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2화 주검의 영광 (9)
[스캔. 스캔. 스캔. 스캔. 스캔.]
알파가 외눈으로 마력의 빛을 조사하며 어두컴컴한 지하를 탐색했다.
마력 파장이 뒤엉킨 탓에 문제의 진원지를 찾기 어려웠지만 얼마 뒤 파장의 패턴 반복을 간파하면서 점차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쿠구구구…… 후두둑, 후둑.
지상이 크게 흔들린다.
머리 위쪽에서 먼지와 돌조각이 떨어져 프레임을 두드린다. 자칫 매몰될 수 있으니 알파는 지하 공간의 하중이 어떻게 지지되는지 계산하며 최적의 경로로 전진했다.
[?]
자그마한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빛.
안을 들여다봤다.
건물 잔해로 봉쇄되다시피 한 지하실과 지하실 한가운데 자리한 기둥에 붙은 정체 모를 기계 장치가 눈에 띄었다.
[발견.]
작은 팔을 파닥거리며 힘껏 틈을 비집고 들어간 알파가 스캔을 시도했다.
직사각형의 금속 재질 내부에 여러 개의 거대한 마력 입자가 존재했다. 그것들은 시간에 따라 조금씩 서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7분 34초 뒤 충돌. 위험.]
아까 전 중앙 대륙에서 그림멜을 놓치고 잔트라 폐허로 돌아갔을 때 베르덴은 아직 의식이 깨어 있는 마법사 겔톤에게 그림멜이 언급했던 마력을 이용한 기술에 대해 마저 들었다.
마력 연쇄 폭발.
마력 분열.
1분도 안 되는 짧은 설명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베르덴에게도, 알파에게도.
마력을 불안정하게 만들어 폭발시키는 것은 제법 놀라운 발상이긴 했으나 전체적인 원리를 파악했으니 깊이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력 구성. 잔트라 붕괴. 마력 분열 장치일 확률 99.78%]
마력 입자가 서로 충돌해 폭발하면 루아스교는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즉각 통신 장치로 공간 좌표를 보고해야 했으나, 알파는 그 대신 주섬주섬 크고 작은 잔해를 빠르게 쌓아 발판을 만들었다.
[베르덴 폐하 분주함. 확신. 알파의 선에서 해결 가능.]
그림멜의 장치를 완벽하게 파훼해서 가져가면 에온에 도움이 될 터.
알파는 칭찬받을 준비가 됐다.
[마력 분열 폭탄. 해체. 개시.]
교국의 3할을 날려 버릴 폭탄을 향해 알파가 손을 뻗었다.
* * *
포르메네 자유국의 도시 잔트라의 흉보(凶報)는 에온에 지원 요청으로 루아스교에 알려졌고, 그 과정에서 가르간트에서의 마도 축제에 참여한 일부 세력들에게도 전해졌다.
세계 회의에서 드러났던 불길한 위협이 고개를 쳐들었다.
가르간트에 파견된 대주교와 루아스 교국과의 연락이 끊긴 것, 루아스 교국 근방으로 공간 이동이 불가능해진 것…… 그 외 기타 등등.
각 세력의 수장들은 고대의 위협이 당장 무엇을 노리는지 알고 있었기에 루아스 교국의 이변은 금방 파악되었다.
루아스 교국과 함께 서대륙에 군림한 아케나드 마도국와 아르나크 제국은 곧장 다각적으로 교국의 수도로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려 했다.
공간을 경유하지 않는다면 그곳까지 이동 시간이 너무 길었기에.
하지만 제국 마법성과 반젤리스가 다양한 시도를 해 보기도 전에 전이를 방해했던, 교국과 교국 주변을 덮고 있던 차단막 같은 것에 구멍이 뚫렸다.
미세한 틈이 생긴 것이다.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갑자기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만한 위험은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스윽.
리반데일 대공이 검붉은색으로 채색된 하늘을 응시했다.
루아스 교국 본산이 습격받은 것은 단순한 국가 침공이 아니기에 제국의 검인 그조차 황제의 특명을 받고 국경을 넘어왔다.
“이 세상에 세기말의 풍경이 있다면 이런 걸지도 모르겠군.”
멸망해 가는 듯한 하늘 아래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각이 전율했다.
낯선 경험이었다.
지금 당장 범위에서 벗어나는 게 좋을 거라며 속삭이는 본능을 강제로 억누르느라 신경을 상당히 기울여야 했다.
반젤리스도 최근에 보았던 고유한 마력의 색채를 눈에 담았다.
“……무지막지하군.”
마법의 규모로 보나 일대를 장악한 위압감으로 보나, 이 하늘은 베르덴이 설계한 초위 마법의 전조 현상으로 해석된다.
‘마도의 격이 저번에 봤을 때와 달라졌다. 하지만 자연스럽지 않아……. 설마 일시적으로 7위계 극한을 넘은 건가? 위계를 돌파하듯이?’
암월의 꿈을 그런 식으로도 변형해서 사용할 수 있다니. 마법사로서 순수하게 놀라웠지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억지로 경지 자체를 높였다면 어떤 반동이 올지 가늠할 수 없다.’
초월자이기에 더욱 그렇다.
7위계와 8위계를 나누는 장벽은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을 만큼 낮지 않다.
벽이 높을수록 떨어질 때의 충격도 큰 법이다.
‘그렇게 무리해야 할 정도로 저 드워프가 위험한 강적이라는 뜻이겠지. 괴이하군. 주검의 영광에 붙은 드워프라니.’
반젤리스가 그림멜을 일부 통찰하고는 가볍게 손짓했다.
“멀리 떨어져 주변을 넓게 포위해라. 초월자가 아니면 감당키 어려운 자다.”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겠나이다.”
마도국의 정예 마법사들이 재빠르게 물러나며 산개했다. 곧 리반데일 대공의 명령을 받은 제국의 정예병들도 자리를 벗어났다.
화아아아아악!
“베르덴,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전쟁은 진즉에 시작된 모양이군. 그러니 힘을 보존해라. 시작부터 지치면 끝까지 가기 어렵다.”
반젤리스는 스태프 [린데일]을 강하게 말아 쥐며 마력회로를 활성화했다. <파멸>에 짓눌린 대자연의 마력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마도 <원천(源泉)>
땅이 갈라짐과 동시에 8위계의 격이 이 자리에서 개방되었다.
“놈은 우리가 맡으마.”
* * *
무수한 현뢰로 뒤덮인 [인테리스]를 중심으로 거대한 번개의 형상이 구축된다. 통제를 반쯤 벗어난 마도가 격하게 흔들렸다.
스태프를 잡은 베르덴의 손까지 파멸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2초에 이어 14초가 지나고, 7초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시점.
‘반젤리스와 로드릭, 게다가──’
방금 이곳에 도착한 초월적 존재는 둘이 아니라 셋이었다. 엄연히 다른 한 명은 초월자라고 규정할 수 없었지만 그 힘은 규격 외였다.
그림멜 그롬파르를 변수 하나 없이 잡을 수 있는 전력이 집결했다. 설령 운명의 추종자들이 개입해도 절대로 막을 수 없다.
‘이렇게 되면 도박수를 던질 이유가 없다.’
전력을 온존한 채 옛 왕의 부활을 저지하는 편이 현명하다.
무엇보다도 초위 마법이 발동된 순간 반젤리스, 리반데일 대공, 또 주변에 포진한 정예 마법사들까지 휩쓸리기도 할 것이다.
시작부터 지치면 끝까지 가기 어렵다…… 좋은 충고였다.
현뢰가 흩어진다.
하늘이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8위계의 <파멸>은 주검의 영광에 쓴다.’
쿵.
결단을 내린 베르덴이 마도를 가라앉히며 지상에 내려왔다. 고작 십수 초 동안 마도의 위계를 돌파했을 뿐인데 탈력감이 몰려왔다.
깊게 숨을 내쉰 그가 태세를 갖춘 두 사람에게 말했다.
“성소의 침입을 허용했다. 협공으로 정리하지.”
반젤리스가 미간을 구겼다.
“그 성소가…… 예상 밖이군.”
리반데일 대공이 기로 전신을 강화하며 애검 [에테스]를 뽑아 들었다.
“앞장서겠다.”
리반데일 대공은 허공을 단 한 번 박차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특유의 파동이 깃든 칼날 전체가 진동했다.
“초면인데 인사도 안 하고 죽이려 들다니. 예의가 없어도 너무 없지 않나!”
우드득!!
그림멜이 망설이지 않고 병기의 전 제어 장치를 박살 냈다. 과열되면 병기가 폭발하겠지만 그딴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죽는다.
그 옛날처럼.
죽으면 그곳으로 돌아가고 만다!
‘저들은 베르덴처럼 자연 마력에 대한 저항력이 없겠지……!’
병기에서 사출된 마력 입자들이 리반데일 대공 앞에 드리웠다. 그림멜이 기계로 덮인 손을 움켜쥐어 마력 파장을 확산시켰다.
마력 연쇄 폭발.
불안정해진 마력 입자는 특정 파장에 노출시키면 연쇄적으로 터진다. 그러자 리반데일 대공이 허공에 참격을 날렸다.
파장이 끊어졌다.
마력 입자들은 폭발하지 못한 채 그대로 대공을 지나쳤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림멜이 기계 팔뚝에서 마력 칼날을 꺼냈다.
쩌어엉───!
그림멜과 대공이 칼날을 맞대고 지근거리에서 마주했다.
“파장 자체를 벨 줄이야. 초월자들은 하나하나 성가신 힘을 지니고 있구먼……!”
“놀란 건 마찬가지다.”
대공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드워프가 내 검을 받아 내다니.”
현연弦連
사나운 파동이 몰아쳤다.
삽시간에 십수 번의 연격이 가해지면서 불씨가 튀었다. 그를 전부 방어한 그림멜이 한 바퀴 회전하며 뒤로 크게 물러났다.
화악───콰아아아앙!
기계손에 집중된 마력이 광선으로 되어 직선을 관통했다. 대공의 귀 옆으로 뜨겁게 달구어진 공기가 스쳐 지나갔다.
광선의 경로 끝에 있던 작은 산이 폭발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저 복잡한 기계로 부족한 신체 능력을 보조하고 있군. 주력기는 마력을 이용한 위협적인 폭발. 마치 드워프 마법사 같다.’
대체 어떤 금속으로 만들었는지 그의 파동 검에도 기계 팔에는 겨우 흠집밖에 나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드워프가 나타난 걸까.
‘……잠깐.’
특징을 나열해 보니 뭔가 익숙하다.
그렇다.
실제로 본 적은 없어도 괴이한 드워프에 대해서 들은 적은 있다.
‘최악의 난쟁이?’
지상 최악의 난쟁이.
이제 보니 천공룡의 옛날 이야기에 나온 인물과 매우 흡사하다. 그래도 설마…… 싶었지만,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거리를 좁혔다.
그림멜이 또다시 물러나려던 찰나 좌우에 기척이 드리웠다. 달빛에 늘어진 그림자가 그림멜의 얼굴을 덮었다.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정!
두 개의 스태프와 한 개의 검이 곧장 사방에서 쏟아졌다.
“비겁한……!!!”
그림멜은 전부 대응하지 못하고 병기의 저항력을 믿고 공세를 견뎠다. 직접 막아 내지 못하는 일격들은 마력 장벽으로 차단했다.
그 순간 베르덴과 반젤리스가 동시에 오른손을 뻗었다.
<아케인──궤(潰)>
<아케인: 천류(遷流)>
서로 다른 내부 충격파가 마력 장벽을 관통해 병기를 지나 그림멜의 몸 안에서 충돌했다.
울컥.
장기가 크게 파열됐다.
특이 신체를 타고난 그림멜조차 감당할 수 없어 입을 쩍 벌렸다.
“끄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림멜이 비명과 같은 함성을 내지르며 양손을 지면에 꽂아 넣었다.
대지에서 푸른빛이 뿜어졌다.
번쩍.
주변 일대가 폭발에 날아갔다.
마력 장벽이 없어 그림멜도 피해를 보아야 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혼잡한 틈을 타서 마력 은폐장을 켜고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리 나라도 정면으로는 답이 없다. 짐승 놈도 그럴 것이고. 최소한 마력 분열 병기는 제작해야 해볼 만할 테지……! 준비가 필요, 우웩!!!’
내장이 거의 곤죽이 되다시피 해 도주하는 것도 힘겨웠다. 그래도 최대한 들키지 않게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전신 갑옷을 두른 거대한 체격의 사내가 앞길을 막기 전까지는 말이다.
“방금…… 대륙에서…… 발생한…… 사태로…… 마경 탐사가…… 정벌이…… 늦춰질…… 가능성이…… 아주 높다더군…….”
칼로 긁는 것 같은 끔찍한 음성이었다.
그림멜은 사내를 미친놈 보듯 하며 우회하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투구에 가려진 시선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보인다고?’
그림멜이 서둘러 마력 은폐장이 정상 작동되는 걸 확인했다.
묵직한 발걸음에 땅이 흔들렸다.
쿵. 쿵. 쿵. 쿵. 쿵. 쿵.
갑옷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오며 등에 멘 거대한 창을 꺼내 들었다.
“네가…… 원인인가…….”
“……?!!”
그림멜이 반사적으로 왼팔을 들어 마력 폭발을 일으켰다. 위치를 들킬 테지만 저도 모르게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바, 방금 그 기세는, 말도 안 돼.’
옛날 생전에 딱 한 번 맞닥뜨린 적 있는 폭력적인 기운…… 그림멜은 우연히 자신에게 생물의 공포심을 느끼게 해 준 존재가 떠올랐다.
드래곤 중에서 최상위 존재.
4대 고룡.
‘어떻게 일개 인간이 그 괴물들을 연상시키게 할 수가……!’
화악.
갑옷 사내───흑요 등급 모험가인 마의 공포, 또는 방주의 선장 중 최강자인 재액의 토벌자가 연기를 뚫고 지척에 섰다.
쩌어엉!
창격에 몸을 정통으로 맞은 그림멜이 후방으로 날아갔다. 충격의 여파로 뒤늦게 근방의 풀과 나무가 뽑히거나 부러졌다.
‘지금의 대륙은 이런 초월자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단 말인가.’
최악의 병기가 크게 손상됐다.
‘뭐냐, 이 미친 시대는……!’
평지에 곤두박질친 그림멜이 퉁겨지며 바닥을 굴렀다. 병기에서 나온 기계의 잔해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졌다.
“겔톤이 부탁하더군. 꼭 복수해 달라고.”
베르덴이 그림멜의 팔을 짓밟고는 파멸의 창날을 생성했다.
“베, 르덴……!!”
“활로는 닫혔다.”
쩍.
“이 개새끼가, 아아아악!”
그림멜의 손목이 절단됐다.
드워프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자랑인 손이 나뒹굴었다.
* * *
초월자들은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는 항상성에 기반한 강력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에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다.
신체 절반이 날아가도 심장과 뇌가 무사하다면, 어떤 치명상에도 항상성만 깨지지 않는다면 즉사를 면할 수 있다.
물론 그에 따른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개인의 역량이었다.
바닥에 피 웅덩이가 고였다.
검붉은 균열이 명멸하는 육신 일부를 잘라 내어 내던졌다. 그것들은 드라벤에게서 멀어져 항상성에 보호받지 못하자마자 소거되었다.
……쿵.
드라벤이 로브 안쪽에 있는 고대의 목걸이를 거칠게 뜯어냈다.
“나로, 나를 대체하리.”
시동어에 아티팩트가 발동했다.
끊어진 목걸이에서 온전한 상태인 드라벤의 육신이 현현했다.
물론 영혼도, 본능도 없는 빈 껍데기였다.
꾸물꾸물…… 스르륵.
껍데기의 살점과 장기가 떨어져 나와 드라벤의 상처를 뒤덮었다. 드라벤의 사라진 일부를 정확히 대체하는 것이다.
껍데기를 태우고 공간을 나섰다.
복도는 조용했다.
‘폐하의 신체는…… 저쪽이군.’
아티팩트나 마법 물품 없이도 신체 부위들이 어디에 있는지 느껴진다. 그의 ‘신체’가 그 방향으로 이끌어 주었다.
지하로,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갔다.
성직자들의 눈을 피해 성소의 은밀한 장소에 침입한 드라벤이 멈춰 섰다. 유일한 통로 중앙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당신이…… 첫 번째 하인이군요.”
새로운 성자인 레온하르트가 성검 [루엔스]를 들고 수문장을 자처했다.