야, 뒤에.”
잘 차려입은 중년인이 정확히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종업원이 아니었다.
로크가 코코아를 마시는 척 [노이즈]를 끄며 입을 다물었다. 테온이 등 뒤로 신경을 집중하며 포크를 역수로 쥐었다.
그리고…… 중년인이 고급스러운 모자를 벗으며 그들과 합석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두 분.”
“엇.”
로크와 테온이 동시에 긴장을 풀며 [노이즈]를 다시 켰다.
“리스너였잖아. 꼭 그렇게 위장하고 와야겠어?”
“방주의 일원으로서 위장은 기본이니까요.”
테온이 다시 포크를 바로 잡았다.
“이번엔 무슨 일이지?”
“장로님의 전언입니다.”
리스너는 로크의 스승───렌 발하그의 말씀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올해 마도 축제가 개최되기 전 여섯 번째 선장의 즉위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당연히 참석은 의무이며, 참석 대상자는 방주의 일원 전체.”
“……!”
“로크와 테온.”
리스너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크로 복귀하라.”
* * *
고고도 <비행> 아니면, 평소에는 좀처럼 접할 수 없는 청량한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든다.
까마득한 높이다.
가히 세 자릿수에 가까운 층계로 이루어진 10대 마탑에 비견될 수준이며, 수평의 규모는 그보다 약 세 배 더 거대했다.
대륙 간 공간 이동진과 선착장을 함께 갖춘 성은, 모든 역사와 대륙을 통틀어 오직 아케나드 마도국의 센트럼뿐이었다.
마법의 길을 걷는 이는 초대 마도왕을 찬양하고 숭앙한다. 그것은 개개인의 호불호를 넘어선 믿음의 영역이었다.
일각에서 초대 마도왕을 마법의 신으로 신앙하는 걸 생각하면, 아케나드 마도국은 근본적으로 루아스 교국과 성격이 비슷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루아스교의 빛의 성소와는 달리, 이곳 센트럼은 약 5세기 전에 초대 마도왕이 자신의 마법으로 직접 구축했다는 것이고.
초대 마도왕의 실존을 신화와 신앙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초대 마도왕의 신앙자들은 아케나드 마도국의 수도를 ‘마법의 성지(聖地)’라고 부르기도 한다.
“베르덴 님께서 마도국에 방문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군요. 결례가 안 된다면, 센트럼에 대한 소감을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조사국장을 곁에 둔 메드레일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그녀는 베르덴과 한 걸음 간격을 유지한 채 앞장서고 있었다.
베르덴은 온갖 마법적 요소들이 조화롭게 설치된 회랑에 시선을 두었다. 아르카디옴과는 종류가 다른 광활함이 느껴졌다.
“미적으로도, 실용적으로도 완벽에 가깝군. 되레 센트럼에 대한 소문들이, 그 진가를 담아 내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센트럼은 마도국의 영원한 자부심입니다. 저희 시조님께서 베르덴 님의 진심을 들으셨다면 틀림없이 기뻐하셨을──”
“잠깐.”
갑자기 베르덴이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지?’라 묻는 듯한 의아한 시선이 쏟아졌다.
……스윽.
베르덴이 센트럼의 벽에 손을 댔다. 벽 내부에서 묘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 기행에 메드레일과 조사국장이 내심 멈칫했다.
베르덴이 말했다.
“센트럼 자체에서 순환하는 이 순수한 마력. 무슨 용도지?”
“지금 베르덴 님께서 감지하신 마력은 센트럼의 기능 활성화에 사용됩니다. 10대 마탑은 별도의 동력 장치를 갖추고 있는 반면에 센트럼은 자연의 마력을 동력으로 삼고 있죠.”
“마치 성채 자체가 하나의 아티팩트 같군.”
두 사람은 마음속으로 식은땀을 흘렸지만, 각자 은폐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있었기에 속마음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흠…….”
[흐음.]
베르덴, 알파, 베타는 잠시 벽을 주시하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드리안, 이자벨라, 그리고 레바나가 그 뒤를 따랐다.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메드레일과 마도국장은 의심스러운 신체 반응을 일절 보이지 않으며 국빈에 대한 응대를 이어 나갔다.
“마도국이 건국되고 5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초대 마도왕의 직계 후손들이 왕위를 물려받아 왔지만, 제 조부님을 포함해 누구도 센트럼의 기능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못 했죠. 그저 공간을 활용하여 선착장 등을 마련한 게 전부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광경이 과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건가.”
“마법적 기술의 이해도도 문제지만, 원형보다 더 발전시킬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능력의 부족. 아케나드 혈통의 일원으로서 시조님께 죄송할 따름이죠.”
9위계 초월자의 위상을 넘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상식적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시조의 위업을 500년이 지나도록 넘어서기는커녕 감히 닿지도 못한 현실은, 피를 이은 자로서 뼈아팠다.
“특히 조부님께서는 그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고 계세요.”
[정보. 7대 마도왕. 반젤리스 루인 아케나드. 역대 마도왕 중 초대 마도왕 폐하에 가장 가깝다는 평가가 지배적.]
메드레일이 알파를 향해 작게 웃었다.
“조부님께선 늘 과분하다고 하시지만, 사실 제일 좋아하시는 말이죠. 저도 언젠가는 그런 평가를 받는 게 꿈이랍니다. 베르덴 님은 어떠신가요?”
“초대 마도왕을 본받고 싶어 하지 않는 마법사가 과연 있을까.”
“다름 아닌 베르덴 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로 기쁘네요.”
그녀가 특유의 청금색 눈동자를 빛냈다.
“정말로요.”
이자벨라는 바로 그 눈빛에서 꽤 낯익은 감정의 색채를 보았다.
뭐였더라?
너무 오랜만이라서 당장 떠오르진 않았지만…… 적어도 여자가 남자를 대하는 이성적인 무언가가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 * *
베르덴 일행은 태양이 중천에 뜬 지 꽤 시간이 지난 때에 센트럼에 도착했다.
메드레일은 베르덴의 도착 시점에 맞춰서 일정을 자연스럽게 조율했다. 그녀가 직접 내린 지시는 곧 7대 마도왕의 뜻이었다.
아무리 국빈으로 취급한다고 해도 보기 힘든 과도한 예우였다.
마도 축제에 대한 7대 마도왕과의 회담은 오늘과 내일, 이틀에 걸쳐 진행된다.
그동안 센트럼에 머물러야 하는 베르덴 일행은 일정을 진행하기 앞서 마법적으로 호화로운 귀빈관을 안내받았다.
화악.
베르덴이 마력을 퍼뜨려 방을 탐색했다. 당연히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다. 이야기가 외부로 새어 나갈 가능성은 전무했다.
이자벨라가 팔짱을 꼈다.
“아직은 낌새가 보이지 않네. 음, 느낌상 대놓고 확인하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식으로 검증하려는 걸까?”
반젤리스는, 베르덴을 초대 마도왕의 혈통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심증이 아닌 물증이 있어야만 비로소 증명되는 것이다.
별도의 수단이 없는 이상 반젤리스는 <아케인>을 이용할 터였다.
마도왕의 마력 운용법은 마도국의 왕가 혈통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전유물이니까. 그보다 확실한 검증법은 없었다.
아케나드 왕가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한번 변칙적으로 움직여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주군.”
“그렇게 하면 아케나드 왕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군. 그런다고 결과에 영향을 주지는 못할 테니까.”
베르덴은 초대 마도왕의 혈통을 어떻게 대응할지 이미 선택을 내렸지만, 선뜻 마도국에 이 주제를 꺼낼 순 없었다.
중요한 건 시기.
베르덴은 센트럼이라는 생소한 공간에서 가능한 모든 변수에 대비하고 싶었다. 이번 인선은 바로 그를 위해서였다.
레바나는 아직 이해를 하지 못해 멀뚱멀뚱 눈만 깜빡였다.
이자벨라가 물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알지만 그래도 자세한 사정을 모르니 영 답답하지? 무슨 일인지 궁금하면 말해 줄까?”
“음…….”
레바나가 슬쩍 시선을 기울였다.
“제가 알아도 될까요?”
“입조심만 한다면.”
[입조심.]
에온의 기밀을 발설한 것인가.
누군가 그렇게 물으면 레바나는 설령 목에 칼이 들어와도 고개를 저을 거라고 자신한다. 충성심을 제외해도 마찬가지다.
살기 위해서 자살을 선택하는 멍청이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뿐만 아니라 레바나 또한 권력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베르덴의 신임을 얻는 일을 거부할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그럼, 듣고 싶습니다.”
“마도국에서 가주가 초대 마도왕의 혈통이라고 의심하고 있어. 그리고 이번 마도 축제 회담을 핑계로 검증하려 들 거고. 그게 배경이야.”
“……?”
레바나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마도왕? 마도왕의 혈통? 이윽고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서, 설마, 신성께서 위대한 혈통의……!!”
“아니다.”
“하, 하지만 다름 아닌 7대 마도왕이 그런 의심을 했다는 건 그럴 만한 명확한 근거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어디까지나 오해에 기반한 근거다. 해서 대비가 필요한 거고.”
아드리안이 첨언했다.
“오해가 잘못된 방향으로 풀릴 경우에는 생각할 시간이 없을 거다. 마도국에서 탈출해야 하니. 그러니 네 역할을 절대 잊지 말도록.”
아, 괜히 들었다.
레바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후회를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똑똑.
노크 소리에 레바나가 움찔거렸다.
에온의 여섯 번째 위상이지만 이 중에서 말단인 그녀가, 지금 귀빈관을 찾아온 마도국의 조사국장과 얼굴을 맞댔다.
짧은 대화가 오간 뒤 레바나가 조심스럽게 다시 문을 닫았다.
“만찬까지 아직 여유가 있으니, 그동안 센트럼의 내부를 둘러보는 게 어떻겠느냐며 마도국 왕실에서 제안을 해 왔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각보다 검증이 빨리 이루어질 수도 있겠군.”
베르덴이 몸을 일으켰다.
“마다할 이유가 없지.”
* * *
마력이 인간의 마력회로를 질주하며 마법적인 현상을 일으키듯이, 자연의 순수한 마력이 움직이며 센트럼의 기능을 극대화했다.
마력의 순환.
그 ‘특정 흐름’이 반복되며 센트럼 내부의 환경을 점차 바꾸기 시작했다.
반젤리스 본인도 감지 능력을 끝까지 끌어올리지 않으면 감히 인식하지 못할 만큼 미약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그렇게 센트럼의 마력이 무수한 회로를 따라서 한곳에 집약되었다.
‘베르덴이 흐름을 걷기 시작했군.’
제렌이 잘 유도한 것일까.
베르덴이 일부러 따라 주고 있는 것일까.
뭐든 좋다.
과정은 다를지언정 결과는 다르지 않을 테니.
기대감에 부푼 마음으로 센트럼의 중심부를 나선 반젤리스 루인 아케나드.
그가 센트럼의 ‘연무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